강화도 전등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 경인교통방송 180716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불교가 우리 나라로 들어오면서 그 초기에 지어진 절.
강화도의 전등사를 가 보기로 한다.
전등사. 많이들 아는 절인데, 우선 정확한 위치부터 설명해 주셔야겠지요.
각 절마다 유서깊은 내력이 있지만, 이 절도 의미있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겠죠?
전등사. 이름이 좀 특이한데, 이 절의 이름 ‘전등사’는 어떤 뜻으로 지은 이름인가요?
이 절이 꽤 오랜 절이라고 했잖아요. 처음에 지어진 건물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 오고 있는 건가요?
이 절에 가서 우리가 우선 깊이있게 살펴 봐야 할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절 근처에는 어떤 마을들이 있나요? 옛 마을들이 지금도 그대로 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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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다.
신촌~전등사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4번 출구 직진 후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M6117번 버스 승차(15분 1대)
김포복합환승센터 하차 후 60-2번으로 환승
→ 온수리 하차 후 전등사 방향으로 걸어오기(도보 15분)
인천광역시 좌석버스 700-1번
인천터미널(뉴코아백화점 방향) → 동암역(북광장 앞) → 전등사 앞(온수리)
: 40분 간격으로 2시간 10분(도보20분포함) 소요
부평역에서 1호선 인천행 타고 동암역 하차 700,700-1번 타고 온수리 하차. 내려서 62번을 타고 전등사 하차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阿道) 화상에 의해 진종사(眞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
우리 땅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이 372년이니, 지금은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이 절은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이다.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은 것이다.
이 절은 고려 말년인 충숙왕에서 충정왕에 이르는 기간에 수 차례 수축하였고, 조선 중기 인조 3년(1625년), 1906년에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두 차례나 중수하였다. 이처럼 수축과 중수를 거친 것은 이 절의 가치가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인 전등사는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되었다.
고려 충렬왕(1274∼1308)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하는데, 등을 전했다는 뜻으로 전등사(傳燈寺)라 하게 되었다.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토록 했단다. 전등사 개칭에 관해서는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 대장경 속에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것이 더 근거가 있잖은가.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 절에는 보물 178호인 전등사 대웅전, 보물 179호인 전등사 약사전, 보물 393호인 전등사 범종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근처 정수사(淨水寺)에서 고쳐 만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동문골, 사거리, 서두머리(온서) 쇠마답, 안말(내촌) 온수물, 이런말, 장안말, 해란댕이, .....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 일대의 옛 마을들은 뭔가 작은 역사라도 간직했음직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다.
그 마을들을 다신 한번 다 확인하고 갈 곳을 향하고 싶었지만, 이미 초저녁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가싶어 절을 향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예전 같으면 이맘때쯤 마을에선 저녁상을 무르고 평상에 모여서 동네 소식, 농삿얘기로 꽃피웠을 이 시간, 그러나 마을들은 하나같이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젊은이가 별로 없는 시골 농가는 청색의 토속적 활기를 잃은지 이미 오랜데, 뛰어노는 아녀석들 모습도 볼 수 없고, 우물가에서의 두레박 소리도 없다. 하긴, 세상 바뀐지가 언젠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망령이지.
달맞이고개, 등잔모통이, 벌이고개, 벌랑고개, 여우고개, 원수물고개, 불당골, 난자골(난자곡), ... 이 곳의 고개나 골짜기 이름 역시 무슨 전설이라고 간직했을 것 같다.
그러기에 고개마루나 골짜기 냇가에 앉아 지나는 토박이 어른에게 전설과 같은 사연을 지닌 이야기라도 듣고 싶지만 헛된 욕심이다. 바퀴 몰고 붕붕대며 달리는 세상에 어느 행인을 만날 수 있다는 거며, 설사 만난들 누가 이야기를 자근자근 해 주랴. 그냥 문헌이나 떠들어 보고, 지도나 살펴보면서 옛날 일을 마음대로 상상해 보는 게 다겠지.
아무도 없는, 말벗이 되어 주지 않는 없는 길, 옛 이야기 가득 간직한 전등사 앞 돌층계를 밟고 천천히 절 마당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초이렛달이 저녁 하늘에 외로이 떠 있었다. 사람이 없으니 소리 없는 이야기라도 나누자는 건가. 우선, 마당 가의 샘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은데, 그 중에 전등사가 크게 꼽힌다. 이 절보다 3백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도 그렇지만,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는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삼랑성은 단군왕검이 세 아들, 즉 삼랑(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흙성. 삼국시대에 흙성 자리에 돌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유서깊은 삼랑성 안에 전등사가 자리잡고 있다.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 바로 전등사이다.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려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고려 고종 46년(1259)년. 당시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기록이 있다.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
이 사실과 함께 5년 뒤 원종 5년(1264년)의 기록.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
대불정오성도량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이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말해 준다.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가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이 그것.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역사가 오랜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1266년에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다.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는 고려 왕실이 개경(개성)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 갈 수 있었다.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풍수가들은 말한다. ‘마리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라고.
□ 왕실 종찰로서 더욱 성장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인 전등사는 다른 옛 절들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의 큰불을 맞았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건물들이 모두 타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 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1707년, 강화 유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했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인 도총섭이라는 지위를 주었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절을 다시 중수하고, 대조루도 함께 건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서도 이 절은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조선 말로 접어들면서 이 절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이에 맞서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전의를 잃고 물러갔다.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 스님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려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안에 세웠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이에 맞서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전의를 잃고 물러갔다.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 스님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려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안에 세웠다.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불리우는 장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 내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조선 현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다. 조선 고종 3년 병인 양요시 양헌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한다. 남문의 문루(종해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 많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이 염원을 담아 적은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자인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했다. 전등사가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전등사는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전등사 뜰 고목나무 위의 초승달이 서쪽으로 많이 이울었다. 달도 이제는 이야기를 그만 하자 함인가. 전각 안에서의 목탁 소리와 함께 초여름 저녁의 사찰 주위에 희미한 어둠이 잦아들었다. /// (배우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