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일본식 땅이름 일제 강점기 지명
서울 땅이름과 일제에 의한 상처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이 글은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이 약 20여 년 전에 발표한 글입니다. 출처도 밝혀지지 않은 채 이 자료가 인터넷상에 그대로 떠돌고 있는데, 꼭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 연구 및 작성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서울 안의 땅이름들은 원래 민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러 온 토박이 땅이름들이 많았으나, 문자 생활이 한자식으로 거의 일관됐던 왕조시대에 이 이름들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새터'가 '신기(新基)'가 되고 '논고개'가 '논현(論峴)'이 되었다. 한자식으로의 표기 과정에서 원형이 바뀌긴 했으나,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유추해서 본꼴을 알아 낼 수 있는 정도의 변경이었기에 그래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표기돼 왔던 땅이름들이 핸정 구역의 개편으로 크게 상처를 잃고, 그 원형에서 크게 멀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일제 때에 심했다.
일제는 우리 땅을 침탈한 이후, 행정지명(行政地名)을 대대적으로 크게 바꾸어 버렸고, 산이나 내와 같은 자연물의 이름도 많이 고쳐 버렸다. 행정구역의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때는 1914년 4월이었다.
□ '왕(王)'자를 '왕(旺)'자로 바꾼 예 많아
행정구역의 개편에 의한 땅이름 변경 작업에 따라 원래의 이름이 아예 없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어느 것은 아예 우리 옛 땅이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인사동(仁寺洞)', '은평구(恩平區)' 등 법정 땅이름의 대부분은 일제 때 정해진 것이다.
고의적으로 음(音)만 같게 하고, 다른 글자로 취한 것도 있었다.
서울의 '인왕산'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산은 원래 지금과는 글자가 다른 '인왕산(仁王山)'이었다. 인왕산은 '인왕도량(仁王道場)'의 그 '인왕'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인왕도량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개최된 호국법회의 하나였다. 이 법회는 <인왕경(仁王經)>의 내용에 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인왕경>은 인왕(仁王)이 16대국의 국왕에게 교시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제왕들을 대상으로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심법(深法)을 설한 경전이다. 따라서, 이 산은 조선 5백년을 두고 계속 그렇게 불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옛 문헌, 옛 지도나 옛 그림 등에는 분명히 옛 이름인 서울 북악 서쪽의 산이 '인왕산(仁王山)'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일제는 어느 때부터인지 슬그머니 이 산에 대한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바꾼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초기의 지도엔 '인왕산'이 그대로 우리의 원이름대로 나와 있고, 후기 지도엔 '인왕(仁旺)'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중기 이후로 정식 절차도 없이 슬그머니 바꾸어 표기한 듯하다. '왕(旺)'은 '일본'의 '일(日)'자와 '왕(王)'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일본이 왕(조선)을 누른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성남시를 흐르는 '대왕천(大旺川)'도 원래는 '임금왕(王)'자 들어간 '대왕천(大王川)'이었다.
서울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줄기의 안쪽을 따라 흘러 지금의 청파동과 용산 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로4가에서 한강으로 유입하는 서울 서부 지역의 한강 지류는 원래 덩굴풀이 많아 '만초천(蔓草川)'이라고 불렀던 유명한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기들이 집단 주거지 지역을 관통하는 이 내의 이름을 자기 나라에 있는 '아사히가와(욱천=旭川)'란 이름을 옮겨 붙였다.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도 일제가 붙인 땅이름이다. 원래 이 내에는 갈대가 많아 옛날부터 '갈내' 또는 '갈천(葛川)'이라고 부르던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내가 안양 지역을 지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옛날부터 불러 오던 '갈내' 같은 이름은 없애 버리고,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 일제의 '땅이름바꾸기' 속셈
일본은 우리 땅의 땅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행정구역 정리'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구실일 뿐이다. 행정구역을 변경하더라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쯤이라도 있었다.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따라서,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땅이름을 퇴색시켜서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또, 그들식의 땅이름을, 또는 일본에 있는 그대로의 땅이름을 우리 땅 곳곳에 하나하나 붙여 나감으로써 이 땅이 한국 땅이 아닌 일본 땅임을 새겨 나가려는 저의 깔려 있었음도 볼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추진해 나간 일제의 '땅이름바꾸기'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나, 땅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끈질긴 속성과 우리 민족의 비협조로 인해 그들의 목적은 쉽게 성취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1945년에 우리가 35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의 땅이름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 일제 잔재를 그대로 받은 광복 후의 땅이름
광복 이후, 우리는 일제가 붙인 땅이름을 많이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존속시켜 식민지시대 이전의 상태로는 돌려 놓질 못했다.(표1 참조)
1945년 8월 15일, 나라에서는 일제 때 '경성부'라 불리우던 우리의 수도를 '서울시'로 개칭하였다.
1946년 8월 18일엔 법령 108호로 서울을 '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켰고, 그 해의 10월 1일에는 일본식의 통(通) '정(町)'을 우리식 '로(路)'와 '동(洞)'으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그 달 18일에는 군정 법령 108호로 경기도 관할에서 서울을 분리하여, '서울특별시'로 승격시켰다.
우리의 수도를 일본식 잔재인 '경성'을 청산하고, '서울'이란 땅이름으로 정한 것은 잘 한 것이나. 일제 때의 땅이름을 그대로 둔 것이 서울만 해도 무척 많다.
'만초천'이 아직도 일제가 붙인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가 하면,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한강가의 흑석동 일부는 당시 일본인 별장 이름 그대로 '명수대(明水臺)'로 통하고 있다. 이 곳의 교회 이름, 성당 이름, 아파트 이름까지도 '명수대'이다. 이 곳의 초등학교 이름도 원래 '명수대초등학교'였으나, 97년 봄학부터 '흑석초등학교'로 바꾸었다.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제 때 '태평통'이라고 붙여졌던 곳은 '통(通)'을 '로(路)'자로만 바꾼 채 '태평로'란 이름을 달고 서울 중구의 정식 행정지명으로 자리잡내고 있다.
쌀 창고가 있어서 일제 때 '북미창정(北米倉町)'과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고 불렀던, 남대문 근처의 동네는 해방 후에 왜식 동명을 없앤다고 '북창동', '남창동'이라고 고쳐 짓기는 했지만, 일제가 지은 이름에서 겨우 '쌀미(米)'자만 빼고 정한 것이어서 개운치가 않다.
서울의 구(區)이름 중의 하나인 '은평(恩平)'도 일제의 잔재이다. '은평'은 일제가 1911년 경기도령(京畿道令)으로 경성부의 성외 8면을 정할 때 당시 이 지역의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한강 가운데의 섬을 아직도 '중지도(中之島)'로 부르는 것도 문제다. '중지도'는 지명이라기보다는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일본어이다. 일제는 한강의 섬들을 자기 멋대로 이름을 짓거나 고쳤는데, 그 중 몇 개의 섬은 이름 아닌 이름인 '중지도'(일본말로는 '나카노시마')로 불러 왔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서울의 예만 들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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