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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일제 강점기 일본식 지명 / 우리 땅이름을 살려라 / 배우리 회장

작성자이름사랑|작성시간15.02.05|조회수884 목록 댓글 1

일제 강점기 일본식 지명이 수두룩. 우리 땅이름을 살려라 / 배우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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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짓밟힌 우리 땅이름
서울 곳곳의 땅이름들

 

 

 

       

광복 70주년 우리 땅이름을 생각한다


배 우 리



과거 일제 35년간은 우리 5천년 역사로 볼 때는 그리 긴 기간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우리 강토와 겨레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우리말이 왜색으로 크게 물들었고, 우리의 땅이름들이 그들식으로 변해 버렸다. 또 그 동안 잘 유지돼 오던 행정구역이 마구 통폐합되어 기존의 이름들이 많이 없어지거나 변질되었다.

광복 후 우리는 이러한 일제 잔재를 말끔히 정리해야 했으나, 행정 당국의 무관심-무성의로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대가 바뀌고 생각들이 누그러지면서 이러한 사실을 잊고 또 이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땅이름은 겨레의 얼이 담긴 무형적 유산이다.

이 땅이름도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역시 많은 이들이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럼, 여기서 우리의 땅이름들이 그들에 의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가) 오랫동안 불려 온 ‘서울’이란 이름


‘서울’이란 이름도 일제에 의해 딴 이름인 ‘경성(京城)’으로 바뀌었었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을 맞아 이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우리 이름을 다시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이란 땅이름은 신라 때부터 써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의 ‘서울’과는 조금 다른 음(音)이었다. 고 양주동 님이 한글로 풀이한 신라 시대의 향가 <처용가(處容歌)>에 ‘’이 나오는데, 이것이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이다.

 ‘?기 ?래 (東京明期月良)

 밤드리 놀니다가 (夜入伊遊行如何)---‘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여기에 나오는 ‘’은 ‘새로운 땅’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한자로 서벌(徐伐)’ 또는 ‘서라벌(徐羅伐.徐耶伐)’ 등으로 음차(音借)되기도 했다. 이 ‘(새발?새벌)’이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이고, 이것은 당시의 말로 ‘수도(首都)’에 해당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新羅)’나 ‘시림(始林)’도 ‘’이 음차된 이름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岳)’과 태봉의 수도인 ‘철원(鐵原)’ 등도 모두 ‘’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의 뜻인 이 ‘서벌-새벌’은 그 뒤로 조금씩 음이 변하면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훈민정음이 나오고 난 후의 조선 시대의 문헌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 ‘셔? 적신(賊臣)이 잇고’<용비어천가>(37)

 * ‘슬피 셔울흘 ?랑?노라’<두시언해>(초.15;52)

 * ‘가? 비? 셔울로 도라가놋다’<두시언해>(초.24;45)

문헌들에서는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이 이처럼 ‘셔블’, ‘셔울’ 등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서 신라 초 이래로 ‘머릿고을(首都)’의 개념으로 계속 써 왔던 ‘서울’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소리 변화 과정을 거쳐 정착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벌>셔벌>셔블>셔불>셔울>서울



(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 서울


그러나, 지금의 우리 서울은 한자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씌어 왔다.

백제 때에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러 왔던 서울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韓山州)’라 했고, 그 후 경덕왕 때에는 ‘한주(漢州)’라 개칭하고, 지금의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 서울 지역을 ‘양주(楊州)’라고 개칭하여 지방 군현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1067년에 당시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되면서 행정구역의 단위로 정치적인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당시 서울인 개성을 버리고 새 도읍지로 정할 만한 곳을 찾다가 나라의 중심 도시로서 좋은 조건을 갖춘 한양 땅이 마음에 들어 결심을 굳히고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1394년 10월 25일(음력) 역사적인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새로이 행정구역을 책정하였다.

그러나, 이 곳이 한자로는 ‘한양’ 또는 ‘한성’이었지만, 일반인들은 보통 ‘서울’로 불러 왔다. 왜냐 하면 ‘서울’이란 말은 삼국시대 이래로 계속 ‘중심 고을’의 개념으로 써 왔던, 우리 조상들에게 익히 불려 온 토박이 땅이름이기 때문이다.



(다) 서울의 옛 행정구역


조선시대엔 서울의 행정구역을 크게 다섯으로 나누었다. 즉, 서울이 한성부로 바뀌던 이듬해인 1397년, 나라에서는 수도의 영역을 성 안의 지역과 성 밖의 지역(성으로부터 대체로 10리에 이르는 외곽 지역)으로 정한 후, 행정구역을 북부(북부(北部), 남부(南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중부(中部)의 5부(五部)로 나누었다. 각 부는 10개 안팎의 방(坊)을 관할하였는데, 초기에는 모두 52방(坊)이었다.

그 방 밑에는 다시 계(契), 또 그 밑에는 또 동(洞)이 있었다. 속담 중에 ‘동네방네 소문났네’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의 ‘동네방네’는 그 당시의 행정구역 단위인 ‘동(洞)과 방(坊)의 안(內)’이란 뜻의 ‘동내방내(洞內坊內)’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태조 때에 정해진 행정구역은 세종 때에 52방이 49방으로 변경되었을 뿐, 조선 말까지 350여 년을 거의 변경 없이 내려왔다. 26대 고종 초에 이르러 47방 339계로 조금 조정되었으나, 그 영역이나 명칭들은 거의 그대로였다.

따라서, 조선 5백년 동안 우리 서울의 행정 지명들은 각각 부-방-계-동의 꼬리를 달고 불려져 왔다. 이 지명들은 모두 한자로 붙여지긴 했지만, 원래의 토박이 땅이름을 토대로 해서 옮겨진 것이 많았다. 지금의 광교 부근의 ‘너븐다리’가 있는 곳을 ‘광통방(廣通坊)’으로,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부근인 ‘황토마루’를 ‘황토현계(黃土峴契;)’로, 지금의 혜화동 부근 ‘웃잣골’로 불리던 곳을 ‘상백동(上栢洞)’으로 정한 것 등이 바로 그 예가 된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5부는 갑오경장(1894) 때에 이르러 5서(署)로 바뀌어 동서(東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북서(北署), 중서(中署)가 된다. 갑오경장 당시의 서울의 행정구역은 5서(署) 47방(坊) 288계(契) 775동(洞)이었다. 그 방-계-동의 이름들은 거의 모두 우리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라) 서울 곳곳 마을의 토박이 이름들


오랜 옛날의 우리 땅이름은 거의 모두 순 우리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한자로 표기함으로써 그 원래의 뜻이 변질된 것이 무척 많게 되었다.

서울에 있었던 옛 우리 땅이름들을 살펴보자.

서울에는 현재 480개 정도의 법정동과 530 개 정도의 행정동이 있다. 이들 동(洞)이름들은 모두 한자식으로 되어 있으나, 그러한 동명들 중엔 원래 우리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토박이 땅이름 중에는 산과 관계된 것도 있고, 물과 관련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설치물이나 역사적 사실에 따라 붙은 것들도 있다.


① 물과 관련된 마을들


서울 일대엔 한강이 지나고 있고, 그 한강으로 흘러드는 많은 갈림내들이 있어 물과 관련된 땅이름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한 곳으로 잘 알려진 것이 ‘모래내’, ‘곰달내’, ‘한내’, ‘마른내’ 등이다.

‘모래내’는 북한산쪽에서 흘러내리는, 지금의 홍제천을 일컫는 이름이었는데, 이 내의 하류인 남가좌동ml 일부를 지금도 ‘모래내’라고 부른다. ‘곰달내’는 지금의 양천구 신월동 일대를 지나는 내인데, 지금 이 곳을 지나는 길의 이름이 ‘곰달래(곰달내)’이다.

‘한내’는 지금의 중랑천이다. 지금 이 이름을 딴 ‘한천로’가 노원구에 있다. 이 근처의 ‘상계(上溪)’, ‘하계(下溪)’ 등의 이름은 이 내의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마른내’는 지금의 중구 인현동 일대를 지나는 내로, 조선시대엔 이 곳의 마을 이름을 ‘건천동(乾川洞)’이라 했으나, 일제 때에 이름을 없애 버렸다. 지금 이 곳을 지나는 길의 이름을 ‘마른냇길’이라 한 것은 그 옛 땅이름을 살려 쓴 것이다.

그 밖에도 ‘무수막’(수철;水鐵.금호동), ‘새내’(신천;新川.신천동), ‘물아랫골’(수하;水下.수하동), ‘연못골’(연지;蓮池.연지동), ‘청숫골’(청담;淸潭.청담동), ‘물치’(수색;水色.수색동) 등의 물 관련 땅이름이 있었다.


② 산지나 바위와 관계된 이름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고개나 산, 골짜기, 산등성이와 관련된 땅이름도 많았다.

마포구 아현동의 ‘애오개’는 고개가 작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한자로는 ‘아현(阿峴,兒峴)’이 되어 w;금의 ‘아현동(阿峴洞)’이란 이름을 낳았다. 그 옆의 ‘큰고개’는 고개가 높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한자로는 ‘대현(大峴)’이라 했는데, 지금은 ‘만리재’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종로4가쪽의 ‘배오개’(이현;梨峴), 충무로 입구의 ‘진고개’(니현;泥峴), 을지로2가의 ‘구리개’(동현;銅峴) 등이 고개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것들이었다. ‘구름재’(운현;雲峴.운니동), ‘솔고개’(송현;松峴.송현동), ‘당고개’(당현;堂峴.상계동), ‘밤고개’(율현;栗峴.율현동), ‘갈고개’(갈현;葛峴.갈현동), ‘박석고개’(박석현;薄石峴.갈현동), ‘논고개’(논현;論峴.논현동), ‘한치’(대치;大峙.대치동) 등도 모두 고개가 있어 붙은 이름들이다.

광화문 네거리 근처의 ‘황토마루’(황토현;黃土峴.), 강서구의 ‘등마루’(등촌;登村.등촌동) 등은 ‘높은 지대’를 뜻하고, 성북구나 도봉구, 강북구쪽의 ‘되너미’(돈암;敦岩.돈암동), ‘무너미’(수유;水踰.수유동) 등은 ‘산을 넘음’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 밖에도 봉우리 이름이 그대로 들어간 ‘매봉’(응봉;鷹峰.응봉동)이 있고, 골짜기 이름이 그대로 들어간 ‘간뎃골’(중곡;中谷.중곡동), ‘가는골’(세곡;細谷.세곡동) 등이 있었다.

산이 많으면 바위도 많게 마련이다.

바위나 돌 관계 땅이름으로는 ‘두텁바위’(후암;厚岩.후암동), ‘감은돌’(현석;玄石.현석동), ‘검은돌’(흑석;黑石.흑석동), ‘북바위’(종암;鐘岩.종암동), ‘붙임바위’(부암;付岩.부암동), ‘돌곶이’(석관;石串.석관동), ‘돌마리’(석촌;石村.석촌동), ‘독부리’(도곡;道谷.도곡동), ‘매바윗골’(응암;鷹岩.응암동), ‘바위절’(암사;岩寺.암사동) 등이 있었다.


③ 풍수지리와 관계된 이름들


서울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땅이름들도 있다.

용산(龍山)은 서울 우백호(右白虎)의 끝자락으로 산머리가 용을 닮은 데다가 마치 한강물을 먹는 모습의 산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산 모양이 용 머리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용머리’(용두;龍頭.용두동)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고, 땅모양이 벼루를 닮아 문필가들이 많이 날 것이라는 ‘벼루말’(연촌;硯村)이 노원구 월계동에 있었다. 그러나, ‘벼루말’은 대개 비탈이나 벼랑이 있는 곳에 많이 붙는 땅이름이다. 산 모양이 시루를 닮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될 것이란 예측으로 이름 붙은 ‘시루뫼’란 땅이름이 은평구에 있었는데, 지금은 ‘증산동(繒山洞)’으로 되었다.


④ 들과 관계된 이름들


서울은 군데군데 넓은 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들과 관계된 땅이름들도 더러 있었다.

마포는 ‘삼개’라는 들이 있어 나온 이름으로, 이것은 ‘마포(麻浦)’라는 한자로 옮아갔다. 신촌(新村)도 전에는 새로 일군 터라는 뜻의 ‘새터말’이었고, 이 마을 서쪽의 서교동도 좁은 들이 있어 ‘잔다리’(세교;細橋)라 불렀었다. ‘노들’(노량;鷺粱.노량진동), ‘너벌섬’(여의도;汝矣島), ‘갯들’(포이;浦二.포이동), ‘개패’(개포;開浦.개포동) 등도 들 관련 땅이름이었다.


⑤ 땅의 모양을 따라 지은 이름들


마을이 있는 곳의 땅모양을 따라 붙은 땅이름도 있었다.

강북구의 우이동(牛耳洞)은 마을 뒤 북한산에 소의 귀처럼 생긴 ‘쇠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 ‘쇠귀골’로 불렸던 곳이고, 강남구의 학동은 마을이 학을 닮아 ‘학실’(학동;鶴洞)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송파구의 풍납동(風納洞)은 마을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지형이라 하여 ‘바람들이’라 했던 곳이다. 성동구 성수동에는 물(내) 있는 쪽으로 땅이 튀어나갔다고 해서 이름 붙은 ‘살곶이’(箭串)란 벌이 있었는데, 예부터 말을 많이 놓아먹이던 곳이다. 서초구의 염곡동(廉谷洞)은 마을이 염통을 닮아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⑥ 마을의 위치에 따라 붙은 이름들


마을의 위치에 따라 붙은 땅이름들도 있다.

마포구 망원동에는 들의 머리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붙은 ‘덜머리’(절두;切頭)가 있었고, 서대문구 남가좌동에는 물가에 있다고 해서 나온 이름인 ‘가재울’이 있었다. 지금의 남가좌-북가좌의 ‘가좌(佳佐)’는 바로 ‘가재울’의 음역이다. 물가 마을의 뜻인 ‘무수막’(수철;水鐵)이 성동구 금호동 등에 있었고, 두 물줄기가 합해진다는 뜻의 ‘두뭇개’(두모포;豆毛浦)가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 ‘간뎃말’(중곡;中谷.중곡동), ‘안골’(내곡;內谷.내곡동), ‘성안말’(성내;城內.성내동), ‘새문안’(신문내;新門內.신문로) 등의 이름도 마을 위치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⑦ 시설물 따라 지은 이름들


그 곳에 무엇이 있다고 해서 붙은 땅이름들도 있다.

용산구 신창동의 ‘새창고’(신창;新倉) 동대문구 회기동의 ‘떡전거리’, 중랑구의 ‘먹굴’(묵동;墨洞), 마포구 용강동의 ‘독막’(동막;東幕.옹막;甕幕), ‘조개우물’(합정;蛤井.합정동-合井), 은평구의 ‘역말’(역촌;驛村.역촌동), 강남구 역삼동의 ‘말죽거리’, 성동구 사근동의 ‘사근절’(사근;沙斤.사근동), ‘마장안골’(마장동;馬場洞.장안동;場安洞), 동작구 상도동의 ‘장승백이’,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골’(사직동;社稷洞), 중구의 ‘다방골’(다동;茶洞), ‘배다릿골’(주교동;舟橋洞), ‘갓우물골’(입정동;笠井洞), ‘붓골’(필동;筆洞) 등은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⑧ 식물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들


식물의 이름이 들어간 땅이름들도 있었다.

‘복삿골’(도화동;桃花洞), ‘은행나뭇골’(행촌동;杏村洞), ‘대춧말’(대조동;大棗洞), ‘갈울’(갈월동;葛月洞), ‘가락골’(가락동;可樂洞), ‘삼밭’(삼전동;三田洞), 약밭(약전;藥田.약현;藥峴.중림동), ‘미나릿골’(미근동;渼芹洞), ‘서래’(반포동;磐浦洞), ‘서리풀이’(서초동;瑞草洞) 등이 모두 어떤 식물이 특별히 많거나 식물들이 많이 서려 나온 이름들이다.


⑨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이름들


서울은 역사가 오랜 도시여서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땅이름들도 많다.

‘잿골’(재동;齋洞), ‘오금골’(오금동;梧琴洞), ‘고더기’(고덕동;高德洞), ‘물래’(문래동;文來洞)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종로구의 재동은 조선 세조 때 이 곳에서 살상극이 벌어져 그 피 냄새를 없앤다고 재를 뿌려 나온 이름이라 전하고 있고, 송파구의 오금동은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해 가던 중에 이 곳에서 오금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또, 강동구의 고덕동은 고려 말에 벼슬을 지냈던 이양중(李養中)의 높은 덕을 기려 붙여졌고, 영등포구의 문래동은 일제 때 이 곳에 방직공장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다.



(마) 지방에도 토박이 이름들이 거의 일본식으로


이러한 토박이 땅이름들은 지방에도 무척 많았다. 충북 충주 일대와 인천의 일부 옛마을 이름들을 예로 들어 보자.


① 충주 일대의 땅이름


내나 물과 관련된 땅이름에는 달내(달천;達川.달천동), 가리여울(지탄:灘.용탄동),목수울(후문;後門.목행동), 두무소(두담;斗潭.용관동) 등이 있었고, 고개나 산-골짜기-산등성이와 관련된 땅이름에는 용산(龍山.용산동), 민마루(민종;民宗.종민동), 풀무고개(야현;冶峴.교현동), 방자고개(연수동) 등이 있었다.

바위-돌 관계 땅이름에는 능바우(능암;陵峴.금릉동), 명당바우(명당암;明堂岩.단월동), 범바위(호암;虎岩.호암동) 등이, 풍수지리와 관련된 땅이름에는 용머리(용두;龍頭.용관동), 자래바우(별암;鱉岩.직동) 등이 있었다.

넓은 들이 있어 붙은 땅이름에는 가주(佳洲.가주동), 새터말(신대;新垈.달천동), 도로습(도촌;島村.봉방동), 벌터(달천동) 등이 있었고, 마을이 있는 곳의 땅모양을 따라 붙은 땅이름에는 황새머리(안림동), 곧은골(직동;직동), 능골(능공;陵谷.풍동) 등이 있었으며, 마을의 위치에 따라 붙은 땅이름에는 양달말(안림동), 동편(東便) 등이 있었다.

설치물이 있어 붙은 땅이름에는 남문거리(남부;南部.봉방동), 주막거리(안림동), 향교말(교동;校洞.교현동), 역말(단월동) 등이 있었고, 식물 이름 따라 붙은 땅이름에는 단풍골(풍동;楓洞) 등이 있었다.

또,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땅이름에는 이심바우(대망암.단월동), 어림(어림;御林.어림동) 등이 있다.


② 인천의 이름들


맑은 물이 흘러 ‘맑은내(청천;淸川)’라는 이름의 내가 흘러 그 이름의 마을 이름(청천동)이 나왔는가 하면, 물 흐름이 느리다고 해서 나온 이름인 ‘시시내’도 ‘시천(始川)’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시천동(始川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낳았다.

‘열우물(십정동;十井洞)’과 ‘까치물(작전동;鵲田洞)’은 우물 또는 샘이 있어 나온 이름이다.

인천 근처엔 산도 적지 않기 때문에 고개나 산, 골짜기, 산등성이와 관련된 땅이름도 많았다.

연수동의 ‘배꼽부리’는 배꼽과 같은 산부리가 있어서 나온 것이고, 용현동의 ‘비랭이’나 효성동의 ‘새벼리’는 비탈에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도리미(도림동;桃林洞)’는 산이 둘려 있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서운동의 ‘도두머리’는 땅모양이 불쑥 돋아 나왔다고 해서 이름붙은 것이다. 골짜기가 깊다고 해서 ‘깊은골(심곡동;深谷洞)’이라는 이름도 나왔는가 하면 고개가 있어서 ‘솔고개(송현동;松峴洞)’, ‘새오개(신현동;新峴洞)’, ‘논고개(논현동;論峴洞)’과 같은 이름도 나왔다. ‘산곡동(山谷洞)’은 뫼가 불쑥 솟아 있어 ‘뫼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옮겨간 이름이다.

산이 많으면 바위도 많게 마련이다.

바위나 돌 관계 땅이름으로는 ‘석바위(석촌;石村.간석동), ‘독바위(옹암;瓮岩.옥련동), ‘검바위(겅암동;黔岩洞)’, ‘흰돌(백석동;白石洞), ‘돌고지’(가정동) 등이 있다.

인천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넓은 들이 많았다. 그래서, 들과 관계된 땅이름들이 적지 않았다.

구월동(九月洞)은 ‘구리울’ 또는 ‘구울’이라는 들이 있어 나온 이름으로, 이것은 ‘구월(九月.구월동)’이라는 한자로 옮아 갔다. ‘구리울’은 땅이 질어 나온 이름으로, 뜻으로 보아선 서울의 ‘구리개(을지로2가)’와 그 맥을 같이한다. 연수동의 ‘구레메기’도 비슷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답동(沓洞)’은 논이 많아 나온 것이고, 부평동의 ‘신트리(신대;新垈)’는 넓은 들의 뜻을 담은 이름이다.

인천은 바닷가에 있어 그와 관계된 땅이름이 아주 많다.

중구 일대의 해안에서 많이 나오는 섬 이름들이 다 그러한 것이고, 밀-썰물의 차가 심한 이 지역에는 유달리 굴곡 해안이 많아 ‘곶’과 관계된 많은 땅이름들이 널려 있다.

신흥동의 ‘꽃골’은 꽃과 관계 있는 양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으나, 원래 이 이름은 곶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나온 ‘곶골’이 원래 이름이다. 고잔동은 ‘고잔(古棧)’이라는 이름이 그 바탕인데, 이 이름은 곶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이름은 인천 일대의 해안분 아니라 서해안 지방에 널려 있다.

마을이 있는 곳의 땅모양을 따라 붙은 땅이름인 창영동의 ‘쇠뿔고개’ 즉 ‘우각현(牛角峴)’은 그 모양이 소의 뿔을 닮아 나온 이름이고, 연희동의 ‘용머리’는 그 모습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마을의 위치에 따라 붙은 땅이름엔 ‘갓골’, ‘가재울’ 등이 있다.

동춘동에는 물가에 있다고 해서 나온 이름인 ‘갓골’이 있는데, 음의 변화에 따라 이를 ‘각골’이라고도 한다. 가좌동(佳佐洞)은 ‘가재울’의 음역으로, 이 이름은 ‘가장자리’라는 뜻의 ‘갖’과 ‘마을’이라는 뜻의 ‘울’이 합쳐져 된 ‘갖의울’이 변한 이름으로, ‘가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가 하면 안쪽에 있다는 뜻에서 나온 ‘안골(내동;內洞)’이라는 이름도 있다. ‘사이’라는 뜻의 ‘살’과 ‘사리’는 ‘사리울’(논현동)이라는 이름을 낳았고, ‘사이’의 준말인 ‘새’는 ‘쇠’로 음이 옮겨가면서 ‘쇠골’이 되면서 ‘금곡동(金谷洞)’라는 이름을 낳았다.

그 곳에 무엇이 있다고 해서 붙은 땅이름들도 있다.

‘장승배기’(송림동)는 ‘장승’ 때문에 나온 것이고, ‘모래말(사동;沙洞)’은 모래가 많아서, ‘솔울(송월;松月.송월동.)’은 ‘소나무가 많아서 나온 것이다. 부개동에는 큰 무덤이 있어서 이름붙은 ’말무덤‘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곳에 있는 식물의 이름이 들어간 땅이름들도 있었다.

‘무푸렛골’(청학동)이나 ‘버드나뭇골(유동;柳洞)’ 또는 ‘밤나뭇골(율목동;栗木洞)’ 등은 그 곳에 많은 식물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이들 땅이름은 식민지시대부터 잦은 행정구역에 따른 한자식 명칭으로의 변경으로 이제는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다.



(바) 반 이상 바뀌어 버린 서울의 땅이름


토박이말에 바탕을 둔 전국 곳곳의 땅이름은 한자로나마 뜻빌기나 소리빌기로 표기되어 오다가 그나마 20세기 초 우리가 나라를 잃음으로써 하나하나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이들 땅이름은 식민지시대부터 잦은 행정구역에 따른 한자식 명칭으로의 변경으로 우리 입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조선 27대 순종 융희 4년(1910) 8월 29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두고 우리 땅이름에 대대적인 칼질을 가했다.(표 참조)


(표) 

 

행정구역 및 명칭 변경 내용

1910년 10월 1일

*관제(官制)를 실시, 종래의 관찰사를 폐하여 각 부의 장관으로 함. *한성부(漢城府ù)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에 붙임.

1911년 4월 1일

*경기도 도령(道令) 3호로 경성부 행정구역에 부(部),면(面) 제도를 창립. 성 안은 5부(部) 36방(坊), 성 밖은 8면으로 획정. 8면은 용산면(용(龍山面), 서강면(西江面), 숭신면(崇信面), 두모면(豆毛面), 인창면(面), 은평면(面). 연희면(延禧面), 한지면(漢之面).

1913년 12월

*총독부령 111호로써 부(部)와 군(郡)의 명칭, 위치 및 관할 구역 개정.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7호로써 동(洞), 정(町)의 명칭과 구역 공포. 동의 수 186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에서 조례 포고, 4부(동부, 서부, 북부, 용산)에 출장소를 둠.

1915년 6월 1일

*동부-서부-북부의 3부(部)의 출장소를 폐지하고 경성부가 직접 관할.

1936년 4월 1일

*부령(府令) 8호로 경성부 관할 구역 확장 변경.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관내 1읍 8면 71리 및 5리 일부를 경성부 관할에 편입. *동부, 서부, 영등포출장소 신설. *동(洞), 정(町), 리(里)의 3가지로 불러오던 이름을 전부 정(町)으로 통일.

1943년 4월 1일

*출장소를 폐지하고 구제(區制)를 실시.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영등포구, 서대문구 등 7개구 설치.

1944년 10월 23일

*연희면의 편입으로 마포구를 더 설치하여 8개구로 함.


그러나 당시의 지명 조사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고, 일본인들의 사용에 편리하게 변질된 것이 상당히 많았다. 또, 지형도에는 일본글인 카다카나를 병기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파생된 혼란이 심했다.

1911년 4월, 일본은 경기도령 3호로써 경성부 행정구역에 부(部)와 면(面) 제도를 창립하였다. 성 안은 5부(部)와 36방(坊)으로 하고, 성 밖은 방(坊)을 면(面)으로 이름을 바꾸어 성외 8면(面)이라는 묘한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총독부는 그 해 10월 1일,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 경성부(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에 붙여 버렸다. 이렇게 되면서 조선 시대부터 익히 불러 왔던 ‘서울’ 또는 ‘한성’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의 땅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이른바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착수하고, 땅을 측량함과 함께 지도를 새로이 작성하면서 전국의 땅이름을 자기들 장부에 올려 놓기 시작하였다. 이 때 채집된 땅이름은 약 180만 개로서 상당수가 일본 제국 참모 본부 간행의 지형도에 기입되었다.

그 3년 후인 1914년 4월 1일, 일제는 행정구역 조정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땅이름에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당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의 개편은 식민지 기간인 35년 동안에 가장 규모가 컸다.

서울엔 부제(府制)를 실시, 기존의 부(部)-방(坊)-계(契) 등의 명칭들을 없애고, 동(洞)은 구역을 넓혀 기존의 여러 동들을 마구 합해 이름까지 많이 바꿔 버렸다.



(사) 광복 70년 아직도 고쳐야 할 땅이름 많아


광복 70주년 아직도 고쳐야 할 일제 잔재 땅이름이 많다

우리 땅이름들은 원래 민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러 온 토박이 땅이름들이 많았으나, 문자 생활이 한자식으로 거의 일관됐던 왕조시대에 이 이름들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새터'가 '신기(新基)'가 되고 '논고개'가 '논현(論峴)'이 되었다. 한자식으로의 표기 과정에서 원형이 바뀌긴 했으나,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유추해서 본꼴을 알아 낼 수 있는 정도의 변경이었기에 그나마라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표기돼 왔던 땅이름들이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크게 상처를 잃고, 그 원형에서 크게 멀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특히 일제 때에 심했다. 일제는 우리 땅을 침탈한 이후, 행정지명(行政地名)을 대대적으로 크게 바꾸어 버렸고, 산이나 내와 같은 자연물의 이름도 많이 고쳐 버렸다.


① '왕(王)'자를 '왕(旺)'자로 바꾼 예 많아


행정구역의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때는 1914년 4월이었다.

행정구역의 개편에 의한 땅이름 변경 작업에 따라 원래의 이름이 아예 없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어느 것은 아예 우리 옛 땅이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인사동(仁寺洞)', '은평구(恩平區)' 등 법정 땅이름의 대부분은 일제 때 정해진 것이다.

고의적으로 음(音)만 같게 하고, 다른 글자로 취한 것도 있었다.

서울의 '인왕산'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산은 원래 지금과는 글자가 다른 '인왕산(仁王山)'이었다. 인왕산은 '인왕도량(仁王道場)'의 그 '인왕'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인왕도량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개최된 호국법회의 하나였다. 이 법회는 <인왕경(仁王經)>의 내용에 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인왕경>은 인왕(仁王)이 16대국의 국왕에게 교시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제왕들을 대상으로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심법(深法)을 설한 경전이다. 따라서, 이 산은 조선 5백년을 두고 계속 그렇게 불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옛 문헌, 옛 지도나 옛 그림 등에는 분명히 옛 이름인 서울 북악 서쪽의 산이 '인왕산(仁王山)'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일제는 어느 때부터인지 슬그머니 이 산에 대한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바꾼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초기의 지도엔 '인왕산'이 그대로 우리의 원이름대로 나와 있고, 후기 지도엔 '인왕(仁旺)'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중기 이후로 정식 절차도 없이 슬그머니 바꾸어 표기한 듯하다. '왕(旺)'은 '일본'의 '일(日)'자와 '왕(王)'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일본이 왕(조선)을 누른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성남시를 흐르는 '대왕천(大旺川)'도 원래는 '임금왕(王)'자 들어간 '대왕천(大王川)'이었다.

서울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줄기의 안쪽을 따라 흘러 지금의 청파동과 용산 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로4가에서 한강으로 유입하는 서울 서부 지역의 한강 지류는 원래 덩굴풀이 많아 '만초천(蔓草川)'이라고 불렀던 유명한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기들이 집단 주거지 지역을 관통하는 이 내의 이름을 자기 나라에 있는 '아사히가와(욱천=旭川)'란 이름을 옮겨 붙였다.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도 일제가 붙인 땅이름이다. 원래 이 내에는 갈대가 많아 옛날부터 '갈내' 또는 '갈천(葛川)'이라고 부르던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내가 안양 지역을 지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옛날부터 불러 오던 '갈내' 같은 이름은 없애 버리고,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② 일제의 땅이름 바꾸기 속셈


일본은 우리 땅의 땅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행정구역 정리'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구실일 뿐이다. 행정구역을 변경하더라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쯤이라도 있었다.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따라서,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땅이름을 퇴색시켜서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또, 그들식의 땅이름을, 또는 일본에 있는 그대로의 땅이름을 우리 땅 곳곳에 하나하나 붙여 나감으로써 이 땅이 한국 땅이 아닌 일본 땅임을 새겨 나가려는 저의 깔려 있었음도 볼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추진해 나간 일제의 '땅이름바꾸기'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나, 땅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끈질긴 속성과 우리 민족의 비협조로 인해 그들의 목적은 쉽게 성취되지 못하였다.

런 중에 1945년에 우리가 35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의 땅이름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③ 일제 잔재를 그대로 받은 광복 후의 땅이름


광복 이후, 우리는 일제가 붙인 땅이름을 많이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존속시켜 식민지시대 이전의 상태로는 돌려놓질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나라에서는 일제 때 '경성부'라 불리던 우리의 수도를 '서울시'로 개칭하였다.

1946년 8월 18일엔 법령 108호로 서울을 '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켰고, 그 해의 10월 1일에는 일본식의 통(通) '정(町)'을 우리식 '로(路)'와 '동(洞)'으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그 달 18일에는 군정 법령 108호로 경기도 관할에서 서울을 분리하여, '서울특별시'로 승격시켰다. 우리의 수도를 일본식 잔재인 '경성'을 청산하고, '서울'이란 땅이름으로 정한 것은 잘한 일이나. 일제 때의 땅이름을 그대로 둔 것이 서울만 해도 무척 많다.

'만초천'이 아직도 일제가 붙인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가 하면,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한강가의 흑석동 일부는 당시 일본인 별장 이름 그대로 '명수대(明水臺)'로 통하고 있다. 이곳의 교회 이름, 아파트 이름까지도 '명수대'이다. 이곳의 초등학교 이름도 원래 '명수대초등학교'였으나, 1997년 봄학기부터 '흑석초등학교'로 바꾸었다.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제 때 '태평통'이라고 붙여졌던 곳은 '통(通)'을 '로(路)'자로만 바꾼 채 '태평로'란 이름을 달고 서울 중구의 정식 행정지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쌀 창고가 있어서 일제 때 '북미창정(北米倉町)'과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고 불렀던, 남대문 근처의 동네는 해방 후에 왜식 동명을 없앤다고 '북창동', '남창동'이라고 고쳐 짓기는 했지만, 일제가 지은 이름에서 겨우 '쌀미(米)'자만 빼고 정한 것이어서 개운치가 않다.

서울의 구(區)이름 중의 하나인 '은평(恩平)'도 일제의 잔재이다. '은평'은 일제가 1911년 경기도령(京畿道令)으로 경성부의 성외 8면을 정할 때 당시 이 지역의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한강 가운데의 섬을 ‘노들섬’으로 바꾼지 오래지만 아직도 '중지도(中之島)'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중지도'는 지명이라기보다는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일본어이다. 일제는 한강의 섬들을 자기 멋대로 이름을 짓거나 고쳤는데, 그 중 몇 개의 섬은 이름 아닌 이름인 '중지도'(일본말로는 '나카노시마')로 불러 왔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서울의 예만 들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다.



④ 광복 70년 올해는 일제 잔재 청산의 해가 돼야


광복 7주년, 이제는 우리 주위에 일제 잔재를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 입에 버릇처럼 많이 남은 일제의 찌꺼기 언어들도 우리식으로 길들여 써야 한다. 일본식으로 지어 부르고 있는 왜식 인명들도 이 기회에 모두 고쳤으면 좋겠다. 법적으로 더 쉬게 고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아직도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은 땅이름들을 우리식으로 잡아 주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혼이 밴 땅이름들이 이 땅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또, 새주소 사업으로 많이 죽어 버린 우리의 땅이름들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숫자식으로 붙어 있는 이름들을 우리의 얼이 살아 있는 이름들로 고쳐져야 한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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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름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2.06 글을 퍼 가실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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