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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아우내 아우내장터 땅이름 / 삼일절을 맞아. 배우리

작성자배우리|작성시간19.02.27|조회수235 목록 댓글 0

아우내 아우내장터 땅이름

삼일절을 맞아. 배우리

땅이름 자료 보기(전국)




  해마다 삼월이면 어른이고 아이이고 꼭 생각나는 이가 있다. 바로 '유관순'이다.
  "삼월 하늘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삼일절 아침, 각 대문마다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곤, 어렸을 때부터 입에 붙은 노래, 귀에 익은 이 노래를 우선 떠올리게 됨은 어쩐 일일까? 그 노래말 속의 주인공 '유관순 누나'가 우선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은 또 어쩐 일일까?
  유관순 누나라? 지금까지 살았다면 백 살도 넘었을 텐데. 그러나, 세상 뜰 때의 나이를 기준으로 해도 스무 살이 안 되었을 때이니, 어린이들 입장으로 보면 언제나 '누나'인 셈이다.


  또, '유관순' 하면 우선 생각나는 땅이름이 하나 있다. 그의 고향인 '아우내'이다. 보통은 '아우내장터'라고 한다. 그가 만세 운동을 크게 벌인 곳이다.



 

□ 아우내는 두 물줄기가 아우른다는 뜻

 

  땅이름에서의 '아우내'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일대를 흐르는 냇줄기 이름이다.
  '아우내'란 이름을 들으면 꼭 '작은 내'라는 뜻의 이름 같다. '형과 아우'의 그 '아우'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내'는 우리말의 '아우른다'는 뜻과 '내'란 말이 합쳐져 나온 이름이다. 즉, 두 줄기의 내가 아울러서(합쳐져서) 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아우른내'의 준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벌 가운데서 '치랏내'와 '잣밭내'의 두 물줄기가 합해져 나온 이름이다. '치랏내'는 '칡밭의 내'라는 뜻의 '칠앗내'의 변한 이름으로, 한자로는 '갈전천(葛田川)'이고, '잣밭내'는 '잣나무밭 사이의 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백전천(栢田川)'이다.
  물줄기가 합쳐진 주위는 너른 벌판.
  그 벌판 한 모퉁이에 큰 마을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 이름 역시 '아우내'.
  이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는 '병천(竝川)'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이다. 한자의 '병(竝)'은 '아우를병'자로, 한데 아우름을 뜻한다. '아우르다'의 비슷한 말로는 '어우르다'나 '어울리다'가 있다. '아우르다'는 뜻이 들어간 땅이름으로는 '아우내' 말고도 강원도 정선 땅의 '아우라지', 탄광으로 유명한 북한 땅의 함경북도의 '아오지'가 있다. 

  경기도 용인읍의 삼가리도 토빅아 땅이름이 '이우개'인데, 여기서는 물이 아우른다는 뜻이 아니고 길이 함쳐진다는 뜻이다. '아우라지'. '아오라지' 또는 '아우라치' 등의 이름은 정선 말고도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같은 군 연천읍 고문리.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장흥리, 같은 군 서면 도창리,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구래리, 홍천군 서면 중방대리, 같은 군 두촌면 철정리 등에 있다.


  병천의 아우내 마을은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마을. 예부터 5일장이 섰는데, 장날이면 이웃 고을인 청주, 진천, 안성, 천안읍내까지에서도 삼사십리 길을 걸어 이 곳으로 장을 보러 왔다.
  일제 강점기 초중반인 1919년, 이 곳 아우내 장터에선 큰 사건이 터졌다. 그 해 음력 3월 1일, 근처의 주민들이 이 곳에 모여들어 만세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벌판 한가운데서 여러 물줄기가 아우른 아우내처럼 지방민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모두 아울러 힘차게 독립을 외치며 일본에 항거했다.
  그 날은 아우내 장터의 장날이라 장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앞에서 누군가가 선창을 하자, 사람들은 미리 받은 태극기를 허리춤에서 꺼내어 모두들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앞으로 무리를 지어 나아갔다. 온 세상이 떠나갈 듯한 만세 소리. 행진하는 군중들의 수는 더욱 불어났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총칼을 휘두르며 이를 저지하였으나, 만세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 추모각의 열사 영정은 지금도 나라 걱정을 하듯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끈 사람은 유관순 열사였다. 당시의 나이가 불과 16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애띤 처녀였다.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 열사는 그 해의 양력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도 이러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서 그 일대 관청의 우리 한국인들을 찾아 협조를 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은밀히 만나 약속을 하는 등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그리고, 음력 2월 그믐날 밤, 아우내 마을의 뒷산인 매봉 산마루에 올라가 다음날의 만세 운동의 신호로 횃불을 올렸다.
  결국 그 다음날인 음력 3월 초하루, 이 아우내와 만세 운동 장터에선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일본 경찰의 손에 피를 흘리고 죽거나 다쳤으며, 이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는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가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했다.
  이 곳 아우내 장터에서는 해마다 양력 3월 1일이면 유관순 동상 앞에서 기념식을 올리고, 그 전날인 2월 그믐 밤이면 당시의 큰일을 기념하는 봉화제(烽火祭)가 열린다.
  그 옛날, 태극기의 물결로 일본을 놀라게 했던 곳.
  지금, 이 곳에는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 매봉산 중턱에서 아우내 장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추모각. 그 안의 영정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 열사는 지금도 그 옛날의 사건을 떠올리며, 지금도 평탄치 못한 이 나라의 앞날을 은근히 걱정하는 듯하다.
  매봉산 정상에는 봉화터가 있다. 유 열사가 기미년 음력 2월 그믐날 봉화를 올려 그 이튿날의 궐기를 알린 곳이다. 올라가는 길 옆엔 이화여고 학생들이 선배 언니(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며 지은 시들이 새겨진 비석들이 있다.
  시비가 있는 곳 위쪽의 너른 공터엔 열사의 묘비만 있는 초혼묘(招魂墓)가 있다. 시신을 못 찾아 그 혼만 모신 묘의 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인다. 비석엔 열사의 행적을 알리는 글과 함께 애절한 기원문이 적혀 있어 읽는 이의 마음에 작은 충격을 준다.
  "오오, 하나님이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유관순 생가


 

□ 아우내 냇물은 옛날과 다름없이

 

  유 열사의 생가터는 매봉 남쪽에 있다. 아우내에서 조금 동남쪽으로 1.5㎞쯤 들어간 곳인 지령마을이다. 1992년에 복원해 놓은 생가 마당 한옆에는 박화성 시인의 추도시가 새겨진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생가터 뒤에는 유 열사가 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던 '만마루'가 있고, 근처엔 독립 운동 전에 자주 넘어다니던 '까치고개'와 '개목고개'도 있다. 서원(書院)이 있던 '서원말', 말처럼 생긴 '말바위', 들 가운데 마을인 '너븐들' 등이 일대의 땅이름이다.
  독립 운동의 숨결을 간직한 아우내 냇물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기름진 들을 적시며 흐르고 있다.
  그래도 이 곳이 옛날 장터라고 자랑이라도 하는가? 마을엔 꽤나 오래 됐음직한 가게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당시의 모습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라도 쓰듯이.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옛날과 같은 번화한 장터의 모습은 아니다.
  그 해를 특별히 오직 '대한 독립 만세'를 한 소리로 불렀음을 우리 겨레 모두가 길이길이 기억이라도 하라는 의미일까? 묘하게도 그 큰일이 일어나던 해가 1919(일구일구. 一口一口)년이다.
  그 해는 정말 만세 운동에 나선 온 마을 사람들의 외침이 오직 '일구(一口)'였을 것이다. 바라는 것 역시 그것이었을 것이다. 또, 일본 경찰의 총칼에 쓰러져 넘어지면서도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계속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일어나고, 일어나고'---. 아, 그래서 그 해가 바로 '일구일구(1919)'년이었던가.
  그러나, 이젠 그 총칼보다 거센 태극기의 물결이 너울댔던 그 '아우내' 냇가의 너른 들판과 마을은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그래도, '아우내'라는 이름은 두고두고 우리 겨레의 가슴에 남아 선혈들의 얼을 기리는 이름으로 길이 기억되겠지. /// (글. 배우리)


전국 땅이름 보기

http://www.travelevent.net/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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