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땅이름 연구

청계천 발원지 백운동천을 찾아서 / 인왕산 옥인동 청풍계천 201031

작성자땅이름공부|작성시간20.10.28|조회수1,305 목록 댓글 0

himchan70abab3200baehan73name3200

청계천 발원지 백운동천을 찾아서 / 인왕산 옥인동 청풍계천

2020년 10월 30일(토) 오전 10~12시
2020년 10월 31일 우땅걷공(김석수 대표)가 페북에 올린 안내문.

 

서촌 백운동천(청풍계천)과 옥류동천 일대의 옛 지도
서촌에서 들러 볼 만함ㄴ 곳
-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의 합수 지점 (자하문로)
백운동천(청풍계천)과 옥류동천의 합수목 . 현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옆.
옥류동천길(안내판) 현재 자하문로7길

옥류동천 주변에는 서촌이란 이름을 단 간판이 더러 보인다.

 

서촌 일대 명문가 집터
인왕산 오르는 길 (옥인동)
옥인동의 한옥 마을

송석원 松石園
 

경치 좋기로 소문난 옥류천 상류에는 18세기에 송석원(松石園) 시사(詩社)가 있었다.
'송석원'이란 이름은 중인 출신 시인 천수경의 아호이자 집 이름이다. 중인들의 문학동인으로 1786년(정조 10) 천수경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이 시회는 장혼·김낙서·왕태·조수삼·차좌일·박윤묵 등 경아전 13인이 참여하였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하는데, 여기서의 옥계는 이곳을 흐르는 '옥류천'을 말한다.
송석원을 중심으로 수시로 시회가 열렸고 봄과 가을에는 송석원이 주최하는 백전이라는 백일장이 열렸다.
이 모임은 1786년에 결성되어 1818년까지 활동하면서 이채로운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예가 『풍요속선』의 발간이었다. 1797년 간행된 이 책은 글을 수록한 시인이 333인이나 되어 당대 위항문학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시사는 3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말에 와서 100여 년의 기풍도 그만 사그라들고 말았다.
천수경의 환갑잔치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들은 당대의 명필 추사에게 ‘송석원’ 글씨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추사의 집은 송석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경복궁 바로 서쪽 통의동 백송이 있는 큰 집이었다. 추사는 큰 예서로 ‘송석원’이라 쓰고 그 옆에 간기 ‘정축 정화 소봉래서’라고 적고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 음력 4월은 천수경이 타계하기 바로 전 해인데, 이 때의 추사의 나이는 32세이다.
옥류천이 흐르는 천수경 집 뒤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놀고먹는 양반이 무엇이길래 白手子誰子
바람받이에 앉아 부채질만 하다가 臨風又錦扇
이슬이 차가운 가을철이 되면 露寒天逈際
땀 흘려 가꾼 곡식을 몽땅 빼앗아 가는가 奪盡滿疇功
-차좌일의 「농부」

6년 후 1797년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 속에 들어 있던 이 그림을 본 선비 마성린은 그림 좌상단에 이런 제문을 써넣었다. "유월 무더운 밤 구름과 달이 아스라한데,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라게해 혼을 빼는구나."
왼쪽 아래에는 '김씨운림서소(金氏雲林書所)'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송석원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기 전 김씨 성을 가진 주인의 초당 근처이다. (김홍도 자신의 집이라는 설도 있다.)
송석원 자리는 지금의 옥인동 47-253 번지 일대이다. 천수경의 집터 송석원은 김수항, 민태호를 거쳐 윤덕영 소유로 바뀌어져 왔다.
현 송석원 터 표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절경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정조 때 평민시인 천수경이 이곳에 살면서 송석원이라 불렀고, 1914년 순정황후 윤 씨의 백부 윤덕영이 방이 40개나 되는 프랑스풍 집을 지어서 역시 송석원이라 불렀다.
윤택영은 순종황제의 황후-순정효황후 윤씨의 친정 아버지이고, 덕영은 윤황후의 백부이다.
다음은 윤덕영의 됨됨이에 대한 한양가(漢陽歌) 일부이다.

못된 사람 윤택영은 부원군만 욕심내어
경사는 못보았네 렴치없는 윤택영이
…중략…
합방시에 한양보소 만고역적 윤덕영은
황후백부 명색없네 임금옥새 빼앗다가
일본통감 갖다주니 우리나라 상감님은
룡포옥새 빼앗기여 백수군왕 가련하다.

1913년부터 10년이 넘게 걸려 지었으며 프랑스 설계도에 의해 석재를 혼입한 벽돌조의 2층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다. 천정에 금붕어가 논다고 하여 ‘금붕어집’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50년대 언커크((UNCURK,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로 사용되어 오다 1966년 화재 이후 많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송석원의 옛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추사의 바위 글씨 ‘송석원’은 어느 집 축대 밑에 묻혔다. 지금의 옥인동, 동양화가 남정 박노수 화실의 윗집이 바로 송석원 자리였다고 한다.
유서 깊은 곳도 세상의 부침에는 어쩔 수가 없나 보존과 개발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이다.

 

출처 -월간서예,2016.2,114-116쪽. 추사의 예서 ‘송석원 松石園’글씨- 석야 신웅순

자하문로. 바닥 밑으로는 백운동천의 물이 흐르겠지.

 

청풍계 일대는 송강 정철이 태어난 곳도 있다.
관동별곡의 긓판

 

백운동천 골짜기. 여기서부터 청계천 물줄기가 시작된다.
정선이 그린 백운동(자하동)의 풍경
백운동천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
백운동천에 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운동천 글씨는 바위에 깊이 새겨져 있다. 동천(洞天)은 골짜기 입구의 뜻
백운동천 시작점의 물길.

 

백운동천 白雲洞天

 

서울 인왕산(높이 338m) 동북쪽 기슭, 자하문터널 위(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가는 방향의 자하문터널 입구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백운동(白雲洞)은 ‘흰 구름이 떠 있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백운동의 ‘동(洞)’은 행정단위기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을 말한다

. 인왕산은 험준한 바위산이지만 예로부터 동쪽 기슭은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는데, 백운동은 옥류동·수성동·송석원·청풍계 등과 함께 인왕산의 명소로 꼽혔다. 백운동에 흐르는 물줄기인 백운동천은 청계천의 상류이자 본류로, 옥류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조선 전기 문신·학자이자 당대 문장가들이었던 김수온(金守溫), 이승소(李承召), 강희맹(姜希孟), 김종직(金宗直) 등은 백운동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그중 강희맹은 “백운동 안에는 흰 구름이 드리웠는데 白雲洞裏白雲陰/ 백운동 밖은 홍진(어지럽고 속됨)이 깊네 白雲洞外紅塵深/ 외길을 굽이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一徑盤回八雲中/ 놀라워라 성시(성으로 둘러싸인 시가)에 감춰진 산림 忽驚城市藏山林/ 시냇물 콸콸 뜰을 돌며 울고 溪流汨循除鳴/ 장송은 서로 가리운 채 바람에 슬피 운다 長松掩暎風哀吟/ …”로 시작하는 칠언고시를 지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성현(成俔)의 문집 《용재총화》와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사서(史書)인 《연려실기술》 등에는 삼청동·인왕동·쌍계동·청학동과 함께 백운동이 한양 도성의 명승으로 소개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도성 내 개천의 준설·보수 공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준천사실》, 한성(한양)의 인문지리서 《한경지략》, 관아의 행정법규 사례집 《육전조례》 등 조선 후기 문헌에는 백운동이 도성 내 공간을 구획하는 중심축이자 개천(開川, 현재의 청계천)의 수원(水原)인 백운동천이 흘러나오는 계곡이라 적혀 있다.

〈한양도성도〉, 〈도성도〉, 〈동여도〉 등 조선 후기의 고지도에도 등장하고, 겸재 정선의 화첩 〈장동팔경첩〉에도 ‘백운동도’가 한 폭을 차지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이염의가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대한제국기에 외무·법무대신을 지낸 김가진의 별장도 있었다. 백운동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천’이라는 글씨는 김가진이 쓴 것이다.

오래된 문헌·지도·회화에 등장하는 서울의 흔치 않은 전통적 경승지이자 청계천의 발원지이고,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공간이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있다. 2014년 10월 3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천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ㄹㄹ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