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01 KBS1 방송 생방송 토요일 땅이름 순례 34 ·철원·백마고지
배우리의 땅이름 순례 - 철원 백마고지
철원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KBS 2012년 12월 1일 방송)
경원선 신탄리~철원(백마고지역) 간 5.6㎞ 구간이 지난 달 20일 복원·개통되었다. 승객을 태운 열차가 철원 백마고지역으로 들어오는 모습, 각 신문의 보도를 통해서 보았다.
그래서, 오늘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 그 곳으로 땅이름 순례를 해 본다.
1. 경원선의 약 6킬로미터가 복원-개통되었다는 사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6·25전쟁 이후 단절된 구간이었는데, 이 구간이 복원됨으로써 남북 철도 연결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철원군 주민들의 수도권 접근도 한결 쉬워졌다. 철원평야 철새도래지 등의 관광 활성화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리적으로나 교통면으로 보아서는 남북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주게 되었다.
2. 그럼, 먼저 철원이라는 고을부터 살펴보죠. 예로부터 어떤 고을이었어요?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추가령열곡을 서쪽으로 바라보며 한반도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철원은 신석기시대의 유물들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 같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철원군(鐵圓郡)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하였고,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901년(효공왕 5) 송악(개성)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다음해에는 지금의 철원읍 홍원리로 도읍을 옮겼다. 911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918년까지 통치하였다.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이듬해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동주(東州)라 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5도·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교주도(交州道)에 속하였다. 1254년(고종 41)에 직제가 떨어져 동주현(東州縣)으로 불렸다가 뒤에 목으로 승격되었고,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낮추어져 철원부(鐵原府)로 개명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京畿)가 확장됨에 따라 교주도에서 경기좌도로 이속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태조 3) 한양천도가 이루어지고 경기의 영역이 재조정될 때에도 역시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태종 때에 철원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세종 때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춘천부 철원군이었다가 다음해에 도제(道制)로 환원되면서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38선을 경계로 철원군 전 지역이 공산치하로 들어갔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특히 1952년 10월의 백마고지전투와 철의 삼각지대 저격능선전투에 참여했던 장병들의 애국적인 투지는 온 겨레의 거울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면적은 898.30㎢이고, 인구는 4만 7,724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7개 면, 109개 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다.
3. 이번에 복원-개통된 구간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경원선 신탄리~철원(백마고지역) 간 5.6㎞ 구간이 복원·개통된 것이 지난 달 20일이었는데, 아마도 많은 분들이 승객을 태운 열차가 백마고지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셨을 것이다.
6·25전쟁 이후 단절된 이 구간이 복원됨으로써 남북 철도 연결의 기반을 구축하게 됐으며, 철원군 주민들의 수도권 접근이 한결 쉬워졌다. 철원평야 철새도래지 등의 관광 활성화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동두천에서 전곡, 연천, 대광리 등을 거쳐 신탄리에서부터 백마고지까지 이르는 철도를 쉽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욕신 같아선 이 기회에 아예 북한의 원산까지 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열차는 상·하행선 하루 아홉 차례 운행하며 막차는 상행선 오후 8시 52분, 하행선 오후 7시 50분이다. 요금은 신탄리역과 동일하다. 경기도 동두천에서 하루 34회 신탄리역까지 운행하는 통근열차가 철원(백마고지역)까지 하루 18회 연장 운행된다. 운행 시간은 7분 정도다.

4. 백마고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철원 하면 우선 이 백마고지가 생각나는데요. 특히 백마고지 전투,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전투가 아닌가요?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고지 전투.
백마고지는 철원의 방어와 주요도로 감제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국군과 중공군은 열두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는 혈전을 벌였는데, 중공군은 제 38군 예하의 112,113,114사단을 투입하였고, 국군 9사단은 배속된 제51경보병연대와 미군포병 2개대대, 전차중대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의 국군 제 9사단은 김종오 소장의 지휘를 받아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3차례의 전투 끝에 중공군은 물러났고 다음날 다시 4차 공격을 시작해와 백마고지를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주일 대령의 제 28보병연대가 2시간에 걸친 전투끝에 다시 탈환해 왔다. 10월 8일 중공군 제 38연대를 투입하여 제 5차공세를 가해와 오전 8시에 고지를 점령했으나 또다시 국군 제 28보병연대 제 33대가 23시에 고지를 탈환했다. 10월 9일 6차공세가 벌어졌고 또다시 함락과 탈환이 있었고, 10월 10일에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3차례가 넘게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후에도 10월 15일 새벽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는 28보병연대와 29보병연대의 고지탈환으로 인해 전투가 완전히 종결되었다.
5. 왜 그 고지를 백마고지라 하게 되었을까요?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북단의 요충지로 원래 이름은 395고지였으나 전술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과 집중 포격으로 인해 고지의 모습이 달라져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황폐화된 산머리 부근의 모습이 하늘에서 보면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열흘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 1만명, 국군 35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 이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냈던 9보병사단은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6. 신탄리에서 백마고지까지 철도가 이어진다고 하셨죠? 신탄리에서의 ‘탄’이란 글자는 우리가 ‘폭탄’ ‘수류탄’ 할 때의 그 ‘탄’자인가요?
경원선 일부가 복원 개통되 전까지는 기차는 경원선의 한 역인 신탄리역까지만 갈 수 있었다.
이 역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발길을 옮기면 강원도 철원 땅이다.
'신탄리'에서의 '신탄(新灘)'은 순 우리말로 '새여울'이다. 들 사이로 흐르는 사이(새)의 여울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은 듯하다.
근처의 차탄(車灘)이란 여울목은 그리 넓지도 않다. 또 깊지도 않다. 그렇다면 기차가 너무 술이 취해서 이 작은 내를 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술 취한 이가 가로막아 차가 달리지 못하는 것인가?
차탄은 ‘산골짜기 여울’이란 의미의 ‘술여울’이 ‘수리여울’, ‘수레여울’로 음전되면서 수레차(車)자가 들어간 ‘차탄’으로 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