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이야기
YTN 방송 2011-11-01 08:50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장)
11/1(화) 남산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1-11-01 08:50 | 조회 : 1093
MC>> 이번 시간은/
우리 동네의 이름이 어떻게 유래했는지..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과
얘기나눠보겠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인사)
1. 요즘 단풍과 낙엽을 즐기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죠.
서울 시내에서도 아름다운 단풍길이 많은데요.
그 중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로 손에 꼽히는,
남산의 이름에는 어떤 유래가 있는지 알려주신다구요.
남산은 서울 남쪽에 있어서 남산인가요?
- 북악산이 서울의 뒷산이라면 남산은 서울의 앞산이다. 그러기에 예부터 서울 사람들은 뒷산인 북악보다는 남산을 더 가까이 했다. 더구나 북안산은 조선시대엔 대궐 뒷산이어서 함부로 올라갈 수도 없어 서울 사람들은 간단한 산행을 하려면 주로 남산을 찾았다. 그만큼 남산은 예부터 한양 사람들과 함께 숨쉬어 왔고. 삶을 늘 같이 해 왔다.
예부터 한양(서울) 사람의 사랑을 받아 온 남산(南山)은 도성(都城)의 남쪽에 있어 그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 그리고, 변방에서 전해 들어오는 봉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가장 남쪽에 닿는 산이라고 해서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했고, 조선 초에 도읍을 개성에서 이 곳으로 끌어 왔다 하여 '인경산(引京山)'이라고도. 뱃사람들은 '마뫼'로 불렀다.
2. 풍수적으로도 매우 좋은 산이라던데---?
- 남산 서쪽 봉우리 모양은 누에머리를 닮아 '누에머리' 또는 '잠두(蠶頭)'라 했다. 옛날 서울 사람들은 음력 4월 8일 밤, 이 봉우리에 올라 종로의 등불놀이 불빛 야경을 즐겼다.
남산은 백악(白岳.북악산), 인왕산(仁王山), 낙산(駱山)과 함께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백악을 주산으로 하는 풍수적 지형의 안산(案山)이 된다.
예부터 서울 사람들은 남산을 장 안에 좋은 풍수적 기운을 싸안아 주는 고마운 산으로 여겨 어느 누구나 무덤 한 자리조차 쓰지 않았다. 또, 나라에서도 이를 막았다. 조선 말 순조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장제급(張濟汲)이 자기 어머니 시신을 몰래 이 산에 묻었다가 나라에 알려져 큰 화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산은 말이 안장을 벗고 홀가분하게 달리는 모습의 주마탈안형(走馬脫鞍形)으로 보는 이도 있다.
또, 조선 초의 풍수가 무학대사도 지금의 회현동2가쪽으로 벋어나온 남산 줄기를 보고 거북이 엎드린 모습의 복구형(伏龜形) 명당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그 등성이에 자리한 두 선비의 집이 거북의 양쪽 눈 자리라 했다.
<조선실록>엔 세종대왕이 남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핀 기록도 있다.
3. 풍수적 기운을 가진 산이니 인물도 많이...?
- 풍수적으로 좋다는 이 복구형 등성이 밑에선 많은 인물이 나왔다.
즉, 지금의 인현동1가 40번지 일대 '마른내'에선 조선 초에서 중기에 이르기까지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여름에도 비가 뜸하면 금방 말라 버리는 내가 있어 '마른냇골' 또는 '건천동(乾川洞)'이라고도 했던 이 곳은 풍수적인 기(氣)가 서린 곳이었던지 단종 때의 김종서, 정인지, 세조 때의 양성지, 명종 때의 노수신, 선조 때의 유성룡, 이순신, 원균 등이 태어나거나 자란 곳이다.
그러나, 인현동쪽의 남산 기슭에선 중기부터 벼슬에서 밀려난 글쟁이나 가난한 선비들이 골짜기에 숨어 들어와 관직(官職)의 기회를 노리면서 제각기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의 중구 필동이나 예장동 일대가 바로 그런 곳으로, 이 곳에선 그런 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자고 나면 글만 읽는 사람을 '남산골 샌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성부의 남부 '건천동(乾川洞)'이었던 지금의 인현동 아래쪽으로 남산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이 물줄기가 지났는데, 비가 조금만 와도 금방 말라 이름을 '마른내'라 하였고, 한자로 '건천(乾川)'이라 하였다.
지금의 인현동2가에 있는 작은 고개는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저택이 근처에 있어서 '인성붓재'라 하였다. 이 이름이 줄어서 '인현('仁峴)'인데, 이것이 지금의 '인현동'이란 이름의 바탕이 되었다.
4.근저 동네가 필동. 왜 필동?
- 조선시대에 한성 지역을 크게 다섯으로 나누어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五部)를 두었는데,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가 그것이다.
그 중 남부는 대체로 남산을 끼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이 곳에도 많은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성의 '남부(南部)' 지역을 관할하는 부(部)가 있어 '남붓골'이라 하던 마을은 '붓골'이란 이름으로 변해 갔고, 이는 다시 '붓'과 관계된 이름으로 보아 '필동(筆洞)'이란 이름으로 옮겨갔다.
5. 필동이란 이름을 들으면 글깨나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것 같은데?
- '붓골'의 '붓'은 이 일대에 많은 인물이 나게 했다. 특히, 이름난 문장가를 많이 나게 했다.
인조 때에 척화신(斥和臣)이며 우계(牛溪)의 문인인 팔송(八松) 윤황(尹煌)도 지금의 필동 2가에 살았었다. 그는 '남별영(南別營)'이라고 하는 병영 서문 밖에서 살았는데, 그의 집안 마당에 있었던 '팔송정(八松井)'이라고 하는 우물이 유명했다. 이조참의라는 벼슬까지 올라간 그는 붓글씨를 잘 쓰기로도 이름났다. 그가 세상을 뜬 후에 인조는 그에게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내렸다.
지금의 필동 3가 동국대학교 안에는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는 시단이 있다.
이 곳에선 선조 때의 시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살면서 당시 명류(名流) 이오봉(李五峰), 권석주(權石洲), 홍학곡(洪鶴谷) 등과 더불어 시루(詩樓)와 시단(詩壇)에 모여 시를 지으며 즐겨 놀아서 세상 사람들이 신선같이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영조 때 그의 현손(玄孫) 이주진(李周鎭)이 바위에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의 6자를 새겼다.
그 밖에도 지금의 필동 1가에 인조 때 학자인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가 살았던 터가 있고, 2가엔 영조 때의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자주 올라 사색을 즐기던 귀록정(歸鹿亭) 터가 있다. '귀록정'이란 이름은 조문명이 푸른 줄로 사슴을 정자 아래에 늘 매어 두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필동 1가 옆의 남학동(南學洞)은 조선시대에 유생(儒生)을 교육하던 4학(四學)의 하나인 남학(南學)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남학은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하였다.
필동 2가 남산 기슭엔 노인정이 있었다. 이 노인정은 순조 때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 창건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지키며, 그 뒤 바위에다 '조씨 어른의 터'라는 뜻의 '조씨노기(趙氏老基)'라는 4자를 새겼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싸우기 전, 한국 대신들이 이 노인정에 모여 일본 공사 대도규개(大島圭介)가 제출한 5개조 개혁안을 가결한 바 있는데, 이를 '노인정 회의'라 했다.
6. 붓골, 즉 필동과 지금 거기 있는 학교가 동국대학교 인데요.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 '붓골'이 인물을 만드는 데는 그 옆에 있는 '먹골'도 한 몫을 했다.
지금의 필동 3가 동국대학교 근처에 있었던 이 마을은 한자로는 '묵동(墨洞)'이라고 일러 왔다. 이 이름은 이 마을 근처에 '먹절', 한자로는 '묵사(墨寺)'라고 하는 절이 있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먹절골', 한자로는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해 왔었다.
붓(문장 글)으로 출세한 많은 이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고, 붓으로 공부하는 학당(學堂)이 자리잡아 많은 유생들이 배출되었다.
7. 옛 사람들은 이 남산을 어떻게 이용했나요? 봉수대도 있는 걸 보면 아주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 같은데요?
- 남산에는 서을을 도읍으로 고른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봄 가을로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올렸던 이 국사당은 일제 때 일인들에 의해 헐린 뒤로 인왕산 기슭의 무악동으로 옮겼다.
산꼭대기엔 옛날에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5 군데 있었으나, 그 흔적조차 없어져 그 위치가 확인된 것은 팔각정 옆의 하나뿐었다. 이들 봉수대에선 국경 지대나 해안에서 들어오는 국방 관련의 신호를 연기나 횃불로써 최종적으로 받아 냈었다. 여기서 받아진 횃불 신호는 곧바로 대궐로 전해져 곧바로 국방에 관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돼 있었다.
제1봉수;(육로)함경도-강원도-경기도-아차산
제2봉수;(육로)경상도-충청도-경기도-광주 천천령
제3봉수;(육로)평안도-황해도-경기도-무악(毋岳) 동봉
제4봉수;(해로)평안도-황해도-경기도-무악 서봉
제5봉수;(해로)전라도-충청도-경기도-개화산(開花山)
남산에는 서을을 도읍으로 고른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國師堂)도 있었다. 봄 가을로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올렸던 이 국사당은 일제 때 일인들에 의해 헐린 뒤로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 무악동으로 옮겼다.
산꼭대기엔 옛날에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5 군데 있었으나, 그 흔적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팔각정 옆의 한 봉수대 자리를 확인, 이 곳에 다섯 봉수대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 남산의 이들 봉수대에선 국경 지대나 해안에서 들어오는 국방 관련의 신호를 연기나 횃불로써 최종적으로 받아 냈었다. 여기서 받아진 횃불 신호는 곧바로 대궐로 전해져 조치가 취해지도록 돼 있었다.
지금의 '한국의집'이 있는 북쪽 모퉁이에는 '육신송(六臣松)'이라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생민골[生民洞]'이란 아름다운 골짜기에 아래쪽에서 자라 온 이 소나무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저항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사육신 박팽년이 그 집에 손수 심었던 소나무여서 누구나 이 앞을 지날 때면 숙연한 마음이 되어 옷깃을 여미곤 했다. 그가 순절한 다음, '육신송'으로 모든 이의 우러름을 받아 왔던 이 나무는 일제 중엽까지도 이 곳에서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정치가인 백사 이항복의 정자 홍엽정(紅葉亭)도 필동에서 가까운 지금의 남창동인 남산 기슭에 있었는데, 이 정자는 고종 때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별장이 되었다. 지금의 국토통일원 자리엔 임진왜란 때 왜장이 주둔했던 왜성대(倭城臺)가 있었다.
지금의 장충단 공원 자리엔 고종이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수와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과 그 부속 건물이 있었다.
남산 북쪽 기슭에는 조선 말까지도 많은 한옥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일본식 건물들이 자리잡아 갔다.
8. 일제 강정김에는 일본인들이 남산을 많이 훼손했다던데?
- 남산은 나막신을 신고 가난 속에 지조를 지켰던 '딸깍발이'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일본에 의해 이 땅이 강점당하면서 상처를 입어 나갔다. 갑신정변 이후로 일본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거류 지역이 형성되고, 일본에서 가져온 근대적 상품을 진열 판매하여 당시 개화가 늦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했던 그 때만 해도 남산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서울 거주가 허용되던 구한말부터 남산은 오욕의 현장으로 치달았다. 서대문 밖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자, 일제는 남산 기슭을 깎아 새 공사관 건물을 지었다. 을사조약 후엔 통감부 건물까지 남산에 지었다. 이 때부터 사실상 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일본은 그 주변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장충단의 사당을 허물고 그 곳에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 군인들을 기리는 육탄 3용사와 이토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를 세웠다.
1906년, 남산 북쪽을 손아귀에 넣은 일제는 경성공원(京城公園)을 만들고, 그 2년 뒤엔 회현동 일대까지 차지해서 한양공원으로 개설했다. 1918년 현재의 남산식물원 자리에 13만평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짓고 참배객을 위한 도로를 내었다. 1920년엔 예장동까지 넓혀 자기들의 주거지로 삼았다. 1940년부터는 예장동과 장충동에 일본인의 휴식을 위한 남산공원. 장충단공원을 조성, 남산 기슭을 크게 파헤쳤다.
8.15 뒤에 조선신궁 등은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으나, 남산의 제모습은 바로 찾아 놓지 못했다. 도리어 우리 손에 의해서도 남산은 더 크게 잠식되었남산은 더 크게 잠식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의 집단 판자촌(일명 해방촌) 이 용산동 일대에 들어서면서 남산은 또 한차례 깎여나갔다.
1957년 9월, 당시 내무부는 외국인 주택 건설을 이유로 남산공원 남쪽 5천5백여평을 공원용지에서 해제했다. 이듬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남산 자락 9천여 평에 동국대학 건립을 허가했다. 이 후, 자유센터와 19층짜리 타워호텔 건설(72년), 케이블카 설치(62년), 16.17층짜리 남산 외인아파트 2개동 완공(72년)이 이어지면서 남산의 훼손은 극에 달했다. 하이야트(22층) .힐튼(23층) .신라(22층) .앰배서더호텔(19층) 대우빌딩(25층) 등도 남산을 가로막고 들어섰다.
'남산의 배에서 등까지 구멍을 뚫었다'는 비난을 받은 남산 1호터널 굴착(70년)도 훼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강남북의 소통이라는 표면적 이유보다도 1968년 1.21사태 이후 전시 상황에 대비해 방공 터널용으로 지으라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불호령에 따라 1년여 만에 졸속으로 지어진 작품이라는 소문이다. 얼마 후 2호터널(70년). 3호터널(78년)도 남산의 몸통을 관통했다.
산꼭대기엔 남산 송신탑을 드높이 세워 전파 발송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송신탑은 지금은 전망대 구실도 하고 있으나, 멀리서 보는 남산의 모습을 크게 해치고 있다.
9. 남산은 그렇게 많이 훼손되었는데, 제모습 찾기 운동으로 어느 정도 많이 좋아졌죠?
- 지난 1990년, 서울시는 각계의 의견을 모아 '남산 제모습 찾기 1백인 시민위원회' 구성했다, 이것이 남산의 원래 모습을 찾는 첫 단추라 할 만하다.
그 첫 결실로 남산 외인아파트가 1994년 11월 20일 폭파 철거됐다. 남산의 안기부 건물 21개동은 그 중 제1별관만 철거(96년)됐다. 나머지 20개동은 서울시가 청사 부족을 이유로 보존키로 해 제모습 찾기의 취지가 퇴색됐다. 또 필동 2만4천여 평에 들어섰던 수도방위사령부도 이사가고, 1998년 4월에 한옥마을이 들어서 남산의 경관은 많이 좋아졌다. 그 뒤로, 서울시는 소나무 1천1백그루를 추가로 심고, 전면적인 생태 조사를 하는 것으로 제모습찾기 사업을 거의 마무리했다.
그러나 서울의 여러 지역에서는 고층 빌딩숲이 가리고 있어 남산의 스카이라인이 보이지 않는다.
남산의 생태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1995년과 1998년에 진행한 한 조사에 의하면 3년 사이에 소나무 군집은 25개 종에서 21개 종으로 줄었고 그루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소나무는 1910년 무렵 일제가 아카시아를 심기 시작할 당시엔 전체 수목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 1994년 조사에선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이란 애국가 가사를 무색케 하는 대목이다.
고려시대 호랑이가 출몰한 기록도 남아 있는 남산이다.
그러나 동식물이 남산에서 다양하고 조화롭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입돼야 할 것이다.
MC>>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사)
지금까지 한국 땅이름 학회 배우리 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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