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신문 `정동 ‘정동길 / 2109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정동과 정릉동
신덕왕후의 한이 서린 곳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 서울 중구
중구 정동(貞洞)과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은 이름 첫 글자가 똑같이 '정(貞)'자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두 동이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구의 정동은 조선 이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한이 깊게 서린 곳이다. 강 왕후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조가 왕이 되던 해에 현비(顯妃)로 책정되었다.
태조 원년 8월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왕위 계승 문제로 복잡한 궁내의 사정을 남겨 놓고 차마 감을 수 없는 눈을 감은 것이다.
태조는 왕비의 죽음 이후 슬픔을 못 이겨 열흘 동안이나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가까운 남쪽 언덕인 황화방(皇華坊;지금의 정동)으로 능 자리를 정한다. 능터는 도성 밖에 정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불쌍하게 죽은 아내를 가까이 두고 싶어 여기에 능을 썼다. 능침 꾸미는 일까지 친히 감독하였다.
태조는 능소 바로 동쪽 모퉁이에 원당인 흥천사(興天寺)를 짓는다. 이 절을 세우고 경상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해 오는 단 하나인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일부 옮겨 사리전(舍利殿)을 절 북쪽에 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주 왕비의 능을 찾고 절에 들러 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이 태조 7년(1398) 8월, 마침내 궐내에서는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세자 책봉에 누구보다 불만이 많았던 방원이 칼을 휘둘러 배다른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만 것이다. 상심에 빠져 있던 태조는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 궁에서 나와 멀리 함경도 함흥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태종 때인 1408년 5월, 태조는 세상을 떠난다. 신덕왕후를 잃은 지 12년 뒤이고,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을 잃은 지 10년째이다. 태종은 그 해 9월, 양주 검암산. 지금의 동구릉)에 부왕을 장사지낸다. 태종은 우선 대궐 가까이 있는 계모 신덕왕후의 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부왕의 장례를 치른 지 불과 5달만에 정릉을 동소문 밖 살한이(지금의 정릉동)에 옮겨 버린다. 죽은 신덕왕후로 보아서는 배다른 아들로부터 당하는 큰 수모가 아닐 수 없다. 옮기고 난 뒤에도 능지기도 두지 않은 채 돌보지 않았다. 묘 앞에 누구 묘라는 표석도 세우지 않았고, 태묘에 배향하지도 않았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였다.
신덕왕후의 능이 있었던 원래의 정릉터는 원래 정릉동이었다가 정동(貞洞)이 되었다. 정릉의 원당으로 지었던 정동의 흥천사도 정릉 석문(石門) 밖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옮겼다가 정조 18년(1794) 9월 지금의 정릉동으로 다시 옮겨 이름까지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었다.
옛날의 정릉이 있던 근처 덕수궁 돌담 근처에 ‘정동길’이 있지만, 이곳이 채조 왕비 신뎍왕후의 능이 있었던 것을 아는 이가 별로 많지 않다. 정릉동이 원래 여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별로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