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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구용산과 용산강

작성자이름사랑|작성시간22.06.01|조회수260 목록 댓글 0

구용산과 용산강

지금의 원효로-산천동 일대가 원래의 용산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용산 일대

 

용산이란 산 언덕에 집들이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용산 남쪽 산비탈과 그 북쪽 언덕으로는 용산의 모습은 거의 제대로였다. 만약, 여기에 집들이 들어서지 않게 하고 모습을 하나하나 바꾸어 나갔다면 용산의 산모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처럼 한강 조망의 좋은 산인 명승지(名勝地)로 되살아나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치가 좋았던 그 용산 산언덕은 지금은 산자락을 가득 메운 아파트 건물들로 이젠 용산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산이 그 유명한 옛날의 용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산천동 언덕이니 원효로4가 끝머리니 하며 말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 초만 하더라도 이 산과 그 일대를 거의 모두 ‘용산’으로 불렀다. 즉, ‘용산’ 하면 우선은 여기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용산은 뒤에 한강로쪽에 둘어선 용산역과 그 앞의 상권이 형성되면서 ‘용산’이란 이름이 차츰 그쪽으로 옮겨가게 됐다. 구용산(舊龍山)이니 신용산(新龍山)이니 하는 말도 나왔다.

지금은 이 지역이 원래의 '용산'이었음은 그 산마루에 있는 용산성당과 그 아래 용산신학교터로 용산의 옛터가 여기였음을 증명해 준다.

 

만초천의 변화

 

용산의 옛터에 흐르는 물줄기가 만초천(蔓草川)이다. 그러나 복개되어 지금은 이 불줄기를 볼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욱천(旭川)으로도 부르던 내인데, 복개된 후에 한때 농수산물시장이 되었다가 그 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사간 후에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섰다.

만초천은 원효대교 밑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그 한강 유입 지점에 구용산 수위관측소가 있다. 이 관측소는 일제가 1917년부터 수위를 측정하던 자리에 1924년에 세웠다. 이듬해 1월부터 정식으로 관측을 시작했고, 한국전쟁 때 잠시 가동을 멈추었다가 측정을 재개하여 1976년 9월까지 제 역할을 했는데 1977년에 와서 문을 닫았다.

근처 청암동 산등성이에는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성종 24년(1493)에 세워진 이 독서당은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라고도 했다. 남호는 용산강의 또다른 이름이다. 인재들이 선망하던 이 독서당은 연산군 때 폐지되었고 개화기 이후에는 영국인과 일본인의 별장이 되기도 했다.

 

용산강의 사람들

 

구용산 일대의 한강을 용산강(龍山江)이라 한다. 즉 용산구 원효로4가 지역의 한강과 만초천이 만나는 한강 일대인데 용호(龍湖)나 용강(龍江)이라 하기도 했다. 전에는 한강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불렀는데, 용호에서 더 내려간 부분은 마호(麻湖), 더 가면 서호(西湖) 또는 서강(西江)이었다.

용산강에는 용산나루가 있었다. 구용산 사람들은 주로 이 나루를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나룻배를 젓거나 뱃짐을 옮겨 주며 그 품삯으로 살아가거나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갔다.

용산의 용머리 부분을 휘돌기 전의 용산강 끝머리를 벼랑창이라고 하는데, 이는 강 언덕에 있던 별영창(別營倉)이 변한 말이다. 벼랑창 아래 강에서는 센 물살 때문에 사고가 많았다. 또한 용산강에 접하는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는 여름 장마철이면 침수도 잦았다.

용산강은 일제 강점기에는 아낙네들의 빨래터이기도 했고, 서해안의 조깃배가 와 닿는 나루터이기도 했다.

수운(水運)의 요충지였던 구용산에는 조선시대에 수로전운소(水路轉運所)와 군량을 저장하는 군자감(軍資監)의 강감(江監)이 설치되기도 했다. 중요한 창고들도 많아 이곳으로 드나드는 선박과 인마의 왕래로 지금보다 훨씬 번잡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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