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초천(덩굴내)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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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천
땅에는 분명히 팔자가 있다. 이 땅에도 저 땅에도 분명히 팔자가 있다. 그리고 땅은 자기의 팔자를 그 형상 이나 땅이름을 통해서 좋은 땅 나쁜 땅을 알아내는 지혜를 길러 왔다.
그리고, 또 땅은 그 옛날 사람들로부터 받은 어떤 기운을 다시 발하는 신비한 재주도 지녔다.
그 한 예로 서울 용산의 용산 전자 상가를 들 수가 있다.
용산 전자상가의 정확한 행정상의 위치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일부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남영역과 용산역 사이 철길 북서편에 있는 이 전자 상가 일대는 지금은 갖가지 전자 제품들을 판매하는 번화한 거리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한낱 냇줄기 한가닥이 지나가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이 곳을 지나는 내의 이름은 '욱천(旭川)'으로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덩굴풀이 많았던지 '덩굴풀내'의 뜻을 지닌 '만초천(蔓草川)'이었다. 이 내는 '무악천(毋岳川)' 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이 내가 '무악'에서 발원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무악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쪽으로 넘는 고개인 무악재 바로 왼쪽(서쪽)에 있는 산으로 '무악재'란 이름도 원래 이 산이름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곳에서 시작되는 이 내는 현저동과 서대문, 서소문 일대를 거쳐 용산구의 청파동을 지나 지금의 용산 전자상가 있는 곳을 거쳐 원효대교의 북단 근처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 일제 때 이름으로 바뀌어
'욱천' 이란 이름은 일정 때 일인들이 지은 이름으로 그들의 음으로는 '아사이카와' 라고 했다. 일인들은 일제 때에 자기 나라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지금의 원효로(당시 이름은 '원정') 일대의 땅이름들을 모두 자기들 식으로 지어 사용했는데, 이 곳을 지나는 내의 이름도 우리의 옛이름인 '만초천'에서 '욱천'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욱천' 이란 이름은 일본 땅에도 여러 곳 있다.
이 내는 복개되어 지금은 지도에서조차 나타나 있지 않고 서울에 웬만큼 오래 산 사람들조차 이젠 이 내를 잘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복개된 땅 밑으로 흘러 이젠 그 물 모습도 볼 수 없고, 그 물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이 냇줄기 양옆으로 있던 옛날의 논밭들은 기차길이나 한강로, 청파로, 동호로 등의 길, 주택가로 변하고 전자상가로까지 되어 지금은 우리 기억에서 아주 멀어져 버렸다. 동호로 중 원효로 부근의 용산 전자상가도 이 내를 덮어 씌어 만든 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가 않다.
만초천에서 유일하게 복개가 안 되어 있는 부분. 용산구 문배동
□ 옛날 서부 서울의 좋은 젖줄
이제 우리 곁에서 아득히 멀어져 버린 내이지만, 욱천은 옛날에는 청ㅖ천과 함께 서울 사람들의 좋은 젖줄이었다. 즉, 청계천이 성 안 사람들의 젖줄이었다면 욱천은 서울 성 밖 사람들의 둘도 없는 훌륭한 젖줄이었다. 이 물로 논물을 댔고 이 물에서 빨래를 했으며 이 물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내에서 옛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할 것은 밤에 뻘에다 불을 켜 놓고 게를 잡았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 내에서 게잡이 불빛은 용산팔경(龍山八景)의 하나로도 꼽혀왔다.
용산8경에는 모두 8개의 땅이름이 나오는데, 현재의 땅이름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만천은 지금의 욱천이고, 율도는 지금은 없어져 버린 마포대교 옆의 밤섬이며, 사촌은 지금의 서부이촌동에 있었던 옛마을인 새남터이다.
'용산'이란 이름은 원래 산이름이었다. 지금 용산구 산천아파트와 마포구 도화동 우선아파트 사이에 있는 산이 그 산이다. 이 곳(용산)에서 바라본 8가지 좋은 경치 중에 7가지는 낮에 보이는 경치이고, 나머지 1가지인 '만천의 게잡이 불빛'은 밤에 보이는 경치이다.
게는 불빛을 보면 그것을 기엄나오는 버릇이 있어서 예부터 게잡이꾼들은 밤에 불빛을 이용해 게를 잡았다. 게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냇가 여기저기에 켜 놓은 불빛들이 용산 산마루에서 보았을 때 무척 볼 만했던 모양이다.
□ 이도령도 지나갔던 만천 냇가길
서울 서부 지역의 너른 들을 촉촉이 적셔 주었던 이 젖줄을 따라 옛날에도 제법 큰길이 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옛 지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문헌들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가 있다.
<춘향전>에도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서울에서 남원까지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울 남대문을 나와 우선 이 만천(욱천)을 따라 한강까지 간 것으로 돼 있다.
그 부분을 한번 보자.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
즉, 청파역(지금의 청파동에 있었던 옛 역)에 말을 부탁해서 준비해 타고, 숭례문(남대문)을 나와서 칠패팔패(지금의 염천교 칠패길 부근)를 거쳐 이문동(서울역 근처에 있던 마을)으로 해서 청파 배다리를 지난다. 그리고는 돌모루(지금 남영역 근처에 있었던 옛마을)를 지나 밥전거리('밥을 파는 음식점 거리'의 뜻: 지금의 삼각지 근처?)로 해서 동자기나루(지금의 동작대교)쪽으로 간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길이 만천 옆으로 난 옛 도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청파로와 용호로 일부 그대로가 된다.
만천은 인왕산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긴 내여서 다리도 꽤 많았다. 서대문 바로 바깥쪽(서쪽) 에는 경교(옛날 경기 감영 창고 앞쪽이어서 이 이름이 붙음)라는 다리가 있었고 지금도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서울역 뒤편의 염천교(옛이름은 염초교)라는 다리도 있었다. 그 하류쪽 지금의 청파동에 처음에 배를 띄어 다리를 놓았던 '배다리'라 했고, 이 곳에 큰 길(지금의 '청파로')도 예부터 '주교대교(舟橋大橋)'라 했다.
이 내는 지금의 남영역 근처에 와서는 다른 큰 물줄기를 합해 물의 양을 크게 불린다. 남산 서쪽 골짜기에서부터 시작해 후암동, 남영동 일대를 적시고 나온 한 냇줄기가 여기서 합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초천은 크게 말하면 인왕산과 물과 남산의 물이 다정히 합쳐져 흐르는 내라고 할 수가 있다.
□ 게잡이불빛 터에 전자상가 불빛 휘황
옛날의 만초천, 즉 지금의 욱천 하류는 밤이면 서울 그 어느 곳 보다도 불빛이 요란하다. 가히 국제적 규모라 할 수 있는 용산 전자 상가. 이 곳의 많은 가게들에서 내쏟는 불빛들이 밤이면 서로 다투기라도 하듯 빛의 잔치를 벌인다.
이 곳에 내를 복개한 이유는 원래 전자상가를 유치할 목적은 아니었었다. 큰 농산물시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이 시장이 여러 해 동안 운영해 가는 과정에서 도심의 교통난을 가증시킨다는 여론에 따라 송파구 가락동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대신 세운상가에 있던 전자상가를 옮겨 왔던 것이다.
상점들마다 휘황찬란하게 번득이는 조명 불빛, 야광 간판, 네온사인, ……거기에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노래소리까지 끼어들어 서울의 '불빛거리'임을 마음껏 뽐낸다.
그 옛날 만초천의 게잡이 불빛이 이젠 전기의 불빛으로 되살아난 것일까? 옛날 갯벌이던 터에 가득 들어선 전기, 전자 관련의 각종 상점들은 게잡이 불빛으로 게를 끌어 모은 그 옛날을 흉내내듯 화려한 불빛을 쏟아내며 손님들의 눈을 홀려 놓고 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우리가 붙인 땅이름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빛날욱(旭)'자가 들어간 '욱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뜻대로 '빛나는 내'가 되질 않았는가. 밤마다 내 위에서 빛의 향연이 벌어지니 말이다.
땅은 가끔 이처럼 옛날을 되살리고 그 이름처럼 돼 가는 묘한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땅이름에도 팔자'가 있다라는 말을 더러 하게 된다. ///(글. 배우리)
만초천 상류. 서대문구 독립문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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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천이 아니고 만초천인데...
17.5.30 한강강에서 본 안내판에는 버젓이 '욱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