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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작성자배우리|작성시간23.01.15|조회수479 목록 댓글 0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한강철교
새남터 한강철교 신용산 260406

한강철교의 수난사

한국전쟁 때 폭파-종전 후 복구. 현대사의 상징

 

한강철교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 사이에 있는 철다리이다.

일제의 침탈 도구로 불행한 출발을 한 다리로, 1900년 7월 한강에 건설된 첫번째 다리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교량이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용산역)과 동작구 노량진동(노량진역)을 잇는 길이 1,110m의 철도 전용 교량이다. 이 다리를 한강대교로 알고 있는 이도 있는데 한강대교는 여기서 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서울 사람들이 쪽배로 한강을 건너다녔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등장한 이 다리는 서울 시민의 생활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교통인 기차로 인천에서 서울 도심안(현재 서울역 인근)으로 바로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다리 건설 이야기에 앞서 경인선 부설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9일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이 철도 개통 이전,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은 우마차 등으로 12시간이 걸리던 육로교통과 인천~용산간의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서울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대개 인천항에 내려 하루를 묵고 이튿날 우마차로 서울로 향하였다. 1899년 9월, 인천과 노량진사이를 운행하는 경인철도의 임시영업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서울 중심까지 철도를 이으려면 한강에 다리를 놓는 게 필수였다.

일제는 상당한 경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이 다리를 완성하였다.

 

지금 한강철교는 하나가 아닌 4개의 철교로 이뤄졌다. 강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B교, A교, D교, C교란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리들의 쓰임새와 탄생 연도도 제각각이다. 현재 단선 철도가 놓여 있는 A·B교는 용산역으로 향하는 수도권 급행 전철이 사용하고 있다. 복선인 D교는 지하철 1호선과 연결된 수도권 일반 전철이, 복선인 C교는 KTX를 비롯한 장거리 철도가 다닌다. 이 개별철교를 이용, 열차가 하루에 평균 1300여회 한강을 건너고 있다.

이 중 제일 먼저 건설된 게 길이 1110.25m의 A교. 전쟁에 혈안이 됐던 일제가 1897년 3월에 착공해 1900년 7월에 완성했다. 원활한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한강다리 건설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B교는 경인선, 경부선과 경의선 등의 잇따른 개통으로 운송량의 증가에 따라 1912년 9월 준공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1950년에 수난이 닥친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남침 저지’란 명분으로 수많은 피란민의 비명과 함께 C교를 폭격하여 끊어버렸다. 당시에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나머지 A·B교는 이후 유엔군의 공습에 파괴됐다.

한강철교는 전쟁 기간 복구와 파괴가 거듭됐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지 19년 만인 1969년 6월 경인선의 복선개통과 함께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우리 민족사의 격동기를 상징하는 많은 기념물이 있지만 한강철교는 1900년에 탄생해 지금까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기사 일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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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우마차 다리 한강대교

한강인도교-제일한강교-한강대교로 이름 바뀌어

 

한강인도교 2022년 11월

 

서울 한강에 있는 다리들의 이름들을 보면 거의 모두 한강의 남쪽이나 북쪽에 있는 땅이름들을 따서 붙인 것들이다. 예를 들면, 동작대교나 잠실대교는 강의 남쪽 지명을, 원효대교나 마포대교는 강 북쪽의 지명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새 다리가 놓이면 강 남쪽과 북쪽 지역의 주민들이 다리 이름에 대해 신경을 쓴다. 때로는 이름 쟁탈전(?)이 일어난다. 미사대교가 놓였을 때 강 남쪽에선 ‘미사’를, 강 북쪽(남양주시)에서는 ‘덕소’를 요구하며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는데 결과는 ‘미사대교’였다.

용산에는 ‘용산대교’가 있을 법한데, 그런 이름의 다리가 없다. 그 이름 대신 ‘한강대교’가 있다. 이 다리는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인도교인데 당시 이름은 ‘용산한강인도교’였다. ‘한강인도교’라고도 불리던 이 다리는 1981년에 ‘제1한강교’로 이름이 바뀐다. 한강에 다리가 여럿 생길 것을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1965년에 제2한강교(뒤에 양화대교)가 나오고, 1968년대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제3한강교(뒤에 한남대교)가 나왔다.

제1한강교는 1981년에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면 ‘용산대교’로 이름을 정했어야 했다. 이 다리는 1917년에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도록 인도교로 건설된 교량이다. 서울 도심과 여의도 동부의 노량진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서울에서 남쪽 방면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조선시대에 노량진(鷺梁津) 즉 노들나루가 있었던 자리이다.

다리 아래로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섬으로 바뀐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단의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연결하기 위해 ‘한강철제 인도교’를 건설했다. 남북 연결을 위해 다리 모래언덕에 흙을 돋우어 석축을 쌓아 원형 인공섬인 중지도(中之島)를 만들었다. 지금의 노들섬이다. 이 인공섬은 남쪽 한강교와 북쪽 한강소교를 연결하는 중간 구조물로 사용하려고 만들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북쪽 둑이 무너져 1929년 북측 한강소교는 철거되었고 대신 그곳에 현재의 다리(게르버교)가 신설되었다. 이후 1930년대 중반부터 1937년 10월 사이 남쪽에도 현재의 교량(타이드 아치교)이 신설되었다. 지금도 노들텃밭 입구 왼편에 당시 쌓은 석축과 돌난간이 남아 있다.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인도교 건설로 왕래가 더 활발해졌고 1930년대엔 노들섬까지 전찻길이 놓이고 한강인도교역도 생겨나게 된다. 주변엔 100만여 평의 한강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중지도까지 잡풀과 갈대숲이 우거진 가운데 사람들은 모래언덕과 물웅덩이 사이를 걸어 노들섬으로 강 구경을 하러 가곤 했다.

모랫벌이 이촌동 지역과 이어져 있었던 이곳은 1921년 지도에 신초리(新草里)라고도 붙여져 있다. 이로 보아 여기에 마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신초리는 토박이 땅이름으로 ‘새푸리(새풀이)’이다. ///

-노들섬(한강대교)

한강철교 2000년 청지일보 27
한국정쟁 때 끊어진 한강철교

 

한강대교 2301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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