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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인사동- 일제 때의 이름. 우리식 이름은 절골 댓절골 향우물골 탑골

작성자배우리|작성시간17.07.15|조회수969 목록 댓글 0

인사동- 일제 때의 이름

우리식 이름은 절골 댓절골 탑골



130302 KBS1 방송 생방송 토요일 땅이름 순례 44 인사동 ·탑골공원

 

배우리의 땅이름 순례 - 인사동

 

인사동(탑골공원 일대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1. 오늘 어디로 떠나 볼까요?

 

광복절이 가까이 다가온다.

광복절 하면 서울에선 우선 탑골공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

그래서 오늘은 탑골공원 인근의 인사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2. 그렇다면 탑골공원의 위치는 인사동이 맞겠죠?

 

탑공공원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서울 종로구 종로2가이다.

공원 근처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탑골과 그 근처의 절골’, 그리고 이문골등이다. 지금의 인사동 일대이다.

절골원각사(圓覺寺)’라고 하는 큰 절이 있어서 큰절골’, ‘댓절골이라고도 했다.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다.

이문안, 댓절골 외에 상우물골, 원골, 수전골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한자로 표기할 때는 이들을 각각 대사동(大寺洞), 향정동(香井洞), 원동(園洞), 수전동(水典洞)이라 했다.

댓절골은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옛날에 댓절이라고 부렀던 큰 절인 원각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고, 상우물골은 향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는 동네여서 향우물골이라 했던 것이 변한 이름이다. 과부 다섯이 살았다는 오과붓골도 있었고, 그 남쪽으로 인사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인 승동(承洞)이 있었다.




 

 

3. 그렇다면, 그 중에도 우리가 잘 아는 인사동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동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 관인방(寬仁坊)에 속했던 이곳을 한자로는 사동(寺洞)’ 또는 대사동(大寺洞)’이라 했다. 지금의 인사동(仁寺洞)’이란 땅이름은 일제 때 관인방의 사동이란 뜻으로 ()’자와 ()’자를 넣어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도 인사동에서 사동이라 이름붙은 식당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인사동은 일본식 이름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일제 잔재의 이름인 것만은 사실이다.

인사동은 그 옆의 교동(校洞)과 합하여 교사동(校寺洞)’이라 하기도 했다. ‘교동(‘校洞)’()’사동(寺洞)’ ‘()’를 합해 부른 것이다.

양반들이 많이 살아 때만 되면 이곳 골목이 선물 짐으로 줄을 잇기도 했다.


 

 

4. 인사동은 일본식 이름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조선시대엔 어떤 역사를 가졌던 곳이죠?

 

조선의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이어지는데,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과 그 아들 김좌근(金左根) 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었다. 윤효정의 <한말비사(韓末秘史)>에 보면 김좌근의 주문(朱門) 앞 광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도 교사동이 등장한다. , 뇌물이 교사동(校寺洞) 솟을대문 안 누상별고(樓上別庫)로 들어와 쌓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골근처 이문골’, ‘이문안이라 하는 마을은 지금의 YMCA 건물 뒤쪽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마을 문인 이문(里門)’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능천부원군 구수영(具壽永)이 살았던 곳이다.. 태화정(太華亭), 부용당(芙蓉堂)이 있었던 이 집에는 당 앞으로 못이 있었는데, 인조가 어렸을 때 공부하던 곳으로, 그 잠저(潛邸)가 된다 하여  ‘잠저못이라 하였다. 영조의 친필 잠용지(潛龍池)’의 현판이 있었다. 이 집에 처음 살았던 구수영은 중종반정 공신이요 능성구씨(綾城具氏) 외척 인맥을 형성했던 사람으로 증손자인 구사맹(具思孟)은 인조의 외조부이고,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는 구사맹의 딸이자 구수영의 고손녀이다. 따라서, 인조가 이 집에 살았다는 것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다는 것이 된다.

그 후, 이 집은 안동김씨에게 넘어가 곧은 말 잘 하는 대신 김흥근(金興根)이 살았고, 이로 인해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궁인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융희2(1908)에 그 궁이 미동(渼洞. 지금의 서대문구 미근동)으로 옮겨간 후로는 이완용(李完用)의 집이 되었다가 변하여 요릿집인 태화관(太和館)이 되었다.

19193월에는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대한 독립 선언을 함으로써 역사적인 삼일운동의 첫 불을 당기기도 햇다. 그 후 또 변하여 명월관(明月館) 지점이 되었다가 감리교의 여자 교육 기관인 태화회관(太和會館)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 태화빌딩이 들어서고 일부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인사동에는 효종 때 훈련대장인 이완(李浣. 1620~1674)이 살았다.

이완이 자기 집 뒤의 울 안에다 몸소 배나무를 심었는데, 열매가 무척 많이 열렸단다. 이완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 뒤에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가 이 집을 빼앗아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배나무에서 배가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영조 때 이완의 서손(庶孫)이 나라에 원정하여 다시 이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는 이 배나무에서 배가 다시 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보고 장안 사람들은 배나무도 사람을 알아보고 열매를 맺는다고 화제가 됐었다고 한다.

 

 

5. 인사동에 이문안이란 이름의 마을도 있었다고 하셨죠? 이문의 안? 무슨 뜻인가요?

 

이문안이란 땅이름은 지금의 인사동과 공평동과의 경계 지점인 222번지쯤에 이문(里門)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다. 한자로 이문동(里門洞), 이문내(里門內)라 했다.

이문은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지키기 위해서 마을 입구에 세운 문으로, 조선시대엔 웬만한 마을에는 거의 이 이문이 있었다.

이문은 세조 11년에 처음으로 생겼는데,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특히 장정들)이 번갈아 몇 명이 보초를 서며 도둑을 지켜 왔다. 인사동의 이문은 193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는데,   사진을 보면 이곳의 이문은 다락이 달린 이층 기와 문루로, 판자문을 통해 그 골목에 사는 동민들이 출입하게 되어 있었다. 다락에는 도둑 지키는 이들이 올라 앉아서 그 밑으로 드나드는 출입자를 살펴 왔다.

옛날에는 서울에 10 집 정도 이상의 마을이면 대개 이문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많은 이문들이 불에 탄 후 복구하지 않은 채 내려왔다.

이문동이니 이문안이니 하는 이름은 서울 장안에 여러 곳 있었다. 지금의 청진동, 계동, 다동, 회현동, 명륜동에도 있었고, 태평로의 삼성 본관, 소공동의 조선호텔 입구, 서울역 앞 대우빌딩이 있는 자리에도 이문동이 있어서 이러한 곳을 이문또는 이문동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동대문구의 이문동만 서울 동이름 중 유일하게 이문이란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다. 도봉구의 쌍문동(雙門洞)도 쌍갈래길에 이문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중구의 쌍림동도 전에 쌍이문(雙里門)이 있어서 원래 쌍이문골또는 쌍문동이라 했던 곳이다.  

 

 

6. 지금 인사동 일대는 우리의 전통 문물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가득히 자리잡고 있는데요, 어떻게 해서 이런 특성을 가진 전통 상가로 변한 것일까요? .

 

인사동과 관훈동 일대는 지금 우리의 전통 문물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가득히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부근 안국동에 미국 대사관 직원의 사택이 있어서 그 곳의 미국인들을 고객으로 골동품을 비롯한 각종 전통 문물을 거래하는 가게들이 생기고 그 맥이 이어져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라 한다. 특히, 낙원동, 인사동 관훈동뿐만 아니라 멀지 않은 가회동, 운니동 일대에는 예부터 한학을 즐기는 선비들이 많이 살아 그 맥을 이은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어 그러한 가게들이 밀집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취급하는 물건들은 골동품 외에 고서화(古書畵), 고문헌, 도자기, 목각품, 표구, 문방사우(文房四友) 등 주로 옛 내음을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거기다가 전통 음식점도 많이 생겨서 명실공히 전통 문화의 거리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부터 필방(筆房)이 많았던 사동 일대는 한때 먹자골목으로 변해 가는 듯싶었다. 그러더니, 지금의 가구 시장이라 할 장전거리가 되기도 했고, 한국전쟁 이후로는 고서화의 거리로 모습을 바꿔 가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조선일보의 김한수 기자는 해방 후 변천사라는 글에서 1950년대 말에서 1960대 초에 이르는 기간의 모습을 이렇게 기사로 썼다.

당시의 인사동은 환도 후의 피폐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길 양편으로는 고서점(古書店)과 문방구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문화 공간이었다. 이 때문에 이 거리에는 주로 한국 화단(畵壇)의 대가들인 이당 김은호, 풍곡 성재휴, 소정 변관식 등이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는 모습이나 장욱진의 거나하게 취한 모습도 마주칠 수 있었다.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어 친근하다는 의미로 당시 서울의 외국인들은 메리스 에어리어(Mary's Are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당시로선 그림을 걸 만한 번듯한 전시장은 물론 서양화를 다루는 화랑이라곤 전무했다. 그나마 가끔씩 미술전이 열린 것은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화신백화점 등 서울시내 백화점의 꼭대기층에 있는 전시장이 전부였다.”


 

 

7. 끝으로 인사동이 우리식 지명이 아니고 일제 잔재의 이름이라는 것,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죠?

 

다시 말하지만, 인사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우리식 그대로의 이름이 아니다. 인사동이나 인사정이란 이름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붙여지는데, 관인방(寬仁坊)과 사동(寺洞)이란 우리 땅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 (. 배우리)

절터였던 탑골공원

인사동 바로 옆에 있는 탑골 공원도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때 세운 흥복사(흥복사)의 터였다.

태조가 도읍을 옮긴 후에 조계종의 본사로 삼았다가, 세종 때 폐지하여 공창(공창)으로 쓰고, 세조 9(1464)에 효령대군이 양주 회암사(檜岩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강()하는데, 여래가 현신(現身)하여, 사리를 주는 영험이 있으므로, 그 이듬해에 흥복사의 터를 더 확장하여 큰 절을 지어, 이름을 원각사(圓覺社)라 하고, 같은 임금 13(1467)10층탑을 교묘하게 만들어, 그 속에 원각경과 사리를 넣어 두고, 성종 2(1471)에 원각사비를 세웠다.

연산군 10(1504)에 중들을 내쫓고 기녀(기녀)들을 들여서 연방원(聯芳院)을 차렸는데, 중종 때 폐지해서 10층탑과 원각사비만을 남겼다.

고종 광무 때 미국인 고문 브라운이 이 땅을 공원으로 만들고 파고다공원이라 했는데, 장안 사람들은 대개 탑골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하였다.

191931일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대한 독립을 선언하여 독립 운동의 발상지가 된 이곳에 정부에서는 1963815일 광복절을 기해 삼일 독립 선언 기념탑을 세웠다.

종로2가와 낙원동에 걸쳐 있었던 큰 마을을 옛날에는 탑골이라 했고 한자로는 탑동(塔洞)이라고 썼다. ‘탑골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곳에 원각사의 10층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장전거리


탑골공원 뒤쪽 인사동 골목에는 한 60여 년쯤 전만 해도 장전이라는, 일종의 가구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인사동은 궁궐이 가까워서 예부터 문방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 동네에는 옷장과 이불장 따위의 장을 파는 가게들이 길 양쪽으로 쭉 있어, 이 골목을 장전골목이라고도 했다. 장은 머릿장, 이층장, 삼층장, 의걸이(옷걸이)가 있고, 큼직한 이불장도 있었다. 지금도 농촌 등에서 더러 볼 수 있는 반닫이도 있었다.

이곳 장전에서는 주로 안방에서 쓰는 것만 팔았다.

지금도 인사동 옛 장전 자리엔 가구점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가구 거리가 강남의 논현동 일대나 용산의 남영동 등지에 형성되면서 이젠 가구를 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는 별로 없게 됐고, 옛날과 같은 장을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예스런 실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위해 골동품의 장농을 갖춰 놓고 파는 가게나 남아 있을 뿐이다

옛날 옷장의 재료는 화류라는 단단하고 윤이 나는 검붉은 나무였다.

그러나, 옛날에 화류로 만든 좋은 장들은 지금은 크게 값나가는 골동품이 됐다.

이제, 가구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 의식도 많이 달라졌고, 그 모양이며 많이 달라졌다. 가구점들이 많이 몰려 있는 장소도 옛날의 인사동에서 지금은 강남의 논현동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유명 가구점들이 몰려 있는 논현동 가구 거리에선 해마다 가구 거리 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모두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젠 그 번영을 멀리 강남으로 옮겨 줘 버린 그 옛날의 가구 거리.

옛날의 장전골목은 이젠 한낱 골동품 가게 동네로 전락한 채 사람들의 발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예술인의 거리 인사동


그러나, 인사동이라고 하면 먼저 미술의 거리라고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홍익대 미대가 서울로 돌아와 지금의 신촌 교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화신백화점 옆의 장안빌딩에 있게 되는데, 이것이 인사동을 미술의 거리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봉상 화실이 인사동에 들어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 화실 외에도 이곳에는 무용연구소 등이 있어 다양한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종합예술공간이었다.

인사동 거리는 70년대에 들어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과 동덕미술관이 들어서 현대적 의미의 전시 공간이 마련되고, 현대화랑, 동산방화랑, 선화랑 등 상업 화랑들이 생겨나면서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등이 그림이 걸렸다. 이렇게 하나둘씩 생겨난 화랑들이 지금은 안국동 입구에서 종로쪽까지 일방통행로를 따라 줄잡아 40여 곳에 이르고 있는데, 아쉬운 것은 90년대 말부터 이 지역에 서서히 대형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하나하나 이런 문화 공간들을 잠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옛것에 젖어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전래의 주류나 차를 파는 전통 찻집도 많이 들어섰으나, 이나마도 이곳이 사무실 등이 들어서면 다른 유흥업소 같은 것으로 변해 갈 전망이다.

요즈음 이 거리에 나가면 옛맛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화랑이나 골동품점이 문을 닫고 대신 이름도 야릇한 카페가 눈에 띈다. 옛스럽던 한옥과 골목은 망가지고 오래돈 점포가 문을 닫는다. 정이 없는 거리, 옛날이 없는 거리로 바뀌고 있다. 정들었던 사람이 떠나가듯 마음이 허허해진다.”   

인사동을 옛날에 자주 드나들었던 화가 이만익 씨의 말이다.(97.5.13 조선일보)

인사동 골목은 시대에 따라 계속 옷을 갈아입어 왔고, 지금도 그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옛날의 절골인 사동(寺洞)’은 이제 법정동(法定洞)에서조차 지워지더니 정말로 옛빛을 하나하나 잃어 가고 있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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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동으로 주위에는 종로2가, 관훈동(寬勳洞), 낙원동(樂園洞), 적선동(積善洞), 공평동(公平洞) 등이 있다.

  조선 초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에 속하였다.

  1894(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는 현 인사동 지역에 원동(園洞), 승동(承洞), 대사동(大寺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있었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이문골), 향정동(향우물골), 수전동(수전골), 승동, 원동(원골)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다. 

  '인사(仁寺)'란 땅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관인방(觀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이름에서 각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댓절골은 큰 사찰인 원각사(圓覺寺), 향우물골은 우물 옆에 향나무가, 이문동은 순화궁의 이문(里門)이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인사동 149번지는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具壽永)이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 김흥근(金興根)의 소유였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이씨의 순화궁(順化宮)이 되었다.

  1936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인사정(仁寺町)이 되었고, 1943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이 동()으로 바뀔 때 인사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인사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관할하에 있다   

  3·1운동 당시 33인이 모인 태화관(泰和館)이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으로 헐리고 12층의 태화빌딩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축제로는 관훈동과 함께 1988년부터 해마다 '관훈·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승동교회가 있다.

  



사동(寺洞)이란 옛 이름을 딴 인사동의 한 식당.

이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근처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어서 도선시대부터 사용해 온 이름이다.

마을이 둘로 나뉘어 있어 그 중 큰 마을이 댓절골인데, 이것이 한자로 옮겨아 '대사동(大寺洞)'이 되었다.


이 지도는 인사동 남쪽 지역을 나타낸 지도이다.

1백여 년 전 한글로 적어 만든 지도로, 이런 지도는 거의 볼 수가 없다.























인사동은 일본식 땅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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