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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사는 경향신문 1995년 10월 2일자 23면(사회면)에 게재되었던 기획 시리즈 기사입니다.
시리즈 연재 제목: [한국인의 초상] 시리즈 중 제8화 (동작동 국립묘지 편)
기사 내용 중 "특히 지난 93년 이후 중국에 방치됐던 임정요인들이 대거 안장됨으로써", "지난 83년 버마 아웅산에서 산화한..." 이라는 문구와 당시 인물들의 직함 및 나이(예: 박유종 당시 건교부 공무원교육원장)를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 기사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경향신문의 대표적인 장기 기획 연재였던 '한국인의 초상' 코너의 실제 지면입니다
한국인의 초상 (8) [동작동 국립묘지]
학도병서 臨政(임정)요인까지 16萬位(만위) 안장
「조국의 의미」일깨우는 산 교육장
「살아있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 찾으며, 들리는 것 같은데 소리 없으니 날마다 불러볼까」
육군 대위 박금산의 아빠와 엄마 형들과 누나가.
「너의 맑은 눈동자 깊이 석류꽃 피는 고함이 트이고 / 너의 밝은 이맛전 위에 푸르디 푸른 하늘을 얹고 / 전설의 발에 심는 꿈 이야기 알리다오… 삶과 죽음의 되풀이 틈에서 너의 죽음이 펼쳐놓은 정토에 / 외경없는 동아리 도시리거든 이름없는 이름, 이름이여…」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비문.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을 중심으로 병풍을 둘러치듯 한강을 감싸안으며 자리잡고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43만여평의 광활한 이곳에는 한국 근대사의 주인공들과 자기의 몸과 마음을 초개같이 버려 조국을 지킨 영령 16만여위가 잠들어 있다.
구한말 의병, 독립애국지사, 참판, 예비군, 종군기자 그리고 전 대통령들….
역사가 농축된 성역이자 후대들에게는 산 교육장이 된 이터에는 특히 지난 93년이후 중국에 방치됐던 임정요인들이 대거 안장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의 뿌리찾기 현장으로 귀중함을 더해주고 있다.
국립묘지관리소의 교육담당인 朴鍾宇(박종우)사무관(57)은 「이곳에는 주로 4월부터 10월까지 청소년들이 단체로 찾아오고 있으며 연평균 참배객은 4백만명에 이르고 있다」면서 「6·25와 월남전등이 끝난지 많은 시일이 지난만큼 그 상처가 상당히 아물어 가는 시점에서 이제 우리가 평화통일을 위한 정신적인 힘을 이곳에서 키워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6·25가 끝난 다음해인 54년 3월 정지공사에 들어가 55년 국군묘지로 창설 금정사 범어사등에 흩어져 있던 6·25 전사자와 독립투사등이 안장됐고 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경찰관도 이곳에 묻히게 된 것.
묘역은 크게 일반묘역과 특수묘역 위패봉안관등으로 나뉘어있다.
일반묘역의 하나인 장병묘역에는 백마고지 3총사인 姜承友(강승우) 소위를 비롯해 인천상륙작전후 수도 서울을 되찾아 중앙청에 태극기를 맨처음 게양한 朴正煥(박정환) 해병상사, 姜才求(강재구) 소령등이 잠들어 있다.
또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과 6·25가 터지자 현해탄을 건너와 참전했다 숨진 재일학도의용군 1백35명의 묘비와 위령비가 세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총무부장 吳奇煥(오기환, 65)는 「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살던 청년학도들이 도쿄 오사카 규슈 홋카이도등에서 조국방위를 위한 의용군을 조직했었다」면서 「함께 참전했던 친구도 강원도 9사단에 배속됐다 전사하는등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여줬던 조국보다 더 뜨거운 정열을 보여줬는데 요즘 이러한 정신이 퇴색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특수묘역내에 있는 애국지사묘역에는 구한말 의병사령관 申乭石(신돌석) 의병장 申采浩(신채호)장군들을 비롯해 金九(김구) 趙素昻(조소앙) 張德秀(장덕수) 申翼熙(신익희) 趙炳玉(조병옥)박사등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 徐載弼(서재필)박사등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선열들이 모셔져 있다.
임정요인묘역에는 朴殷植(박은식, 임시정부대통령) 申圭植(신규식, 국무총리) 盧伯麟(노백린, 군무총장) 金九(김구) 金奎植(김규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리급(현장관급) 이상의 순국선열 11분이 안장돼 있다. 앞으로 국내에 산재해 있는 金九, 安重根(안중근)烈士(열사) 申翼熙(신익희)선생과 申乭石(신돌석) 장군등 임정요인 25위의 묘를 이곳에 옮기고 현재 중국에 있는 우 임정묘역은 민족정기를 계승하는 곳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朴殷植(박은식) 임정대통령의 손자 朴維鍾(박유종)씨(56·건설교통부공무원교육원장)는 「아버지의 유언이 할아버지를 중국에서 모셔오는 일이었는데 그 꿈을 실현해 매주마다 두 세번씩 묘역에 들른다」면서 「청소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들이 써놓은 감상문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정기를 확인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국가유공자 묘역에는 지난 83년 버마 아웅산에서 산화한 李範錫(이범석) 전총리의 무장관 徐錫俊(서석준) 전부총리 李金鉉(이금현) 전동아일보기자등 외교사절 17위를 비롯해 張泰玩(장태완) 전국방총리 許政(허정) 李殷相(이은상) 李宜根(이의근) 周時經(주시경)박사와 李範錫(이범석) 장군 安益泰(안익태)선생 崔圭植(최규식) 전종로경찰서장등이 잠들어 있다.
「한평생 겨레의 스승 이땅에 태어나시어/ 한평생 오직 한길 우리말 키우시니 그공덕 어디다 비기리까/ 하늘같이 빛나옵니다…」(周時經선생 헌시문).
각 묘비에는 고인들의 생전 업적과 덕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있어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을 더욱 숙연케하고 있다.
李範錫(이범석) 전장관의 외아들 昊永(호영)씨(36·국제변호사)는 『일요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의 유택을 찾는데 그때마다 묘비에 쓰여있는 「통일되는날 임이여 일어나시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면서 『이분들이 뿌려 놓았던 씨앗을 우리들이 수확해야 한다』고 후손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을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李承晚(이승만) 전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위쪽에는 朴正熙(박정희) 전대통령과 陸英修(육영수) 부부가 나란히 안장돼 있고 왼쪽에는 蔡秉德(채병덕) 장군등 2백64위를 모신 장군제1묘역이 있다.
한국인이면 죽은 다음에 누구나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혈육이 끊기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무연고 묘지가 늘어나고 사회단체등에서도 점차 돌보기리를 꺼리는데다 갈수록 안장규정도 허술해져 「성역」이 점차 빛을 잃어가는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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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배우리집' 정자가 하나 보인다
그 정자 이름을 지은 배경
| 이름사랑 - Daum 카페 국립 현충원 연못가에 아담하고 예쁜 우리 집이 하나 있습니다. 배우리집(정자). 1998년에 현충원 안의 정자를 여남은 개 지었는데, 그 모두의 이름을 우리말 이름으로 제가 작명했습니다. 현충원에서 그 보답으로 그 정자들 중 하나에 감사하게도 제 이름(배우리)을 넣어 주었습니다. 작명비를 두둑히 받고도 이렇게 해 주니 기쁠 수밖에요. 이 정자에서는 시화전, 시 낭송회, 어린이 글짓기 대회, 백일장 등 행사들이 종종 열리고 있습니다. ▲ 정자지붕 밑에 '배우리집' 현판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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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에서> (배우리)
한 평도 안 되는 네모진 땅에 시신을 묻고 묘비 하나에 이름만 드러낸 채 그 젊은 가슴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는 땅.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하는 참배객틀이 줄을 잇습니다.
현충문을 들어서면 우선 병풍처럼 둘러친 주위의 산자락이 찾는 이를 에워쌉니다. 그 산자락 언덕에 빽빽이 들어찬 무덤들.
여기 어디를 가나 누워 있는 그들은 한 자리를 지킨 채 말이 없습니다. 내가 어느 때 어느 전투에서 어떻게 적과 싸우다가 어떻게 전사했노라고... 모두가 금방이라도 입을 열고 말을 할 만도 한데 그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습니다. 말뚝처럼 선 돌비석에 이름과 계급과 장소와 날짜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벙어리인 채 글을 보여 줍니다.
-육군 일병 이동우의 묘 1952년 9월 8일 구마지구에서 전사
-육군이병 김중복의 묘.1950년 11월 25일 춘천지구에서 전사
전사, 전사. 전사, ....
왜 그들이 이렇게 숱하게 죽어 가야 했습니까? 도대체 이들의 젊음을 누가 왜 앗아 갔습니까?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국, 두 조각난 땅에서 태어나 민족 형제간 원하지 않은 싸움판에 들어가 한 방울 이슬로 사라져 간 그들.
불과 3년간의 싸움, 그 치열한 전장에서 폭탄을 맞고 총알을 맞고 쓰러져 시신으로 남은 불쌍한 인간들.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 황량한 터에 반 평 정도 자리에 누워 있는 그들. 동족의 집안싸움에서 애매하게 죽어 가며 다시 태어나도 이런 땅에 태어나진 않을 거라고 죽어 갔겠지요.
바람이 갑자기 이는가 했더니 별안간 저쪽 소나무 숲에서 쏴아 소리가 들립니다. 깊은 밤 어느 싸움터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아우성 소리 같습니다. 잠시 몸이 오싹해집니다.
묘비 뒷면에 적힌 순직 장소들을 보았습니다. 죽어 간 장소들이 제각각이군요.
-파주에서 전사
-포천에서 전사
-양구 금화에서 전사
-철원 화천 양구에서 전사
-춘천에서 전사
-제 2육군 병원에서 전사
-동해 앞바다에서 전사
육지와 바다가 온통 전쟁터였습니디. 묘비 뒷면 글자들이 말해 주는 사연들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아, 그런데, 묘역에는 '무'씨 성을 가진 이들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이 묘비에서도 저 묘비에서도 모두 자신의 이름을 '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름은? '명용사'랍니다. '무씨' 성 뒤에 '명용사'입니다. 이름이 '무명용사'인 이들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나이를 보니 모두 제 형님뻘이군요.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들은 죽어서는 딴 이름을 남겼군요.
무명 용사들이여. 그 영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까짓 이름자가 뭐 그리 대숩니까? 이제는 '무명용사"라는 이름이 더 멋져 보입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갓 입학하던 해에 6.25를 맞았던 나로서는 여기 잠든 대부분의 영령들이 서너댓살 위의 형님들입니다. 나이가 어려 직접 총을 들고 전선에 나서진 못했지만 여러 곳에서 전쟁의 참담함을 보았습니다.
원효로 전차 종점 아래 한강 백사장에서의 처참한 모습은 지금까지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남은 구 정도의 국군 시신이 강가 모래밭에 여기저기 엉켜 있음을 보았습니다. 인민군이 쳐들어와 서울까지 점령한 적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적군에 밀려 구용산(원효로)까지 밀려 왔습니다. 한강쪽으로 터벅터벅 동료들과 함께 걸어가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결국 한강 다리 밑까지 다다라 울음을 터뜨렸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후퇴를 멈추고 이미 폭파된 한강다리(한강대교)를 보며 얼마나 한숨을 뱉었을까? 한숨 외에 그들에게 오직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적군에게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고 했나 봅니다. 동료의 가슴을 향해 서로 방아쇠를 당겨 죽어 갔다는 어느 목격자의 소식에서는 눈물이 더 났습니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누구나 한 번 죽는 죽음이지만 그 죽음들 중에도 더러는 멋진 죽음이 있다고.
교단에서 강의하다가 분필자루를 손에 쥔 채 과로로 쓰러진 교사도 있다고 했습니다. 대중 앞에서의 정치 연설 중에 흥분을 못 이겨 쓰러진 정치인도 있다고 했습니다.
조국울 지키기 위한 싸움터에서 총을 든 채 쓰러진 죽음도 참으로 거룩한 죽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쓰러진 그들이 여기 와 있습니다. 함께 죽은 전우들과 같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의 숨결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여기는 국립묘지입니다. (배우리)
이름사랑
02) 70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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