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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서대문의 옛날

작성자배우리|작성시간26.06.08|조회수7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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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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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703-5300   한국땅이름학회

서대문의 옛날

 

서대문의 행정동과 법정동

~서대문구
서대문 조감도

서대문구의 역사

 

서대문구 일대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며 취락을 형성해 온 지역으로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영토쟁탈전이 벌어졌던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땅이었으나 A.D 475년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A.D 553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양군으로, 고려시대에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로 개칭되었으며 1396년 조선초 서울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 즉 서대문이 건립됨으로써 지금의 지명을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태조는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하고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분류하였으며 서대문구는 서부에 속하여 반송방, 반석방, 상평방, 연희방, 영은방의 일부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류시 진입로 역할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시 한성부와 경기도 고양군에 각각 분리, 편입되었다가 1943년 區制가 실시되면서 서대문구역소가 경성부내에 설치되었으며, 1945년 10월 6일 서대문구역소를 서대문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전부를 서대문구로 편입하여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2년 12월 28일 대신동을 신설하고, 1964년 6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지역이 마포구로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지역을 서대문구로 편입하였다. 1973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의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가 서대문구에 포함되어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마포구의 동교동,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에 편입되고, 서대문구의 성산동,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 2가, 중림동과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합동, 충정로3가, 만리동 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 1, 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 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였다.

 

1979년 10월 1일 은평구청 신설로 그동안 은평출장소 관내에 속했던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외동, 구파발동, 수색동의 13개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고 은평출장소는 폐지되었다.

 

1980년에는 홍은4동을 폐지하였고, 1983년에 홍제1동 일부를 홍제2동으로 편입하였으며, 1989년에는 대현동 일부를 북아현3동으로, 북아현3동 일부를 충정로3가로 편입하였고, 1998년 10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현저동이 천연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자주독립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린 상징적인 장소이다. 젊음과 문화의 거리 신촌은 대학교들이 밀집되어 있어 각종 문화 행사들이 열리고 카페, 식당들이 밀집되어 있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에서 용구와 딸 예슬이가 살던 동네, 홍제동 개미마을은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사진 찍기 좋다.

 

서대문 형무소 터 911020
서대문형무소 내부
현저동 금화터널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1982년

홍제동

홍제동의 역사

1914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

1936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홍제정으로 변경

1946 홍제동으로 변경
1950 안산동사무소 관할
1970 홍제1,2,3동으로 분할
1975. 10. 1 홍제제2동에서 분동되어 홍제제4동이 설치됨

2008.5.6. 홍제1동과 홍제2동이 통합하여 홍제1동으로 명칭변경 , 홍제4동이 홍제2동으로 명칭변경

 

홍제동의 유래

홍제동은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현재의 국립여관격인 홍제원이 이 지역에 위치하여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원래는 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홍제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홍제천(모래내)

모래내 홍제천 일제 잔다리
홍제천
홍제천(모래내)
홍제천 모래내 1962년
홍제천 210823 모래내
홍제원 5층탑 580000

가재울

가재울 https://cafe.daum.net/name0900/baO6/444

마리북스 https://cafe.daum.net/name0900/baO6/612

"이 너머 개울에 가재가 많았대지, 아마."
가재울 마을 이름의 내력을 물으면 대개 비슷한 대답이다. 그러나, 대개 '가재울'과 가재는 별 관계가 없다.
'가잿골', '가재말' 등 '가재'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은데 서울의 북가좌동에도 있다. 서대문구의 '가재울(가좌리-가좌동)'에 대한 어느 설명.
-'가재울 加佐里'(마을) : 경티말 너머의 마을. 가재가 많고 산에 둘러싸여 '가재울(가좌리.加佐里)‘이라고 한다.
북한산쪽에서 홍제동을 거쳐 흘러오는 '모래내(홍제천)'가 한강으로 흘러드는, 북가좌동의 한 마을이 ‘가재울’이다.
‘가재울’은 주로 ‘가장자리’의 뜻인 '갓(갖)'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이름은 수도권만 해도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의 가재리(佳才里), 용인시 원삼면의 가재월리(加在月里), 인천시 서구의 가좌동(佳佐洞) 등 여러 곳에 있다.
그렇다면 서울 서대문구의 ‘가좌동’의 본래 이름 ‘가재울’은 어떻게 해서 나왔을까? 북가좌동 일대는 옛날 고양군 연희면 지역으로, 그 남쪽에는 ‘잔들(잔다리)’이라는 벌이 펼쳐져 있다. 언덕쪽에 있는 이 마을이 벌 가장자리에 있어 ‘가재울(갖의울)’이란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벌 남쪽에 궁말(궁동.宮洞)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궁동근린공원이 있다. 남쪽의 내(홍제천.弘濟川) 건너쪽이 세교리(지금의 동교동-서교동)이고. 다시 그 남쪽이 노고산과 와우산이다.
궁말 남쪽의 내가 홍제천인데, 홍제동을 지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옛날에는 ‘모래내’라고 불러 왔다. 서울 사람들은 지금도 모래내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전통 깊은 모래내시장도 있다.
모래내는 종로구 구기동-평창동에서 시작하여 홍제동-남가좌동-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데, 세검정의 맑은 냇물이 홍제동에 이르면 모래 밑으로 스며든다는 데서 ‘모래내’라 했단다. 한자로는 사천(沙川)이며. 지역에 따라 홍제내, 성산천, 세검천, 홍은천으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모래내의 중-상류, 지금의 서대문구청 부근에는 ‘응달말(음월리.陰月里)’이 있었다. 그 남쪽이 궁말(궁뜰)이고, 여기서 동교동쪽으로 넘는 고개가 ‘기레미고개’이다. ‘기레미고개’는 질러 넘는 고개, 즉 ‘지레미고개(지름이고개)’가 변한 이름이다. 지금의 동교동-서교동 지역은 고양군 시절이었을 때에 ‘잔다리(세교.細橋)’였는데, 그 중 위쪽의 웃잔다리는 서교동, 아래쪽 아랫잔다리는 ‘동교동’이 되었다.
모래내 하류쪽으로는 벌판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로는 ‘성미(성산.城山)’라는 작은 산이 솟아 있다.

북가좌동 가재울 2023년

아현동(마포구)과 북아현동(서대문구)

아현동 1930년 아현로터리

굴레방다리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63번지 남쪽 사거리에 위치해 있던 국내 첫 고가차도인 아현고가도로를 부르던 명칭으로, 1968년 9월 19일 개통해 2014년 3월 철거된 곳이다. 굴레방다리라는 이름은 ‘큰 소가 길마는 무악에 벗어 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고,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이는 시청∼아현∼신촌을 이었던 길이 939m · 왕복 4차로의 도로로, 1968년 9월 급격한 교통량 증가에 따른 소통대책과 도심 인구의 외곽 분산을 위해 건설됐다. 그러다 시설의 노후화는 물론 보수·보강 및 유지관리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 철거가 결정됐다. 이에 2014년 2월 6일 오후 3시부터 통행이 전면 통제된 데 이어 그해 3월 철거가 완료됐다.

한편, 고가도로로 단절됐던 이대역∼서대문사거리 구간에는 2015년 6월부터 12월까지 중앙버스전용차로 2.2km가 설치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굴레방다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굴레방다리 171213

 

무악재

서울특별시의 서대문구 현저동(峴低洞)에서 홍제동(弘濟洞)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컫는다. 무악재 지명은 무악재를 끼고 있는 안산을 무악이라고 하는데 이 산 이름 무악에서 비롯되었다. 무악재는 여러 별칭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삼각산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는 형세를 하고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무악산을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산, 즉 모악(母岳)이라 했고, 그 고개를 모악현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무악이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잘룩하여 마치 말안장 같이 생겼기 때문에 길마재라고도 한다. 또한, 고개 북쪽 지금의 홍제동 언저리에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현사라는 절이 있어서 모래재라고도 한다. 영조 45년에 영조가 부왕 숙종의 명릉 역사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 쪽을 바라보면서 부왕의 생전 모습을 그리워하며 추모했다 해서 추모현이라고도 한다. 그 밖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도읍 터를 물색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서울의 남쪽 일대를 답사할 때 무학대사가 이 고개를 자주 넘나들었다 해서 무학재, 봉수대가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봉화재, 봉화재에서 음이 변한 봉우재, 예전에 이 고개길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사람을 모아서 건너갔다 하여 모아재,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홍제동고개라고 불린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10년 8월에 "강징이 무악재와 아차산 봉수를 제외한 각진의 봉수를 올려 변을 보고하기를 아뢰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화관 서쪽에 무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악재 [毋岳-, Muakjae]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김기혁, 옥한석, 성효현, 양보경, 전종한, 권선정, 김용상, 박경호, 손승호, 신종원, 이기봉, 이영희, 정부매, 조영국, 김정인, 박승규, 손용택, 심보경, 정암)

1994년 무악재
1907년 무악재 1907
무악재 일대.개발 전
무악재 하늘다리 .1917년 11월에 이 이름으로정해졌다. 배우리 땅이름학회 회장 등

서대문 지역의 여기저기 옛날

1920년의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밖 곡물창고

 

<전국 땅이름>

https://cafe.daum.net/name0900/baO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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