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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연구

김포 - 검개가 검포 금포로 이어져 온 이름

작성자배우리|작성시간17.08.31|조회수418 목록 댓글 0

배우리의 땅이름 역사 기행 - 김포

 

검개 이름이 검포 금포로 이어져

- 1910년대 지도에도 김포는 ‘금포’로 표기 -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검개 들판에 나가 봐. 벌싸 벼 이삭들이 고개 숙였어. 

-벌써 가을이구만. 올 농사 이만하면 풍년이지.

-근데, 구두물쪽엔 비 피해를 좀 봤다나 봐.

-여우재 넘어오다 보니깐 거기두 피해를 본 곳이 좀 있두만.

-농사는 이제 가을걷이만 하면 되겠구. 오늘 감바위 아래쪽으로 낚시질이나 하러 가세.

( 검개, 구두물, 여우재, 감바위, ...김포의 땅이름)  


  경기도 북서부, 한남정맥 끝자락에 위치한 경기도 김포(金浦)는 타지역보다 일찍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한강 하류에 위치한 이 지역은 충적평야를 이루어 농사가 잘 되었다.

  김포 지역을 포함한 한강 하류의 너른 들을 김포평야라 부른다.

  김포평야는 김포 지역 들판에 국한하지 않는다. 김포 고을과 인접한, 한강 건너의 고양시, 파주시의 평야까지를 다 싸안아 김포평야라 한다.



 

󰁱 김포의 원이름은 검개


  많은 이들은 한자식 땅이름에 ‘금(金)’이 들어가면 우선 금속의 ‘금’을 연상한다. 그래서 이 글자가 들어간 김포를 보고도 ‘금(金)’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김포’는 옛날엔 ‘금포’였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검개’에 도달한다. 이 ‘검’은 ‘금’으로도 읽혀 ‘금개’라고도 불려 왔을 듯하다.

  김포 고을 땅이름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 지리지>이다. 삼국시대 초, 고구려에 속했을 때의 이 고을 이름은 ‘검포현(黔浦縣)’. 지금은 인천광역시로 옮겨져 가 버린 전 김포 ‘검단면(黔丹面)’의 그 ‘검(黔)’자와 똑같은 한자가 들어가 있었다.

  이 고을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에 금포(金浦)가 되어 장제군(長堤郡=부평)으로 합해 들어갔지만, 고려 19대 명종 2년(1182)에 비로소 감무를 두고, 20대 신종 원년(1198)에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현령으로 올려진다. 조선 3대 태종 14년(1414) 8월 양천현을 합하여 금양현(金陽縣)이 되는데, 이는 금포(김포)와 양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따라서, 이 고을은 ‘김포’가 아닌 ‘금포’로 불려 왔음을 알 수가 있다.

  김포의 원이름 ‘검개’는 ‘큰 물가’ 또는 ‘신성한(거룩한) 곳’의 의미일 듯싶다. ‘검()’은 ‘거룩한’, 신성한‘, 중심적인’ 등의 뜻을 갖는다. 이 말은 일본어의 ‘가미(神)’와도 상통한다.

  ‘검(감)’은 ‘금’으로도 불리다가 ‘김’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지금의 한자 ‘金’을 ‘금’으로도 읽고 ‘김’으로도 읽는 것은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검개’의 ‘개’는 ‘물가(수변)’을 뜻한다. 물가의 뜻을 갖는 ‘개’는 한자식 땅이름에선 대개 ‘포(浦)’로 의역되어 있다. 따라서, ‘검개’는 ‘큰 물가’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거의 모두 ‘김포’로 부르지만,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 때까지도 ‘금포’로 많이 불려 왔다.



 

 

󰁱 풀과 모래의 벌판 새모랭이는 ‘사우동’이 되고 

 

일제 때인 1914년에 발행한 1;25,000의 지도에 보면 당시에 ‘김포’가 ‘금포’로 불렸음을 알게 해 주는 일본의 가타카나 표기가 발견된다. ‘金浦’라고 한자로 표기된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은 ‘구무포(クムポ)’가 보인다. 이것은 ‘금포’의 일본식 표기이다. 당시에 ‘김포’라고 했다면 ‘기무포(キムポ )’라고 썼지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에 발행한 가타카나의 표기는 대개 그 지역 주민들이 부르는 음(音)에 근거하였다. 예를 들어, 김포 고을의 곡촌(谷村)이 ‘골말(골자기 마을)’의 표기인 ‘고루마루(コルマル)’로, 감암(甘岩)이 ‘가무바우(カムバウ)’ 식으로 표기된 것.

  김포 지역 논벌의 중심지는 새모랭이.  

  '새모랭이'는 물가 지역이라 모랭이(모래)와 새(물풀)가 많아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이것이 한자로 된 것이 '사우(沙隅)', 지금의 김포시 사우동이다. 모랫벌이 논벌이던 이 새모랭이는 지금 시의 중심이 되어 있다.

  김포 지역은 지대가 낮아서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지역이 아주 많다.

  그래서, 이 지역의 땅이름들 중에는 ‘낮은 지역’임을 말해 주는 것들이 많다. 사우동 근처의 감정동도 그 하나.

  감정동은 토박이 땅이름으로 ‘구두물’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굳’과 ‘물’이 합쳐서 된 땅이름이다.

  굳+(의)+물>구드물>구두물

  여기서 ‘굳’은 ‘(구덩이같은) 낮은 지역’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구두물(굳의물)’은 물이 잘 드는 낮은 지역의 뜻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한자로 ‘굳(구덩이)’의 뜻인 ‘감(坎)’과 ‘우물’의 뜻인 ‘정(井)’을 붙여 ‘감정(坎井)’으로 적어 왔다. 바로 지금의 김포시 감정동이다.

  ‘굳’은 ‘굳이(구지)’로 연철되어 지금의 김포 양촌면에 ‘구지(九之)’라는 이름이 있다.

  낮은 지역의 뜻인 ‘굳’이 개음절화(開音節化)한 것이 ‘굴’인데, 양촌면의 구래리(九來里)가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구래리의 중심 마을은 ‘구래골(구랫굴, 구럿굴, 구럿골)’로 불렸다.

  본래 통진군 상곶면의 지역으로서, 기름진 논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 이름도 낮은 지역의 뜻인 ‘굴’과 마을의 뜻인 합쳐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굴+(의)+골>구래+골>구래골(九來-)

  구래골의 한자식 이름 ‘구래(九來)’를 보고, ‘아홉(九) 번을 찾아와(來) 살아도 좋은 곳’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 손돌목은 ‘좁은 물목’의 뜻  



  

  김포 고을엔 우리의 역사와 관련해 돌아볼 만한 곳이 많다.

  고을 북쪽의 문수산성을 비롯해서, 남쪽 풍무동에 위치한 장릉(章陵), 북한 땅을 바로 턱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한강 최하류 조강(祖江)의 애기봉, 서쪽 염하(鹽河) 물가의 손돌묘, 중봉 조헌 선생을 기려 세운 우저서원(牛渚書院) 등.


문수산성에서 강화도쪽을 가리키는 류지만 님(김포향토연구소 소장)


  이 여러 곳 중에서 ‘손돌목’이란 이름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손돌목은 임금의 무사 항해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까지 바른 말을 한 그 주인공 '손돌(孫乭)'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내용도 구체적이고 역사적 사건과 얽혀 어느 정도 사실적인 느낌을 주어서 그럴싸하고 설득력도 지닌다.

  그러나, 손돌목은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기보다 좁은 물목인 이 지역 특징에 따라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용비어천가>에도 '손돌'이란 땅이름이 나오는데, 한자로 '착량(窄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의 '착량'을 그 뜻대로 풀어도 '좁은 물목'의 뜻이 되니, '손돌'이 바로 그러한 뜻을 안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손(小) = 좁은 (窄:좁을 착)

   ·돌(물목) = 돌 (粱:돌 량)

  '솔다'는 작거나 가늘거나 좁다의 뜻으로, 이의 관형형인 '손'도 새로운 말을 이루게 했다. 얼굴에 약간 얽은 마마 자국을 '손티'라고 한다든지, 나무나 쇠 같은 것에 구멍을 뚫는, 끝이 뾰족한 연장을 '손곶(송곳)'이라 하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손돌목’이란 이름은 ‘좁은 물목’이란 뜻에서 나온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작은 역사를 간직한 검개 고을에선 푸른 내일을 말하며 지금 신도시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다. 그 주위의 들에서는 벼가 쑥쑥 자란다. 금쌀의 고장 금포(金浦)에서 금벼가 자란다.

  김포는 이제 새 도시를 이루고, 새로운 금빛 미래를 향해 계속 달리고 있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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