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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1977년 발행한 정사파보에 동소 남하정이 찬한 대사마대장군 전과 성재 허전이 찬한 병조판서 시충무남이장군 행장에 의거 대사마대장군충무공 사적이스여져 잇어 이와 연관하여 허전의 행적을 살펴본다 |
대사마 대장군이란 중국 한나라 한무제 때에 관직 칭호로서 대사마는 황제의 비서들인 상서(尙書)들을 지도 감독하는 오늘날의 비서실장 격이다. 이를 장군의 관직위에 명예칭호를 쓸때도 대사마 대장군, 대사마 표기장군, 대사마 좌장군등으로 쓰기도 하였다.
허전(許傳)
30세손 / 시호는 문헌(文憲) / 호는 성재(性齋) / 문장가 (성재집) / 성리학자
1797년(정조 21)∼1886년(고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시조로부터 30세손이다.
자는 이로(而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에서 악록공 허성의 9세손으로 출생했으며
정언 허형(許珩)의 아들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승자가 되었다.
1835년(헌종 1) 39세에 늦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에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에 교리·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는 학자적 관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1855년에 당상관이 되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3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에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도(儒道)를 크게 일으켰다.
또,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1년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1886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로 이어지는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의 관련에서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에 투철하여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852년(철종3)에 양천허씨 족보 서문을 쓰셨고
1866(고종3)에 김해도호부사로 있으면서 김수로왕 재실당호를 숭선전(崇善殿)으로 정하도록
고종에게 진언하여 허락을 받게 하고 숭선전 비문(崇善殿 碑文)을 지었으며
1868년(고종5)에는 양천허씨 세고 발문을 쓰시는등 많은 문헌을 남기신분으로
우리 선조들 중에서도 가장 근세까지도 빛을 내신분이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에 있는 이택당(麗澤堂; 여택당)내에 그를 모신 물산영당(勿山影堂)이 있으며
또한 김해시 대성동에 취정재(就正齋)에는 금릉영각(金陵影閣)이 있어 제례를 올린다.
저서 : [성재집]·[종요록 宗堯錄]·[철명편 哲命編]이 있고,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 士儀]가 있다.
*당상관(堂上官) :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
허전 (許傳)
1797(정조 21)∼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출생. 정언 형(珩)의 아들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승자가 되었다.
1835년(헌종 1) 39세에 비로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에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에 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는 학자적 관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1855년에 당상관이 되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3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에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도를 크게 일으켰다.
또,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의 관련에서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에 투철하여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 宗堯錄》·《철명편 哲命編》이 있고,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 士儀》가 있다.
선생은 포천출신으로 악록공 허성 (즉, 교산 허균의 형)의 후손입니다.포천문화원 인물란중 (초당)허엽 선생의 큰아들이 허성이다.(또한 허균은 허엽의 3남이기도 하다) 성재 허전 선생은 조선후기 극심한 혼란의 시기 속에서도 유도를 지켜나가 절개있는 문인중의 한분이며 그분의 좌상초상화는 미술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화원의 발전과 신축개관을 간절히 기원드리며,포천유도회 에서도 각별한 관심과 소중한 지역인물로 발굴하시어 그가치를 발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남하정(南夏正)
1678(숙종 4)∼1751(영조 2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시백(時伯), 호는 동소(桐巢).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수교(壽喬)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부사(府使) 석로(碩老)의 딸이다.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특히 글을 잘 지어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그가 지은 「출사책(出師策)」은 명문장으로 일컬어져 사람들은 그를 흔히 이식(李植)에 비교하였다.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었으나, 세도(世道)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을 단념, 진위(振威 : 지금의 경기도 평택)의 동천(桐泉)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후진 양성으로 일생을 보냈다.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으며,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성신(誠信)이 있었고, 자제들을 의리로써 가르쳤다. 또한 검약을 항상 생활신조로 삼았다. 저서로는 『사대춘추(四代春秋)』와 『동소만록(桐巢謾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