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 (分派) 내력
전의령보(前宜寧譜)에 밀직공(密直公)의 아드님은, 혁지(赫貾) 익지(益貾) 두분 만으로 되어있었으나, 1957(丁酉)년 남씨대동보(南氏大同譜) 발간당시에 각파 남씨의 족보를 종합검토하여 공약공(公若公)을 장자(長子)로 효윤공(孝允公)을 사자(四子)로 입보(入譜)하게 되었는데,
1. 장자 공약공은, 공의 후손인 몽뢰보(夢賚譜)에 “公은 밀직공의 장자로서 寧海府英陽縣에 대대로 살아오다가 密直公이 의령별업(宜寧別業)으로 이 사할 때, 公은 英陽은 深僻(깊이외지 또한 宜寧은 거리가 멀어서, 福州 棲可村(복주서가촌: 지금의 안동)으로 이사하다” 라고 되어 있어, 그대 로 영양관(英陽貫)을 쓰게된 사연이 적혀있고.
2. 차자(次子)인 혁지공은 7세손대에서 자손이 없어 世系를 잇지 못하고
3. 삼자(三子)인 익지공은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둘째인 천명공(天明公) 역시 7세손에서 절손무후(絶孫無後)되고, 장자인 천로공(天老公)이 세 아드님을 두었으니.
ㄱ.長子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을번(乙蕃)의 자손이 가장 많아 (전체 남씨의 47%의령남씨의 80%)
① 장자인 영의정 재(在)의
㉠ 장손인 좌의정(左議政) 지(智)의 자손을 충간공파(忠簡公派)
㉡ 차손(季孫)인 의산위(宜山尉) 휘(暉)의 자손을 의산위공파(宜山尉公派)
㉢ 계손인 직제학(直提學) 간(簡)의 자손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라 이르 는데,
◎ 장자인 충간공파(忠簡公派)와 삼자인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자손이 의령남씨의 과반수를 차지하여
○ 충간공파는 감사(監司) 부정(副正) 간성(杆城) 별좌(別坐) 참판 (參判)각 파로
○ 직제학공파는 감찰(監察) 목사(牧使) 호군(護軍) 군수(郡守) 각 파로 호 칭하게 되었고
○ 태종대왕의 사위로 정선공주와 결혼한 의산위(宜山尉)남휘(暉)의 후손 은 그 의손자 남이 장군이 역모혐의 처형되자 그 후손들이 번창하지 못했다
○ 부정공파(副正公派) 15세 경상감사(慶尙監司) 선(○)공의 자손은 숫자 도 많거니와 (의령남씨 6%) 아드님 7분이 모두 영달하였고 그의 자손 에서 현관(賢官)이 많이 나와 판서(判書)만도 8명으로 남씨의 명성(名 聲)을 이 일문(一門)에서 떨쳐 세칭(世稱) 창명공파(滄溟公派)가 되었다.
② 차자(次子)인 판상서사(判尙書事) 은(誾)의 자손은
㉠ 장자인 상호군(上護軍) 경수(景壽)는 무후(無後)하고
㉡ 차자 병조판서 경우(景祐)의 자손을 안호공파(安胡公派)
㉢ 삼자(三子) 판사 경복(景福)의 자손을 판사공파(判事公派)
㉣ 사자(四子) 부정 경지(景祉)의 자손을 부정공파(副正公派)
㉤ 오자(五子) 경선(景善)의 자손은 그수가 극소하여 별로 파를 형성하지 못하였음.
③ 삼자(三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실(實)의 자손도 숫자가 작아 통칭 보문각제학공파(寶文閣提學公派)로 통하고
④ 사자(四子) 우상절제사(右廂節制使) 지(贄)는 증손(曾孫)대에서 절손되었 음.
ㄴ. 중(仲)이 문하부사(門下府事) 을진(乙珍)으로
①장자인 정랑 근(瑾)이 자손은 정랑공파(正郞公派)
②차자인 목사 이(珥)의 자손은 목사공파(牧使公派)
③삼자인 사간 규(珪)의 자손은 사간공파(司諫公派)를 이루었고
ㄷ. 계씨(季氏) 좌찬성(左贊成) 을경(乙敬)의 자손은 그 수가 의령남씨의 1% 에 불과하여 총칭 좌찬성공파(左贊成公派)로 통하며
4. 사자(四子)인 판도판서(判圖判書) 효윤공(孝允公)은 증손(曾孫) 좌시공(左 時公)에 이르러 심(深) 혼(渾)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ㄱ. 심(深)공의 장자 상명(尙明)자손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ㄴ. 혼(渾)공의 장자 상치(尙治)자손 쌍청헌공파(雙淸軒公派)만이 있어
○ 총합(總合)하여 양정공파(良靖公派)를 이루고 있음.
* 참조 : 의령남씨 현조록 14P (87.2.15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