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 24~5
1606(선조 39)∼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왕자로 선조의 적자(嫡子).
이름은 의(㼁). 선조의 열네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선조의 아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영창대군묘가 원래는 남한산성 아래 (경기도 수정구 태평동)있었는데
1971년 경제개발로 현위치로 옮겼다함
인조는 영창대군의 무덤도 왕자의 예로 개장한 뒤 당시 우의정 (신흠)에게
묘지명을 짓게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가 이 뜻에 영합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왕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고.
이이첨 등은 이 역모 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고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인목대비의 가슴을 찢고간 8세 된 아들!!! 영창대군..
그 뒤 조야에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상소 등이 이어졌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 살밖에 안된
‘유자(幼子 :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다. 그러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민족대백과자료에서...
어린왕자를 지키는 신하들 입을 꼭 다문채 신하의 도리를 다 하고 있는모습
동자승
동구릉에 모셔진 선조임금의 릉
서울 동구릉내 가장 깊숙한 곳에 모셔진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 릉
| 모함으로 증살된 비극의 영창대군 광해군 5년(1613) 4월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銀商)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朴應犀)를 체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얼마 후 박치의(朴治毅)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도 모두 잡혔는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準), 김평손(金平孫) 등 하나같이 명문대가 집안의 서자들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처지를 비관하다 의기투합해 자칭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사생계를 조직해 어울려 다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거칠게 없었던 이이첨 등이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5월 30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어느 민가에 구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강화부사는 계축옥사 조작에 일조했던 정항이었고 위리안치된 영창대군의 감시책임자인 수직무장(守直武將)은 임해군 때 일개 수장으로 있다가 직접 임해군을 목 졸라 죽인 이정표(李廷彪)였다. 영창대군이 병사했다는 거짓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 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이제는 인목왕후와 철천지원수가 된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자리에 계속 앉혀놓을 수가 없었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광해군 10년(1618) 1월 후궁격인 서궁(西宮)으로 강등시킨 뒤 유폐시켰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시 복위는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난 뒤였다. 피붙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제주에 유배되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친어머니 노씨 부인과,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고서 절에 의탁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조카 한 명, 그리고 친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작성자 아솜 |
영창대군 답사길목 일죽면에서 본 500년 된 느티나무 푸른잎이 온동네를 덮을 때 다시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