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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이야기

[펌]포에버 차붐(Forever Chaboom!!!) 글:박군배기자

작성자비상_최진승|작성시간12.09.16|조회수834 목록 댓글 0

http://www.nacham.com/?p=1129

 

1. 후추 명예의 전당 차범근편 & 노컷 인터뷰(출처:후추닷컴 명예의 전당)
2. 한국축구 인물사 차범근편 (출처: e플라마 이의재)
3. 78~79년 중앙일보 기사로 알아보는 차범근 독일진출당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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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전당] 차범근 – 1 스포츠(인터뷰)

Pre-Prologue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후추 명예의 전당을 쓴다. 지난 815 광복절 특집 ‘불명예의 전당’을 마치고 명전의 간판을 닫은 지 어느덧 5개월,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우리 축구 계는 또 한번 ‘대표팀 감독’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겪었고 결국엔 거스 히딩크란 유럽 축구의 명장 영입으로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태워 본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번 명전을 장식할 주인공이 바로 다름 아닌 차범근이란 사실이 필자를 사뭇 당혹케 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외국인 지도자… 포에버 차붐(Forever Chaboom!!!)

필자는 차범근을 늘 ‘외국인 지도자’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차범근 같은 ‘외국인 지도자’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니, ‘우리 정서를 이해하고 한국 축구 풍토를 얼싸안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온갖 ‘허수아비 공개 쇼(Show)”를 펼쳐가며 허모 감독을 선임할 때는 또 언제고… 2년도 채 못되어 이번엔 또 ‘허정무 갈아 마시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 잘난 우리 축구 계의 ‘풍토’… 어디 가서 ‘한국 축구 팬’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 진다.

지난 5개월 동안 ‘마음 고생’을 꽤나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명전 끝났냐?’, ‘후추도 명전 소재가 바닥났다’, ‘후추가 예전의 참신함을 잃었다’… 후추인들의 이런 관심 어린 지적의 근원 역시 명전이 ‘놀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난 10월 초에 단행된 개편 준비 작업 즈음에 ‘명전을 잠시 쉬고 ‘대박’으로 보답하자’는 후추 주방의 내부 결정, 차범근의 예상 밖의 조기 귀국, 한국 축구 ‘총체적 위기’ 분위기, 그리고 ‘후추 = 명전’ 등식의 파괴 전략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명전의 재개 시점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지난 12월 어느 오후, 차범근의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그를 잠시 만나게 되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차범근은 그날 역시 필자와 긴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날 저녁 필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이유였던지 그날 밤 새도록 차범근의 명전이 머리 속에서 구상되었고 새벽에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민하다간 영영 명전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르자, 지금!’… 그리곤 다음 날 후추 주방 식구들에게 약속을 했다. 이 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차범근의 명전 기사가 될 것이라고…^^ 지난 1년 넘게 명예의 전당을 운영해 오면서, 차범근의 헌액 시점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차범
근의 임팩트를 능가할 사람은 누군가? 명전에 있어서 post-차범근은 누군가? 그렇다면 차범근으로 명전의 피날레를 장식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두려움이 앞선 기우였다.

차범근이 소개된 후에 그의 명전을 능가할 만한 글을 쓸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한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고, ‘Post-차범근 명전’ 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비록 후추인 여러분들에게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되지 못하겠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필자가 알고 있던 차범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차범근의 명전은 2회에 걸쳐 실리게 될 것이다.

어렵게 다시 시작한 만큼, 필자가 알고 있는 차범근에 대한 많은 것을 후추인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말이다. 단 한가지 미리 약속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조카 뻘 되는 측근’을 믿고 인터뷰에 응했다가 결국은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대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차범근에게 또 다른 ‘조카 뻘 측근’에게 같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 말이다. 차범근은 ‘명전의 토픽’이기 이전에 후추의 영감이요, 대한민국의 보물이요, 필자의 영웅이다.

차범근 명전 기사에 대한 그 어떤 아쉬움 또는 실망감을 남길지언정 이제 겨우 다시 박동하려고 하는 그의 심장에 다시 한번 난도질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필자의 가슴 속에는 영웅으로 기억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후추는 사라질 수 있어도 차범근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Prologue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 할말이 많아서 쓸 말이 없다’ 란 느낌을 후추인들은 공감할 수 있을는지?
‘축구인 차범근’에 대한 필자의 기억을 자극하는 장면이 몇 개 있다. 전봇대만큼 두꺼운 허벅지를 힘차게 움직이며 축구장의 양측면을 무섭게 돌파하던 한국 축구 ‘부동의 스트라이커’ 차범근, ‘바가지 머리’에 ‘Minolta’ 란 글씨가 새겨진 자주색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고 서울운동장을 후끈 달구었던 ‘민간 외교관’ 차범근, 검정색 양복 차림에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벤치에서 솟아오르던 일본 요요기 경기장 안의 ‘차기 대통령’ 차범근, 그리고 핸드캐리(Hand Carry) 가방 하나를 들고 황급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던 ‘민족의 원흉’ 차범근…

최순호가 날랐고 이동국이 물이 올랐다고 각종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 대도 필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허정무 감독이 참신하다는 평을 할 때에도, 외국인 감독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을 때에도 필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김흥국이 방송에 나와서 월드컵 홍보가 어떻고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고 해도 필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오직 필자의 ‘축구 우주’ 속엔 차범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축구 팬들은 필자가 가졌던 ‘특권’을 누릴 수 없었음도 인정한다.
바로 차범근의 숨소리를 곁에서 듣고 그의 축구 세상을 곁눈질할 수 있었던 그런 ‘특권’ 말이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축구를 사랑하는 이땅의 모든 팬들이 단 5분 만이라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그저 그의 존재를 함께 느낄 수만 있었더라면… 필자는 차범근을 수도없이 만나봤지만 그를 만날 때 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이유는 어쩌면 그가 ‘차범근’이라서 보다는, 그 만큼 축구로 인해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야 했던 인물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그를 대할 때 마다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한다. 그는 동정 받기를 거부하고 동정이 필요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필자에게 ‘상처’로 다가온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차범근만큼 축구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차범근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 축구와 함께 한 사람 그리고 그 만큼 우리나라 축구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축구를 위하는 기준이 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은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이 사실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차범근 만큼 축구를 통해 많이 번 사람도 없다’ 라는 지적도 나올 법 하다. 차범근 만큼 축구를 위해서 ‘번만큼 토해낸’ 사람도 없다.

‘축구선수 차범근은 인정하지만 감독 차범근은…’ 이 말도 꽤 들린다. 한 때는 차범근 감독 대통령으로 뽑자는 말도 있었다. 다음은 뭐? 여기까지 읽고 차범근 광신도의 ‘마지막 발광’쯤으로 생각이 드는 독자들은 이쯤해서 후추를 나가는 게 좋을 듯 싶다. 앞으로 약 100여 페이지에 걸쳐서 왜 필자의 생각이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아주 다부지게 설명하게 될 테니, 애당초 차범근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겐 심한 ‘고문’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차범근을 위한 ‘마지막 발광’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후회해도 그리워해도 부를 수 없었던 차범근을 향한 ‘연가(戀歌)’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유는 필자 스스로가 바로 스포츠를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우며 살아왔던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란 분야에서 뛰던 선수들을 통해서 미래를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웅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약했기 때문이다. 영웅이 없는 유년기는 서글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이땅의 새싹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야 말았다. 차범근이란 영웅 한명을 그들 곁에서 앗아갔기 때문이다. 차범근의 명예 회복은 사실 후추의 손으로 해서는 안 된다. 후추로는 너무 약하다. 우리가 그에게 범한 죄악은 이땅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사람들의 힘과 입을 모아서 만천하에 공개적인 사과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 모두의 너무 쉽게 잊는 성향 떄문에 그리고 차범근 역시 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후추의 미약한 힘을 빌어 감히 그 엄청난 일의 엄두를 내본다.

차범근의 명예의 전당은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다. 성급한 후추인들은 ‘차범근을 명전에 올리지 않고 무슨 진정한 명예의 전당이냐?’고 항의했지만, 차범근이 후추 명예의 전당의 앞마당에 나타날 날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시간문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후추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차범근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공식 인터뷰 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필자가 후추를 구상하고 준비하던 시절, 당시 중국 심천에 있던 차범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후추의 탄생은 영원히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중국에서 만났던 날, 필자는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참 손 아래 후배가 제대로 사과 또는 위로할 입장도 못 되었다. 당시 ‘무기력’ 이란 말을 사전에서 뒤져봤더라면 아마도 필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 시골 농부처럼 검게 탄 얼굴로, 여전히 축구 트레이닝 복은 입은 채,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선수들을 독려하며 지도하던 차범근을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 오니까 마음이 더 편해..”란 말을 듣는 순간 위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불과 1년 전 대한민국 전역을 ‘차범근 전염병’으로 앓게 했던 그 장본인이 어느덧 그토록 고요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변함없이 ‘차범근 축구’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후추 개편에 맞추어 차범근의 명전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작년 8월 말 필자는 독일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후추를 계속 지켜봐 왔던 후추인들은 대충 짐작했겠지만, 필자의 성격 상 설기현 선수를 방문하기 위한 목적 하나 만으로 그 머나 먼 유럽행 비행기에 오를 리가 없었다. 당시 2년 가까이 고국을 떠나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차범근의 독일 생활, 말로만 듣던 독일에서의 차범근의 명성, 그리고 그와 함께 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를 화려하게 수 놓았던 휄첸바인, 그라보스키, 니켈.. 등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3박4일 동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머무르며 그가 묵고 있던 집, 그가 애지중지하던 자동차, 그가 부상 당했을 때 치료 받던 재활원, 그리고 그의 아침식사까지… 모조리 전부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왔다.

4시간 가까이 진행 되었던 차범근과의 동영상 ‘노컷 인터뷰’ 까지 말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선 유일하게 최근 차범근과의 동영상 인터뷰를 확보했던 후추였지만, 그 자료를 쉽게 공개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크고 작은 언론 단체에서 “같이 터뜨리자”란 제의가 쏟아졌지만, 필자를 믿고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의 인터뷰를 ‘장사 속’으로 공개할 순 없었다. ‘논란’과 ‘자극’, ‘노출’과 ‘제휴’ 만이 살아 남는다는 인터넷 업계에 종사하는 필자의 이런 속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차범근은 이제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홀로 외롭게 지켜온 차범근 축구 교실의 제2의 도약을 꿈꾸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 가치는 일은 내 천성인가봐… 걔들이랑 공 찰 때가 제일 좋아..”란 말을 들으며 그런 그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축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축구 팬들을 위해 외로운 등대처럼 묵묵히 존재해 주었던 것처럼, 이제 두 번 다시 차범근을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차범근의 이름을 외쳐본다. 필자의 아주 소박한 소망 하나로 후추 명예의 전당 제26호 헌액자로 차범근을 불러낸다. ‘사람들이 단 5분 만이라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에 대한 많은 편견과 오해가 사라질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말이다. 후추인들이 이 글을 통해서 차범근의 참 모습을 단 5분 만이라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미진하나마 이젠 우리가 그에게 돌려줄 차례가 왔으므로, 부족하나마 이젠 우리가 그를 보호해 줄 때가 왔으므로, 늦게나마 이제는 그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가 왔으므로…

‘후추의 영감 (Inspiration) 차범근’ – 99년 5월 중국
후추를 떠 올리는 많은 독자들은 으레 후추 ‘명예의 전당’을 연상하곤 한다.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편집진 입장에선 씁쓸한 사실이기도 하다. ‘명예의 전당’이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명.전 이상으로 심혈을 기울여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다른 코너들에 대한 미안함 마저 들기도 한다. 그런 ‘명예의 전당’ 이란 코너를 구상하기 위해 1999년 3월, 필자는 경기도 모처의 한 콘도 방에서 후추의 다른 파트너들과 함께 ‘명전 후보 명단’을 작성해 나갔다. 명전의 기본 취지와 철학을 모두가 공감한 후, “자, 그럼 누구부터 할까?”하는 질문에 참석자 모두의 입에선 한 이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범근이었다. 명전에게 차범근은 분명 피해갈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소개되는 이 글은 필자가 작년 5월, 당시 소재지였던 홍콩에서 쓴 글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우연히 알게 된 차범근 감독의 중국 연락처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다음날 약속이 잡히게 되었다. 97년도 월드컵 예선 당시, 온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98 월드컵 대표팀의 지도자와 대표팀 후원사의 직원 입장에서 그와의 첫 만남을 가진 후, 돌이킬 수 없는 희로애락의 시간과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사이에 둔 세월이었지만, 그들은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차범근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보낸 반나절은… 필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후추라는 ‘모험’을 걸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때문이다. 필자가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 글을 마치게 된 데에는 이국 땅에서 그와 나눈 교감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복받침이 필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간직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씩 읽어보는 필자 마음 속의 ‘명전 제1호 기사’를 후추인들에게 공개한다. 지금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그날 받았던 그 느낌을 재생하기 힘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 아래 글은 후추 주방장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닌 일개 개인의 일기였음을 미리 경고함)

가까이 홍콩에 살고 있으면서도 친분이 있는 차범근을 찾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혀 왔다. 용기를 내어 마침내 6개월 만에 그에게 전화를 하고 (부인 오은미씨와 약속) 중국으로 향하는 기찻길에 올랐다… 위로해주고 싶다는 단 한가지 목적뿐이었다… 97년 여름, 한창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비롯 우즈벡, 카자흐, 중국… 등 닥치는 대로 속속들이 박살을 내고 우리축구를 통해서 온 국민의 갈증을 해소 시켜줌은 물론,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팻말까지 잠실 구석 구석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온 국민의’연인’이 되었던 그가… 어떠한 경위에서건 지금은 중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 “쓸쓸한 이방인 감독” 차범근으로 ‘몰락’했다는 사실이 당시 ‘차범근 영웅 만들기’ 과정을 지켜 만 보고 있던 ‘공범’의 한명으로서 그간 충분히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15미터 전진하는데 1시간 반…..”
1999년 5월 29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중국 심천(Shenzen) 역전에 있는 ‘샹그리라 호텔’ 커피숍에서 오은미씨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날 유선상으로 그가 친절히 가르쳐준 대로 홍콩 구룡의 헝함(Hung Hom) 역에서 한국의 국철 격인 KCR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홍콩 북동부에 위치한 로우(Lo Wu). 중국 경계선과 가장 근접한 마을로서 말 그대로 구름다리 같이 생긴 낡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홍콩과 중국을 넘나들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홍콩의 마을이었다. 45분 정도 기차로 소요 된다는 오은미씨의 말은 정확했다. ‘역시 자그마한 것 하나도 예사로 넘기지 않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약속이 된 덕분에 중국 출입 비자가 없던 상태라 걱정을 했었는데 (제아무리 가깝고 중국 소유가 된 홍콩이었지만, 무비자로 홍콩을 출입하던 한국인은 중국을 오가는데 비자가 필요했다),

그 부분 역시 오씨의 지시대로 심천 도착 후에 긴급 비자 발급 사무실에서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취득할 수 있었다. 홍콩의 로우 역에서 중국으로 놀러 가는(?) 인파에 밀려 출국 심사를 마치고 “심천”이라는 사인을 따라 걷는 도중 약간은 살벌하고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불과 15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중국, 그리고 또 한쪽은 홍콩이었다. 소위 홍콩의 로우 역에는 모든 표지판이 영어와 광동어로 함께 쓰여졌지만, 그 짧은 다리를 건너는 순간, 모든 글씨며 표지판이며 한자로 둔갑, 황당했다. 영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Welcome to China” 정도?? ‘한문공부 좀 제대로 해둘걸….’

홍콩달러로 100불(한화 약 15,000원)을 주고 5일 비자를 받아 나오니 입국 심사대 줄은 아까 보다 더 길었다. 곡절 끝에 심천역을 거쳐 나오자니 저기 한쪽 모퉁이에 검은색 스커트와 흰색 자켓을 입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눈에 띄었다. 차범근의 유일한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 그리고 그의 매니저 오은미씨가 보였다

한국축구의 대모… 오은미”

오 : “어머….. 맞아 맞아. 이제 정확히 누군지 알겠다. 어제 전화했을 땐 긴가 민가 했는데. 반가와요 정말. 여기서 또 이렇게 만나다니…” (악수를 청하는 오른손을 내미시며)
나 : “너무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 있죠??”
오 : “그래 맞어. 내가 깜빡 했지 뭐에요. 토요일 이 시간은 중국이 워낙 물가가 싸니까 홍콩에서 떼거지로 몰려 오는 날인데. 그걸 내가 깜빡 했어요.”(음냐리…) 원래 약속했던 샹그리라 호켈 커피숍에 가서 점심을 하자 시길래 우선 그리로 향했다. 차감독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점심은 됐고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고 호텔로 입장. ‘음메, 이건 중국이 아녀.’ 서울보다 더 화려하고 빠방한 호텔 로비, 그리고 생활한복처럼 현대식으로 개조한 중국 의상 상의에 옆구리 쭈왁 찢어진 치마를 입은 웨이트레스들이 살랑 살랑. ‘어? 중국 괜찮은데…^^’그때부터 오은미씨와의 쉴 새 없는 대화는 2-30분간 이어졌다. 중국 처음 도착 후 적응하던 시절 얘기서부터 6학년짜리 막내둥이(”차세찌”) 공부 문제, 마치 한 2년 동안 한국 사람 구경 못하다가 작정하고 수다떨기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자가용 기사가 호텔 입구에 파킹하는 걸 보고 차가 왔다며 차감독 소속팀이 비 시즌 중인 요즘 2부 리그 어느 팀과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라면서 구경가자고 제의를 하셨고, ‘그래, 인간 차범근은 초록빛 그라운드에서 만나야 제맛(?)이야…’하는 생각에 심천팀 합숙소 겸 연습구장으로 출발했다. 만화주인공처럼 귀엽게 생긴 ‘짱’이라고 불리는 운전기사의 운전 솜씨는 과연 듣던 대로 중국의 무대뽀 운전의 대표기수급 이었다. 앞에 차 빨리 움직이라고 껌뻑 거리는 쌍라이트는 어지간한 사람 브레이크 밟는 횟수 보다도 더 많은 것 같았고 차선위반, 신호위반은 아주 극히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한 20분 가량 달려 가면서 차 안에서 역시 오은미씨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경기장까지 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약 2시간 가량 계속된 연습경기를 함께 관전하며 나누었던 이런 저런 대화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내가 차범근 감독 부인이 아닌 “자유인” 오은미 였더라면 정말 스포츠 마케팅이나 이벤트 같은 쪽에 관심이 많았을 거다. 차감독 부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가 없다. 차감독 매니저 일을 내가 직접 하는 이유도 단 한가지 때문이다. 머리가 똑똑하고 비지니스를 아는 친구들은 스포츠에 문외한이고, 스포츠를 좀 알고 그쪽으로 감각이 있는 친구들은 완전히 비즈니스 센스가 없다. 그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정말없다. 난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차감독 매니저 한다고 그런다. 그런 사람이 나오면 난 당장 그만둘 거다.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합치고 머리를 짜내면 앞으로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월드컵을 2002년에 한번 치르고 난후, 차감독은 이미 일본, 한국, 중국… 아랍 제외한 아시아 축구의 3대 국에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전 아시아를 상대로 하
는 프로그램을 한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 아들 “두리” 가 고대 신방과에 들어 갔다. 어렸을 때는 공부 하는걸 그리도 싫어 하더니 이제는 좀 철이 드나 보다. 축구 선수들의 비참한 말년을 우리 두리만큼 현장에서 생생히 본 애가 없다. 비로서 그게 피부로 와 닿기 시작하나 보다. 예전에 한국을 대표하던 아빠 친구 아저씨들은 지금 완전히 백수 건달 내지는 아마추어 축구장 방황하고 있는 “축구 원로”가 되어 버렸다. 심심하면 집으로 전화나 한번씩 한다. 이게 축구 선수들의 현실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라는 걸 우리 두리는 직접 봤다. 두리는 축구기자를 시키고 싶다. 두리만큼 실기나 간접경험이 국내 외적으로 풍부한 애가 없을 거 같기에, 운동 끝나면 그쪽으로 본인도 하고 싶어하고 나도 바란다. 우리나라 스포츠 스타는 정말 구단에서 거저 주고 부려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연예인만큼 벌어 들이고 저금할 수 있는 상품인데도 1/5 아니 1/10도 챙기지 못하는 형편이다. 안타깝다. 구단과 계약할 때 광고비 받는 거 구단이랑 나눠먹는 건 절대 빼라고 일러 주곤 한다. 그걸 구단과 나눠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왜 구단에게 주느냐 말이다. 이런 쪽으로도 맘만 먹으면 돈 벌고 할 일이 너무 많다.

중국의 축구 열기나 수준은 무섭다. 지금은 최영일이 혼자 중국 리그에서 뛰고 있고 그나마 통하는 수준이다. 중국 축구 얕보고 작년엔 한국에서 봉고 트럭 2-3대에 달하는 선수들이 입단 테스트 받으러 왔다가 다 되돌아 갔다. 최근엔 조정현, 오주표…이런 애들도 왔다가 짐 싸서 그냥 갔다. 이젠 최영일이 수준, 국가대표급 아니면 중국에서도 안 통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외국선수 TO는 3명인데 그들로 인해 승부가 결정 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안 통하는 애들이 와서 되겠냐?? 지금은 거의 브라질, 아프리카에서 주전급들만 온다. 우리 팀에도 리투아니아, 폴란드 대표출신들이 뛴다. 관중들의 열기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다. 지방경기에도 4만씩 꽉꽉 찬다. 오늘 같은 이런 연습구장 경기에도 지역주민들이 엄청나게 보러 온다. (실제 약 7-8열 정도의 소형 스탠드에는 가족 단위로 빽빽이 앉아서 2부리그 팀과의 경기를 보고 박수치고 응원하고 있었고 시합 전 유치원생들 그라운드로 불러다가 선수들과 사진 찍어 주고 사인볼 선물하는 등…. 작은 축구 문화를 이미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중국 축구 협회는 아직도 한국의 10년 전 수준정도로 썩어 있는 것 같다. 여긴 돈 받고 입 닦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일부 “개혁파” 인사들은 다르다. 우리팀의 오너는 중국 전국의 2대 보험회사가 구단주인데 하버드 출신의 개혁파이다. 축구를 통해서 중국을 변화 시키려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고 차감독의 스타일과 정확히 궁합이 맞는 사람이다. 감독 부임 후 부대시설, 트레이닝룸, 숙소 모두 개조 해서 중국의 보통 수준보다 좋게 개선 시켰고, 시에서도 30만평을 공짜로 내줘서 축구대학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 구단주는 차범근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단장, 코치 그리고 모든 구단 식구들에게 “정말 위대한 감독이니까 잘 모셔라…”라고 번번히 주의를 준단다.

조선족 통역을 통해서 작전 지시를 하는 차감독이지만, 말이 안 통하는 중국 심천의 시민들은 어딜 가나 차감독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하고”우리팀이 2부로 떨어져도 절대 떠나지 말아달라”라고 신신당부를 한단다. 부패가 많이 된 나라지만, 서민들의 본심은 너무나 착하고 여유롭고 순박하다. 축구에 대한 그리고 팀, 감독에 대한 지지도 일관적이고 변함이 없다. 협회에서도 이미 차감독에게 언급을 한 것 같다. “당신이 월드컵 예선을 통해서 4천만 한민족을 감동 시켰다면, 이걸 한번 상상해 보라. 10억 인구가 당신의 축구로 인해 움직인다면 그건 정말 축구인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해볼만한 일 아닌가?” 이 말에 차감독은 사실 조금 동요가 되기도 했다. 그림이 그려지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10위 권에만 들어 달라고 협회에서 부탁을 했다. 그럼 명분도 생기고 그 후엔 대표팀 감독 자리 맏길 수 있
다라고 했다.

20년 전 프로레슬러 장영철의 ‘폭로’ 이후로 가장 비판적이고 거리낌없이 공개 되었던 한국 축구계의 ‘비리’를 다룬 작년 여름 월간조선 인터뷰가 문득 떠올랐다. 원래 인간 오은미에 대한 선입견은 대충 ‘설친다’, ‘보통 아니다’, ‘여우다’, ‘돈독 올랐다’, ‘차범근을 조정하는 리모콘이다’ 이정도 였다. 전혀 근거가 없는 평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위에 나열된 편견은 오은미씨에 대해서 극히 ‘꼬인’ 시각
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일종의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그것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에 대해서 좀 더 긍정적이고 수용하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도 그를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적극적이다’ ‘똑똑하다’ ‘헌신적이다’ ‘환상의 내조다’ ‘돈에 대해선 지극히 합리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녀만큼 ‘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여인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국내 축구계의 내용뿐만 아니라
온 유럽, 남미의 축구까지 손 바닥 위에 올려 놓은 것 같이 상세하고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축구의 흐름을 알고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놀라웠다. 나 역시 남자지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이기 때문에, ‘실력 대 실력으로 붙어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여자’이기 때문에 우리 정서 상 그저 ‘밥맛 없는 여자’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한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듣던 오은미씨에겐 한 가지 목표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남편 차범근이 오로지 축구에만 전념토록 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 축구의 자존심… 차범근

연습구장 군데군데 한문으로 써있는 사인들을 보자니 중국 땅에 온 게 피부에 와 닿았다. 저기 멀리서 누가 츄리닝 상하의를 입고 “사모님” 하면서 인사하는 모습에 자세히 들여 다 보니 다름아닌 전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였던 정성진 코치였다. ‘순수파’ 정성진씨는 작년 여름 차감독이 중국으로 오게 될 때 같이 계약을 맺고 돌아와서 팀의 훈련을 돕고 있는 소위 “차범근 군단”의 일원이었다. (조병득, 김평석, 김강남 등) 예전부터 일을 같이 해오던 사람을 이곳 중국 땅에서 만나게 되니 둘 다 엄청 반가워 했다. 친정이 울산인덕에 사투리를 구수하게 써대는 그의 부인과 두 꼬마 놈들도 볼 수 있었고 그가 시멘트 스탠드 위에 깔아주는 신문지에 오은미씨와 나는 자리를 잡았다.
약 10여분 간의 팀 미팅을 통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선수들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떨구고 그라운드로 걸어 나오는 차범근의 모습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기엔 현 국가대표 축구 팀의 트레이닝복인 푸른색 상하의와 흡사한 그런 UHLSPORT 브랜드의 트레이닝복 차림에 축구화. 아마도 내 머리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차범근의 이미지 그대로 모습을 나타냈다. 부인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던 총각(?)을 알아보고 구장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 오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쯤이 되자 그는 이빨이 하얗게 드러나는 그런 함박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잽싸게 그라운드로 뛰어 내려갔고 그의 첫마디는 “야, 여기서 다 만나고… 홍콩에 있다며? 너무 반갑다 정말”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여전히 짧은 머리에 그의 얼굴엔 중국 인민 농부의 Sun Tan이 그을러 있었고 악수를 하며 잡은 그의 손은 생각보다 너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범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큰 웃음을 짓는걸 보는 게 워낙 드문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다

나 : “감독님, 고생 많으시죠?? 죄송합니다. 가까운데 있으면서도 일찍 찾아 뵙지 못해서요.”
차 : “아냐, 아냐. 나 괜찮아. 편해”
경기 후 못한 얘기들을 다시 나누기로 하고 난 스탠드로 올라왔다. 그 후 한 5분 정도 오여사는 옆에서 계속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 환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정말 한두 마디 외엔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 오질 않았고 그저 차감독의 모습만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오여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얼굴을 돌렸다.’저 사람이 지금 왜 이곳에 있나? 불과 18개월 전만 하더라도 잠실벌이 떠나가라고 “차범근”을 외쳐대던 6만 관중의 품안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주위에 그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수는 조선족 통역을 포함해서 열 손가락 안에 들텐데…’

그리고 자꾸 지금 이곳의 아담하고 조용하고 한가한 기운이 드는 심천의 연습구장 그리고 잠실벌의 종이 테이프, 써포터즈 Flag, 마이크를 통해 외쳐대던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그를 에워싸고 터져대는 기자들의 플래쉬 불빛, 그리고 온 관중석을 뒤덮은 “붉은 물결”이 그윽하던 그림들이 내 머리 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온 한반도가 축구 열풍으로 휩싸여 있던 97년 여름/가을 나는 몹시 불안하고 불쾌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월드컵 본선 진출 , 아니 영원한 숙적 일본을 개박살을 내던 흥분의 도가니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 우리 언론에서 그랬던 것처럼 특정 감독을 대상으로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띄워주는 건” 절대 잘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떠한 훌륭한 감독이 있다 하더라도 선수 그리고 Team 위에 존재하는 감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필요이상의 인정을 받았고 날마
다 과찬의 연속이었다. 그의 업적이나 역할을 과소평가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한 인간이 저렇게 급작스럽게 “영웅대접”을 받는 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언제, 얼마나 빨리 곤두박질 칠까…하는 우려 때문에 말이다.

그러한 우려는 불과 1년 반이라는 세월 안에 이미 현실로 나타났고 결국 우리는 우
리 손으로 한 영웅을 추방시켰다. 이미 20년 전에 우리나라 최초로 유럽 하늘에
KOREAN 이라는 문자를 시뻘겋게 물들여 놓고 당시 고국에서 월요일 밤마다 “MBC독일
프로 축구 – 분데스리가전” 을 꾸벅꾸벅 졸면서 시청하며 꿈을 키우고 희망을 심어온
아이들에게 “HERO”란 무엇인가를 카르쳐 준 그 장본인 차범근이 지금 이곳 중국 심천
의 작은 축구장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었다.
비록 지난 시즌 가까스로 2부 리그 탈락을 모면한 차감독의 심천팀이었지만, 2부 리
그팀을 상대로는 골잔치를 즐기며 손쉽게 요리했다. 골대 뒤로 올려 놓은 펜스를 넘
어 “똥볼슛”들이 수없이 길가로 넘어 갔지만, 관중들, 선수, 그리고 감독 모두가 진
지하고 흥미 넘치게 경기를 치렀다. 경기가 끝나고 골키퍼 마무리 연습을 시키고 있
는 정코치에게 다가 갔다….

나 : “말 안 통한다고 개 굴리 듯 훈련 시키네..?? ^^ ”
정 : “어… 아니야.. 요놈은 쓸만해. 주장이고 하기도 잘해.”
나 :”언제 홍콩 한번 나와서 쐬주나 한잔 해야죠.나 주말에 심심해서 미칠 경인데..”
정 : “어,그래.연락처 좀줘.우리가 월요일 밤엔 한가하니까.한번 연락하고 나갈게..”

이때 마침 경기 후 사인 받으려고 줄 서있던 중국 꼬마들, 사진 찍자고 서있던 심천
아가씨들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고 걸어 오는 차감독을 만났다.
차 : “어때? 재미있었어?? 시시했지??”
나 : “아녜요. 9번하고 13번은 볼 잘 차던데요??”
차 : “애들이 하나라도 배우려고 해…”
나 : “그나저나 요즘 정말 어떠세요?? 괜찮으신 거죠?”
차 : “어..나? 나 괜찮다니까. 정말이야. 중국이 정말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아. 처음
에 오기 전엔 걱정했는데 와서 좀 살아 보니까 되게 편해. 사람들이 ‘불필요한 말들’
잘 하기 싫어하고…”

어떠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예를 드는 토픽이 차범근의 성격을 그리고 과거 그가 시달
렸던 부분들을 단적으로 대변 해줬다.

나 : “아무래도 서울 보다는 사람들한테 좀 덜 치이시죠??”
차 : “그래, 그거지. 나 정말 편해 여기서. 사람들이 ‘대국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좀 여유가 있고 착해”
나 : “감독님 우리 사진이나 한 장 박죠? 사모님하고 같이요….”
차 : “그래 그러자…”

“축구, 종교, 그리고 그의 PRIVACY”
워낙 조용하고 무뚝뚝하기로 소문이 난 차감독의 이런 다정한 모습은 아마 내 평생 쉽게 두번 다시 보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금방 옷 갈아 입고 나온다는 말씀에 오은미씨와 나는 주차장에서 정코치의 꼬맹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막내 “세찌”가 놀고 있는 친구집으로 향했고 차 안에서는 분데리스리가 시절 얘기 (나 어릴 때 광적으로 좋아하던 보루시아 MG 소속의 ‘지몬센” 선수, 그리고 현재 영국 감독 된 캐빈 키건 등), 얼마 전 극적인 로스트 타임에 넣은 두 골로 유럽컵을 먹게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얘기, 밤에 있을 예정인 북한 대 중국의 올림픽 예선전 얘기…등으로 금세 시간이 흘렀다.

한번 차감독의 서울 집에서 본 적이 있는 막내 “세찌”는 많이 커 있었지만 여전히 장난기가 넘치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나이키 스우
쉬로 쳐 바른(?) 의상을 보니 ‘얘가 심상치 않은 나이키 팬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고 날 보자마자 어떻게 기억을 하고 대뜸 “아저씨, 새로 나온 에어조던 신발 못 구해
요?”했다.^^ 세찌를 태우고 차는 어느덧 심천 외곽에 위치한 골프 연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그나마 그와 식구들이 즐기는 ‘가족 행사’ 중에 하나가 밤에 연습
장에 가는 일 같았다. 차감독 내외를 비롯해서 세찌는 물론 기사 “짱”까지 다 같이
연습장에서 땀을 흘리곤 한다고 했다. 기사와 함께 같은 연습장에서 스윙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어쩌면 왜 그가 국내의 지독하게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축구인
들이나 ‘기득권자’들과 융합하기 힘든 지 상상할 수 있었다. 매일 연습장은 철저하
게 나가고 있지만 아직 FIELD는 구경도 못해본 차범근이라고 한다. 기회가 없어서?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돈이 없어서?? 그의 코칭 스타일과도 흡사하게 치밀하고 차분
한 골프 스윙을 고집하는 차범근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골프 스윙은 첫째, 축구를 숨쉬고 축구를 노래하는 그의 일상 생활 중 유일하
게 ‘다른’ 어느 것에 100%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도피성 도구 일수도 있을 것이고..
둘째, 아니면 그 조용하고 적막한 골프 연습장에서 그는 또 다른 무슨 축구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중 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아마도 후자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연습을 하면서 오은미씨는 핸드폰으로 서울에 남아있는 첫째 ‘하나’와
‘두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누이 간에 전화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모녀는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던 중 차감독은 스윙 멈추고 부인에게 묻는다.

“한국 축구 예선 오늘 어떻게 되었나 물어봐…” 아마도 후자였던 게 틀림없다.
‘짱’과 세찌를 시켜 피자를 사오게 하고 시원하게 뚫린 야외 연습장에서 (중국은 땅
이 넓어서 그런지 연습장도 실제 FIELD처럼 예쁜 조경 작업과 넓은 LAY-OUT으로 꾸며
져 있었다) 그의 식구들과 나는 공도 치고 먹기도 먹고 대화도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저쯤에서 들리는 소리 “감독님!!!” 한국과 중국
을 오가는 LPG가스 운송선의 선장(”마도로스”)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한국인이 달
려오며 상당히 거리낌 없이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 들길래 양측이 꽤나 친한 사이인가
보다 했더니, 일방적으로 그 선장 친구만 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객지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변죽이 좋고 말이 많았는데, 추측하건대 차감독 내외가 싫
어 하진 않는 것 같았지만 죽고 못사는 스타일에 유형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보기
엔 그 친구가 원하는 차감독의 관심을 사기엔 일단 ‘불 필요한 말’이 너무 많은 스타
일이었다. 그 친구가 조인한 후 그리고 이것저것 들쭉날쭉 골프 스윙하고 있는 사람
들한테 이 질문 저 질문 해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차감독의 말문은 이미 막힌 거 같
아 보였다. 본인을 축구광이자 ‘차범근 광신도” 정도로 소개하던 그 사람의 수많은
질문에 차감독은 단답식 대답만 하고 일체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
고 ‘오늘 차감독과의 대화는 이정도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족과의 시간, 아내와의 대화, 그리고 자식에 대한 절제된 관심… 이런 것들이 차
감독의 PRIVACY 였다. 언뜻 보기엔 너무나 하찮은 PRIVATE LIFE 였지만, 10대 후반부
터 30년 넘게 그를 따라 다니던 스폿라이트를 피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쉬게 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가정뿐이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더욱이 그런 그의 가정생활이 그
에겐 ‘좋은 남편, 자상한 아빠의 점수 따기 식’ 가정 생활이 아닌 그만의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은미씨 말대로 ‘외국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만 어쩌
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의 따듯함과 편안함을 난 감히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축구를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차범근은. 그런 그의 목표
를 달성하기 위해선 독일생활 도중 맥주 맛이 좋기로 유명한 독일의 바 또는 나이트
클럽에서 요즘 우리나라의 일부 젊은 스타플레이어들의 생활처럼 밤새도록 쾌락과 알
코올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을 거고, 그런 것들을 등 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안식처는 아마도 가정 그리고 교회 뿐이었을 거란 생각
이 든다. 그렇게 살아오길 어느덧 40여년…. 오직 그런 생활에 길들여져 온 차범근
은 자신이 그동안 획득한 부와 명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후배들이나 동료들에게도 그런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검증된 방법’을 요구해 왔
고 고집해 왔다. 여기서 차범근과 ‘나머지 축구인 모두’의 근본적인 갈등과 오해는
시작되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쉽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연습장에서 집으로 가는 차에 오른 시각이 벌써 저녁 9시반이었다. 불편하지만 않다
면 세찌와 함께 집에서 자고 가라고 오은미씨는 얘기를 한다. 극구 사양을 했다. 그
들만큼 외국 생활을 오래 해 본 나로서는 그런 민폐 끼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
기 때문이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차감독이 지독하게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PRIVACY 침해를 더 이상 연장 시킨다는 점을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기차역으로 향
하는 차 안에서 차감독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팔을 뻗어서 옆으로 옮기기도
하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 사람이 사는 법이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다. 오은미씨가 다시 한번 묻는다. “아니… 내일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오늘밤에
가야 되는 거면 말릴 수 없고, 미안해서 그런 거면 정말 그럴 필요 없는데….” 이번
엔 침묵하고 있던 차감독까지 거든다. “미안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세찌
하고 오늘 자고 내일 아침 같이 먹고 우리팀 소속 아마추어 애들 가르치는 것도 보러
같이 가고 그러지?” 감동이 밀려왔다. 대한민국만 빼놓고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전
직 대통령보다도 더 인정을 받고 국위선양을 열심히 해온 차범근의 이 한마디에. 미
안해서 못 자고 간다는 뜻만 충분히 간접적으로 비추고 거절했다.

6월21일부터 휴업중인 중국 프로리그가 재개된다고 한다. 올림픽 대표 선수 차출로
인해 리그 운영이 어려워서 아예 쉬기로 했다는 중국 협회와 프로연맹의 하모니였다.
그전에 차감독과 심천팀은 합숙을 떠난다고 했고, 오여사와 세찌는 방학을 맞아 한국
으로 나간다고 했다. 6월21일 홈경기를 꼭 관전하러 가기로 약속한 후 기차역 앞에서
내렸다. 차에서 두분이 내려서 악수를 하고 “자주 놀러와…”하며 작별을 나누었다.
다시 홍콩행 기차에 몸을 싣고 집에 도착하니 정확히 밤 11시반이다. 12시간동안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한 거 같다. 오늘 밤 나의 느낌을 글로 쓰기가 쉽지 않다. 워낙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기 때문일 것이다.정리를 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Fact 위주
로 글을 쓴다.

단 한가지, 차범근은 중국에서 더 Happy 해 보였다. “언젠가는 한국이 다시 차범근을
찾지 않겠냐…?”던 부인 오은미씨의 말대로, 그때까지의 재충전을 위해서라면 이상
적인 나라가 중국인 거 같았다. 떠나기 전 나의 유일한 목표는 달성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를 위로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가용 기사 굴리며 넉넉하게
대접 받고 살고 있는걸 봐서가 아니다. 서울에서도 그는 그 정도는 누리고 살던 사람
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적으로 굉장히 편안한 모습이었다. 98년 여름 네덜란드전을
마치고 ‘바람난 부인 짐 싸들고 처가집으로 쫓겨 나듯’ 김포공항 빠져 나오던 그때
그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기억들은 아마도 그의 가슴속 어디선가는 아직
도 꿈틀거리고 있으리라 상상된다. 하지만, 그의 그 깊숙한 심정까지 파헤치려고 드
는 무모한 기자나 친구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는날까지 우리는
차범근의 그 모든 것을 들여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되기 전까진.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위로를 받았다. 그를 생각하면 불편하고 괴로웠던 내 심정을 오히
려 위로받고 왔다. 그의 곁에 오은미씨와 가족들이 있는 한 절대 차범근의 ‘축구 불
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얻고 왔다. 그와 함께 있었던 중국에서의 반나
절… 내가 그와 같은 한국인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끝

차범근의 중국 생활은 그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축구, 가정 그리고 종교… 외
엔 아무 것도 그의 시간과 관심을 사지 못했다. 작년 가을, 필자는 어느 스포츠 신문
의 기사를 읽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범근 중국 팀에서 불명예 퇴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팀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필자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
인하고 왔는데 ‘불명예 퇴진’이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이텔의 스포츠 게
시판에서 그 기사를 쓴 송모씨와 필자가 소위 말 하는 ‘통신상 싸움질’까지 해가며
진상을 규명하려고 들었다. 필자의 격앙된 어조와 감정 섞인 필체가 상대방을 무시
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선 후회스러운 일이었지만, 근본적으로 필자는 그 기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던 동안 줄곧 필자는 차감독님 측과 전화를
하며 중국 심천의 분위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감독의 퇴진 소식을 접한 한 심
천의 시민이 어느 빌딩에서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한다는 얘기서부터 선수들과 팀
관계자들과의 눈물의 미팅, 구단주의 재고 요구… ‘불명예’란 말이라곤 도저히 납득
이 갈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또 한번의 오보를 통해 차감독의 명예
에 먹칠을 하려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또 다른 스포츠지가 중국으로 가
서 구단주와 단장과의 면담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차감독은 다시 한번
‘그를 못 살게 만드는’ 일부 국내 언론들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심천 어느 구석을 가더라도 그곳의 시민들은 차범근을 공경의 대상으로 접근했다. 숫
기 없는 어느 중국 꼬마 녀석 하나도 차범근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에 아버지 곁으로
도망갔고 곧 이어 그 꼬마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차범근의 사인을 받으러 조심스레 다
가왔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의 스타들, 하나 같이 하는 소리는 ‘외국에 나
와 있으니 정신적으로 너무 편하다. 팬들이고 기자들이고 괴롭히는 일이 없어서 좋
다.’ 그런 해외 생활의 가장 큰 수해자가 바로 차범근이 아닐까? 독도가 일본 땅이
라고 우기는 날엔 온갖 언론과 시민 단체가 단합해서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지만,
만약 독일이나 중국이 ‘차범근은 우리 것이요’라고 그러는 날엔 우리 민족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독도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목에 힘줄 세우듯 차범근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는지 부터가 궁금해 진다. 우리의 보물
을 우리 손으로 지키지 못 한다면 아니 우리의 보물을 남들이 더 잘 지켜주고 보호
해 준다는 게 과연 무슨 뜻인지..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차범근에 대한 기억 1 – co-sprayed by chef & roby10

차범근에 대한 명전이라면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해 과연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
하여 어디에서 끝을 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후추의 주류 독자층인 20대
스포츠 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 그들이
차범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과연 어느 정도이며 얼마를 알려줘야 하는지? 암담했다.
요즘 스포츠 팬들이 필자에게 “차범근이 정말 그렇게 축구 잘 했나요?”하고 질문 한
다면… 그저, 막막할 뿐이다. K-League 보다 이태리 Serie-A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축구 팬들에게 ‘당시 차범근은 지금의 바티스투타 정도의 실력과 입지를 누리고 있었
다’라고 답한다면 feel이 올까나? 차범근의 명전은 ‘축구 선수 차범근’ 또는 ‘생활인
차범근’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을 해서 특정 주제에만 전념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때 했
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후추가 아는 만큼은 전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한 소개를 할까 한다. 그가 ‘세계적인 스타 차
범근’이 되기 전까지의 축구 이야기를 말이다.

‘차범근이 과연 얼마나 잘했냐?’는 질문에 답하는 일처럼 고통스럽고 막막한 ‘도전’
이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하나씩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1970년대 아시아 축구판도는 전통의 강호 한국을 필두로 장신 스트라이커 크라파이와
테크닉이 좋은 몽예몽이 이끄는 버마 (현 미얀마),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유
럽식 축구를 구사했던 이란, 짐 메케이와 롱드로우인의 명수 리챠드가 버틴 호주, 여
기에 늘 우리 한국이 껄끄럽게 생각했던 이스라엘 등이 4강 내지는 5강 체제를 유지
했다고 볼 수 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득점왕 가마모토가 이끌던 일본은 비록 멕
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당시 한국의 상
대는 분명 아니었다(버마는 70년대 중반부터 쇠락 한다).

72년 경신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한 차범근은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면서 그 해 5월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에 이세연, 이회택, 김호, 박수덕, 박이천, 변호영 등 기라성같은 대선배들과 함
께 출전한다.
한국은 결승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GK ‘헤자지’와 파르빈, 베자디, 아디비 등 초 아
시아급 선수들이 버틴 이란에게 2대1로 패하며 비록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차범근
개인에게 있어서는 화려한 국가대표 데뷔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소득을 올린 대
회라고 볼 수 있다. 국가대표 초년병시절 차범근은 대표팀 연습 시에 바람 빠진 축구
공에 공기를 넣는 등 대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막내둥이 였지만, 플레이만
큼은 처음부터 막내가 아니었다. 당시로는 비교적 장신에 속하는 178센티의 신장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측면돌파와 정확한 센타링은 기존의 국내 선수들과
는 분명 한 차원 다른 플레이였고, 어시스트능력 또한 탁월했다. 혹자는 ‘대한민국
뻥축구의 원조는 차범근이다’라고도 하지만, 차범근이 보여준 ‘뻥축구’는 당시 이땅
의 국민들의 눈에는 ‘삼바 축구’, ‘토탈 사커’이상의 ‘신기’였다. 대표팀에 발탁된
차범근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모해 나갔고, 대표팀 코칭스탭은 물
론 선배들도 차범근의 성실한 자세와 뛰어난 기량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차
범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의 독보적 스타로 군림했던 이회택은 자신의 아성
에 정면으로 도전한 차범근이었지만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후배 차범근
에게 늘 격려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차범근은 고려대학 2학년 때인 73년 5월 뮌헨월드컵 아시아 A조 예선 대 이스라엘 전
에서 연장 3분 경에 수비수 김호곤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오자 기가
막힌 발리 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차범근 시대’의 막을
올린다. 이후부터 차범근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해 국내 경기뿐 아니라 수많은 국
제대회에 출전하며 맹활약, 축구팬은 물론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국민
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한국 스포츠계 최고의 영웅 자리에 오른다. 당시 학교에서든
동네 조기축구에서든 가장 볼을 잘 차는 인물들은 모조리 차범근의 백넘버인 11번을
달았고, 당시 우리축구 대표팀의 패턴이 차범근의 측면돌파에 이은 정확한 센타링을
190센티의 장신 센타포오드 김재한이 헤딩으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것
을 자주 봐온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종이비행기’란 동요의
가사를 바꿔 ‘찼다찼다 차범근 센타링 올렸다 떴다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이라고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차범근은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박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는 메르데카컵,
태국에서 벌어지는 킹스컵 등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유럽과 남미팀들과의 경기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해 유럽과 남미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아
시아권에선 폭발적인 스피드의 차범근을 마크하기란 불가능했고 아시아 어디를 가더
라도 축구팬들은 한국의 차범근이 ‘아시아 넘버원’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 한국이 78년 5월재팬컵에 출전해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 지몬센
이 이끄는 서독의 명문 보루시아 MG와의 경기에서 4대 3으로 패했지만 차범근의 플레
이를 눈여겨본 보루시아 MG의 명감독 우도 라데크에게 경기 후 ‘한국의 11번은 정말
놀라운 선수다. 저 선수는 서독에 와도 충분이 통할 수 있는 플레이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차범근은 78년 박대통령컵에 동행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팀 1군 코
치 슐테 코치의 관심을 사기도 했었다. 차범근은 이미 이때부터 우리의 몫, 아니 아
시아의 몫이 아니었다.

차범근이 72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79년 서독에 진출하기 전까지 국가대표로 참가했
던 주요대회는 72년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74년 뮌헨월드컵 예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78년 방콕아시안 게임 등이었
다. 얼마 전 보도된 차범근의 공식 A매치 출장 기록(121경기)을 일일이 파헤칠 순 없
겠지만, 필자의 ‘Memory Lane’을 조심스레 뒷걸음질 쳐가며 ‘태극마크의 차범근’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경기 3개를 replay 해 본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1″
(1976년 9월11일 제 6회 박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 대 말레이시아 전 – 서울운동장)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소친원이 이끄는 말레이시아와 첫 경기에 맞붙은 한국대표1진
화랑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으나, 이날 따라 선수들의 미스가 속출했으며
특히 수비수들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연속해서
수비수들의 엉성한 플레이로 엉겹결에 3골을 허용한다. 후반전에 전열을 가다듬은 화
랑은 차범근이 슛한 골이 골대 맞고 튀어나오자 이공을 미드필더 박상인이 골대 안으
로 밀어넣어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말레이시아의 목타르
다하리에게 중거리슛을 허용해 스코어는 4대 1로 벌어지며 패색이 짙어진다. 말레이
시아가 무서운 강팀은 아니라고 하지만 축구경기에서 3골차란 결코 쉽사리 따라붙을
수 있는 스코어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7분. 그러나 ‘기적’은, 그리고 ‘차범근의
전설’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어느덧 까까머리 신참에서 대표팀 대들보로 성장한 라이트윙 차범근이 수비수들을 멋
지게 제치고 강슛한 볼이 골네트를 가르면서 추격에 불을 지피더니 4분 후 또다시 차
범근이 두 번째 골을 터뜨려 한 순간에 서울 운동장에 모인 관중들과 시내 다방 안에
서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그리고 2분 후 종
료1분전 중간 지역에서 볼을 차단한 차범근이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천금과 같은 동
점골을 터뜨리며 4대4동점을 만들어낸다. 차범근은 그래서 ‘차범근’이었다. 스탠드를
꽉 메운 관중들은 물론 한국팀 벤치 또한 흥분을 감추질 못했으며 반면에 다잡은 승
리를 한 순간에 놓쳐버린 말레이시아 선수단 전원은 망연자실 했다. 이 ‘동화 같은
엔딩 (ending)’을 발판으로 화랑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진출, 한국대표 2진 충무
를 3대0으로 제압한 브라질의 상파울로 선발팀과 공동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수 많은
축구 팬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는 차범근의 모습은 바로 이 ‘대 말련
전’ 한 경기로 충분했다. 또한 이 게임은 아직까지도 한국축구사의 가장 흥분된 순간
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이 대회직전 차범근은 약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었다. 76
년 고려대를 졸업한 차범근은 신탁은행에 적을 두게 되는데 신탁은행과 서울은행이
통합되면서 당시 감독이던 민병대씨가 자동차보험으로 옮기며 차범근도 동시에 자동
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문제가 발생 졸지에 무적선수가 되고 만다. 이때 축구선수가
적이 없으면 경기장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당시 축구협회 회장 김윤하씨가
차범근을 축구협회소속으로 등록시켜서 박 대통령컵 대회에 출전 시켰던 것이었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2″
(1977년 3월20일’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대 이스라엘전 -서울운동장)

당시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은 먼저 1,2,3,4조로 나누어 각 조1위 팀을 가려낸 뒤
오세아니아 지역대표등 5개팀이 홈앤드 어웨이로 승패를 가려 가장 성적이 좋은 팀
하나가 아시아 대표로 월드컵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은 일본, 그리고 항시 우
리에게 껄끄러운 상대였던 강호 이스라엘과 같은 조에 속했다. 한 달 전인 2월 이스
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김진국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맡고 골
라인 안으로 들어갔으나 선심이 골인으로 인정치 않아 결국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는
데, 이스라엘 매스컴에서 조차 김진국이 슛한 볼은 골인이 분명하다고까지 보도된 바
있고 한국의 오완건 단장은 부당한 오심을 FIFA에 제소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했지
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서울 홈 경기는 한달 전의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한국의 감독은 최정민씨였고 코치는 김정남씨였다. 당시 멤버는 GK 1번 김황호
DF 3번 김호곤, 8번 조영증, 12번 최종덕, 5번 황재만, 6번 박성화 MF 4번 조광래,
9번 이영무, 17번 박상인, 18번 김성남, FW 15번 허정무, 14번 김진국, 11번 차범근,
7번 신현호등이었다.

1차전과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적극공세를 펼친 한국은 전반 20분이 지날 무렵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11번 차범근이 수비수 두 명을 가볍게 제치며 강슛을 성공시켜 3만
여 관중들의 함성을 쏟아낸다. 전반을 성공리에 끝낸 한국은 후반 GK 김황호가 ‘충분
히 잡을 수도 있는 볼’을 골로 허용해 1대1동점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후반 3분 여
를 남기고 오른쪽에서 최종덕이 가까운 포스트쪽으로 이동하는 차범근을 향해 롱드로
우인 한 볼을 차범근이 헤딩패스로 가운데 밀어넣자 달려들던 17번 박상인이 골대 정
면에서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골네트를 가른다. 승기를 잡은 한국은 1분 뒤 다시 차
범근이 센타서클 중앙에서 한 사람을 제치고 오른쪽 풀백인 자신의 고려대학 2년 후
배 12번 최종덕에게 연결하자 최종덕은 볼을 한두 번 툭툭 치고 가다 골대와의 거리
30여 미터 전방에서 그대로 중거리 슛을 성공시켜 서울운동장을 꽉 메운 3만 여명의
관중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한다. 최종덕은 이후 ‘중거리슛의 명수’란 별명까지 얻
게 되고 결국 한국은 강호 이스라엘을 3대1로 물리친다. 이 시합에서 역시 차범근은
혼자서 3골을 모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며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자 사상 첫 국대 남북대결인 대 북한전을 0-0 무승부
로 마친 화랑(전 국대) 선수들 중 유일하게 차범근만이 현지에서 직접 독일 행 비행
기에 오르게 된다. 차범근의 독일 진출은 스위스에 본사를 둔 ‘바두즈’사의 독일 대
변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서독에 도착한 차범근은 여우종 재 서독 한인회 회장의
환대를 받으며 다음날 분데스리가 최하위팀인 다름슈타트와 월봉 1만마르크(260만원)
에 6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보쿰을 상대로 데뷔전을 갖는다. 다름슈타트의 부크발트
감독의 극찬은 독일 지역 신문을 비롯 국내 언론은 대서특필, 차범근의 ‘탈 아시아
시대’를 예고했건만, 당시 공군 현역병이었던 차범근의 신분 문제로 급거 귀국하게
된다. 도무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며 궁금해 할 후추인들을 위해 차범근
의 입대 배경 및 거취 문제를 간단히 요약해 본다. 76년 10월에 입대했던 차범근은
공군이 타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길었던 부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공군팀 전력 강
화 특별 케이스’로 선정되어 타 군과 동일한 복무기간 후 ‘총장 권한으로 조기 제대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받아 놓았던 상태라서 78년 12월이면 제대할 수 있다
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독일 진출은 12월에 진행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공군팀 특별 케이스 입대 1기’가 바로 차범근이었고 2기가 장기문, 황재만과
같은 당시 국가대표 급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독일 진출을 놓고 워낙 ‘시
끄러웠기 때문에’ 공군의 그런 약속이 무산되었던 것이었다. 차범근의 독일 체류는
이렇게 해서 11일 만에 마감된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3″

차범근은 그 다음해인 1979년 5월31일 공군에서 만기 제대 한 후 6월22일 다시 서독
으로 출국을 하게 되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떠나는 축구영웅 차범근을 위해 서울
운동장에서 성대한 고별경기를 열어준다. 3만 여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차범근의 고
별전은 차범근의 모교 고려대학OB와 연세대학OB의 라이벌전으로 치러졌다.
당시 고려대OB에는 차범근을 비롯해 선배인 황재만, 이차만, 고재욱, 그리고 후배인
박성화, 최종덕, 김성남, 김강남등이 출전했고 연세대OB역시도 김호곤, 박종원, 홍성
호, 허정무, 조광래 등 양팀 다 정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출전했다.
결과는 박성화가 맹활약한 고려대 OB의 승리로 끝났지만, 경기를 마친 후 차범근은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응원단장과 함께 서울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면서 자신을 보
러 온 3만 여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운동장을 꽉 메운 수많
은 축구팬들은 환호와 박수 그리고 눈물로써 차범근을 배웅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
던 필자 역시 떠나가는 차범근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영웅
을 잃는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꺼지지 않는 차범근의 독일 신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당시 유럽 최강이었던 헝가리를 누르고 첫 월드컵을 제패
하며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한 서독은, 그 무드가 이어지면서 1963년 국민들의 절대적
인 지지 속에 분데스리가를 창립한다. 차범근이 진출할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최강
의 리그였으며 세계적 선수들이 가장 뛰어보고 싶어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분데스리
가를 거치면 유럽 시장 어디든 갈 수 있었을 정도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실제로 대
단했다.

국내에서는 1977년경부터 MBC 문화방송에서 매주 월요일밤 10시 30분에 이철원 아나
운서와 주영광 선생의 구수한 해설로 서독 분데스리가를 방송해 주었기에 축구 팬들
은 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은지를 대략 조금은 알 수 있었고, 골수 축구팬 이라
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세계적 선수들의 이름 한두 명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고있던 유명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바이에른 뮌헨의 폴 브
라이트너, 헤네스, 칼하인츠 루메니게, 융한스. 함부르크 SV의 케빈키건, 마가트, 후
루베쉬, 만프레도 칼츠. 도르트문트의 아브람직. 카이져스 라우테른의 브리겔. 샬케
04의 피셔. FC쾰른의 슈마커, 쿨만, 리트바르스키, 슈투트가르트의 한스뮐러, 쌍둥이
푀르스터 형제, 보루시아 MG의 마테우스 등이었다. 정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
는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선수들이 즐비해 있었기에 차범근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성공을 섣불리 점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쿠데라가 이미 차범근이 서독에 진출하기 2년
전인 77년에 FC쾰른에 입단해 있었다.

1978년 6월22일, 두 번째로 독일에 도착한 차범근은 몇 차례의 역경과 시련을 겪어야
만 했다. 처음에 입단했던 다름슈타트가, 잠시 고국에 다녀온다고 해놓고 기한 내에
차범근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위반을 들고 나왔으며, 다른 팀에서도 차범근
에 대한 교섭이 전혀 없었다. 차범근은 3-4주 정도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봉착하게 된다. 대변인이었던 여우종씨와 함께 당시 다름슈타트 감
독이던 부흐만 감독을 슈트트가르트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 다음날 (현 샬케 04 매
니저인) 루디 앗싸워가 공격수를 찾다가 부흐만에게 전화, 차범근에 대해서 알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서 다음날 3일간의 브레멘 테스트가 성사되었다.

3일간의 테스트 도중 차범근은 연습경기에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실력을 유
감없이 발휘해 지역 신문에 호평을 받게 된다. 브레멘의 매니저 루디 앗싸워가 브레
멘과의 계약을 요청해서 브레멘 크레스트 호텔에서 차범근의 협상은 시작된다. 5시간
에 거쳐 진행된 협상 중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의 슐테로 부터 급하게 연락을 받는다.
78년 박스컵 당시 차범근을 활약상을 직접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슐테는 신문에
난 소식을 보고 차범근에게 ‘브레멘과 사인하지 말고 프랑크푸르트로 내려오라’는 요
구를 한다. 가능하다면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상황으로 봐선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브레멘 측은 사실 ‘헐값’에 차범근을 사인
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슐테의 연락을 받은 차범근은 곧 바로 본에 위치한 여우종 씨의
집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새벽 프랑크푸르트로 내려간다. 10분 간의 입단 테스트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와 연봉 25만 마르크(7천 8백만원)와 다
름슈타트에 이적료 20만 마르크를 지불해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차범근이 입단한 프랑크푸르트는 FC쾰른, 함부르크SV, 카이져스라우테른과 함께 63년 분데
스리가가 창설될 때 같이 출발했던 역사 깊은 명문팀이었다. 이 팀에는 74년 뮌헨월
드컵 우승의 주역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중 한 명
인 오스트리아의 ‘전기철조망’ 브르노 페차이가 핵심을 이루었으며, 이외에도 동독에
서 망명한 금발의 나흐트바이와 서독대표출신 니켈, 노이베르거 등을 보유한 중상위
팀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페차이와 스위스 국가대표 출신 엘스너까지 2명의
외국인 선수가 있었는데 차범근을 영입하기 위해서 엘스너를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차범근의 독일 진출 배경을 쓰기 위해서 수 많은 자료와 서적을 뒤적이
며 연구했다. 그 중 85년 축구원로들에 의해 공동집필 된 ‘한국 축구 100년 사’ 중
의 차범근 독일 진출 이야기를 인용해서 후추 명전의 일부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보기
좋게 낭패를 보았다. 가급적 차범근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FACT를 전달하려고 했던
후추의 기본 취지를 살려 원고 작성 후 차범근 감독의 확인 작업에서 여기저기서 빨
간 줄이 그어진 것이다. 여러 명의 축구 원로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축구 전문
서적에서도 차범근에 대한 오보가 전달된다면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차범근에 대
한 정보는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입단과 동시에 차범근은 한국대표 시절에 달아온 백넘버 11번을 달고 당당히 프랑크
푸르트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면서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분
데스리가의 ‘차붐 돌풍’을 예고 한다. 특히 미드필더인 주장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콤비를 이룬 니켈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패스를 받아 많은 골을 터뜨려 데뷔
첫해인 79-80시즌 34게임중 31게임에 출장해 12골을 기록,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며
서독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갈색 폭격기’라고 불리우기
시작한다.

그 이듬해인 80년에 키커지에서는 차범근을 신년 첫 호의 표지인물로 내세웠고, 프랑
스의 메이어지는 차범근을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으며, 또한 차범근은
독일의 슈테른지가 선정한 ‘세계 4대 상승인물’에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선정되는 등
세계적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UEFA컵 결승 2차전 대 보르시아MG
와의 경기에서 결정적 어시스트로 프랑크프르트가 1대0으로 승리하는데 공헌하며
UEFA컵 우승의 주역이 된다.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한 차범근을 두고 서독의 유명
한 스포츠 전문가인 티터 큐어튼은 ‘차범근이 서독 국적이었다면 대표팀 공격문제가
완전 해결됐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본다. 80년대 초반 세계 축구의 메인스테이지(Main stage)는 지
금 우리 축구 팬들에게 익숙한 이태리의 ‘Serie-A’ 또는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
양대산맥 체제도 아닌 분데스리가 독주 체제였다. 물론 당시엔 유럽 시장과 남미 시
장이 지금보다 더 확연히 구분되던 시절이었지만 유럽 최고의 축구 시장, 즉 유럽에
서 볼 제일 잘 찬다는 선수들이 한결같이 몰려들던 분데스리가의 위상을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베컴, 지단, 피구에 열광하는 요즘의 축구 팬들에게 당시의 차범근의
‘무게’를 상상해 보라는 요구 자체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 지금처럼 한
국 축구의 세계적 위상이 곤두박질 치고 있을 즈음, 과연 한국 국적을 가진 축구 선
수 한명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 최정상의 자리에 버젓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
지는 이야기인가…

분데스리가 진출 1년 만에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차범근은 80년 6월 프랑크푸르트
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도착한 날 각 신문사와 방송사 사진기자들은 차범근
이 비행기 트랩에서 딸 하나양을 안고 내려오는 모습부터 촬영 하는 등 지금의 박찬호
가 귀국할 때 이상으로 김포공항을 뜨겁게 달구었다. 또한 화랑과 프랑크푸르트의 경
기 중계방송이 있던 날 차범근의 아버지인 차금동선생과 어머니인 채규순씨를 텔레비
젼 중계석까지 모셔서 인터뷰를 하는등 매스컴에서도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다. 프랑
크푸르트는 한국대표 화랑과 세 차례, 그리고 할렐루야팀과 한차례의 경기를 치루면
서 4연승을 했는데 화랑 시절의 짧은 스포츠형 머리스타일에서 바가지 머리스타일로
바뀐 차범근은 매 게임 절친한 후배이자 화랑의 주전 스토퍼 홍성호의 끈질긴 대인마
크와 심한 허벅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차례의 경기 중 총 3골을 터뜨리는
등 놀랄 만큼 성장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차범근을 보러 운동장에 운집한 국내 축구 팬들 중 과반수는 프랑크푸르트를 응
원하며 차범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면서 격려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국
내 축구팬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했던 콧수염의 그라보스키와 세계적 수비수인 브루노
페차이가 사정상 내한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차범근의 명성에 자극을 받은 국내 몇몇 선수들이 80년 초반부터 분데스리가에 조심
스럽게 노크를 하기 시작하는데 연세대 출신의 박종원이 카이져스라우테른에 진출 하
지만 기량부족으로 도중하차 하고 박상인(뒤스부르크), 김진국(2부리그 보름즈), 김
민혜 등이 뒤이어 1부리그와 2부리그에 각각 문을 두드리긴하나 역시 분데스리가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유일하게 허정무만이 80년 7월 네덜란드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 필립스에 진출하게 된다.

1981년,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지만 역경이 끊이지 않았던 차범근의 축구 인생에 어쩌
면 가장 큰 ‘시련의 시절’이 찾아온다. 이미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공격수로 인정
받은 차범근이 팀 내에서도 1억이 넘는 고액 연봉자가 되자 이때부터 동료들의 텃세
가 시작되는데, 특히 자존심이 상한 브로노 페차이(얼마 전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친
선 아이스하키 경기 중 심장마비로 사망)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고, 분데스리가
의 타팀 수비수들 역시 정상적인 수비로는 차범근 마크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후
부터는 고의적 파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는 80-81시즌에 바이엘 레버쿠젠과의 경기
에서 겔스돌프의 잔인한 반칙으로 인해 차범근은 척추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선
수생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프랑크푸르트 팀 단장인 악셀샨더씨는 매 경기 후
기자들에게 ‘경기를 마친 후 라카룸에서 차범근의 몸을 한번 봐라. 마치 2차 세계대
전에 참전했던 모습이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차범근의 고난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이어진다. 국내 언론에서는 갑작스럽게 몰아 닥친 ‘차붐 돌풍’으로 인해 그의 일거
수 일투족에 주목했지만 그라운드 복귀와 재기에만 전념하던 차범근의 ‘비 협조적
태도’에 반기를 들다 못해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소위 ‘차범근 죽이기’는 이미 20년 전에 시작된 셈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난 8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문 시 차범근의 손 지갑 안에 아직까지
도 고이 간직되고 있던 한 통의 편지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얼마 전 ‘월드컵 조직
위 홈페이지 사건’으로 부당하게 옷을 벗은 최창신 전 사무총장(당시 서울 신문 기자)
이 81년 차범근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월드베스트
올스타전’에 출전을 앞두고 있던 차범근은 P모 씨를 비롯한 국내 기자단 4명의 ‘초대
치 않은’ 독일 방문을 받게 된다. PSV 아인트호벤에서 뛰던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의
초청으로 유럽에 도착한 기자단은 바르셀로나 올스타 경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차범
근에게 자신들에게 스페인 행 비행기 표와 체제비를 요구한다.

아주 좋게 얘기하자면 “차선수, 그래도 당신이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와서 이렇게 컸는데 고국에
있는 그들에게 바르셀로나 올스타 전 경기 소식을 열려 주고 싶으니 가능하면 우리
취재비랑 체제비 좀 대 주쇼…” 이런 식의 요구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이,
차범근이… 니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국민스타가 되고 떼돈을 벌게 됐는데 이젠 우리
한테도 좀 협조해야지..” 당시 기자단의 정확한 접근 방식은 후추인의 상상에 맡긴다.
이에 대한 차범근의 반응은 단호했다. “당신들 비행기 표랑 체제비 끊어줄 정도로 돈
을 벌지도 못 했지만 설사 벌었다고 해도 그렇게는 돈을 쓸 수가 없다.” 차범근의 이
한 마디로 그에 대한 국내 언론의 ‘융단 폭격’은 시작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차
범근의 말을 들어본다. “독일에서 멀쩡히 게임을 뛰고 있는데 경기에도 안 나갔고 벤
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감독과 불화’, ‘미국 코스모스로 간다’, ‘홍
콩으로 간다…

‘ 뭐, 이런 악성 루머나 퍼뜨리고 말이야.” 당시 차범근에 대한 공격
은 독일 신문에서도 한몫을 했다. 81 시즌 골이 터지지 않자 ‘고연봉 선수’에 대한
시기로 인해 동료 선수 페차이와의 갈등 등, 한마디로 차범근이 경험했던 ‘최악의
나날들’ 이었다. 차범근은 회상한다. “내가 죽는 수 밖에 없더라고… 내가 죽어줘야
해결이 되겠더라고… 마누라는 정신병원에 갈 뻔 하고, 근데 내가 죽질 않으니… 첫
골이 터지고 나니까 독일 신문은 그런 공격이 서서히 사라지고 차차 회복이 되었지만,
금방 죽길 원했던 국내 언론은 내가 3년, 4년까지 살아 남으니까 그때서야 서서히 수
그러 들더라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

당시 서독을 방문해서 내 생활을 보고 서독 팬들의 반응을 두 눈으로 보고 갔던 최창신 기자는 국내 언론에서 별의 별 얘기를
다 해대니까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해서 그 편지를 보낸 거고 얼마 전(98년)
보다도 훨씬 더 언론의 공격이 심했던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창신이 형의) 그 편지
한 통이 정말 많은 힘이 되었지… 그 무렵 교통부 장관 하시던 정부 고위 관계자가
독일에 와서 내 생활을 다 보고 경기도 보고 가셨는데 그 뒤로 청와대에 계시는 분
이 신문사 데스크들을 불러서 ‘내가 다 보고 왔는데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면 되느
냐?’라고 질타를 해서 신문사 데스크들도 다 바뀌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필자가
직접 본 최창신 전 사무총장의 낡고 낡은 편지에는 그런 말이 쓰여져 있었다. “자네
에 대해 그 어떤 소문과 말이 나돌아도 난 자네를 믿네…” 그 한마디의 격려는 이날
까지도 차범근의 지갑 속에, 아니 그의 가슴 속에 묻혀져 있다.

80-81 시즌에는 부상에 따른 그 후유증으로 28게임에 출장 8골을 기록하는데 그쳤으
나, 그 이듬해인 81-82 시즌에는 31게임에 출장해서 11골을 기록 하는 등 득점 랭킹
10위에 오르며 차범근의 건재를 과시했다. 82-83 시즌에 들어 더욱 완숙한 기량을 선
보인 차범근은 15골을 터뜨리며 팀내 최다득점선수가 됐으나 재정난에 허덕이는 프랑
크푸르트와의 재계약에 실패한다.

그는 7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1백 22 게임에 출전해 46골을 기록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차범근에게 같은 분데스리가팀인 슈투트가르트와 뉘렌베르크, 이태리의 나폴리, AC밀란 등의 많은 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으나 차범근은 83년 7월 이적료 1백 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
6천마르크(1억 5천만원)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받고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전격 이적한
다.

레버쿠젠은 차범근과 ‘악연’이 있는 겔스돌프가 소속된 팀이다. 레베쿠전은 이미
분데스리가 베테랑이 된 차범근에게 그 무엇보다도 리더쉽을 요구하고, 그는 이적 하
자마자 팀에 쉽게 적응하면서 하위팀에서 맴돌던 레버쿠젠의 공격선봉으로 나서 팀을
분데스리가 7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83-84, 85-86 시즌에는 두 차례나 전 게임(34
게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85-86 시즌에 시즌 최다득점인 17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득점랭킹 4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세계적 스트라이커로써 인정 받
는다.

반면에 차범근이 빠진 프랑크푸르트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진다. 85년 바이엘
레버쿠젠 선수들 체력검사에서 차범근은 같은 팀 소속 19세의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
력을 갖고 있다고 진단 받는 등 레버쿠젠에서도 변함없이 절제된 생활과 아울러 철
저한 체력관리를 해나간다.

86년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된다. 2월20일 A급 코치자격증(모
든 아마추어팀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 했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도 서게 된다. 한국대표는 86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
기에서 숙적 일본에 2연승하며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 짓는데 본선을 앞
두고 축구협회는 서독에 나가있는 차범근을 불러들이며 한국축구 사상 최강의 멤버
를 구성한다. 사실 차범근의 월드컵 대표팀 합류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루어졌
다. 차범근의 대표팀 합류에 찬반양론이 갈렸기 때문이다. 우선 반대하는 측은 차범
근이 대표팀에 들어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차범근에게 쏠리게 되어 기존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더러 위화감을 조성해 팀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축구감독이자 축구 해설위원인 박경호씨는 ‘차범근이 합류해도 대표팀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에 한양대 교수이자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최은택씨와 88대표팀의 박종환감독
은 ‘세계적 공격수인 차범근을 반드시 합류시켜야 한국이 16강에 들 수 있다’고 강력
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최은택씨는 축구해설을 할 때도 국내 전문가들중에 분데
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차범근 소식을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전해주었고, ‘차범근 같
은 세계적 선수가 월드컵에 나가질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늘 얘기
한 바 있는 축구인이었다. 이외에도 이회택감독, 김재한감독 등도 차범근 합류에 강
력히 찬성했고 조광래, 허정무 등 노장선수들도 차범근을 불러와야 된다는 의견을 낸다.

이 문제로 수개월을 끈 끝에 결국 대표팀 감독인 김정남씨는 차범근 합류를 축구협회
에 공식적으로 요청해 멕시코 월드컵 한달 전인 4월 차범근은 드디어 대표팀에 합류한
다. 차범근이 소속되어 있는 바이엘 레버쿠젠에서도 구단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
전하게 되는 선수인 차범근을 위해 분데스리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맛사지사인
레버쿠젠 팀 닥터 죨렉씨를 한국대표팀에 파견한다. 드디어 차범근은 월드컵 개막 한
달 전 대표팀의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전지훈련 때 합류하게 되는데 김정남 감독
은 8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차범근에게 백넘버 11번의 유니폼을 건넨다. 그동안 대
표팀에서 11번을 달고 뛰었던 변병주는 대신 19번 유니폼으로 바꿔 입게 된다.

차범근은 월드컵 본선에서 후배인 최순호와 김종부를 투톱 파트너로 맞이하며 대 아르헨
티나전, 대 불가리아전, 대 이탈리아전에서 고국을 위해 헌신한다. 당시 나이 32세
의 차범근은 온 국민이 기대한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3게임모두 줄기찬 기동력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여러 차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냈다. 비록 한국이 1무 2패
로 예선탈락은 했지만 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뜻깊은 대
회였으며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 대회라고 볼 수 있다.

87-88시즌부터 차범근은 센타포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환하며 25게임에 출장 4
골을 기록한다. 88년에는 ‘킥 AIDS88세계 올스타’로 선정되어 베켄바워, 미셀 플라티
니, 케빈 키건, 조지 베스트 등 전설의 수퍼스타들과 함께 친선경기에도 참가할 기회
를 잡게 되지만, 개인 사정 상 출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88년 4월 15일 대 카이져스
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300게임 출장기록을 세운다. 또한 차범근이 이끄는 레버쿠젠
은 같은 해(88년) 구단 사상 처음으로 UEFA컵 결승에 올라 1차전 어웨이 경기에서 스
페인의 강호 에스파뇰에게 3대0으로 완패해 우승전망이 매우 어두웠으나, 2차전 홈
경기에서 레버쿠젠이 에스파뇰에 2대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범근이 기적과
같은 3번째 골을 성공시켜 레버쿠젠이 3대0으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다.

결국은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에 4대2로 승리, 구단사상 처음으로 UEFA컵을 차지한
다. 이로써 차범근은 80년 프랑크푸르트시절 UEFA컵 우승을 경험한 후 다시 한번 우
승의 축배를 들게 되는데, 한 선수가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경험한 것은 차범근
이 처음이었다.

그 후 차범근은 88-89 시즌에 29게임에 출전해 3골을 기록을 하며 89년 6월 19일 은
퇴할 때 까지 분데스리가 통산 308게임에 출장해 98골을 터뜨렸는데 이 기록은 분데
스리가에 진출한 외국인 선수 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이 전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득
점자는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 스타플레이어인 보루시아MG의 알란 시몬센이 71년-78년
까지 기록했던 76골이 최다였으나,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진출 6년 6개월째 이미 81골
을 터뜨려 알란 시몬센의 기록을 깨고 이후 새로운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은퇴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팀을 지도할 수 있는 축구교사 자격증인 ‘푸스 발레러’를 취득
하고 그 해 11월 10일 고국의 품으로 금의환향했다.

차범근이 10년 동안 변함없이 세계 무대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선수로서 명성을 떨
치며 서독 국민들과 축구팬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
인은 피나는 훈련과 함께 술,담배,도박은 물론 오로지 축구와 가족 그리고 신앙 이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않는 구도자적인 생활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간혹 교민
들 사이에서 ‘대인관계가 안 좋다’,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등의 비난도 받았으나 차
범근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축구만을 생각했기에 최정상의 자리까지 간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차범근의 ‘처세술’과 ‘대인관계’그리고 그의 ‘입’은 오로지 축구장에
서만 존재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축구 하나로 평가 받길 원했다. ‘남들에
게 잘 하고 대인관계 좋게 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독일에 온 목적은 단 한가지, 분데스리가에서의 성공이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괴로움
을 무릅쓰고 포기해야만 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난
후 독일 선수들이 노골적으로 표명한 이질감을 없애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 후론 한국 음식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흔치 않은 한국 음식을 고집하다간 경기력
에 까지 지장을 주겠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승리는 축구장
안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집념을 보고 질타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지
만, 입장을 바꿔서 볼 때, 어느 외국 용병 선수가 한국에 와서 김치찌개 보기를 무슨
‘돼지 꿀꿀이 죽’보듯 꺼려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스테이크 대령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미친x, 여기가 어디라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과 그 의미를 짧은 지면을 통해서 설명한다는 일은 어쩌면 그 시대를 직접 체
험해 보지 않고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 차
범근의 독일 신화’는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읽었던 어느 독일 시인의 시집에 쓰
여진 한 귀절로 요약된다고 믿는다..

‘차붐!
나는 너를 낳아준 너의 어머니와 너의 조국 코리아를 향해 경의를 표한다…

별책부록 – ‘차붐 엑기스’

53년 5월 21일생. 차금동씨와 채규순씨의 3남 1녀 중 막내. 평범한 농가.
중학교 때 (하키 명문 영도중)필드하키 선수. 경신 중학교로 전학하면서 축구 시작.
(김기봉 교사가 경신중의 장운수 코치에게 소개)

경신고 1년, 무릎 부상으로 공백(대 동북고 전, 왼쪽 무릎)
경신고 2년, 베스트 멤버. 가을의 부산 MBC 대회 최우수 선수. 대통령 금배 전국 고
교대회 득점상. 경신고 3년, 청소년 대표.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연대, 경희대 등) 끝에 고려대 진학

고대 1년(72년) 국가대표. 100m 11초 04의 총알 스피드. 부동의 오른 날개.
72년 한국일보 선정 최우수 신인상.
73년 5월28일 뮌헨월드컵 아시아 A조 예선 대 이스라엘전에서 연장 후반 4분 결승골.
76년 신탁은행 입단.
76년 신탁은행과 서울은행 통합, 당시 감독이던 민병대씨가 자동차보험으로 옮기며
스카웃 소용돌이.

76년 10월 공군 입대.
77년 1월 7일 3시, 3년간의 연애 끝에 오은미씨와 결혼.
78년 12월 25일, 서독으로 가 다름슈타트에 입단. 대 보쿰전으로 분데스리가 데뷔,
병역 문제로 79년 1월 5일 귀국.
79년 9월 22일 서독으로 다시 출국. 다름슈타트가 2부리그로 떨어지며 프랑크푸르트
와 7월 16일 연봉 25만 마르크(7천8백) 계약.
79~80시즌. 31게임, 12골. 득점 7위

80년 5월 21일, UEFA컵 결승전 대 보루시아 전에서 어시스트(1-0 승).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개최 “슈맨스타 11” (월드 올스타) 선정
80년 10월, 40만마르크(약 1억 2천) 재계약.
80~81 시즌. 28게임 출장 8골(레버쿠젠 전 부상)
81~82 시즌. 31게임 11골, 득점 10위.
82~83 시즌. 32 게임 득점 15골, 팀 최다.
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 이적료 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 연봉 52만 6천
마르크(1억 5천).
83~84 시즌. 34게임 12골. 팀 7위 진출.

84년 프랑크푸르트시절, 교외 늪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사기 사건에 휘말려
집을 차압 당함. 그 때 대우에서 법정 보증금을 내는 등 도움.
85년 11월 9일,대보루시아MG 전.분데스리가 200회 출장.(218게임 중18게임만 빠진것).
85~86 시즌 34게임 17골, 득점 4위.
85년 오른쪽 발목인대 이완. 수술.
86년 2월 20일, A급 코치 자격 획득(모든 아마추어 팀 지도자격 ? 분데스리가 7년 이
상 뛴 선수들에 한해서 B급 자격증 부여, 3일 후 바로 A급 자격증 공부 자격 부여).
86년 4월… 멕시코 월드컵 참여하는 차범근 감독 위해 바이에른 레버쿠젠에서 의사
2명, 비서 1명 특별 배치, 관리 지시.
87~88 시즌 공격형 링커 전환. 25게임 4골.
88년 3월, 킥AIDS88 세계 올스타 선발(대 일본리그 선발팀) 경기 초청되었지만 출전
거절. (베켄바워, 플라티니, 케빈 키건, 네스킨스, 조지 베스트, 파울로 로시, 에우
제비오 등. 출전)
88년 UEFA컵 우승 마지막 동점 골.
88~89시즌 29게임 3골.
88년 4월 15일 대 카이저스라우테른 경기, 300게임 출장.
89년 은퇴. 통산 308게임 98골.
89년 쾰른 대 축구지도자 코스 졸업 – 1급 지도자 자격증 획득.(프로팀 포함 모든 팀
지도 자격)

시즌 소속 출장 골 비고

78-79 다름슈타트 1 0
79-80 프랑크푸르트 31 12 득점 7위.UEFA컵 결승전 결승골 어시스트
80-81 28 8
81-82 31 11 득점 10위
82-83 32 15 팀 최다 득점.

83-84 레버쿠젠 34 12 전게임 출장. 팀 7위
84-85 30 10
85-86 34 17 득점 4위.
86-87 33 16
87-88 25 4 공격형 링커 전환.UEFA컵우승.결승2차전동점골.
88-89 29 3

계 308 98 3.1 게임당 1골, 91% 경기 출장

주방장의 독일 기행 & & Bundesliga 동료 인터뷰

“2000년 8월21일… 대한항공 905편… to Frankfurt…

11시간의 비행 중 6시간이 지났다. 첫 2시간은 신문을 보고 밥 먹고 나머지 3시간
반 가량은 수면제를 먹고 잠을 좀 잤지만 ‘아직도 멀었다’ 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
다. (중략)

담배가 땡긴다. 지금은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까? 카자흐 어디쯤 인가? 차범근 감독
과 그의 가족들을 만나려니 가슴이 설렌다. 그의 명전 취재란 생각이 더 가슴 뛰고
부담스럽게 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명전을 1년 반 만에 하게 된다. 잘 도와주
실 지 걱정이다. 기현이 도 걱정이다. 마음이 무거운 trip이다…”

어느덧 비행기 안에서 이 메모를 끌적인 게 반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2년 가까
운 세월을 중국과 독일에서 보내고 있었던 차범근 감독의 근황을 살피기 위해서, 그
리고 후추 개편과 함께 소개 될 차범근 명전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서 독일행 비행기
를 탔던 필자의 당시 느낌은 상당히 불편했고 불안했다.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글 역시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를 악용해서 후추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차감독은 어디까지를 내게 얘기할 것인가..?’
그의 이름 값만큼이나 부담스러웠던 방문이었다.

1999년 12월26일,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 심천 팀의
감독직 재계약을 고사하고 차감독이 한국에 일시 귀국했던 적이 있었다. 단 이틀 동
안의 방문이었다. 차감독, 그의 부인 그리고 막내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 들어온 첫날
밤 필자는 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다음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나야 하는
데 국제면허 취득하는 절차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과 함께 오랜 만에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7시 반, 필자는 그의 동부이촌동 아파트로 향했고 이른
아침부터 그를 필자의 차에 태우고 강서운전면허 시험장으로 달렸다. 그날 정오에 공
항 라운지에서 나머지 식구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말이다. 차범근과 함께 등촌동
의 면허시험장을 들어선 순간, 시간이 이른 탓에 그리 많지 않았던 장내 시민들이 하
나 둘씩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빠 손을 붙잡고 따라온 어린 아이에서부터 아주
머니들 그리고 시험장 직원들까지… 그 누구도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끄덕이
며 인사를 먼저 청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그때 처음 ‘국민 XX’ 이란 표현
의 의미를 피부로 경험했다. 왜 요즘은 ‘국민가수 XXX ‘, ‘국민시인 XXX’ 란 수식어가
생소하지 않지 않나?

하지만, 필자는 그때 비로소 차범근이 왜 차범근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반가움, 정겨움, 미안함, 놀라움, 존경심.. 이런 것들이 그날
아침 면허시험장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눈빛에서 모두 배어 나왔다. 담당부서의 부서
장 쯤으로 되어 보이시는 직원 분의 배려 하에 생각보다 일찍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선 면허시험장 여직원들의 수줍은 사인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인 요청을 친절하고 정감 넘치게 응해 주던 차범근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 사람이 오늘 오후 독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들 좋아하는데…’하는
생각이 필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순간, 무언가를
까먹은 듯, 그는 황급히 시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 참, 그 친구한테 인사를
못 했네…”하며 처음 국제면허 취득 절차를 반갑고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던
여직원에게 그는 달려갔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일 잘 마치고 돌아갑니다. 고마워
요…”

여직원은 차범근의 그 말 한마디에 할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차범근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차 안에 두고 나온 차범근의 명함판 사진을 꺼내
오기 위해서 필자가 그의 허락 하에 열어보았던 Hand-Carry 손가방 안에는 손때 묻
은 성경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낡은 성경책 안에는 부인과 단둘이 찍은
‘사진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축구를 제외한 그의 인생은 그 브리프 케이스(Brief
Case) 안에 모두 들어있었다. 성경 그리고 그의 가족…

그렇게 차감독을 독일로 떠나 보내고 9개월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 8월, 필자는
차범근의 인터뷰도 인터뷰였지만 ‘독일에서의 차범근’을 목격하고 싶었다. ‘축구를
하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차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안다’고 할 정도로 유명
했다고 하던데, 필자는 ‘내 귀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장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프랑
트푸르트 공항에 내려서 입국 심사대에 오른 필자에게 상당히 거북하고 무뚝뚝한 표
정으로 심사대에 앉아 이리 저리 필자의 외모와 여권을 차례로 살펴보던 독일 출입국
직원의 한마디…

” 독일엔 뭣하러 왔습니까?” 피곤에 지친 필자는 가장 형식적이고도
무리 없는 답변인 “비즈니스 목적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마음
을 바꿔 먹었다. “나, 차붐 만나러 왔소이다.” 그 친구의 외모로 봐서 ‘차붐 세대’는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초장부터 ‘깨갱’하고 싶지 않은 한국
인의 자존심을 걸고 내 뱉었던 대답이었다.

“차붐?? 정말입니까?? 그가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있나요? 그를 잘 압니까? 그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고 있습니까?…” 차붐도
좋고 한국인의 자존심도 좋았지만 필자는 곧바로 ‘아뿔싸’를 외쳤다. 한시가 급하게
공항 밖으로 튀어나가서 담배 한 개피를 물어야만 했던 필자의 야무진 생리적 욕구
는 그 악의 없는 대답 한마디로 점점 멀어져만 갔다. ‘언제 내가 무뚝뚝한 표정 지었
었냐?’ 식으로 환히 웃으며 “꼭 그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라던 그의 말을 뒤로 하
며 필자는 짐을 찾으러 가면서 생각했다. ‘독일에서 차붐 얘기 잘못 꺼냈다가 약속
시간 늦기 딱 좋겠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짐 나오기를 기다리며 필자
의 입가에 자연스레 지어졌던 그 미소는 그 어떤 외교관이나 정부 관계자가 국민들에
게 줄 수 없었던 그런 소중한 의미의 미소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찾아 공항 대합실로 나와서 한두 번 두리번거렸더니 저기 멀리서 독일의 ‘후추
게릴라’ 차두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선 오은미씨도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감독은 필자가 도착한 모습을 본 후에서야 저 뒤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공항의 수 많은 한국인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 자리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차범근
이었음을 금새 눈치 챌 수 있었다. 주위 시선의 중심에 서는 걸 그토록 기피하는 차
감독이 직접 공항까지 나온 사실이 고마웠다. ‘독일에서는 그랜저만큼 흔하다’던 차
감독의 애마 벤츠 자가용을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렸다. 날이 춥고 공기가 좋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생활 탓에 폐에 문제가 생겼던 부인 오은미씨의 수술과 간병 차 독일로
갔던 차범근이었지만, 부인의 회복 과정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이 세상 어디
보다도 독일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숙해 있던 차범근 가족에겐 독일에서의 휴식이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처방책이었고 부인의 쾌유는 그런 ‘특효약’의 결과였는지도 모른
다. 폐의 일부를 도려 내야만 했던 쉽지 않은 수술을 받은 부인의 병상 기간 동안 차
감독은 하루도 빼지 않고 기도와 함께 옆자리를 지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는 한마디를 더했다. “이 사람 병은… 마음의 병이었을 거야. 98년에 ‘그 엄청난 일’
을 당하고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중국에 가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정말 열심히… 열심
히 살다가 한계에 도달한 거지. 더 이상은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거지… 다 나
때문에 생긴 병인데 내가 옆에서 지켜 주지 않으면 어떡해? 평생을 내 옆에서 날 지
켜준 사람을 이젠 내가 다른 일 모두 접고 이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라는 하나님
의 지시였다고 생각해…”

조용하고 공기 좋고 평화스러운 프랑크푸르트 주택가의 한 집을 빌려서 생활하고 있
던 차감독 가족은 독일에서 보냈던 8-9개월이 너무 좋았다고 얘기했다. 독일인들처럼
그를 잘 알아보고 그를 아끼는 외국인들이 없었지만, 또 그들처럼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줄 아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범근 가족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
이 바로 이 ‘그냥 내버려 둘 줄 아는 배려’ 였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의 차범근의
일상은 극히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장남 차두리 군이 근처 슈
퍼에 가서 갓 구운 빵을 사오는 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부엌에 위치한 식탁에 4식
구가 (장녀 차하나 양은 당시 레베쿠젠에서 인턴 사원으로 재직 중) 둘러 않아 후레
쉬한 빵과 각종 햄, 그리고 구수한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한식 생각은 잘
안 드시냐?’는 필자의 질문에 마치 ‘너, 애가 왜 그러니…?’하며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필자를 쳐다보시던 차씨 부부가 생각난다. ^^ 외국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
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현지 ‘식생활 적응’이란 설명을 적지 않게 했던
그에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들만큼 객지 생활을 오래
했다는 필자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었으니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차감독과 그의 가족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 식당을 잘 안 찾는다고 했다. 오
히려 그 지역의 ‘맛 있는 토속 음식’을 찾아 다니며 먹으면 먹었지 말이다. 실제 필
자가 독일에서 머무른 몇일 동안 차감독의 집에선 쌀과 김치는 ‘구경’도 할 수가 없
었다. 필자가 외국 생활을 하며 가끔 방문했던 외국인 가족의 식단을 연상케 할 정
도였다. 어줍잖게 식생활 만큼은 ‘골수 된장파’로 굳어버린 필자의 ‘쌀 탐닉’은 결
국 차두리 군과의 프랑크푸르트 ‘시내 구경’을 빙자한 한 한국 음식점에서 비로소 이
루어졌다. 독일 도착 3일 째 되던 날 말이다.

차범근 가족의 철저한 ‘로마에선 로마법을…’ 식의 식생활 중 또 한가지 필자의 두
눈을 튀어나오게 했던 부분은 그들이 먹는 ‘음식의 양’이었다. 평소 운동 선수들과
식사도 자주 하고 술도 자주 하는 편이라 어느 정도 운동 하는 사람들의 ‘그릇 사이
즈’를 알았던 필자였지만… 아~ 차씨 가족은 참으로 음식을 맛있게 많이 드셨다. 파
스타, 빵, 야채 등으로 가득 채워진 한 접시를 애퍼타이저로 후다닥 끝내시고 A4 용
지 만한 사이즈의 스테이크를 또 하나 후다닥, 그리고 나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한
통과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저녁 식사 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또 배가 좀 출출
한 시간이 되자 저녁 식사 때 먹고 남겨둔 파스타를 먹기 위해 3부자(차범근, 두리,
세찌)가 일대 쟁탈전을 펼친다. 할말이 없었다. 평소 신중하고 말수 적기로 유명한
차감독이 식사 테이블에서 만큼은 나름의 재치와 귀여운(?) 모습도 살짝 보여주시곤
했다. 남은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 장남과 나누는 대화 수준은 거의 희극의 한 장면
이었다. “야, 차두리… 니가 그것까지 먹으면 어떡하냐~? 야, 차두리 너 빵 몇 개째
야?…” J 그런 웃음과 사랑이 오가는 행복한 한 가정의 식사 테이블… 차범근이 가장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식생활에서 필자를
놀라게 한 대목은 바로 하늘이 두쪽이 나도 거르지 않는 식사 전 차범근의 ‘감사 기
도’였다. 매 끼니마다 가족들끼리 교대로 돌아가며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 단
순한 “하나님, 땡큐!’ 차원을 뛰어넘어 5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족들 한명 한명과 측
근들의 신상에 대한 기도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바르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한 가족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차범근을 욕하고 비
난했던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이렇게까지 마음 속의 믿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기도 많이 한다고 다 착한 사람이냐? 조
폭들도 주말엔 교회 가더라..’하며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몸보단 입이 앞서는 사람들이란 사실도 이젠 안다.

차범근이 독일에 있는 동안 그가 유일하게 즐겼던 ‘외부 생활’은 바로 골프였을 것
이다. 앞서 그의 중국 생활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었지만, 비교적 저렴하고 단순한
절차 만으로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는 독일에서 그는 골프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독일 도착 이틀째 되던 날 필자는 차감독, 오은미씨와 함께 프랑크
푸르트에서 약 1시간 가량 떨어진 지역의 골프장에 갈 기회가 있었다. 직접 그와 라
운딩을 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감독이 오래 전에 약속되어 있었던 지역단체 친선 골
프 대회에 차범근을 비롯한 전직 분데스리가 출신 축구 선수들 몇 명이 ‘우정 출연’
형식으로 초빙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였다. (덕분에 그 유명
한 독일의 아우토반을 벤츠로 밟아볼 기회도 주어졌지만^^) 참 신선하고도 건전한 발
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 흔히들 방송에 나와서 떠드는 ‘그 나
라의 축구 문화’는 단순히 인프라 구축, 관전 문화 개선, 저변 확대.. 뭐 이런 거창
한 단어들로 만들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출신 축구 선수들이 은퇴하고 나서
도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어 그 무엇보다도 생명력
있는 ‘문화 유적’으로 존속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감독을 골프장에 내려주고 막내아들의 편입 서류 문제로 레베쿠젠 시청에 볼일이
있는 오은미씨를 태워 1시간 가량을 아우토반에서 달렸다. 그녀가 시청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필자는 마침 차범근의 ‘제2의 독일’인 레베쿠젠 출신의 한 축구 에이전트
를 만나 ‘레베쿠젠 시절’의 차범근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울러 레베쿠젠 팀의 경기장 구석구석까지 구경하며 설명을 들을 기회도 얻을 수 있
었다. 레베쿠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개 에이전트가 경기장 내 구단 프런트 직
원들 대부분과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모습을 보며 또 한번 독
일이란 나라의 ‘축구 문화’를 엿 볼 수 있었다. 에이전트의 존재 자체를 원천 봉쇄하
고 있는 대부분의 국내 프로 스포츠 현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보기 좋고 따뜻한 광
경이었다. 구경을 하는 동안 구단 또는 경기장 측의 살벌한 감시도 경계도 없었다.
마침 보조 구장에서 훈련에 돌입하려고 하던 당시 레베쿠젠 팀의 크리스토프 다움 감
독을 비롯, 축구 전문지의 우도 편집장, 주변에서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구경하던
시민들에게 까지 필자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던 ‘국경을 뛰어넘는 축구 공감
대’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자가 차범근의 측근이란 사실이 그들의 환대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겠지만 말이다. ^^

무엇보다도 필자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레베쿠젠 경기장 내의 차범근의 대형 사진’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원래 경기장 지하에 위치한 프레스 룸에 그 동안 레베쿠젠 팀을
빛냈던 선수들의 실물 사이즈 사진을 걸어놓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차범근의
사진 역시 그곳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방문 했을 때에는 레베쿠
젠 팀의 새로운 스펀서가 선정되어 스펀서 혜택의 일환으로 그들의 로고가 선수들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기장 내부에 위치한 ‘레베쿠젠 박물관’ 안에는
레베쿠젠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했던 UEFA Cup을 들고 환호하는 차범근의 사진
이 박물관을 빛내주고 있었다. 레베쿠젠 구단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차범근의 ‘무게’
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차범근의 독일 체류 기간 동안 비자(Visa) 관련
서류에서부터 유로 2000 참관 지원, 차범근 축구 교실 지원까지… 그가 팀을 떠난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그들의 애정은 한결 같았다. 자
비로 해외 연수 떠나는 국내 코치들의 그림자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레베쿠젠 구경을 마치고 차감독의 골프 대회 장소로 다시 돌아왔을 즈음, 이미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라운딩을 마치고 야외 테이블에 마련된 단촐한 ‘리셉션’ 장소에서
그 유명한 독일 맥주를 한잔 씩 나누고 있었다. 그곳 골프장엔 고급 안주가 있는 ‘클
럽하우스’도 없었고 곱게 차려 입은 ‘캐디’도 없었고,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
늘집’ 문화도 없었다. 그저 현역에서 은퇴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기고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이었다. 그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라운딩
을 돌았던 지역 주민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웃음을 나누던 차범근의 모습이 보였다.
현역 시절 그와 함께 분데스리가를 빛내던 니켈, 피셔, 휄첸바인 등의 모습도 보였
다. 결례인 줄 알았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차범근에 대한 기억
을 되살려 한 마디씩만 해 달라는, 철 없지만 필요했던 요구와 함께 말이다. 청춘을
같이 하고 현재까지 가족들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왕래하는 ‘인생 친구’들에게 새삼
스레 차범근의 활약상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부탁만큼 유치하고 부적절한 요구가 없었
지만, 차범근의 현역 활약상을 직접 보지 못한 국내 축구 팬이 필자 만이 아니란 사
실이 그런 실례를 범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옛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차범근은 참으로 편해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많이
안타까웠다. ‘왜 우리는 저들처럼 차범근을 가질 수 없을까..? 과연 국내 축구 관계
자, 동료, 원로 중 몇 명이나 차범근의 얼굴에서 저토록 평화로운 표정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말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범근은 줄곧 골프 얘기
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바나나 킥’을 때리고 난 후의 모습처럼 어느 홀에
서 몇 야드가 나갔다는 그의 천진난만한 코멘트는 필자의 마음 역시 흐믓하게 만들었
다. ‘축구 말고도 이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독일 방문 3일 째, 필자는 차감독의 장남 차두리 군과 프랑크푸르트 중심에 있는
‘스포렉 (SPOREC)’이란 재활원을 방문했다. 현역시절 차범근을 비롯한 수 많은 유
럽의 축구 선수들이 각종 부상을 치료하고 재활하기 위해 찾았던 그 유명한 ‘재활
전문 센터’였다. 마침 그곳에서 재활 중이던 차두리군의 안내로 디터 에리히 재활원
장, 그리고 유럽 최고의 재활 권위자 라인하트 게벨 부원장과 짧으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국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는 스포츠 재활 클리닉에
서 ‘OK 판명’을 받았다가 발이 잘 낫지 않아서 결국 ‘스포렉’의 문을 두드린 차두리
군은 이미 그곳에서도 ‘물건’이 되어있었다. 붙임성 있고 유창한 독어로 재활원에서
함께 치료를 받던 분데스리가 선수들, 아이스하키 선수들과 호형호제하고 있었다. 2
층으로 된 재활센터에는 국내 어느 헬스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기구들
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주로 매트 위에 누워서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저 러닝
머신과 자전거는 한국에도 많이 있는 건데.. 뭘, 어떻게 치료하길래 죄다 이곳을 찾
는가?’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의 궁금증은 10여분 간의 관찰을 통해서 금
세 풀릴 수 있었다. 30여년 전통의 노하우를 통해 스포츠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근
육 요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각 기구들의 장, 단점을 파악해서 실질적으로 운동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훈련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살벌하고 전문
적인 방법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물리 치료사들과 함께 어울려서 뒹굴고 웃고 농담
하고… 깔깔거리면서 뒹굴다 보면 어느덧 오전 시간 2-3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스포렉’의 비결은 아마도 그것인지도 모른다. 막연하고 따분하고 지루하기 십상인
재활 기간을 최대한으로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환경이 바로 ‘스포렉’이 주는 최대의
장점인지도 모른다.

‘스포렉’을 거쳐간 수백명의 스타들의 사진들이 내부 복도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필
자가 아는 축구 선수들은 모조리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Korea’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실내 자전거를 타던 황선홍
의 사진이었다. 십자인대가 두 번이나 찢어져서 고생을 했던 황선홍의 무릎도 그곳
‘스포렉’에서 고쳐졌다. 당시 차범근의 주선으로 ‘스포렉’을 찾았던 황선홍은 그곳의
의료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떠난 듯 싶었다. 황선홍 이후로도 김병지, 김은
중, 고정운 등과 같은 대표급 선수들이 그곳을 방문했지만, 스포렉의 게벨 부원장에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바로 황선홍이었다고 한다. ‘워낙 부상의 정도가 심했지
만 너무도 잘 참고 견뎌주고 결국 재기에까지 성공했기 때문에…’가 그의 이유였다.
‘스포렉’이 입소문을 통해 국내 선수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2-3년 전부터
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엔 이미 (당시) 광양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축구 선수가
자비를 털어서 5주 간의 고된 재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필자는 어린(?) 친
구 두 명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위치한 한국식당에서 간만에 포식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그 나라의 축구 문화’란 말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독일 축구의 저력’ 그리고 ‘분데스리가의 중추’는 ‘월드컵 3회 우
승’도 ‘카이저’ 베켄바워도 아니었다. 정부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골 동네클럽
축구선수에 이르기까지, 바로 축구를 위한 범 국민적 관심과 사랑 그리고 배려가
한데 어울러져 거대한 축구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에서 베어 나오는 힘이 바로
‘독일 축구의 뼈대’였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필자는 그때까지 정식 후추 인터뷰에
구체적인 승낙을 하지 않고 계시던 차감독을 붙잡고 ‘물귀신 작전’에 들어갔다. 그가
그토록 소중히 아끼는 프라이버시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감독이 필자와의 인
터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아니, 넌…. 그 동안 얘기 안
들은 게 뭐 있니?? 다 알면서 뭘 또 물어…?” ‘필자는 들었지만 후추인은 못 들었다’
는 궁색한 이유로 그를 소파에 앉혔다. 부인 오은미씨는 부엌에서 또 뭘 만드시는지
‘죽이는 냄새’로 필자의 굶주린 배를 자극했고 차두리 군은 객원 카메라 맨으로 지
정, 비디오 카메라를 돌리게 했다.

독일을 떠나기 2주일 전부터 그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공식 인터뷰 질문만 100개
가 넘었다. 준비해 간 질문 리스트를 먼저 보여드렸다. ‘평소에 삼촌처럼 따르던 필
자가 다 아는 얘기를 공식 인터뷰화 하기 위해서 허비한(?) 시간이 이 만큼이니 협조
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과 함께 말이다. 후추 스탭의 노고에 감탄하며 차범근의
말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마츄어 차범근

후추:축구 처음 시작하신 건 어떻게…? 중학교 때죠?
차범근:중학교 때 시작을 했지. 근데 거기 체육 선생님이 김기봉 체육선생님이라고
있었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그 사람도 이제 경희대 나와가지고 축구를 할려고
들어왔다가, 아마 전라도 사람이니까 김… 김병삼인지 뭐 교장이 그래, 저… 경성고
등학교로 갔지, 그래서 나중에 중학교 때 우리가 다 고등학교에서 안 받는다 그래 가
지고, 전부 정종덕씨가 잠시 트레이너 였었는데 건국대학교에, 우리를 데리고 경성으
로 다 가가지고 난~리가 나가지고, 나는 붙들려왔지 다시. 장선생님한테 인제 붙들
려 왔는데, 그 김기봉 선생님이 그러니까 인제 전학을 시켜준거야. 그때 누구를 통해
서였냐면… 그때도 고등학교…. 했는데 그때 학교를 고만두면서, 누구를 소개시켜줬
냐면 장운수 선생님을 시켜준거야.
후추:그러니까 장운수 선생님이 감독님 축구 하는 거 보고 pick up 했다는 보도는,
이거는 아니네요?
차범근:그건 아니고, 김기봉 선생님이 도와줘서 그렇게 했지. 근데 이제 가니까 중학
교에는 축구부… 입학을, 8천원. 그때 돈으로 8천원. 땅 파서 갖고 간 돈이야 진짜.
8천원을 인제 아부지가 해 가지고 찾아갔지 이제 장 선생님을… 뭐, 오죽했겠어? 그
래 가지구 인제, 장선생님이 나를 결정적으로 한 거는, 이제 축구를 3학년 때부터 본
격적으로 학교에서 처음 시작을 했는데, 훈련이야 이제 같이 했었지 중학교에서. 그
래 가지구 정식으로 입학이 된 거는 3학년 때부터 입학이 된 거야. 6개월이 그러니까
나는 공중에 떴지. 학교를 영등포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래 가지구 축구도 이제 그때
부터, 축구는 뭐 다니면서 했는데 인제 뭐 그 중간은 알거 없구… 그래 가지구 그렇
게 된 거지. 그래서 대회가 가을에 한 대회가 있었어. 그 가을, 무슨 그 중앙대학교
부속, 중앙대학교에서 하는, 그 무슨 총장있었지? 여자총장님. 그 사람이 하는 대회
에 우리가 2부로 출전을 해 가지고, 그때 우리가 준우승을 했는데 시작할 때 보다는
가을 때 그 때 굉장히 잘했어. 그래서 이제 다 안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등록자체를
3학년들이, 하나만, 그 잘 하는 애 하나만 고등학교에서 받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아
예 2학년으로 등록을 했어. 근데, 겨울에 인제 입학을, 이제 우리가 다 절루 인제 그
러니까 우리는 경성으로, 그때 그러다 3학년때부터 누가 왔냐면 정종덕씨, 건국대학
교가 인제 그 사람은 경신의 주 저거는 아니었는데 하여튼 전학을 와 가지고 고등학
교에서 졸업을 해서 장선생님이 인제 말하자면 은사지, 근데 많이 어려움을 경신에서
당한 게 많이 그런게 있는가봐. 그래가지구 글루 가면서 다 데리구 가는데 나두 이
제 데리구 갔지 글루. 어차피 우리는 2학년으로 등록을 했으니까…

후추;그분 아니었으면 그것두 안됐겠네요 그럼.
차범근:아니지, 그래가지구, 그분이 그래두 1년을 가르쳤지 나를. 우리는 따라서 글
루 갔고, 입학도 거기 다 했어. 시험도 다 보고. 나는 시험은 저기 가서 봤어 경성에.
그때 이제 축구부 처음 만들 때니까 경성고등학교가. 지금 있는지 모르겠어.
후추:있어요.
차범근:그때 거기에 인제 또 누가 글루 왔냐면 김기봉 체육 선생님이 글루 왔다고.
인연이 그렇게 돼. 그러니까 나는 어차피 축구를, 장선생님을 모를 때니까 거기에 미
련도 없구, 안 받는다 그랬으니까. 글루 가서 이제 3학년으로 가서, 아 그 학교 인제
고등학교로 입학을 할려고 간거지. 왜 그러냐면 여기는 2학년으로 다시, 아니 3학년
을 더 다녀야 되니까. 근데 그때 청소년… 9횐가 아시아 청소년 대회가 한국에서 했
었다고.

후추:아, 일본 전에? 일본 대회 처음 나가신거 아녜요, 청소년.
차범근:방콕.
후추:방콕인가?
차범근:응, 방콕대회. 근데, 그 전전이 어디냐면, 2년 전, 고거 2년 전이 서울이었다
고. 김… 인권씨가 그때 잘할 때 크라우춘이 감독이었고, 그때, 아… 저기다. 그때
청소년이 아니고, 필리핀 청소년 대회 때 김진국 뭐, 김호곤. 아마 김호곤도 그때 다
했을 거야. 강병찬 뭐, 강철 뭐 이런 사람들 할 때, 시간이 없더라구 그러니까 합숙
을 하고 뭐. 근데 또 경신 고등학교에 그 이하연교장 선생님이 계셨다고, 경신고등학
교는 이하연 교장선생님, 손갑영 서무과장님, 장문수 선생님이 트리오야. 축구를 참
좋아하시고, 이하연 교장선생님, 연대 나오셨는데. 장선생님은 경희대 나오시고, 송
갑영… 하여튼 세 분이 참~ 그 서로 우애도 좋으시고, 또 축구부를 상당히 그 아껴주
셨던 분들이야. 한 분은 재정이고 한 분은 교장, 한 분은 감독이니까. 그러니까 죽어
도 안 놓겠다 그래가지고 입학이 다 됐는데, 시험은 안 봤어. 여기도 합격을 시켰어
임의로. 그래서 나만, 딴 사람은 다 가도 좋은데, 나는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이하
연 교장선생님하고 장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안되가지구 나는 학교다니다가 언제갔냐
면 입학 다 되고 늦게늦게 몇 개월 지난다음에 다시 경신으로 붙들려왔지. 그래서
들어왔는데 겨울에 이제 들어왔다가 그냥 나를 잡아 죽일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무서워서 도망갔지. 그래서 가출. 1주일동안 가출했었어 그때. 그랬다가 아부지한테
다시 붙들려가지구 장선생님 손에 붙들려갔지.

후추:고등학교때 송갑영 사무국장님이 나중에 97년도에…
차범근;아니, 사무국장이 아니구 서무과장.
후추:서무과장 어… 맞다. 알마타에서 그 가족들 만나신 거 맞아요?
차범근:맞어. 그 아들이라고 그러더라. 아들하고 엄마.
후추:근데 왜 거기 가셨대요?
차범근:그 선교사로 와 있더라구 아들이.
후추:아~
차범근:응, 근데, 참 좋으신 분들이었어. 우리 이하연 교장선생님도 그렇고, 그 송갑
영 선생님은 참 사람이 인자하시고 그리고 그 인제, 잘은 모르지만 교회 오래 그 저
거 해서 사랑이 많으셨어. 그래서 인제… 그때 고등학교 2학년땐가? 운동은 많이 하
고 제대로 먹진 못하고 막 그러니까 인제 쓰러졌지. 그래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영양
실조라고 이제 판정이 됐지. 그래가지구 인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구 가가지구, 그
사모님… 그땐 몰랐지 이제, 그게 보신탕이더라구.
후추:먹고 나니까 아셨어요?
차범근:아~니 인제, 나중에 보니까… 보신탕. 그냥 계속 한번에 많이 못먹으니까는
쪼금씩, 밤중에도 내가 찾으면은 한 다섯 번인가를 먹었던 거 같애. 그래서 이틀인가
삼일을 거기서 그렇게 하구 회복을 하구, 나와서 이제 시합을 나갔지. 그래서, 그리
구 인제 틈틈이 이렇게 찾아 주구 용돈도 주구, 또 장선생님이 인제 그, 침두 그래
서 그… 또 다른 사람이지. 침 놓는 사람은.

후추:기사엔 장감독님이라고 돼 있던데? 장선생님이라고…
차범근:장선생님은 있고, 또 있었어. 침 놓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후추:학교에?
차범근:응, 금침을… 그래가지구 인제 장선생님이, 허리 다쳐 가지구 내가 한 6개월
이가 7개월… 그리구 나서 전학 그때 전학사건 이후에 한 7개월을 또 쉬었지. 그래서
축구를 이제 못하는가부다 그랬는데 인제 그 금침 맞구.. 뭐, 어떻게 금침을 맞아서
그랬는지 어쨌든 나았어. 그리구 2학년 때 이제 바로 청소년 대회 1년 만에 대표 돼
가지구…

후추:처음 청소년 대회 나가신 게, 71년도요.
차범근:71년도.
후추:그죠? 그게 동경대회 아니었어요? 태국이었어요?
차범근:아, 맞구나. 동경이 처음이다. 71년 동경, 72년 방콕. 거기서 대표선수가 바
로 됐으니까.
후추:고등학교 때 꿈은 파일럿이었어요?
차범근:그렇지 나는 이제, 그때는 그게 어렵지가 않은게 뭐냐면, 삼군사관학교 체육
대회가 있어 가지구 럭비하고 축구를 스카우트 해갔어. 그러면은 그 선배들을 미리
인제 차출해 가지구 공부도 가르치고 뭐 해가지고, 선배들 중에 우리 선배들이 비행
기 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마지막까지 내 고등학교 때도 그 제일… 김진국 선배
바로 위에, 한 사람 있었는데 김상호 선배라고, 그 사람도 우리 경신이고, 조덕구,
다 뭐… 또 있어. 또 한 사람은 백혈병으로 죽고, 한 네다섯 사람 돼. 그때 또 우리
집이 바로 수원전투비행장 밑에 있잖아. 그래서 인제 뭐… 워낙 차, 자동차 이런걸
좋아하고, 하늘에 떠 다니는 거야 뭐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 그런
거 한 번 나중에 파일럿이 한 번 돼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후추:축구 이렇게 오래 하실 줄은 생각도 안 하셨어요?
차범근:그렇지, 그때만 해도 인제 애들 때니까 비행기가 이렇게 집앞에 날라다니고…
신기하잖아? 근데다가 고등학교를 가보니까 실제로 아 비행기 타고 있고, 축구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2학년 땐가 결정을 해야 하더라고,
거기 가는 거를. 이제 청소년 대회, 청소년대표가 되고 이제 거기를 갈려면 미리 인
제 그걸 내야 돼.
후추:신청서요?
차범근:응, 신청을 해야 돼.그러니까, 이제 장선생님도 그렇고 운동을 하는게 좋겠다.

후추:고대는, 고대는 어떻게 가시게 되신 거예요?
차범근:고대?
후추:그때 이차만 감독이 차 앞에서 배째라 그러고 쓰러지고, 난리가 났었다면서요?
차범근:아, 그거는 나 때 그런 게 아니고 저기 때 그랬지. 박종원이. 박종원이 때 전
술적으로 그렇게 한거지 전술적으로.
후추:그럼 감독님 가실 때는 그런 난리나 스캔들 같은 거는 없었나요?
차범근:나는 그렇게 할 고대에서 철통같이 그렇게 해서 따른 데서 손을 쓸 수가 없
게 그렇게 됐었지 근데, 원래는 나는 연대에 가기로 돼 있는 거야.
후추:근데 왜 고대? 황재만 선배 따라서 고대 간 걸로 돼있던데.
차범근:아니, 황재만 선배도 선배지만, 나는 이하연 교장 선생님 때문에, 그 인제 정
확히 그래서 고대로 간거야 사실은. 그래서, 우리 경신 나온 선배들이 고대, 가서 다
죽어 가지구 고댈 한 사람두 안 보냈어. 연대 갔는데 연대간 선배들이 다 죽었어. 한
번도 안 됐다고. 근데 교장 선생님은 연대야. 연대 다~ 이제 그 체육위원회 연대 거
뭐라 그러지? 연대 체육위원회 거기 있잖아, 동문들 다 얘기돼서 뭐 장학금, 뭐 다
이거 뭐 문제 없고… 이렇게 인제 다 된거야. 그래서 인제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얘
기했으면 아 연대지. 거기다 청소년을 일본에서 했잖아. 그때 코뼈가 부러졌는데 연
대 선배들이 다 나와서 그거 병원, 거기서 치료해주고, 어디 가서 이거 치료 받았는
데, 세브란스 가서 세 번 받았는데.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가지구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왜?

후추:연대로 갈 몸이라서?
차범근:그럼. 그리구 숙소에 가 가지구 회식하면 고기도 먹고 … 다 하구 ^^ 근데 이
제 장선생님이 나를 얼로 보내려고 했냐면 나를 경희대로 보내려고, 경희대에 누가
있냐면 최영근 교수가 있었는데 둘이 참 가깝고 둘이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이고 그리
고 나를 인제 갖고 싶어하고 그래서 달라고… 아마 서로 약속이 됐던가봐. 근데 이
제 그냥 너 글루 가라 그러면 말이 안되니까, 고대 있고 연대 있는데. 그리구 교장
선생님이 글루 그렇게 가라는데 모 그렇겐 안되잖아. 그래서 모라고 얘기 했냐하면…
그래가지구, 참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시달렸어. 그래서 한동안 내가 장선생님을 나
중에도 그니까… 내가 그 선생님으로서 어떤 그런 거를 내가 잃었지. 왜 그러냐면
분명히 우리들한테는 거길 안 보내겠다고 그랬거든. 고 다음에 바로 우리 하나 선배
가 폐암으로 아니, 폐… 결핵으로 대학이 다 됐다가 결핵이 판정이 났는데, 치료해
주면 되잖아, 근데 짤렀어, 입학 다 돼 가지구, 저… 그니까 뭐야. 시험 날짜가 다
돼 가지구 짤러 버렸어. 그 사람이 나중에 사고친 사람 아냐, ‘경신 고등학교 살인
사건’에. 지금 뭐 행방불명이 됐는데, 뭐 죽었다고도 하고 어떻게 뭐 갔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서 더더욱 인제 고대 연대는 안 보내겠다. 그럼 어디야, 근데 교장 선
생님은 그러면은… 나는 이제… 가만있어, 양호실로 불러. 막 설명하고 2-30분 고대
그러니까 경희대를 가라 이거야. 그럼 또 이제 교장 선생님은 나중에 교장실로 또
딱 불러 가지구 다 얘기됐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연대루. 연대는 또 내가 원하는 데
고, 또 아 가래니까, 교장선생님이 가래는데 뭐. 얘기할 거 있나. 근데 문제는 이제
장선생님이 이제 아마 이렇게 서로 약속이 돼 있었는지 난리가 났어. 그래서 결국은
학교를 졸업 임박해 가지고, 학교를 내가 가지를 못했어, 그랬더니 퇴학을 시키겠다
고 막 그래가지구 또 뭘 증명 떼어 가지구 학교를 보내고,

후추:근데 고대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온 거에요?
차범근:아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경희대는 가기가 싫고, 아 고대하고
연대가 있는데, 연대가 내가 1지망이고, 고대는 생각도 안 났지… 고대는 아예 포기
상태, 왜? 길이 없으니까… 근데 이제 재만이형한테 한 번 전화가 왔어. 그 이제 우
리 수원 고향사람이고, 그래가지구 내가 이제 그때 너무 이제 막 시달리다 보니까, 그
럼 교장선생님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그냥 일루 튀어야 되겠다. 그래서 인제…
후추:도피하신 거네요?
차범근:근데 마침 전화가 왔길래 아휴, 그럼 나는 고대를 가겠다. 근데 문제는 이제
학교에서 뭐 다 난리가 난거지, 퇴학시키겠다 모 하고 막, 그래서 결국 이제 그렇게
해 가지고 그래서 인제 그 와중에 고대는 인제 앉어서 굴러 들어온 거지 그냥.
후추:그러네, 별 힘도 안들이고…
차범근:그럼. 그때부터는 뭐, 내가 온다 그러면… 워낙 뭐 학교가 막 그렇게 되니까
그래서 인제 세 분이 만나서 결정을 해 주면 되는데 따로 불러 가지구 너는 죽어도 연
대다 너는 경희대다 이러니까 완전 중간에서 짬뽕이 돼가지고… 그 얼마나 내 그 상
처가 컸으면 나중까지 내가 장선생님을 찾아가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재밌는 건 내
바로 위에 홍성호가 연대를 갔다고, 응? 그 아부지가 이렇게 돼서 갔다 그러지만…
그 다음 박종원이는 완전히 고대야. 응? 본인도 고대고. 이제 내가 오늘 숙소도 갔
다 오고,내일 이제 집으로 싸인 받으러 가는 날, 애를 연대로 장선생님이 빼돌렸다고.

후추:그때 그럼 이차만…
차범근:우리보다, 먼저, 새벽에, 내려가서 장선생님하고, 도장을 받고. 왜? 우리랑
가게 돼 있는거야 내일 낮에. 그래서 우리하고 저녁 먹고 내가 인제 숙소에 데려다
주고. 본인도 원하고 집, 아버지도 원하고 문제가 없어 근데,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
구냐면 공화당 지구부장인가 뭐 그래. 그래가지고 뭐 저기… 중앙 무슨 공화당 위원
장이 이제 연대가라고 우겨 가지고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눌러 가지고 하여튼 애를
숙소에서 새벽같이 밤중에 데리고 도장 받아서 애 데리고 날른거야. 그래가지고 차
만형이, 이제 차만형하고 같이 가기로 되어있었지 거기를, 집에를. 나는 이제 다 된
거니까 뭐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스카우트 하는데 나는…

후추:개입을 안 한다?
차범근:스카우트하는데 나는 개입을 할 것도… 빠지고 뭐 우리 후배였으니까 그래서
이제 걔는 연대로 가는데 마지막에 몇 선수를, 다른 애들을 이제 잡기 위해서 못 가
게, 나는 안 내려갔지 부산은. 그래서 고대는 이제 제일 첨에 그렇게 뛴거구…
고대는 완전히 그냥 앉아서…
후추:그때 이제 그 나중에 그러고 연대를 얘네를 보내는 바람에 내가 이제 돌았지.
왜 나때는 그러고 갈 때 못 가게 해놓고 이럴 수 있는거냐 이거지… 그래서 이제 갔
었지 이제 집에를. 누구랑 갔었냐면 홍성호는 이제 나는 후배지만, 같이 다니다가 1
년 꿇어가지고 연대를 갔잖아, 나는 이제 고대고. 그래가지고 참, 정말 그래 이제 따
졌어 이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거냐…. 나때는 그렇게 난리를 난리를 하고 연
대를 다, 다 돼있는데 못가게 그래서 결국엔 나는 고대로 도망간 거 아니냐. 선생님
이 고대 연대는 죽어도 안 보내시겠다 그래 가지고. 그래서 괴로우시니까 인제 나는
그 내막은 모르지 인제. 우리야 인제 젊은 그거에 그냥 뭐, 아 선생님이 나한테 그렇
게 이야기했으니까 나는 그것만 가지고 그냥 막… 그러니까 선생님도 할 이야기가 없
잖아. 소주 갖고 오래 가지고 그냥 소주만 딥따 드시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장선생님
이 한동안이야, 한동안. 그래서 참… 내가 스승으로서 장선생님은 그 존경할 수가 없
다, 이러 이렇게 그래 가지고 그냥 한동안. 뭐 이제 그랬었지… 근데 나중에 이제,
대우 뭐 이렇게 들어가시고 그러면서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해도 하고, 다
지난 얘기니까 인제 그렇게 됐었지. 한 동안은 아주… 이건 있을 수 없는 거다, 이건
제자한테 어떻게 그런… 응? 아주 막 상당했었지 그때.

후추:근데 고대 가신 건 후회 안 하시죠?
차범근:잘했지, 연대 갔으면 완전히 뭐…
후추:왜 후회 안 하세요, 고대 가신 건?
차범근:고대는, 고대는 우리처럼… 저 우리, 그거에 맞잖아. 우린 뭐 얄쌍하고 그런
게 아니잖아. 좀 투박하고 촌놈이고 학교 자체가 그러니까. 우린 뭐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3학년 때까지도 고무신 신고 다니고 그랬으니까…
후추:그래요?
차범근:그럼…

후추:축제에서 만나실 때도 그러고 나가셨어요?
차범근:그럼~
후추:진짜?
차범근:그럼, 고무신 신고… 목욕하고 뭐…
후추:사모님이 축제 파트너가 원래는 감독님 친구분 파트너였어요?
차범근:아니, 그게 아니고….응응…. 축젠지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우리 과 친구
가, 이제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저 사람 따라다니면서 죽겠다고 그런 친구가 하나 있
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조성훈인가 이렇게 유도하고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이제 저 사람을 저렇게 죽기살기로 쫒아 다니는데, 저사람 친구가 뭐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 같은 과니까 걔를 통해서 이렇게, 근데 우리 대표팀 합숙
을 하고 있었으니까 학교에 잘 없었지. 그땐 뭐 주로 합숙을 마니 하니까. 그래서 이
제 약속을 해 놨는데 이제 그 친구가 인제 무슨 일 때문에 부산을 내려갔대.
후추:그 유도하는 친구가요?
차범근:아니아니… 저 사람 친구가…
후추:아, 사모님 친구가~~
차범근:친구가 신청을 한거지, 저사람이 신청을 한 게 아니었거든. 그래서 이제 나야
뭐 모르지 이제, 저 사람이 그렇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줄 아는 거지. 그 주영인가
뭐 그런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오더니… 뭐, 뭐라 그러는데 하여튼 나중에 알고 보니
까 저 사람이 아니고 그 친구래는거야. 그래 가지고 없으니까 뭐, 너라도 나와라 그
래서 나는 이제 저 사람인 줄 알고 또 점잖게 나가서 그렇게 만났지. 이제는 만난걸,
만나자마자 내가 결혼하자고…

후추:그러셨다면서요?
차범근:어..
후추: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차범근:뭐 황당하긴 모 좋았겠지 뭐. ^^
후추:저 안암동 로타리에 ‘키 다방’ 이야기 좀 해주세요. ‘키 다방’이요.
차범근:그 키 다방은… 그 고려대학교에…
후추;축구부 아지트에요?
차범근:축구부, 운동부… 운동, 그러니까 야구, 농구, 축구… 하여튼 5개부에 대한…
그 아줌마가 5개부 운동 선수들을 아주 굉장히 잘해줬지.
후추:박희수여사…
차범근:그러니까 해설하시는… 야구해설하시는 이광환!
후추:이광환? LG 감독이었자나요?
차범근:모르겠어… 하여튼 우리 막 드나들 때에는 이광한 감독이 이제 제일 그 아주
머니의 인제, 사랑을 받는 선수였었어. 그러니까 그냥 훤하더라고. 그 사람, 김동광…
또… 럭비만 아니고 하여튼간 야구, 농구, 축구는 하여튼 그 사람이 거의 뭐 먹여 살
렸다고 하면 돼. 거기서 앉아서 뭐 차도 마시고 뭐하고 그렇게 해서 그렇게 인제 거
기를 다녔었지. 특별히 이제 그 거기 가면 다 엄마엄마 그러고 인제 그분을 그렇게
부르고… 재만이형, 나 특히 아주 상당히 이제 잘해주셨고.

후추:기사에도 그렇게 나왔더라구요. 황재만 선배 인터뷰에서… 뺏겼다고, 범근이한
테 뺏겼다고, 그사랑을…
차범근:내가 워낙 또 이제 신인으로 또 이제 그렇게 또 이제…
후추:잘하시니까
차범근:하여튼 뭐 나뿐 아니고 모든 운동선수 들어오는 신입생 선수들이 그러니까 일
단을 가는 데가 거기였어지 그때는. 일단 스카우트해서 들어오면은 선배들이 이제 거
기 다 있었으니까.
후추:동경 청소년 대회에서 만난 김미은이란 학생 기억 나세요?
차범근:그렇지 뭐 세 번인가 만났…거 세 번인가? 두 번인가,한국에 한 번 나왔었고…
후추:대학교 1학년 때죠?
차범근:대학교… 아냐, 고등학교 3학년 때. 2학년 때 청소년을 갔으니까. 2학년 때
우리 청소년 갔는데 그 때 고등학생이 셋이었었어. 나하고 이정국이하고 어… 유영화
라고 있었어. 그래가지구 그 세 선수들이 고등학생이고 나머지는 뭐 은행, 대학교,
우리가 제일 어린 막내였었지. 그래 가지고 인제 뭐 왔다 갔다, 이제 그때는 교포들
이 많이 왔었으니까. 그때 인제 또 무서워 가지구두 뭐 북한 뭐뭐 조총련 이래 가지
고두, 그래서 이제 나, 고등학교 애들은 이제 그… 유영화, 나… 랑은 이제 그, 거
기 고등학교하고 이렇게 거 펜팔 뭐 비슷한 거 이래 갖고 한번, 한국에 그 가족들이
있어 가지고 한번 나갔었어… 만났었어.

후추:어렸을 때… 고등학교 때나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 있으셨어요? 그
때부터 베켄바워였어요?
차범근:근데 어렸을 때는 뭐 베켄바워가 우선 공을 깨끗하게 차니까 그래서… 뭐 이
렇게 부딪히거나 뭐 그렇지가 않잖아. 그래서 많이 좋아했지.
후추:그때 인터뷰 하실 때 보면 고등학교 3학년 때나 대학교 1학년 때 항상 우상이
베켄바워 였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었어요…
차범근:나는 그 하는 베켄바워의 그 스타일이 참 마음에 들고… 성격이겠지 그거는.
후추:72년도에 브라질 싼토스 팀 한번 왔었죠… 그때 경기 뛰셨죠?
차범근:뛰었지, 그때 골도 넣고…
후추:그땐 어떠셨어요 소감이? 그때 처음으로 브라질 프로팀…
차범근:펠레. 옛날에는 프로 1부를 만나는거는…
후추:거의 없는 일 아니에요.
차범근:그러니까 꿈 같은 얘기지…그 팀들하고 경기 한다는 거는… 그러니까 미지수
지, 믿어지지가 않는 거지, 우리 실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공포의 대상
이지 한마디로. 그사람들은 뭐 신기에 가까운 걸로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때 펠레가 그… 아시아 투언가 그거 하면서 그냥 뭐… 우리 또 한국 있잖아,
그냥 하면 되는데 착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막 붙어 가지고… 그래두 한 골 넣더라고.
내가 첫 골 넣고 아마… 저기, 회택이형인가 골 넣고.

신앙인 차범근

후추:76년도 말레이시아 박스컵, 마지막에 세 골 넣으신거요.
차범근:응~ 76년도?
후:네. 4:1로 지고 있다가. 후반 38분 42분 43분…
차:시간은 모르지 나는…
후: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어요?
차:그러니까 그런 게 이제… 그, 글쎄 인제 뭐 의지, 내 의지로다가 될 수 있는 거는
아니고 그런 게 이제 그 신앙을 갖게 된 그런, 상당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아 이 세상에 신의 존재가 있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그런 경우지. 그거는
내가 뭐 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고 그야말로…. 그냥 첫 골도 때렸는데 맞고 나오
는 거를 박상인이가 넣고, 그 나머지도 그냥 뭐 거 막 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가는
순간에, 때리면 들어가더라고. 돌아서면서 때리면 들어가고… 그러니까 신들렸다고
하는 게 바로 그런 거지 응? 신들렸다 그러는 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는
뭐 어떤 성령의 그런 도움이고, 일반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는 신들렸다고 얘기 하는…
그냥 그때는 그 뭐뭐 어떻게 의식적으로 하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 골을 넣기 위
해서 막~ 그러다가 그냥 돌아서서 때리면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래서 5분 동안에 세
골이 터진거지, 난리가 났지.

후:77년에 이천석 목사님 기억나시죠.
차:그럼, 77년…
후:12월 24일… 그 전에 이영무씨 작은 아버지가 전도사였어요?
차:지금 목사님이시지.
후:아, 먼저 그럼… 이, 안수기도 때 모 뜨거운 게 이런 왼쪽 무릎으로 확 올라오는
게 느껴 지셨다는 데… 그때 고질병이던 무릎 치유가 안 되어서 애 먹으시다가 그 안
수기도 같이 받으시면서 무릎도 낫고 신앙도 갖게 되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차:아니 올라오는 게 아니고 여기가 배를 막 움켜쥐고, 타는 것처럼 그래가지고 숨
을 못 쉬었지.
후:아 그래요?
차;그럼. 인제 저 사람 옆에서 같이 기도하고… 근데 뭐, 그 성령 뜨겁게 받으면 여
기가 탄대는 거 아냐, 까맣게. 실제적으로 그런 게 이제, 이제 뭐 그런… 그런 역사
가 무슨 그 자체가 모 이렇게 중요한 거는 아니고, 그러면서 그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우선 그 내면적으로 변화가 생기지. 무슨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이제 하나님의 어떤 그런 존재를 느끼고, 이제 내가 어떤 존잰지도 알게 되고, 내가
뭐를 앞으로 해야되는 지 알게 되고. 그래서 이제 결국은 그게 이제 어떤 그… 하나님
을 믿게 되면서 이제 내가 내면적으로 생활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는, 신앙생활로
바뀌고, 그때 내가 예수를 안 믿었으면 세상 일반 다른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생활
하는 쪽으로 갔을는지 모르지. 근데 그때 인제 내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을 읽으면서부터 이제 내가 느끼는 거지. 그 인
제 뭐 하나님이 그렇게 깨닫게 하시니까 내가 느끼는 거지. 아 내가 이제 어떻게 살
아야 되겠으며 우리가 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알, 느끼게 되고 이제 그것 때문
에 기도하고 그 길이 꿈 같은 그야말로 맨날 테레비, 78년도는 열 시 몇 분에 분데스
리가 해 줬잖아. 그 꿈 같은 거를 놓고 기도한지 1년 만에 그게 이제 기도하는 중에
슐테가 왔다 가고, 일본 재팬컵에 가서 내가 그런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면서 더 그
런 게 확실해지기 시작해서 결국은 독일까지 건너오고, 경기도 우여곡절 속에 그…
그니까 엔트리 접수도 마지막에 하게 돼서 한 경기를 뛰게 되고, 다시 붙들려서 돌아
갔다가 다시 와서도 정말 아주~ 그냥 우연으로 얘기하기에는 너무너무 아주 그냥, 많
은 그런 난제들 가운데서도 길이 열려서 결국엔 프랑크푸르트까지 와서 입단을 하게
되고 그런거야.

후:그러면, 독일은 처음 오시게 된거는 어제도 말씀하셨듯이 그 ‘반두스’인가?
차:그래서 이제, 오게 된거는, 이전부터 꿈이 분데스리가 한 번 갔으면 좋겠다, 이게
꿈이었었지 우리… 막연한 꿈. 근데 70…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나를 위해서 축구를 하는거 아냐. 근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내가 사는 그런 목적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거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
한 생명을 줬고 예수를 통해서. 또 예수 믿는 사람이 나중에 가는거 보면 하늘나라고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이 그러니까 우리를 이땅에 살게 하시고 복을 주신 거니까 그
거를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내야 되는 게 우리 피조물이 해야 될
그런 일이지. 그런 가운데 사명이라고 하면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축구를 했지만 지
금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축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라
고 하는 거는 우선 내가 예수를 믿는 자체가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그 자체도 하나님한테 영광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또 공을 더 잘 차서 더 유
명해지고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면 또 하나님한테 영광이 될 수 있는 거고 사람
들한테 기쁨을 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큰 소망이 생기니까 기도를 하기 시작을 했
지. 말씀을 보고 분데스리가 세계 무대를 보내달라,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서 축
구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축구를 하겠다. 그 담에 가서 돈도
좀 많이 벌고, 그 담에 축구교실, 후진양성도 하겠다 이런 게 기도에 그때 당시 내가
세 가지로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들이야. 축구교실은 78년도 재팬컵을 갔다 오면서 축
구교실, 앞으로 축구학교를 꼭 해야 되겠다
후:그 말씀 하셨어요 예전에

차:응, 그게 있었고, 좋은 축구를 배워야 되잖아. 그래야 세계 축구를 봐야 뭐 내가
가서 뭐를 하든지 하지. 그래서 돈이 있어야 되니까 또 프로에 가면 돈도 많이 준대
니까 뭐 돈도 벌게 해 달라고 그러고 독일 보내달라 그러고. 근데 그게 뭐 그렇잖아,
하루 아침에 분데스리가에 가면, 3류급 선수가 테레비만 나오는 거를 보고, 그래서
내가 우리 저녁에 앉아서 이렇게 테레비 보다가 햐 꿈 같은, 저기 한 번 분데스리가
가봤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허정무가 그러는 거 아냐 꿈 같은 소리 하지도 말라고. 그
게 현실이야 그때는 뭐 지금 이렇게 잘못된 게 아니고, 우리는 3류고 그때는 1부리그
만 만나도 덜덜덜덜 떨 때니까. 똥오줌 못 가리고. 근데 우리가 거기를 갈 수 있다는
거는 꿈이지. 근데 그게 이제 5월 달에 재팬컵을 갔는데, 브라질의 팔메이라스 팀하
고 보르시아 MG의 우도라텍이 왔다고. 그때 내가 팔메이라스 경기도 우리가 1대 0으
로 졌는데 잘했어 그때는 우리가. 굉장히 외국 감독들이 인상에 남게 그렇게 경기를
했다고 글라드빠하고 할 때는 우리가 3대 2로 졌는데, 물론 거기가 잘하니까… 뭐 후
딱 하더니 벌써 인제 세 개 넣더라고 두 갠가… 두 개 때려넣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
나 넣고 그래서 2대 1됐다가, 또 하나 먹고 김재한이가 하나 넣고. 근데 그 경기를
굉장히 잘했어. 그래가지고 그때 우도라텍이 상당히 거… 코가 높은 사람 아냐 그 때
당시에 뭐 관심들은 있을 정도의 그런 경기를 내가 보였으니까. 굉장히 내 스스로 한
테도 자신감을 많이 찾았던 경기지. 그랬다가 인제 대통령배에 9월인가 10월인가 할
때에 우연찮게 그때 계속 기도를 하면서 꿈을 가지고 있을 때 슐테라는 사람이 온 거
지. 어느날 경기 끝나고 중간에 그 축구 협회 박동희 교수를 통해서 그때 그분이 인
제 국제 이산가 국제 부장인가 뭐 그랬었어. 그래가지구 독일 사람이 너 거기 분데
스리가 한 번 가보지 않겠냐 그러는데, 그거야 한번 생각해 봐, 내가 그거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쭉 하고 있는데, 내가 바라던 거지. 나는 가고 싶다
나는 그거를 위해서 지금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이렇게 해 오고 있다. 그
러니까 만나게 해 줬지. 그랬더니 너는 가면 뛸 수 있다 이거지.
후:슐테가?
차:그럼. 갈 수 있게만 해 달라. 근데 그때 내가 이제 군인이었지.

꿈의 무대 – 분데스리가 I

후:예 공군.
차:공군, 근데 그때 공군이 3군 사관, 3군 중에서 가장 길어. 근데 우리 때에 총장…
그게 없이는 우린 스카우트가 못 됐지. 우리때 부터 타군하고 똑같이 해 준다는 조건
에 우릴 스카우트를 했어. 뭐 2년이 지나면 뭐 총장의 권한으로 뭐 어떤 어떤 조항에
의해서 제대가 가능하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인제 우리가 들어갔어. 그걸 가지고 보
여주고 설명을 하고 그래서. 나는 자원입대를 한거거든, 외국으로 갈려고. 근데 나중
에 경기 한 경기 하고 너무 막 시끄러워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그러는데, 어쨌
든 나는 10월… 12월 말 그때 제대로 돼 있는거야. 그러니까 나는 제대하면 바로 갈
려고 생각하고 있던 거고, 그때가 아시안 경기가 12월에 있으니까 끝나고 가면 된다
고 나는 생각을 한거지 왜? 제대가 그때니까…

후:근데 그때 혹시 뭐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얘기 듣고 “국내에서는 저만큼 독일에서
해 주는 만큼 못해줘?” 뭐 그런 말씀 한마디 하시는 바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얘
기도…
차:어어어 그런 얘기가 있었대 그래가지고, 그러니깐 나는 독일 갔다 와서도 대령이
비서야. 대령이 우리 본부에 그니까… 우리 축구단이 그 사람 인사 근무천지 뭐 인사
근무처 처장이 대령이야. 그래서 돈 뭐 인사 이런 거를 하는 게 거기더라구. 그러니
까 총장하고 밀접한 그런 게 있더라구. 그래가지구 나한테 뭐라 그랬냐면, 거 대위한
테 딱 시켜 가지구, 차 딱 태워 가지구, 그거 할 때는 하지도 못해. 대위한테 차 내
주면서 사식, 대방동 저 밤에 뒤로 나가서 3일 동안, 그니까 다시 말하면 그때는 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워낙 여론이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밥 사 먹이라고 야식,
그래서 3일을 타고 났는데 갑자기 탁 끊어졌어. 그래서 혼자 짬밥먹고 혼자 부대 안
에 붙들려 있는거야.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얘기를 해 놓으니까 공군본부
에서 이제 더 이상… 그때 이제 참모 차장이 누구냐면 윤재중씨였었지. 그 사람이 나
제대 말년에 돌아와 가지고

후:그 양반이 그 교통부 장관 하셨다는…
차:응, 그 사람이 이제 휴가 병가 뭐 이런 거 끊어줘 가지구 그냥…
후:다름슈타트 첫, 한 경기하고 나오신거죠?
차:그렇지.
후:거기 경기장에 딱 설 때 어떠셨어요 기분이? 두 골, 아니 어시스트 두 개 하셨다
면서요.
차:뭐뭐뭐… 그거야 뭐… 아이구야,. 뭐 분데스리가를 테레비에서만 보던데 현장에
와 서 있으니까 이게 뭐
후:제정신이 아니셨겠네요
차:그럼, 생각해봐 그리구 1년동안 합숙하고 그 땡볕에서 하다가 여기 왔는데, 내가
봐도 공 처음 차는 사람이야. 나도 공을 찰 수 가 없더라구. 시간차 다르지 뭐 거기
다가 분데스리가지, 뭐 기도하고 나가는 거지. 근데 하여튼 경기를 잘했어. 연습하는
거 봐 가지구는 저게 뭐 경기 뛸 거 같냐? 근데 더 재밌는 건 그 오는 과정이 굉장
히 어려웠어.

후:서독까지요?
차:그럼. 그래서 참…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거야, 여호와…
리그는 그때 12월 24일까진데… 24일날 인가? 경기야. 23일날인가 24일날이 경기였어
그때. 다음슈타트하고 경기가. 근데 선수들이 그 경기를 할려면 등록이 돼야 돼, 선
수 등록이 팀으로. 근데 다 한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안 들어가는 거야 이게.
그래가지구 그때 박동희 교수가 뭐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구 국제 교환을 통해서 뭐
이렇게 해가지구, 그건 저 사람 (오은미씨)이 더 잘 아는데 뭐 어떤 걸로 해서 일
단, 통신으로 하여튼 그게 뭐 가등록이 이렇게 그런식으로 됐어 그게. 그래가지구 뛸
수가 있는데 그 팀만 유독 딱 한… 뒤로 미뤄져 있는 거야 한 경기가 딱. 나머지는
다 끝났고 전반리그가. 12월이니까 끝났지. 그래가지구 그 팀하고 남은 한 경기를 딱
하게 된 거지. 근데 그 한 경기를 잘 해 가지구 그냥 막 온 신문, 또 다른 경기가 없
고 뭐 어디서 이상한 데서 한 놈이 와 가지구 그러니까 신문이 요란 법석을 좀 떨었
지. 그러다 이제 한국에 파장이 좀 커져가지구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군대가 아
직 남았는데, 내년 5월말 제댄데 어떻게 간다 그러느냐?” 그거 인제 허정무 삼촌이
그때 공군본부에, 아니 공군팀 감독이었다고.

후:허정무 감독 삼촌이?
차:응, 허윤정씬가… 그래가지구 방송에 나가서 그랬겠다? 그러니깐 그때 막 난리가
났지 또. 어떻게 제대도 안하고 가느냐 그래가지고 한쪽에선 보내야 된다 모… 하여
간 그래서 안 올려고 사실은 막 애를 썼는데, 1월 5일까지 안 들어오면 그러니까…
그냥 구속이야 그냥. 그래서 1월 5일 날 들어왔어 내가. 미루다 미루다가 안 돼가지
구. 그때 인제 부크만 감독이 거기 감독이었고 슐라프너가 코트레이너였는데, 조감독
인가 그때 내가 못봤지. 그때 그 사람은 부크만만 보고 근데 부크만은 팀이 다음슈타
트가 2부리그로 이렇게 떨어지니까 인정을 받아가지고 3위하는 슈트트가르트루다가
옮겨갔지. 그래서 내가 그 다음에 제대하고 왔을 때는 그팀에 있었지.
후:슈트트가르트에?
차:응.

후:79년도 6월 달에 서울운동장에서 환송경기 하셨잖아요 연고전 OB, 고연전 OB.
OB전? 근데 그때 무슨 인터뷰하신 다음에 모 축구협회하고 불화설이 있다고 뭐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데…
차:불화설이 있을게 없지
후:아 뭐 일개 개인이 가는데 무슨 환송경기냐 이런 걸로 시끄럽진 않으셨어요?
차:아니 그거 저걸 못하게… 아니, 그런 저거는 아니고 이제 축구협회 아니 그때 그
걸로 불화가 아니고, 그때 함흥철씨가 감독이었다고 대표팀. 그… 방콕에서. 근데 이
걸 자꾸 트는 거야. 이쪽에 저사람(오은미씨)이 인제 서류를 해야 되는데, 협회나 체
육부 공군본부 이렇게 뭐가 있어야 등록을 하잖아. 근데 이상하게 자꾸 트는 거야,
함흥철씨가. 그때 협회 부회장인데. 아니 감독인데. 그래서 저 사람한테 전화가 온
거야, 일이 중단이 됐다고. 하다가 지금 막 끝나면 가야 되는데 여권 수속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이 사람이 얘길 해 가지고 한 거야. 그래가지고 막 내가 이제 그때는
이미 내가 간대는 게 거의 다 알려지고 신문에 막 나오는데, 부회장이 한 사람이 있
었어 체육회에.

후:박…박준웅?
차:아냐아냐 체육회에… 노인네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김택수 회장님이 온다 이거
야, 그러니까 김택수 회장님한테 직접 붙어라 이거야. 그 사람도 이제 도와 줄려구.
그래서 이제 김택수 회장, 나, 김택수 회장이 불렀지, 나 함흥철씨, 그 축구한 사람
이야 그 부회장님, 그 부회장님, 훈련… 모라고, 원장이라 그래야 되나? 김성집씨.
근데 거기 인제 그때 체육 그거는 아시안 경기는 축구협회 그게 아니잖아.
후:그쵸, 대한 체육회 쪽.
차:체육회 그거니까, 그리고 또 북한하고 결승전인데, 북한하고 붙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독일 가고 그런 것 때문에 모 안 된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게 해야 된다 그래
서 그게 중단이 됐었던가봐. 그래서 내가 이제, 저 사람이 이제 그렇게 연락이 왔길래
“그럼 나 못한다 이거 해 줘라” 그래서 이제 해결이 안되니까 김택수 회장이 와서
하여튼 “요구가 뭐냐?” 그래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되지 않냐? 끝나면 가야
되는데” 모 항간에는 모르니까 내가 열심히 안 했다고 그러는데, 아, 열심히 안 할
게 뭐가 있어? 그거 때문에 열심히 안 한대는데, 안 할 이유도 없지. 아 독일을 가
야 되는 데 더 잘해야지. 그래가지구 그것 때문에 시끄럽게 좀 피곤하게 그랬었지.
근데 김택수 회장님이 만나 가지고 “보내주겠다 그 서류 하게 해라. 그러면은 최선
을… 몸이 부서져라 뛰어라” 몸 아낀다고 트집을 잡고 그랬었어. 그때 근데 이제
그거는 아니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그거야 뭐 체육회 회장도 그러니까 다
시 하라고 했고, 그래서 인제 결승전까지 뛴거고. 그… 저거는 환송 그거는 협회차
원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환송 그거는 내가 고대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게 좋
겠다. 고대측에서 아마 그런, OB 그거를 해 가지고 경기를 하고 환송 겸 이렇게 해
가지고 끝난 거야.

후:독일 오셔가지구요, 짧게 짧게 대답해 주셔도 되는데, 고기만 죽어라고 드셨다면
서요.
차;그렇지 우선… 몸에 기름이 없으니까, 뛰고 나면 허기가 져 한국음식 먹고 나면
뭐 여긴 비가 많고 땅이 질척질척 하니까 또 힘도 들고 자꾸 느끼한 게 먹고 싶고,
못 견디는거야 몸이. 근데, 한국음식은 먹으면 우선 허기가 지니까, 그거 먹어가지고
는 안… 이제 못 있을거 같고. 저 사람이 음식을 그때는 잘 못했으니까. 고기를 그냥
기름에 이렇게 튀겨 가지고 그냥 집에 오면 그렇게 먹었지. 6개월 동안은 뭐 죽었다
고 생각하고 약으로 알고 먹었으니까. 진짜로. 고기 벌레였었지. 나는 합숙가서도 딴
애들 스테이크 하나 주면, 하나 이상 안 줘 고기. 정해진 양이 있거든, 예산이 다 있
는 거니까. 두 개씩 스테이크가 안 돌아가거든. 근데 나는 배고프다 그러고, 밤에 저
녁에 그 빵 찬 거에다가 스프만 나오는 거, 그거 먹곤 못 견디거든, 우린 양으로 배
를 채웠던 사람이 돼 놓으니까 스테이크 두 개 먹고, 근데 그것도 안 차 내가. 스테
이크 두 개먹으면 100%, 근데 한국음식 먹었다 그러면 3일을 못 가. 그냥 팍 주저앉
아버려. 그래서 ‘아 여기서 앞으로 살려면 체질 개선을 해야 되겠다. 고기를 안 먹
으면 큰일나겠구나.’ 그래서 죽으나 사나, 진짜 살기 위해서 먹는 거지. 그때는 그
걸 밥으로 맛을 알고 먹는 게 아냐 진짜, 솔직한 얘기로. 우선 여기 온 게 두렵고,
분데스리가 자체가, 공포고 한 눈을 팔 그게 없어. 그니깐 뭐 딴 사람들이 초대를 하
고 뭘 해도 어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내 한가지 하는 것도 지금 바쁘고 벅찬데.
그리고 우선 실력들이 뭐 다 좋으니까, 옆에 보면 다 나보다 잘하니까 내 자리가 없는
거야 자리가. 10년 동안… 그 옆에 보면 나보다 다 잘하는 애들이 옆에 있으니까 뭐
게을리 한다든지, 다른 데 갔다 오고 뭐 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고기를 많이
먹었어. 6개월 동안은 뭐. 그래서 그러고 10년이 지나가니까 지금은 뭐 독일 음식, 한
국가면 한국음식, 중국가면 중국음식, 근데 웬만한 사람은 못 견뎌. 먹는 거에.

후:근데, 외국나가서 성공할라면 음식부터 적성에 맞춰야…
차:음식 안 먹으면 여긴 죽었다 깨나도… 뛰지를 못해, 여기 다, 오꾸데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 다… 뛰지를 못해, 후반전까지. 제대로.
후:그러니까 굳이 요즘도 뭐 외국 진출하는 한국 선수나 동양애들 뭐 김치랑 쌀이랑
바리바리 싸갈 필요 없네, 별 도움 안되겠네요?
차:그거? 그거 먹을 거면 그냥 가라 앉는 거지 뭐. 근데 지금은 쟤(차두리)같은 경우
는 이제, 기름이 많이 찼거든, 두리 같은 경우는 괜찮지. 한국에서 옛날에 우리는 대
학교 때도 먹을게 없으니까 라면 국물에 밥 먹고 라면 먹고 그랬으니까 뛰고 나면 푹
꺼지는 그게 되는 거지. 그리고 하루 훈련 강도 높게 해 봐, 그냥 가는 거지. 그니
까 고등학교 때 아니 먹는 것도 없이 그냥 딥다가 빠다에다 그냥 밥비벼 먹고 간장에
다 이렇게 먹고, 고기가 어딨냐 고기가 고기 거 이런 거 돼지고기 기름만 둥둥 떠다
녀도 그렇게 맜있던데 국물이 응? 그러다가 참… 그러니까 음식 못 먹어 가지고는 우
선… 그담에 여기 나오면 가정적으로 바뀌어야 돼 생활이. 프로선수들은… 뭐 말이
좋아, 무슨 뭐… 천만에. 프로선수들은, 이거 완전히 골수분자들이 돼야 돼. 미쳐야
돼. 그담에 그렇게 안 하면 오래 못 가고. 생활이 나쁘면 부상이 생기고, 수면이 부
족하면 부상 생기고, 많이 돌아다니면 피곤하니까 부상 생기고, 집중력 떨어지고 안
돼, 1년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력이 좋아 가지고, 2년 3년은 안 된다 이거지.
그래서 분데스리가를 외국선수, 우리 그럴 때는 5년 이상 분데스리가에 있는 선수는
잘 하는거니까. 경기를 뛰건 못 뛰건 5년 동안 여기 붙어있으면 잘하는 거야. 거기다
뛰는 건 뭐 그건 말할 것도 없지.

후:겔스도르프있죠. 이 ‘사건’ 얘기 좀 말해주세요.
차:게일스도프… 때문에 결국은 이제 슬럼프가 시작이 된 거지. 우리가 그 해 그 준
비하는 두 번째 시즌인가 내가 여기와서…
후:80년돈데요.
차:80년도지?
후:예.
차:처음 와서 두 번째 시즌.
후:예, 레버쿠젠 어웨이 경기에서
차:준비과정을 굉장히 잘했어 그때, 내가.
후:첫 시즌 끝나고 인제?
차:응. 굉~장히… 펄펄 날랐어. 그러고 인제 시작을 잘 했는데 어웨이 경기 인제 거
기 갔는데, 하프라인 부근에서 내가 인제 이렇게 사이드에서 올리면 공을 이렇게 딱
잡아가지고 여기서 수비가 나오니까, 딱 나오니까 주구 뛸려구, 딱 주구 주구 갈려
고 그러는데 여기서부터 태클로 쫙 이렇게 밀면서 나오면서 이걸로다가 이거로다 이
렇게 가위로다가 쳤는데 그게 여길 맞았지 여기. 그래서 요추뼈가 부러진거야. 그러
니까 그대로 그냥 딱 뻗었지. 그래서 당가 실려가지구 거기서부터 와서 여기 프랑크
프루트까지 내려와서 여기 인제, 거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부러졌어. 그래서 인제 고
정시켜 가지고 여기 그 마인가워라고 우리 그 닥터가 거기 있었거든 룬츠하이머가. 그
래서 거기 입원을 했지. 근데, 오줌에서 계속 피가 나오니까. 거기는, 그 신장을 싸
고 있는 요추가 쪼끄매가지구 그냥 뼈하고 달리 요 위에 바로 요렇게 신장 뒤에, 신
장 앞에 아니 뒤쪽으로 딱 있으니까 이게 부러지면 신장에 타격을 받는대니까. 그러
면, 그러니까 최소한 6개월, 잘못하면 축구를 못하게 될 지도 모른대 그 진단이. 그
래서 뭘 어떻게 해. 그저 하나님을 힘으로 안고 사는 사람이니까 인제, 그때도 천상
기도를 또 계속 하면서, 뭐 하나님이 여기서 이렇게 여기서 망신당하고 이렇게 다쳐가
지고 보낼려고 여기까지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힘들게 기도를 계속 했는데 참 회복이
빨랐어.

후:얼마나 걸리셨어요?
차:8주만에 내가 운동장에 다시 나왔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마 우리가 두리를 낳았을
거야.
후:맞네요. 80년도.
차:두리를 낳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아파 가지고 이렇게 안고 있는… 그러고 쟤를 합
숙을 가면서 쟤를 낳았으니까,그리고 이제 첫 경기니까 얼마 안됐을 때지.그래가지구…
후:그때 아까 말씀하신 거처럼, 슬럼프 시작이고, 그저께 말씀해 주신 국내언론 독일
언론 막… 제일 힘드셨을때가 그때 셨어요?
차:그럼, 그때 해가지구, 8주만에 다시 나왔지 세 경기를 뛰었는데 그때… 유럽컵 3
회전인가 소련에 도네츠크라는 팀이 있어. 그 팀하고 할 때 내가 두 골 넣고 우리가
3-0으로, 3-1로 이기고 굉장히 잘했어 회복을 잘했는데, 또 다쳤어. 그때 당시에. 그
러면서 바로 경기를 계속 상승세를 못 타면서 다쳐서 이제 쉬게 되니까, 그러면서부
터 이제 여기 다치고 막 이러면서 이제 몸이, 체력을 이렇게 이렇게 쭉 준비 기간이
했다가 다쳐서 쉬었다가 다시 하니까 몸이 잘 만들어줘야 되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걸 잘 모르니까. 그니까 몸이 체력적으로 떨어져있는 상태에서 자꾸 경기만 나갈라고
생각하니까 못 따라오는 거지, 그런 것도 있고 또 심리적인 그런것도 있고. 그래가지
구 이제 계속 그 반 시즌이 인제 어려웠는데 그 연말에 또 기자양반들이 오셔 가지고
그러면서부터 반년이 더 어려웠었지. 그래서 그 다음 반 시즌이 끝나 갈쯤 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을 했고, 그때 하여튼 내가 전방에 안 서고 처음에 와서 내가 12개 넣
고, 그 때 다쳤을 때 내가 8개 최저골을 넣었었다구.

후:8골?
차:8개..
후:맞네요. 스물 여덟 경기 나가셔 가지구 여덟 골.
차:그래 가지고 첫 경기 내가 31경기인가 뛰고, 그 다음에 28경기인가… 뭐 이렇게
밖에 못 뛰었어. 그래서 3년이 지날 때까지는 그러니까 체력이 따라 가지를 못해. 그
래서 전경기를 못 뛰는 거야. 우선 훈련을 너무 많이 해 내가. 시합에 쏟아야 될 거
를 훈련에 너무 많이 쏟더라구. 그게 인제 한국 식이야. 양의, 거 이제 3년이 지나니
까 내 몸이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기 시작을 하더라구. 그래서 서른 네 경기를 내가
아마 4년 됐을 때 다 뛰었던가 그랬을거야.

후:서른 네 경기요?
차:응
후:서른 네 경기가… 83년-84년 레버쿠젠 옮기신 첫해에 서른 네 경기 뛰셨어요.
차:프랑크푸르트에서도 그런 경기 하나 있을 것 같은데..??
후:프랑크 푸르트에서 고 전에 서른 두 경기 뛰셨구요, 81년도에 서른 한 경기 그렇
게 뛰셨어요.
차:서른 두 경기?
후:예. 그때 뛰셨을 때 15골 팀 최다 득점 올리셨구요.
차;그래가지고 그… 4년이 지나니까 어쨌든, 내가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더라. 그전
까지는 적응을 못해, 몸이 우선. 우선 그 때만 해도 뭐 지금처럼 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던지 뭐 그런 저기 없이 그냥 나만 홀랑 와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노
하우가 없어. 그니까 내가 이렇게 터득해서 알 수 밖에 없는… 기간이었지. 내가 느
끼는 것은 한 3년 4년 지나니까 식사문제라든지…

후:노하우가?
차:뭐 이제 그런 몸이 훈련에 적응하는 거라던지. 아 어떻게 내가 훈련을 내 몸을
이렇게 해가야 되는지 안배 같은 거. 한국은 그냥 토너먼트 툭 하고 끝냈으니까 그런
거를 알 수 있는 기회 같은 거는 없지. 지금은 프로 팀이 있으니까 알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제 그때 당시에 그런 거는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지.
후:그때 인종 차별 같은 거 그런 거 축구장 내에는 없었어요? 페차이 걔는 뭐 인종차
별 그런 거 때문에..
차:아니, 몇 일 전에 이야기 했지. 연봉 문제 때문에…
후:연봉문제 때문에..
차:싸우고 싸움을 해서 35만 마르크 받았는데, 나는 아퍼 있을 때 이런 종이에다가
사인만하라고 가져왔어요 그거를. 우린 또 그것도 모르고 거… 우리 공부하시던 분이
학위하시던 분이 그런 거를 좀 봐줬었거든. 근데, 보더니 그냥 기절할려구 그러더라
구. 이거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 밖에 못 받는거라고.

후:그때 세 사람이면 브라이트너, 베켄바워 이런 사람 아니었나요?
차두리 : 루메니게.
차 : 루메니게, 나…
차두리 : 브라이트너라며..
차 : 브라이트너인지 베켄바워 미국 갔다 와서 인지 하여튼 뭐 그런 봉급이었어. 그
래가지구 뭐, 기절할려 그러더라구 당~장 해야 한다구. 3일을 시간을 줬어 그 사람이
우리한테. 3일동안 해서, 보고 그리고 갖고 오라구. 그런데 인제 그 사람 애기로는
아퍼 있는 사람은 또 계약을 안해준다. 뭐 그 때 당시, 그건 맞는 애기야. 지금도 선
수가 아프면 계약 완료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어떻
게 하겠지. 그런데 어쨌든 아프고..있는데
오 : 아빠
차 : 응~ 그걸 해왔으니까. 가지고 딱 와서 그냥 사인만 해 가지고… ^^ 그게 그 당
시에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이 받는 봉급이었다는 거야. 그러니 그거는 3개월 동안
파니 안 파니 싸움 싸움하고 해서 35만 마르크를 받았는데…
후:페차이?
차:어. 걔들도 여기 애들도 그러는거야. 나보구 얼마에 사인 했냐고. 40만 마르크.
그럼 내가 마이스터 개런티를 받는 거라고.

후:옛날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골인 넣으시면 전광판에 진짜 차범근이라고 한국 말로
나왔어요?
차:그럼. 그거 보고 우는 사람도 있고…
후:그래요?
차:그럼… 대단한 거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예… 차범근 이렇게… 그 스토리는 나
는 관중석에 없으니까 저 사람이 더 잘 알지. 이게 이렇게 나와 저기 거기 나오는거.
후:예
차:옛날에 거 지금 여기 ‘신라’(프랑크푸르트 내 한식당)에 가면 지금은 주인이 바
뀌었지만, 옛날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발트스탄(프랑크푸르트 홈 구장)에 가는 게
낙이니까, 상사 직원들이고 다. 그래가지고 그냥, 그거 보구 감격해서 운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지. 차.범.근. 이렇게 나왔어 ‘토아 골~ 차 범 근`하하하~ 것두 크게

83년도에 프랑크푸르트하고 계약 만료된 다음에…

오 : 아빠 식사합시다.
차 : 어~
후:OK~

[명예의전당] 차범근 – 2

꿈의 무대 – 분데스리가 I

후:예 공군.
차:공군, 근데 그때 공군이 3군 사관, 3군 중에서 가장 길어. 근데 우리 때에 총장…
그게 없이는 우린 스카우트가 못 됐지. 우리때 부터 타군하고 똑같이 해 준다는 조건
에 우릴 스카우트를 했어. 뭐 2년이 지나면 뭐 총장의 권한으로 뭐 어떤 어떤 조항에
의해서 제대가 가능하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인제 우리가 들어갔어. 그걸 가지고 보
여주고 설명을 하고 그래서. 나는 자원입대를 한거거든, 외국으로 갈려고. 근데 나중
에 경기 한 경기 하고 너무 막 시끄러워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그러는데, 어쨌
든 나는 10월… 12월 말 그때 제대로 돼 있는거야. 그러니까 나는 제대하면 바로 갈
려고 생각하고 있던 거고, 그때가 아시안 경기가 12월에 있으니까 끝나고 가면 된다
고 나는 생각을 한거지 왜? 제대가 그때니까…

후:근데 그때 혹시 뭐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얘기 듣고 “국내에서는 저만큼 독일에서
해 주는 만큼 못해줘?” 뭐 그런 말씀 한마디 하시는 바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얘
기도…
차:어어어 그런 얘기가 있었대 그래가지고, 그러니깐 나는 독일 갔다 와서도 대령이
비서야. 대령이 우리 본부에 그니까… 우리 축구단이 그 사람 인사 근무천지 뭐 인사
근무처 처장이 대령이야. 그래서 돈 뭐 인사 이런 거를 하는 게 거기더라구. 그러니
까 총장하고 밀접한 그런 게 있더라구. 그래가지구 나한테 뭐라 그랬냐면, 거 대위한
테 딱 시켜 가지구, 차 딱 태워 가지구, 그거 할 때는 하지도 못해. 대위한테 차 내
주면서 사식, 대방동 저 밤에 뒤로 나가서 3일 동안, 그니까 다시 말하면 그때는 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워낙 여론이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밥 사 먹이라고 야식,
그래서 3일을 타고 났는데 갑자기 탁 끊어졌어. 그래서 혼자 짬밥먹고 혼자 부대 안
에 붙들려 있는거야.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얘기를 해 놓으니까 공군본부
에서 이제 더 이상… 그때 이제 참모 차장이 누구냐면 윤재중씨였었지. 그 사람이 나
제대 말년에 돌아와 가지고

후:그 양반이 그 교통부 장관 하셨다는…
차:응, 그 사람이 이제 휴가 병가 뭐 이런 거 끊어줘 가지구 그냥…
후:다름슈타트 첫, 한 경기하고 나오신거죠?
차:그렇지.
후:거기 경기장에 딱 설 때 어떠셨어요 기분이? 두 골, 아니 어시스트 두 개 하셨다
면서요.
차:뭐뭐뭐… 그거야 뭐… 아이구야,. 뭐 분데스리가를 테레비에서만 보던데 현장에
와 서 있으니까 이게 뭐
후:제정신이 아니셨겠네요
차:그럼, 생각해봐 그리구 1년동안 합숙하고 그 땡볕에서 하다가 여기 왔는데, 내가
봐도 공 처음 차는 사람이야. 나도 공을 찰 수 가 없더라구. 시간차 다르지 뭐 거기
다가 분데스리가지, 뭐 기도하고 나가는 거지. 근데 하여튼 경기를 잘했어. 연습하는
거 봐 가지구는 저게 뭐 경기 뛸 거 같냐? 근데 더 재밌는 건 그 오는 과정이 굉장
히 어려웠어.

후:서독까지요?
차:그럼. 그래서 참…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거야, 여호와…
리그는 그때 12월 24일까진데… 24일날 인가? 경기야. 23일날인가 24일날이 경기였어
그때. 다음슈타트하고 경기가. 근데 선수들이 그 경기를 할려면 등록이 돼야 돼, 선
수 등록이 팀으로. 근데 다 한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안 들어가는 거야 이게.
그래가지구 그때 박동희 교수가 뭐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구 국제 교환을 통해서 뭐
이렇게 해가지구, 그건 저 사람 (오은미씨)이 더 잘 아는데 뭐 어떤 걸로 해서 일
단, 통신으로 하여튼 그게 뭐 가등록이 이렇게 그런식으로 됐어 그게. 그래가지구 뛸
수가 있는데 그 팀만 유독 딱 한… 뒤로 미뤄져 있는 거야 한 경기가 딱. 나머지는
다 끝났고 전반리그가. 12월이니까 끝났지. 그래가지구 그 팀하고 남은 한 경기를 딱
하게 된 거지. 근데 그 한 경기를 잘 해 가지구 그냥 막 온 신문, 또 다른 경기가 없
고 뭐 어디서 이상한 데서 한 놈이 와 가지구 그러니까 신문이 요란 법석을 좀 떨었
지. 그러다 이제 한국에 파장이 좀 커져가지구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군대가 아
직 남았는데, 내년 5월말 제댄데 어떻게 간다 그러느냐?” 그거 인제 허정무 삼촌이
그때 공군본부에, 아니 공군팀 감독이었다고.

후:허정무 감독 삼촌이?
차:응, 허윤정씬가… 그래가지구 방송에 나가서 그랬겠다? 그러니깐 그때 막 난리가
났지 또. 어떻게 제대도 안하고 가느냐 그래가지고 한쪽에선 보내야 된다 모… 하여
간 그래서 안 올려고 사실은 막 애를 썼는데, 1월 5일까지 안 들어오면 그러니까…
그냥 구속이야 그냥. 그래서 1월 5일 날 들어왔어 내가. 미루다 미루다가 안 돼가지
구. 그때 인제 부크만 감독이 거기 감독이었고 슐라프너가 코트레이너였는데, 조감독
인가 그때 내가 못봤지. 그때 그 사람은 부크만만 보고 근데 부크만은 팀이 다음슈타
트가 2부리그로 이렇게 떨어지니까 인정을 받아가지고 3위하는 슈트트가르트루다가
옮겨갔지. 그래서 내가 그 다음에 제대하고 왔을 때는 그팀에 있었지.
후:슈트트가르트에?
차:응.

후:79년도 6월 달에 서울운동장에서 환송경기 하셨잖아요 연고전 OB, 고연전 OB.
OB전? 근데 그때 무슨 인터뷰하신 다음에 모 축구협회하고 불화설이 있다고 뭐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데…
차:불화설이 있을게 없지
후:아 뭐 일개 개인이 가는데 무슨 환송경기냐 이런 걸로 시끄럽진 않으셨어요?
차:아니 그거 저걸 못하게… 아니, 그런 저거는 아니고 이제 축구협회 아니 그때 그
걸로 불화가 아니고, 그때 함흥철씨가 감독이었다고 대표팀. 그… 방콕에서. 근데 이
걸 자꾸 트는 거야. 이쪽에 저사람(오은미씨)이 인제 서류를 해야 되는데, 협회나 체
육부 공군본부 이렇게 뭐가 있어야 등록을 하잖아. 근데 이상하게 자꾸 트는 거야,
함흥철씨가. 그때 협회 부회장인데. 아니 감독인데. 그래서 저 사람한테 전화가 온
거야, 일이 중단이 됐다고. 하다가 지금 막 끝나면 가야 되는데 여권 수속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이 사람이 얘길 해 가지고 한 거야. 그래가지고 막 내가 이제 그때는
이미 내가 간대는 게 거의 다 알려지고 신문에 막 나오는데, 부회장이 한 사람이 있
었어 체육회에.

후:박…박준웅?
차:아냐아냐 체육회에… 노인네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김택수 회장님이 온다 이거
야, 그러니까 김택수 회장님한테 직접 붙어라 이거야. 그 사람도 이제 도와 줄려구.
그래서 이제 김택수 회장, 나, 김택수 회장이 불렀지, 나 함흥철씨, 그 축구한 사람
이야 그 부회장님, 그 부회장님, 훈련… 모라고, 원장이라 그래야 되나? 김성집씨.
근데 거기 인제 그때 체육 그거는 아시안 경기는 축구협회 그게 아니잖아.
후:그쵸, 대한 체육회 쪽.
차:체육회 그거니까, 그리고 또 북한하고 결승전인데, 북한하고 붙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독일 가고 그런 것 때문에 모 안 된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게 해야 된다 그래
서 그게 중단이 됐었던가봐. 그래서 내가 이제, 저 사람이 이제 그렇게 연락이 왔길래
“그럼 나 못한다 이거 해 줘라” 그래서 이제 해결이 안되니까 김택수 회장이 와서
하여튼 “요구가 뭐냐?” 그래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되지 않냐? 끝나면 가야
되는데” 모 항간에는 모르니까 내가 열심히 안 했다고 그러는데, 아, 열심히 안 할
게 뭐가 있어? 그거 때문에 열심히 안 한대는데, 안 할 이유도 없지. 아 독일을 가
야 되는 데 더 잘해야지. 그래가지구 그것 때문에 시끄럽게 좀 피곤하게 그랬었지.
근데 김택수 회장님이 만나 가지고 “보내주겠다 그 서류 하게 해라. 그러면은 최선
을… 몸이 부서져라 뛰어라” 몸 아낀다고 트집을 잡고 그랬었어. 그때 근데 이제
그거는 아니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그거야 뭐 체육회 회장도 그러니까 다
시 하라고 했고, 그래서 인제 결승전까지 뛴거고. 그… 저거는 환송 그거는 협회차
원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환송 그거는 내가 고대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게 좋
겠다. 고대측에서 아마 그런, OB 그거를 해 가지고 경기를 하고 환송 겸 이렇게 해
가지고 끝난 거야.

후:독일 오셔가지구요, 짧게 짧게 대답해 주셔도 되는데, 고기만 죽어라고 드셨다면
서요.
차;그렇지 우선… 몸에 기름이 없으니까, 뛰고 나면 허기가 져 한국음식 먹고 나면
뭐 여긴 비가 많고 땅이 질척질척 하니까 또 힘도 들고 자꾸 느끼한 게 먹고 싶고,
못 견디는거야 몸이. 근데, 한국음식은 먹으면 우선 허기가 지니까, 그거 먹어가지고
는 안… 이제 못 있을거 같고. 저 사람이 음식을 그때는 잘 못했으니까. 고기를 그냥
기름에 이렇게 튀겨 가지고 그냥 집에 오면 그렇게 먹었지. 6개월 동안은 뭐 죽었다
고 생각하고 약으로 알고 먹었으니까. 진짜로. 고기 벌레였었지. 나는 합숙가서도 딴
애들 스테이크 하나 주면, 하나 이상 안 줘 고기. 정해진 양이 있거든, 예산이 다 있
는 거니까. 두 개씩 스테이크가 안 돌아가거든. 근데 나는 배고프다 그러고, 밤에 저
녁에 그 빵 찬 거에다가 스프만 나오는 거, 그거 먹곤 못 견디거든, 우린 양으로 배
를 채웠던 사람이 돼 놓으니까 스테이크 두 개 먹고, 근데 그것도 안 차 내가. 스테
이크 두 개먹으면 100%, 근데 한국음식 먹었다 그러면 3일을 못 가. 그냥 팍 주저앉
아버려. 그래서 ‘아 여기서 앞으로 살려면 체질 개선을 해야 되겠다. 고기를 안 먹
으면 큰일나겠구나.’ 그래서 죽으나 사나, 진짜 살기 위해서 먹는 거지. 그때는 그
걸 밥으로 맛을 알고 먹는 게 아냐 진짜, 솔직한 얘기로. 우선 여기 온 게 두렵고,
분데스리가 자체가, 공포고 한 눈을 팔 그게 없어. 그니깐 뭐 딴 사람들이 초대를 하
고 뭘 해도 어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내 한가지 하는 것도 지금 바쁘고 벅찬데.
그리고 우선 실력들이 뭐 다 좋으니까, 옆에 보면 다 나보다 잘하니까 내 자리가 없는
거야 자리가. 10년 동안… 그 옆에 보면 나보다 다 잘하는 애들이 옆에 있으니까 뭐
게을리 한다든지, 다른 데 갔다 오고 뭐 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고기를 많이
먹었어. 6개월 동안은 뭐. 그래서 그러고 10년이 지나가니까 지금은 뭐 독일 음식, 한
국가면 한국음식, 중국가면 중국음식, 근데 웬만한 사람은 못 견뎌. 먹는 거에.

후:근데, 외국나가서 성공할라면 음식부터 적성에 맞춰야…
차:음식 안 먹으면 여긴 죽었다 깨나도… 뛰지를 못해, 여기 다, 오꾸데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 다… 뛰지를 못해, 후반전까지. 제대로.
후:그러니까 굳이 요즘도 뭐 외국 진출하는 한국 선수나 동양애들 뭐 김치랑 쌀이랑
바리바리 싸갈 필요 없네, 별 도움 안되겠네요?
차:그거? 그거 먹을 거면 그냥 가라 앉는 거지 뭐. 근데 지금은 쟤(차두리)같은 경우
는 이제, 기름이 많이 찼거든, 두리 같은 경우는 괜찮지. 한국에서 옛날에 우리는 대
학교 때도 먹을게 없으니까 라면 국물에 밥 먹고 라면 먹고 그랬으니까 뛰고 나면 푹
꺼지는 그게 되는 거지. 그리고 하루 훈련 강도 높게 해 봐, 그냥 가는 거지. 그니
까 고등학교 때 아니 먹는 것도 없이 그냥 딥다가 빠다에다 그냥 밥비벼 먹고 간장에
다 이렇게 먹고, 고기가 어딨냐 고기가 고기 거 이런 거 돼지고기 기름만 둥둥 떠다
녀도 그렇게 맜있던데 국물이 응? 그러다가 참… 그러니까 음식 못 먹어 가지고는 우
선… 그담에 여기 나오면 가정적으로 바뀌어야 돼 생활이. 프로선수들은… 뭐 말이
좋아, 무슨 뭐… 천만에. 프로선수들은, 이거 완전히 골수분자들이 돼야 돼. 미쳐야
돼. 그담에 그렇게 안 하면 오래 못 가고. 생활이 나쁘면 부상이 생기고, 수면이 부
족하면 부상 생기고, 많이 돌아다니면 피곤하니까 부상 생기고, 집중력 떨어지고 안
돼, 1년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력이 좋아 가지고, 2년 3년은 안 된다 이거지.
그래서 분데스리가를 외국선수, 우리 그럴 때는 5년 이상 분데스리가에 있는 선수는
잘 하는거니까. 경기를 뛰건 못 뛰건 5년 동안 여기 붙어있으면 잘하는 거야. 거기다
뛰는 건 뭐 그건 말할 것도 없지.

후:겔스도르프있죠. 이 ‘사건’ 얘기 좀 말해주세요.
차:게일스도프… 때문에 결국은 이제 슬럼프가 시작이 된 거지. 우리가 그 해 그 준
비하는 두 번째 시즌인가 내가 여기와서…
후:80년돈데요.
차:80년도지?
후:예.
차:처음 와서 두 번째 시즌.
후:예, 레버쿠젠 어웨이 경기에서
차:준비과정을 굉장히 잘했어 그때, 내가.
후:첫 시즌 끝나고 인제?
차:응. 굉~장히… 펄펄 날랐어. 그러고 인제 시작을 잘 했는데 어웨이 경기 인제 거
기 갔는데, 하프라인 부근에서 내가 인제 이렇게 사이드에서 올리면 공을 이렇게 딱
잡아가지고 여기서 수비가 나오니까, 딱 나오니까 주구 뛸려구, 딱 주구 주구 갈려
고 그러는데 여기서부터 태클로 쫙 이렇게 밀면서 나오면서 이걸로다가 이거로다 이
렇게 가위로다가 쳤는데 그게 여길 맞았지 여기. 그래서 요추뼈가 부러진거야. 그러
니까 그대로 그냥 딱 뻗었지. 그래서 당가 실려가지구 거기서부터 와서 여기 프랑크
프루트까지 내려와서 여기 인제, 거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부러졌어. 그래서 인제 고
정시켜 가지고 여기 그 마인가워라고 우리 그 닥터가 거기 있었거든 룬츠하이머가. 그
래서 거기 입원을 했지. 근데, 오줌에서 계속 피가 나오니까. 거기는, 그 신장을 싸
고 있는 요추가 쪼끄매가지구 그냥 뼈하고 달리 요 위에 바로 요렇게 신장 뒤에, 신
장 앞에 아니 뒤쪽으로 딱 있으니까 이게 부러지면 신장에 타격을 받는대니까. 그러
면, 그러니까 최소한 6개월, 잘못하면 축구를 못하게 될 지도 모른대 그 진단이. 그
래서 뭘 어떻게 해. 그저 하나님을 힘으로 안고 사는 사람이니까 인제, 그때도 천상
기도를 또 계속 하면서, 뭐 하나님이 여기서 이렇게 여기서 망신당하고 이렇게 다쳐가
지고 보낼려고 여기까지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힘들게 기도를 계속 했는데 참 회복이
빨랐어.

후:얼마나 걸리셨어요?
차:8주만에 내가 운동장에 다시 나왔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마 우리가 두리를 낳았을
거야.
후:맞네요. 80년도.
차:두리를 낳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아파 가지고 이렇게 안고 있는… 그러고 쟤를 합
숙을 가면서 쟤를 낳았으니까,그리고 이제 첫 경기니까 얼마 안됐을 때지.그래가지구…
후:그때 아까 말씀하신 거처럼, 슬럼프 시작이고, 그저께 말씀해 주신 국내언론 독일
언론 막… 제일 힘드셨을때가 그때 셨어요?
차:그럼, 그때 해가지구, 8주만에 다시 나왔지 세 경기를 뛰었는데 그때… 유럽컵 3
회전인가 소련에 도네츠크라는 팀이 있어. 그 팀하고 할 때 내가 두 골 넣고 우리가
3-0으로, 3-1로 이기고 굉장히 잘했어 회복을 잘했는데, 또 다쳤어. 그때 당시에. 그
러면서 바로 경기를 계속 상승세를 못 타면서 다쳐서 이제 쉬게 되니까, 그러면서부
터 이제 여기 다치고 막 이러면서 이제 몸이, 체력을 이렇게 이렇게 쭉 준비 기간이
했다가 다쳐서 쉬었다가 다시 하니까 몸이 잘 만들어줘야 되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걸 잘 모르니까. 그니까 몸이 체력적으로 떨어져있는 상태에서 자꾸 경기만 나갈라고
생각하니까 못 따라오는 거지, 그런 것도 있고 또 심리적인 그런것도 있고. 그래가지
구 이제 계속 그 반 시즌이 인제 어려웠는데 그 연말에 또 기자양반들이 오셔 가지고
그러면서부터 반년이 더 어려웠었지. 그래서 그 다음 반 시즌이 끝나 갈쯤 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을 했고, 그때 하여튼 내가 전방에 안 서고 처음에 와서 내가 12개 넣
고, 그 때 다쳤을 때 내가 8개 최저골을 넣었었다구.

후:8골?
차:8개..
후:맞네요. 스물 여덟 경기 나가셔 가지구 여덟 골.
차:그래 가지고 첫 경기 내가 31경기인가 뛰고, 그 다음에 28경기인가… 뭐 이렇게
밖에 못 뛰었어. 그래서 3년이 지날 때까지는 그러니까 체력이 따라 가지를 못해. 그
래서 전경기를 못 뛰는 거야. 우선 훈련을 너무 많이 해 내가. 시합에 쏟아야 될 거
를 훈련에 너무 많이 쏟더라구. 그게 인제 한국 식이야. 양의, 거 이제 3년이 지나니
까 내 몸이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기 시작을 하더라구. 그래서 서른 네 경기를 내가
아마 4년 됐을 때 다 뛰었던가 그랬을거야.

후:서른 네 경기요?
차:응
후:서른 네 경기가… 83년-84년 레버쿠젠 옮기신 첫해에 서른 네 경기 뛰셨어요.
차:프랑크푸르트에서도 그런 경기 하나 있을 것 같은데..??
후:프랑크 푸르트에서 고 전에 서른 두 경기 뛰셨구요, 81년도에 서른 한 경기 그렇
게 뛰셨어요.
차:서른 두 경기?
후:예. 그때 뛰셨을 때 15골 팀 최다 득점 올리셨구요.
차;그래가지고 그… 4년이 지나니까 어쨌든, 내가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더라. 그전
까지는 적응을 못해, 몸이 우선. 우선 그 때만 해도 뭐 지금처럼 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던지 뭐 그런 저기 없이 그냥 나만 홀랑 와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노
하우가 없어. 그니까 내가 이렇게 터득해서 알 수 밖에 없는… 기간이었지. 내가 느
끼는 것은 한 3년 4년 지나니까 식사문제라든지…

후:노하우가?
차:뭐 이제 그런 몸이 훈련에 적응하는 거라던지. 아 어떻게 내가 훈련을 내 몸을
이렇게 해가야 되는지 안배 같은 거. 한국은 그냥 토너먼트 툭 하고 끝냈으니까 그런
거를 알 수 있는 기회 같은 거는 없지. 지금은 프로 팀이 있으니까 알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제 그때 당시에 그런 거는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지.
후:그때 인종 차별 같은 거 그런 거 축구장 내에는 없었어요? 페차이 걔는 뭐 인종차
별 그런 거 때문에..
차:아니, 몇 일 전에 이야기 했지. 연봉 문제 때문에…
후:연봉문제 때문에..
차:싸우고 싸움을 해서 35만 마르크 받았는데, 나는 아퍼 있을 때 이런 종이에다가
사인만하라고 가져왔어요 그거를. 우린 또 그것도 모르고 거… 우리 공부하시던 분이
학위하시던 분이 그런 거를 좀 봐줬었거든. 근데, 보더니 그냥 기절할려구 그러더라
구. 이거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 밖에 못 받는거라고.

후:그때 세 사람이면 브라이트너, 베켄바워 이런 사람 아니었나요?
차두리 : 루메니게.
차 : 루메니게, 나…
차두리 : 브라이트너라며..
차 : 브라이트너인지 베켄바워 미국 갔다 와서 인지 하여튼 뭐 그런 봉급이었어. 그
래가지구 뭐, 기절할려 그러더라구 당~장 해야 한다구. 3일을 시간을 줬어 그 사람이
우리한테. 3일동안 해서, 보고 그리고 갖고 오라구. 그런데 인제 그 사람 애기로는
아퍼 있는 사람은 또 계약을 안해준다. 뭐 그 때 당시, 그건 맞는 애기야. 지금도 선
수가 아프면 계약 완료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어떻
게 하겠지. 그런데 어쨌든 아프고..있는데
오 : 아빠
차 : 응~ 그걸 해왔으니까. 가지고 딱 와서 그냥 사인만 해 가지고… ^^ 그게 그 당
시에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이 받는 봉급이었다는 거야. 그러니 그거는 3개월 동안
파니 안 파니 싸움 싸움하고 해서 35만 마르크를 받았는데…
후:페차이?
차:어. 걔들도 여기 애들도 그러는거야. 나보구 얼마에 사인 했냐고. 40만 마르크.
그럼 내가 마이스터 개런티를 받는 거라고.

후:옛날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골인 넣으시면 전광판에 진짜 차범근이라고 한국 말로
나왔어요?
차:그럼. 그거 보고 우는 사람도 있고…
후:그래요?
차:그럼… 대단한 거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예… 차범근 이렇게… 그 스토리는 나
는 관중석에 없으니까 저 사람이 더 잘 알지. 이게 이렇게 나와 저기 거기 나오는거.
후:예
차:옛날에 거 지금 여기 ‘신라’(프랑크푸르트 내 한식당)에 가면 지금은 주인이 바
뀌었지만, 옛날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발트스탄(프랑크푸르트 홈 구장)에 가는 게
낙이니까, 상사 직원들이고 다. 그래가지고 그냥, 그거 보구 감격해서 운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지. 차.범.근. 이렇게 나왔어 ‘토아 골~ 차 범 근`하하하~ 것두 크게

83년도에 프랑크푸르트하고 계약 만료된 다음에…

오 : 아빠 식사합시다.
차 : 어~
후:OK~

꿈의 무대 – 분데스리가 II

후:왜 감독님 하필이면 레버쿠젠 가셨어요? 그 때 뭐 딴 팀들도 있었대매 이태리 팀
도 있었구. 인터 밀란, AS 로마, AS 토리노.
차:어, 처음에는 이태리를 갈려구 그랬었지, 이태리를. 돈도 많이 주고… 나폴리로
가고 이제 쭉 돌아 AC밀란도 가고. AC밀란하고는 일주일 후에 다시 생각해 보구 사인
하기로 하고 돌아왔는데 일주일 사이에, 외국인 선수에 대한 무슨 새로운 규정이 하
나 나타나 가지고 선수들을 더 살 수 있다 그랬는데 뭐 하여튼 어렵게 됐어 이태리로
가는게. 그 때 이제 대우(로얄즈)얘기가 인제
후:아~
차:그런 와중에 대우가 인제… 거액을 제시를 해 가지고 한국을 갔었지. 갔다가 크라
머가 거기를 왔었어.
후:대우에요?
차:어? 아니 아니, 레버쿠젠에.
후:아, 레버쿠젠에…

차:크라머한테 연락이 왔어. 그리고 이젠 우리는 어차피 구단이 이제 그… 우리를 팔
아야 되니까. 무슨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니까 우리도 어디를 가야 되고. 그 때 이
제 집 사건 뭐 이런 게 많이 나와 가지고 우리도 이제 그거를 해결할려면 여기서는 안
되고. 그래서 이제 누렌베르그는 구단쪽에서 접촉을 하고, 레버쿠젠은 크라머하고 전
혀 생소한 그게 아니니까 우리쪽으로 이제 접촉을 해 가지고, 내가 판단했을 때 집이
그 때 이제 아주 어려, 나쁜 건지는 모르고, 그냥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쪽보다는 여
기가 2부리그에서 또 올라왔고, 또 인제 우리를 통해서 새롭게 팀을 만들려고 하는
저거도 있고, 또 아시아 사람을 잘 아는 일본에서 온 크라머도 있었고, 아시아 사람
도 잘 알고 그런 게 있으니까 그냥 모르는 데 가서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낫겠다
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또 그쪽 회장도 만났는데 이쪽이 맘에 들고 근데 단순히 구
단이 조그마니까… 그런 요인들이 다른 쪽에선 괜찮다고 말하게 되서 뭐 가고 보니
까. 거기를 갔어야 됐다는 거지.

오 : 지금까지도 (레베쿠젠) 덕 보구 살어.

후:88년도에 그 UEFA 컵 결승 2차전에서요, 동점골 넣으셨잖아요? 헤딩슛으로.
차:얼마라고?
후:88년도 결승 2차전 스페인. 에스파뇰
차:88년?
후:그때 왜 페널티 킥은 안차셨어요?
차:후페널티 킥? 페널티 킥은 분데스리가 들어와서는 안찼어. 한번도 찬 일이 없어.
후:왜 안차셨어요?
차 : 글쎄 뭐 자신이 없던 것도 있겠지만, 안차게 되니까 거 그렇게 또 뭐 안차게 되
더라구. 또 차고… 찰 사람이 많고, 페널티 킥 그러니까 청소년 대회 때에도 다 내
가 페널티킥…
오 : 간이 작아서 못해 ^^
후:심장은 크시잖아요 ^^
오 : 심장하고 간하고 부위가 다르잖어.
차 : 아니… 기록 찾아봐봐. 한국 국가 대표에서 할 때도 내가 찼고.
후:맞아요

차:청소년 때도 내가 찼고… 내가 찼어. 아시아 청소년 전에서 코뼈 부러졌을 때에도
내가 찼구. 그런데 이제 고려대학교하고 뭐 하다가 하나 위로 이렇게 날라간 공이 하
나 있어. 결국은 이기긴 이겼지만 그러구나선 페날에 대한 이렇게… 미련이 좀 없더
라구. 그 이후로는 안찼어.
후:페널티킥까지 전담으로 차셨더라면 득점왕 여러 번 하셨겠네요?
차 : 페널티 킥을 했으면 골수가 많이 늘어났겠지.
오 : 득점왕까지야 했겠어… 워낙 당신은 골 넣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차 : 그래도 그럴 수는 있었지.
후:아니 아니… 득점 7위, 득점 10위, 득점 4위.
차 : 전혀 안 되는 거는 아닌데… 했으면 굉장히 많이 요인이 됐겠지
오 : 그냥 득점 숫자를 늘렸겠지 ^^
차 : 아유 당신은… 뭐 그렇게… 당신이 인터뷰 해. ^^
후:초를 치세요 진짜… ^^
오 : 아니, 그게 아니고 저번에 내가 시내에 가서 이 책말고 또 있어. 책 하나 그런
데 분데스리가 기록이 쫙 나와있는데 보니까, 아닌게 아니라 루메니게하고 펠러는 많
이 넣었더라고 골을. 당신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많이. 이 사람은 10단위고 그 사람들
은 20단위더라구 ^^
후:루메니게 같은…
오 : 루메니게 펠러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얘기지, 괜히 당신 기죽일려구 그러겠어
당신 사람인데… ^^

후:오케이오케이~ 선수생활 하시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
차:선수생활하면서..??
후:예~
차두리 : 에스파뇰?
후:^^ 너 죽는다… 바람 넣지마.
차:거… 칠십…
후:76년~
차:76년도 그 경기가 굉장히 기억에 남지.
후:그럼 제일 아쉬웠던 경기는 뭐에요? 선수생활을 하실 때.
차:제일 아쉬웠던 경기?
후:예~
차:글쎄 뭐… 특별히 떠오르는 경기는 없네.

후:그럼 감독 하실 때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
차:아니~ 뭐 시간을 줘야지… 두따따따 나도 좀 더듬고…
오 : 그렇게 더듬어서 나온 대답은 진짜가 아니야 그냥 지나가.
후:그렇지.
차 : 아 그렇잖아. 아니 그래도… 아니 어떤 경기가, 여러 개… 십년이 뭐 많이 오래
했으니까 생각이… 이런 경우 그럴 수도 있잖아. 아쉬운 경기가 있긴 있었는데…
오 : 감독으로 제일 아쉬운 경기.
차 : 감독으로 제일 아쉬운 경기?
후:예~
차:저어기 있지. 저… 멕시코하고 할 때.
후:응…
차:아쉽지, 먼저 넣구…
후:그렇지.
차:페널티 맞고 무너졌던 게 아쉽지, 큰 대횐데…

후:분데스리가 뛰실 때 제일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은 누구에요? 라우쉬, 부크먼,
세레코비치, 체벡… 째백, 리벡… 여기 리누스는 없네 여기. 빠졌네 우리가…
차 : 기억에 남는 사람? 글쎄 뭐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억에 남겠지만 그 째백 같은
감독은 하도 술을 많이, 이렇게 취해 가지고 부르니까. 인상이 남지.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는걸 떠나서 좀 인간적으로 아쉽고 좋은 감독인데… 나는 그 사람들한테 상당히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가장 내가… 뭐 거의 너무 그냥 술 먹고 늘 그래 가지고 많이
못배웠어, 내가 그사람한테.
오 : 지금도 베켄바워가 최고 감독으로 꼽는 사람.

후:이때 이 째백은 어디 레버쿠젠에 있었어요 아니면…
차 : 프랑크푸르트
오 : 정말 좋은 감독이야.
후:어 그래요?
오 : 근데 알코올 중독자야. 아 베켄바워가 지금도 자기 감독 생활 중에 최고래는데…
두리 : 좋은 감독이 뭐가 좋은 감독이라는 거야? 잘 가르친다는 거야, 전술이 좋다는
거야 뭐.
오 : 아이디어가 있대 항상 이렇게. 그 사람하고 하펠. 둘 다 돌아가셨다 그지?
두리 : 하펠도 죽었어?
오 : 응 하펠도 위암으로.

후:독일에서 뛰시면서, 저 선수랑은 정말 한 번 같은 팀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했던
선수 있으셨어요?
차 : …
오 : 인터뷰를 왜 그렇게 시큰둥하게 하냐 ^^
차 : 아니,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탁 이렇게 응?
오 : 아니 그게 아니고 대하는 태도가…

후:아니아니아니… 아주 편하고 좋아요 (인터뷰하랴 교통정리하랴…^^)
차 : 아니 그렇잖아. 당신 왜 그렇게 옆에서…
오 : 하기 싫은 사람처럼… ^^
차 : 아니, 물으면은 뭐 생각을 해야 잖아, 선수가 뭐 하나 둘이냐구, 응?
오 : 빨리빨리 해 카메라 돌아갑니다~ ^^
두리 : 이렇게 싸우는 거두 보내야 돼 내 보내야 돼. 이거두 생활이야.
차 : 아니 그런 저거는 바이에른 뮌헨이나 이런 데는 선수들이 워낙 좋았으니까, 다
르지 벌써 우리가, 이렇게 프랑크푸르트만 해도 그 그라보스키하고 횔첸바인 있을 때
다르고, 둘 있을 때 다르고 또 그라보스키 나가고 니켈하고 횔첸바인 있을 때 다르고
횔첸바인 나가고 니켈만 있을 때 달랐거든, 그래서 이제 아까 저 사람도 얘기했는데,
그런데는 공격이 움직이면 볼이 배급이 정확하고, 항상 움직이면 받을 수 있으니까,
다~ 전체적으로 팀이 좋으니까 많이 넣을 수 밖에 없는거야. 우리는 그러기에는 전
체적으로 그런 레벨은 아니었거든, 응? 몇 사람 정도, 응? 한 네 다섯 사람 수퍼고
그 나머지는 또 인제 안 맞고 이러니까 아무래도 그 때만 해도 뭐 브라이트너 라든
지 뭐 한지 뮬러 라든지 리첼바흐스키라든지 패스가 정확~ 좋거든. 그러고 루메니
게 같은 그런 공격수가 우리가 같이 섰다고 생각하면 골 넣을 확률도 훨씬 높지, 둘
이 다 강하니까. 그런거지 근데 이제 누굴 하나 찍어가지구 꼭 그런 저거는 없어.
인제 그런 좋은 선수들하고 더 레벨이 다르니까 여기랑, 지금도 바이… 바이에른 뮌
헨 같은 데는 레벨이 다르잖아, 다른 데하고. 인제 그런거지. 근데 바이에른 뮌헨에
서 나를 두 번째 해에 살려고 그랬거든
후:아…
차:그럼, 그때우리가 내가 20만 마르크 주고 사왔기 때문에 그래서 봉급을 40만 마르
크 준거야. 일년 만에.
후:못 가게 할라고…
차:그럼.

에필로그

차범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후추 명전 상에서는 물론이고 그의 실생활에 있
어서도 그가 앞으로 한국 축구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어렵
고 큰 결단 끝에 차범근의 명전을 시작으로 후추의 명전을 재개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글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또 다른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지나 않을까 밤잠을 설치
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차범근에 대한 정확한 정보 그 하나 만이라도 후추 독자들
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결국은 원고를 싸 들고 차범근
에게 달려갔다. 그 긴 명전 기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고 틀린 점이 있다면 알려달
라고 부탁을 해 가면서 말이다. 그 만큼 차범근은 필자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소
중한 존재이다.

어느덧 한국 축구는 ‘월드컵 16강 진출’ 이란 ‘국민적 염원’의 첫 단추를 잠그기 위
해 홍콩으로 달려갔다. 온갖 언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히딩크’ 소식을 전해 준
다. 독선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소문났던 차범근의 ‘대표팀 운영 방식’을 비웃기라도 하
듯 ‘한국 축구의 수호신’ 히딩크는 선수들을 아주 제대로 ‘잡고’ 있다. 선수들은 아무
불평 불만도 없이 잘 따르고 있는 듯 싶다. 기자들도 아직까지는 꽤나 협조적이다. 협
회는 말할 것도 없다. 왜? 유럽축구의 명장 ‘히딩크’가 그렇게 하라니까… 뭔가 묘안
이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4년 전 이맘 때가 생각난다. 차범근의 지도 방식이 그렇
게 ‘꼴통 스타일’ 만은 아니었나 보다. 세계적인 지도자 히딩크의 스타일도 차범근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 뿐이란 말인가? 2년 동안 ‘반 잠적’
해 있다가 갑작스럽게 대표팀 주전 수비수로 발탁된 이민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 이상윤, 장대일, 황선홍, 진순진… 모조리 다 다시 발탁되는 거 아
닌가?’ 하고 말이다. 히딩크나 차범근이나 전부 ‘그 물이 그 물인 곳’에서 선수,
지도자 생활 했던 사람인데 틀려야 얼마나 틀리겠냐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느
언론에서도 ‘그때 그 시절’과의 흡사했던 모습을 스케치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내 입으로 갈아 마신지 얼마나 됐다고…’ 그들의 심리도 이해는 간다. ‘어? 이거
차범근 때 봤던 거랑 똑 같잖아? 히딩크 이 인간도 또라이 아냐?’ 이런 생각만 부
디 안 해줬으면 한다. 언론이나 축협이나 말이다.

‘후추 명예의 전당 – 차범근 2편’에선 차범근의 그런 ‘독선’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
볼까 한다. 98 월드컵 당시 정작 ‘개차반 취급’ 당하며 쫒겨 나야 할 사람은 과연 누
구였는지, 어쩌면 이제서야 보다 객관적인 판단이 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범근에게 던진 돌이 과연 어떤 돌이었는지… 부디 ‘국민적 염원’을 수행하려고 하
는 히딩크에게도 똑같은 돌이 던져지지 않길 바래는 마음에서, 이제는 제발 좀 변화
하자는 바람 하에… 월드컵 감독 차범근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한다. 진부한 과거사
다시 끄집어 내서 한국의 축구 분위기 ‘다운(DOWN)’ 시키자는 목적이 아니라, 그런
파렴치한 우리 모두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한국 축구의 미
래를 위해서 꼬맹이들과 공을 차고 있는 차범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Prologue

차범근의 명예의 전당 기사가 후추에 실린 후, 후추 게시판을 비롯해서 수 많은 온라
인 창구에선 소위 ‘차범근 부활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동시
에 차범근 감독의 본격적인 공식 활동이 재개되면서 마치 후추가 명전 타이밍을 미리
맞춘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후추란 집단이 평소에 그 정도로 치밀함을 실천하는
조직이었으면 좋겠다. 차범근의 명전 기사 1부 이후 참으로 많은 후추인들이 감사와
격려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후추를 방문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차범근의 ‘무게’를 실감했다. 하지만, 이점 역시 필자의 마음을 편하게
또는 뿌듯하게 만들기 보다는 가슴 한 구석을 시리고 무겁게 만든다. 어느 후추인 말
대로 ‘왜 이제서야 차범근을…’ 또는 ‘왜 또 차범근을…’ 이런 지적들이 사실은
‘감동의 물결’ 이란 표현보다도 더 필자를 주목하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범근에 대해서 그 동안 굶주려 왔는지도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범근을
기억하는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범근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차범근 명전 2부에서는 어쩌면 훨씬 더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어쩌
면 차범근의 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독자가 더 많은 거란 생각도 든다. 차범
근이 얼마나 훌륭한 축구 선수였는지에 대해서 보다도 말이다. 다시 한번 미리 얘기
하지만, 필자가 차범근에 대한 기사를 쓰는 이유는 아주 소박하다. 평소 필자가 알
고 있는 차범근의 모습을 후추인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이다. 필자가 자주 만날 수
있는 차범근이란 사람을 후추란 공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잠시 나마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원래 이번 명전의 제목을 ‘단 5분만이라도’ 라고 지을 생각도 했었다. 그게
바로 필자의 가장 솔직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단 5분만이라도’ 그와 함께 축구
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차범근에 대한 모든 오해와 분노는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을 장담하기 때문이다. 그의 느리고 어눌한 말투, 우리 ‘온라인
사이비 전문가’들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그의 축구 관점, 때론 매섭고 차갑지
만 때론 한 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시선에서 흘러나오는 카리스마를 잠시라도
느껴본다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차범근의 팬, 아니 차범근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차범근이란 인격체에 대해서 수 많은 기사
를 접했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필자부터도 사실은 모
르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래서 그냥 필자가 알고 있는 차범근에
대해서 글을 쓴다.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그를 ‘신격화’, ‘영웅화’ 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필자가 본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평가는 후추인들의 판단에
맡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까발려서는 안 되는’ 아니 차범근의
명예에 그 어떤 훼손이 갈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선 후추는 입을 깨끗이 씻을 생각이
다. 왜? 지금 후추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차범근이기 때문이다. ‘명예회
복’ 운운하며 괜한 사람 또 다시 곤경에 빠뜨릴 소지가 있는 얘기를 또 파헤친다면
그건 후추일 수가 없고 명전일 수는 더더욱 없다.

후추를 처음 창간할 때 필자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후추는 이 땅의 스포츠
계에 트랜드-세터(trend-setter)가 되었으면 한다’는… 만인에게 어필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국민 후추’는 아닐지언정 ‘스포츠를 제대로 아는 소수’에게는 확실히
인정 받는 후추가 되길 바랬다. 결국은 언젠가 그런 ‘작은 목소리’가 다수 관점으
로 자리잡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패션이나 트랜드가 소수에 의해서
우리 생활에 침투하듯 말이다. 지금도 그런 바람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선 후추의 ‘지독히 주관적인 의견’이 불가피하다. 아니, 그 전에 필자는 그렇게 믿
기도 한다. ‘객관성을 빙자한 회색(gray)과의 타협이 우리 곁엔 너무 많다’고… 차
범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또 다시 슬슬 발동을 건다. 이 땅에 수 많은
사람이 비난하고 경멸하는 ‘독설의 발동’을 말이다. ‘독선과 신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바로 관점의 차이’ 란 사실을 후추인들에게 다시 한번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 생활에 다양한 관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리기 위해서 말이다. ‘독선으로 가득찬’ 차범근의 성격을 짚어보면서 왜 필자의 눈
에는 그게 독선 아닌 소신으로 보이는지, ‘타협할 줄 모르는’ 차범근의 철학을 살
펴보면서 왜 필자의 주위엔 이제 타협이 좀 덜 필요한지, ‘실패한 감독’ 차범근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며 왜 필자의 마음 속 ‘맨땅 운동장’은 차범근의 ‘내일’
로 장식되어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2001년 2월9일 오후 3시경… 필자는 마음 속으로 하염없이 울어야만 했다. 일개 고등
학교 축구팀의 창단식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 그리고 그 중심에서 다시 우뚝
선 차범근의 상기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목격하면서 말이다. 3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차범근의 지난 3년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필자는 눈물이 왈
칵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을 짓누르며 수줍은 박수를 보냈다. 오해하고 비난하고 등
돌렸던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를 버린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와 준 차범근에 대한 고마움의 박수였는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그를 ‘남의 품’으로 보내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탐색전: Anti vs. 反 Anti”

요즘 우리 생활에서 유행하는 단어 중에 ‘안티’ 란 말이 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필자는 그 ‘안티’란 말이 참 싫다. ‘안티’란 단어 안에 그 어
떤 그럴싸한 의미와 철학이 내포되어있는지 몰라도 그냥 그 단어가 싫다. 뾰족한 대
안도 없으면서 일단 한번 ‘걸고 넘어지는 태도’ 같아보여서 그런가 보다. ‘안티’
의 개념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다. 아직까지 필자를 완벽하
게 설득시킬 수 있었던 ‘안티 활동’ 내지는 ‘안티 논리’를 못 본 탓으로 돌리기
로 한다. 후추가 대부분의 ‘안티’ 활동에서 빠지려고 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
는 바로 ‘안티’의 씨를 뿌리고 다니는 집단 또는 그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스포츠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눔은 이래서 안되
고 저눔은 저래서 안되고…’ ‘오늘은 이눔이 이래서 이쁘고 내일은 이눔이 이래서
밥맛 없고…’ 어느 신문사에서 먼저 분위기 띄워놓으면 나머지 신문사들도 일제히
그 분위기로 가는… 도무지 독자들이 현명하고 이성적으로 판달 할 수 있는 잣대가
없다는 얘기다. 관점이 획일화 되다 못해서 중심을 잡아주는 추 조차도 없다는 얘기
다. 일부 독자들은 언론이나 방송에서 전문성이나 깊이 없는 멘트 한두 마디에 동화
되어 ‘안티 XXX’ 하며 열 올려서 갈아 마시려고 들다가도, 또 같은 언론에서 ‘어?
이눔봐라? 이눔도 쓸모가 있네?’ 해서 또 좀 띄워주면 ‘안티 XXX’ 하던 집단들은
하루 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흔히 말하는 ‘냄비 스포츠 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귀한 집 자식들 ‘냄비’ 되는 일은 그렇게 한 순간이다. “후추 니들이 안티의 원조
가 아니냐?” 고 말하는 독자들에겐 그저… “아냐..” 라고만 짧게 답하고 싶다.
‘안티’를 제대로 거는 재주도 시간도 없는 집단이다, 후추는… ‘안티 어디어디’,
‘안티 누구누구’… 요즘은 마치 ‘안티’가 없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인정 받지
못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후추가 큰맘 먹고, 제대로 한번 ‘안티’에 ‘안티’를 걸
어보려고 한다. 후추가 ‘反 안티’가 되어보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안티’ 집
단의 젖줄 역할을 해 온 이땅의 스포츠 언론을 향해서, 그들이 양산 해 온 ‘안티 차
범근’에게 말 그대로 ‘안티’를 걸어보려고 한다.

수백 개가 넘는 차범근의 과거 기사, 서적, 사진, 비디오 자료를 이 잡듯이 잡아가
며 명전 기사를 준비하는 동안, 필자는 재미있는 패턴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대다
수의 ‘안티 차범근’ 세력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5-6개의 공통적인 ‘이유’를 중심
으로 그 줄기를 뻗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후추가 뽑아봤다. 소위 ‘안티 차범근’
이 밝히는 차범근의 ‘안티 명분’ Best (worst) 5 가지… 그리고 그에 대한 후추의
반론을…

1. “차범근은 너무 종교적이다! 인터뷰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어쩌고 하
는데, 여기가 기독교 국가냐? 벤치에서도 자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꼴보기
싫다. 당신은 공인이 아니냐. 선수들에게도 기독교를 강요했다면서? 그리고 기독교
믿는 선수들을 주로 기용했다면서?”

“공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듯한…” 뭐 대충 이런 식의 논지다. 공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전도해? 하긴 스캔들을 일으킨 연예인들조차 인터뷰에서 “공인
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라는 말을 하는걸 보면 차범근을 공인이라 부르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기독교 전도는 어떤가? 차범근이 언제 서울역 광장이나 지
하철 역에서 확성기에 대고 소리 지르며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을 했나,
아니면 방송에 나와서 주 기도문을 읊었나? 차범근은 공인이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의 차범근은 기독교를 믿는 한 개인일 뿐이다. 한국팀이 골을 넣어 기쁜 마음에
감사 기도를 올리는 차범근을 카메라가 잡았다면 그것은 차범근이 공인으로서의 신
분을 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가진 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승리를 했다’고 인터뷰하는 것이 싫다고? 차범근이
언제 아랍 국가와의 경기에서 “저들은 알라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의
응징이 계실 것이다” 이런 말을 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당신
은 ‘우리의 승리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가? 한마디만 더하고 싶다. 꼭
기도를 통해서건 염불을 통해서건 차범근만큼만 평소에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주여진
환경에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면 ‘우리나라 만세’ 될 것이다. 축구 판에 종교
문제까지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여, ‘벨트 아래 가격’ 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건 ‘벨트 아래 가격’도 못 되는 노골적인 ‘뻐팅(butting)’ 이다. 말도 안 되는
트집 잡기…

2. “차범근은 권위적이다! 선수들을 옭아 매고 숨도 쉴 수 없게 했다. 국가 대표 선
수들이 중고등 학생들이냐? 다 프로다. 금욕적인 생활 하려거든 혼자 해라.”

히딩크 감독이 한국 선수들의 정신 무장을 강조하면서 통일된 복장, 식사시간 엄수
등을 고집하면 ‘유럽식 선진 지도 방식’이고, 차범근이 그러면 ‘독일빵집 지도 방
식’이란 말인가? 언젠가 TV 인터뷰에서 김병지 선수가 월드컵 사령탑에서 경질된 차
범근의 엄격한 통제 스타일에 대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장면이 기억 난다. 하기
싫은 일 해야 하는 것은 대표팀 선수나 우리 미천한 소생들이나 매 한가지인가 보다.
Welcome to the real world, Mr.Kim… ‘유럽식 지도방식’은 다 그런가 봅니다. 물
론 부채질은 언론의 전매특허지만, 히딩크 스타일은 ‘기강 확립, 정신력 무장을 위
한 행동’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차범근 감독 때? ‘새장에 있던 새는 날지 못한다’
느니, ‘축구 사관 학교 학생들’이라느니 별의 별 말도 안 되는 비난이 나왔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좋다, 차범근이야 어차피 월드컵 감독으로
썬 망가진 몸, 히딩크에게만이라도 나중에 이런 ‘나이트, 술, 섹스 우선 주위’의
뒷통수 갈기기나 없었으면 한다. 불 보듯 뻔하지만…

3. “선수로는 몰라도 감독으로는 함량 미달이다! 우리 전력이 네덜란드에게 0-5로
패배할 전력이냐?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한다. 테크니션들은 왜 기용 안 하는 거냐.
축구선수가 마라톤 선수냐? 죄 덩치 좋고 오래 뛰는 선수들만 기용하는 이유는 뭐냐?
수비축구 실리축구… 싫다 싫어.

차범근에 대한 수 많은 비난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참을 수 없는 비난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선수로는 몰라도 감독으로서는…’ 특히, 98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전에
대한 ‘화살’은 웃겨도 한참 웃긴 화살이다. 우리가 네덜란드한테 왜 이겨야 하나?
까놓고 한번 얘기해 보도록 하자. 우리보다 땅 덩어리도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에 축
구 클럽만 우리보다 수십 배 많고 잔디 구장만 발에 걷어차이고 지도자 개발, 유소년
육성.. 모든 축구 측면에서 우리가 이길 이유가 없는 네덜란드한테 개박 난게 뭐 어
때서? 0-5으로 져서 경질? 97년 청소년 대회에서 브라질한테 3-10… 3-10으로 깨졌
을 때는 왜 감독 안 짤랐나 그럼? 태국.. 태국한테 아시안 게임에서 1-2로 졌을 때
는?? 일본도 아니고 태국한테도 진 적이 있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 입니다. 여보
세요?? 왜 차범근이 이끄는 대표팀은 태국도 아니고 이란도 아닌 네덜란드한테 0-5으
로 깨지면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줄 아는가? 그건 바로 차범근이 이끄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이라면 용서되었을지 몰라도 차범근 만큼은 우리에게 그
런 패배를 줄 ‘자격이’ 없었다. 우리는 그 만큼 월드컵 본선까지의 차범근의 축구
를 사랑했고 차범근의 지도력을 지지했고 차범근의 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16강 진출’을 차범근은 꼭 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지금 감독 차범근의 자질을 욕하는 사람들은 분명 당
시 차범근 축구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 아니 차범근 축구에 도취되어 시력마저 잃었
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만큼 그를 전폭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의 감독으로써의 재능을 욕하진 말자. 차라리 ‘차범근 너 정말 너무 했다, 이 나쁜
인간아..’ 하며 그를 ‘믿었던 도끼’ 취급 하잔 말이다. 차범근 축구가 재미 없다
고 흠집을 내려 하지도 말자. 필자가 본 축구 중에서 97년 가을 그가 이끌었던 한국
축구는 평생 가장 재미있고 스릴 넘치고 짜임새 있었던 축구였다. 그 누가 이상윤의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골 세레머니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최용
수의 살벌한 골 결정력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가 가와구치 오른 팔 앞에서 바
운스(bounce) 되며 그물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이민성의 왼발 슛을 잊을 수 있단 말
인가? 그 누가 잠실 벌의 붉은 파도와 목쉰 함성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모든 것
이 바로 ‘선수 차범근’ 아닌 ‘감독 차범근’ 시절의 추억들이다.

4.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지면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제
발 스스로의 능력 부족이라고 인정해라.”

97년 10월 잠실 주 경기장에서 벌어진 월드컵 예선전 4차전, UAE를 3-0으로 가볍게
밝아버린 우리 대표팀의 감독 차범근의 경기 후 인터뷰엔 이런 말이 있다. “상대팀
의 전력을 상세히 분석해 준 기술 위원들과 열심히 저를 믿고 뛰어준 선수들에게 감
사하다”… 혹시라도 또 무슨 물증이나 근거 운운하는 ‘안티 차범근’ 독자가 있다
면 개인적으로 연락해 주길 바란다. 비디오 자료 그대로 캡쳐해서 보내줄 수도 있으
니까. 이 부분은 사실 차범근의 ‘월간 조선 인터뷰 파문’ 이후 바른 말 해 대는 차
범근에게 간이 콩알만 해 진 일부 축구계 관계자들의 ‘번명 아닌 변명’으로 인해
일반인들에게도 어필 되었던 ‘돌덩이’다. ‘감독은 자기가 맡았으면서 지고 나니까
기술 위원들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지적과 함께…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 두자.
당시 월간조선 8월호를 후추 열혈 독자 jini84 님으로부터 빌려서 읽고 또 읽은 게
4번이다. 그 기사 어디를 찾아봐도 차범근 왈 “내가 잘못해서 진 건 아니다” 라고
책임 회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98년 6월22일, 월드컵 대회 기간 중 전격 경질된
다음날 공식 인터뷰에서 차범근이 했던 첫 마디는 바로 “패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
고… 기술위원회의 그런 (경질) 결정에 따르겠다” 였다. 차범근이 ‘기술위원회 탓’
을 한 것은 월간조선 인터뷰 당시 감독이 요구했던 부분들이 축협 기술위원회에 의해
서 묵살 되었고 그런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선 분명히 할말을 했던 것이다. 모든 역량
과 집중을 한곳에 몰아도 될까말까 했던 멕시코와 네덜란드 전을 앞두고 선수들과 같
은 숙소에 ‘일요일 밤 리포터’ 빙자한 방송인들 들락거리며 선수들 ‘컨디션 점검’
하질 않나? Press Room 빙자한 ‘기자단 고스톱 실’ 만들어서 분위기 초 치질 않나?
축협 간부라고 해서 대놓고 외부인들 앞에서 감독, 선수 비판하질 않나? 필자가 그
분위기에서 대표팀의 총 책임자였더라면 그 인간들 다 싸잡아 때려 죽이고 싶었을
것 같다. ‘쌍화차 내기’ 바둑에서도 훈수 두는 인간들 꼴 보기 싫어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짜장면 내기’ 쓰리쿠션에서도 ‘겐세이’ 붙는 인간들 딱 가버렸
으면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역대 어느 감독들도 그 정도의 ‘관심 표현’은
이해하고 넘어갔다고?? 잘못된 ‘관행’ 그만 하자고 하면 “xx끼” 인가? 필자는
그렇게 상상해 보곤 한다. 만약 당시 축협 기술위원장이 이용수 교수였고 우리 기술
위원들이 지금 히딩크 감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입 다물 줄’ 알았다면.. 차범
근을 조금만 더 내버려 뒀더라면… 이왕 본선진출 과정까지 차범근을 믿었던 사람들
이 마지막 열흘을 더 믿었더라면 차범근의 말로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이 역시 부질 없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5. “독선적이다! 선수 기용에 있어 독선적이고 기술 위원들의 의견을 무시한다. 왜
김주성을 안 뽑았고 최용수를 기용 안 했냐?”

대표팀 구성과 출전 선수 선발에 있어서 최종 권한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아니 다
시 묻고 싶다. 패배의 책임을 가장 빨리 그리고 직접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군가?
쉽게 얘기해서 팀이 ‘부진’하면 제일 먼저 모가지 날라가는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축협 전무? 기술 위원들? 해설자? 그래서 얼마 전 시드니 올림픽 때 우리 축협 기술
위원들 집단 사퇴 했습니까? 여보세요?? 결국은 바로 감독이다. ‘차범근만큼 전권을
휘두르고 지원을 많이 받은 감독이 없다’는 기술위원들의 항변도 있었다. 조민국 당
시 해설위원은 그런 얘기도 했다. “주위의 얘기를 듣지 않아서 감독으로써 경기를
보는 눈이 좁아졌다.” 민국이 형님… 왜 이러십니까? 기술위원들 얘기 잘 듣는 감독
의 ‘장밋빛 시작’과 ‘비참한 말로’.. 얼마 전 아주 live로 생생하게 잘 보았습니
다. 결과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난 제3자의 의견 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믿겠다. 내 운명과 우리나라 축구의 운명이 걸려있는 순간을 남의 손, 남의 눈에 의
존하라고 나를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천하의 차범근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불과 2년 전 이란에게 2-6으로 개박살 난 후 ‘암울하기 짝이 없던’ 한국 축구를 재
정비해서 월드컵 예선전을 그토록 믿음직하게 통과시켰던 차범근이 만약 필자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게 그토록 못할 짓을 했단 말인가? ‘예선전은 아시아권 내에서 치
러지는 예선전이고, 월드컵 본선 때는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야지!!!’?? 차범근 만
큼 세계 축구 잘 알던 당시 기술 위원 이름 한명만 호명해 주십시오. 어느 98 월드컵
출전 선수의 고백이다. “차감독은 냉정한 사람이다.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철저한
사람이다.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선수를 기용한다. 누구를 총애하고 누가 밉보
이고… 웃기는 소리다.”

자, 여기까지가 소위 ‘차범근을 향한 비난 Best (아니 Worst) 5’다. ‘좋은 게 좋
다’ 란 말도 있다. 필자도 때론 ‘좋은 게 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차범근에게
차마 욕을 하지 못 하는 것이다. 차범근 만큼은 ‘좋은 게 좋지도 않고 대충 대충 얼
버무려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명 차범근은 대다수의 ‘우리’와
다른 사람이다. 대다수의 ‘우리’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우리’가 하
지 못한 일들을 그는 해낼 수 있었다. 차범근이 대다수의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
만으로 그를 욕할 수도 그를 추방할 수도 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다. 어찌 보면 후
추가 ‘안티’를 거는 ‘안티 차범근’ 목소리는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Pro 차범근’ 집단이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웅에 대한 사랑
과 기대는 언제까지나 한결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무조건적으로 그를 섬기고 추앙하
라는 얘기가 아니라, 누가 봐도 ‘상식 이하’의 언행을 범한 게 아니라면, 영웅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사랑과 이해가 밑바탕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영웅’이란 ‘트리플 크라운’ 만큼이나 흔치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언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웅을 버리
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귀 솔깃한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
서 우리들의 영웅은 그토록 쉽게 버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차범근은 그런 식으
로 일부 감정적인 비 전문가들의 입과 손으로 인해 매도되어선 안 되는 우리들의 몇
안 되는 세계적인 보배이다.

차범근의 대표팀이 비록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했다손 치더라도 필자는 차범근을
요한 크루이프와도 마르코 반 바스텐과도, 그리고 거스 히딩크와도 바꿀 수는 없다.

‘정면승부 1: 울산 현대 감독 차범근’

1990년 11월 23일 현대 구단과 정식 계약을 체결한 차범근은 한국이 나은 불세출의
스타 ‘차붐’이 아닌 현대 프로 축구단의 감독 차범근으로 한국 축구계에 돌아왔다.
2년 연속 최하위권에 처진 팀을 3년 안에 정상에 올려 놓는다는 청사진과 함께 차범
근의 야심찬 독일 축구의 한국 이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차범근은
‘성적 부진’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현대 감독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우승을 지상 과
제로 여기고 있던 당시 현대 구단과 프로스포츠의 속성으로 볼 때, 그리고 3년 안에
팀을 우승시키겠다던 차범근의 취임 목표를 고려했을 때 그의 퇴진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승을 못했다고 해서 차범근이 한국 축구에 기여한
그 수많은 공헌들을 깎아 내리고 그를 평가절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논리는,
수 십년이 지나도록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와 퇴보를 지속하고 있는 한국 축구의 저열
한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청산해야 할 유산이며, 지금도 겪고 있는 시행착오의 자기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차범근이 당시 현대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어도,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유럽 축구
의 한국 이식은 당시 한국 축구를 발전 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모범 답안이요,
지금도 한국 축구에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 축구의 선각자 차범근

선수로서도 한국인 최초로 선진 축구를 경험하며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던 차범근은
감독으로서도 한국에서는 볼 수도 없었던 선진 축구의 마인드를 가지고 많은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된다. 차범근의 새로운 시도들은 언론의 찬사를 동반하며 그를 시기하
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했으며, 1차 년도 준우승이라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때까
지만 해도 3년 안에 우승이라는 차범근의 취임 목표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는 것
으로 보였다.

차범근이 현대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선수들
을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게 하는 것’이었고, 구단은 ‘프로 구단이 되게 하는 것’이었
다. 그는 아직도 학원 축구에서 고질병으로 남아 한국 축구의 장래를 망치고 있는 요
소들을 없애고, 의식을 뜯어 고치고자 했으며, 스스로 몸 관리 하나도 제대로 못하
는 프로 선수들을 바꾸고자 했고,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대로 된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그가 감독으로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당시(지금도 변하지 않는 곳이 수 없이 많이 존
재하지만) 선수들이 몸 풀 때는 대충 천천히 하고, 음식은 전혀 생리학적이고 과학적
인 근거 없이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 먹고,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엄청난 습관인 정례
적으로 낮잠자는 것 등의 나쁜 습관 등을 금지시킨 일이었다. 워밍업은 적응력을 기
르게 하기 위해 실전 수준으로 진행했으며, 식단을 직접 관리하며 현대 선수들을 프
로 경기에서 뛸 수 있는 프로 선수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운동 선수
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술, 담배를 금지 시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잘
못인지도 모르고 익숙해져 있는 선수들에게는 쉽지 않은 변화였겠지만, 축구 선진국
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당연히 하고 있는 것들을 시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러한 차범근의 조치들에 반기를 드는 선수들이 있었다고 하니, 만일 지금 그런 선수
가 나온다면 온 국민이 쫓아 내려고 할 것이 분명함을 고려하면, 당시 한국 선수들의
얼마나 미개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차범근은 이런 기술 외적인 요소를 뜯어 고침과 동시에 시스템에서도 선진적인 방식
들을 도입해 선수와 구단을 프로화 시키고자 했다. 코칭 스탭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GK 전담코치, 스카우트 담당, 전술분석코치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 축구의 이
식이 어쩌고 저쩌고는 했지만 한국의 후진적인 구단인 현대가 스카우트 담당이니,
전술 담당이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돈 들어 가는 것들을 수용할 리 만무했으니,
10년 지난 지금에서야 대표팀에서 시행하는 시스템을 일개 프로구단에서 시행하려
고 했던 차범근이 얼마나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
는 대목이다. (이것은 역으로 한국이 엄청난 후진국이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남들은 몇 십년 전에 프로 구단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걸 이제서야 대표팀에서 시행
하다니… )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1년 훈련계획을 수립하여 1월 4일부터 시즌이 끝나는 11월
3일까지의 모든 훈련 일정과 경기일정, 선수들의 이동방법과 시간, 숙식장소와 시간
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었던 대우의 엥겔도 3개월 단위의 훈
련 계획표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차범근이 얼마나 철저한 과학화를 추구했고, 선
진적인 시스템을 수립하려고 했었는지 알 수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감독이
경기 일정에 맞춰 1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보편화된 일’이라고…

차범근은 또 하나의 시스템을 시행하려고 했다. 십여 년 동안 탁상공론만 계속되던
‘클럽 시스템’이 그것이다. 아마추어팀을 2군 밑에 두는 구상이었는데, 지금도 제대
로 시행되고 있지 않은 시스템이 당시 진행될 수 있었을리가 만무하다. 혹자는 이렇
게 말한다. ‘너무 앞서갔다’고, 그러나 그건 앞서간 게 아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니냐’고 떠들던 사람들로 인해 일
본에 10년은 앞서 있다던 한국 축구가 10년도 안되어서 일본에 몇 년은 뒤진 꼴이 되
지 않았는가 말이다.)

차범근은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명백히 반대 하던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당
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례로, 92년 말 축구 협회와 일화를 제외한 프로구단들
이 담합해, 90년 1년 동안 진행되고 유명무실해 있던 2군을 93년부터 폐지하기로 결
정을 하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든 2군을 유지하겠다’고 축구협회의 결정에 반박을
하고 나선 차범근의 행동은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확하
게 알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선각자의 그것이었다.
주둥아리로만 ‘축구 발전’ 외치는 세태와는 동떨어져 행동하는 모습, 그것이 이 척박
한 땅을 비옥한 토지로 만들기 위해 광야의 폭풍우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선각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결국 이런 옹골차고 정도를 가는 행동들이 일련의 무리들로
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10년 전 한국 축구의 풍토에서 진정으로 한국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유일한 인
물이 한국의 프로 축구 감독 차범근이었던 것이다.

감독으로서 4년, 첫해 절반의 성공 그리고 그 후

감독으로서 첫해인 91년 차범근은 90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 브라질 등 세계 최고의
국가들이 채택했던 ‘3-5-2′ 포메이션과 ‘유럽식 압박 축구’의 개념을 도입한 전술을
가지고 감독으로서 데뷔한다.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의 수비수 사이의 간격을 20m
정도로 좁게 유지하며 빠른 템포로 움직이는 차범근의 전술은 리그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고,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은 정규 시즌이 끝났을 때 2위라는 성적을 거머쥐었
다. 3년 내 우승을 목표를 천명했던 차범근과 현대 구단으로서는 만족할만한 성과였
고, ‘구단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목표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92년, 93년 리그 초반에 선두를 다투던 팀이 시즌 끝 무렵에는 2년 연속 3위
로 처지고 마는 ‘뒷심 부족’을 겪으며 차범근의 3년 계약은 끝나게 되었다. 당시 여
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현대가 우승하지 못한 원인으로는, 시즌 후반의 체력 저하,
대표팀 차출로 인한 전력 누수 등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대표팀 차출 문제는 모
든 프로팀들이 겪는 문제로 ‘현대’만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었다라고 강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92년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현대는 중국
다아너스티컵에 가장 많은 6명의 선수(최인영, 최강희, 정종선, 신홍기, 김현석, 송
주석)가 차출되어 후반기 10게임을 남기고는 3위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았다. 주축 선
수들의 부상과 대표팀 차출이 겹쳐 우승 전력에 상당한 차질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는 것이 당시의 중평이다. 반면에 동 시즌 우승팀인 포철과 2위 팀 일화는 주전 중
2명만이 대표팀에 차출되어 현대에 전력적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대표
팀 차출이 성적 차이의 모든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차범근의 전술은 선수들에게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니, 시즌
후반의 체력저하라는 내부적 요인과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겹쳐 당시 차범근
과 현대의 목표인 팀 우승이라는 당면과제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차범근은 구단의
신임을 받아 94년 3년의 재계약을 맺었으나 94년 초반 6연승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시즌 4위라는 성적표를 받고 난 후 4년 동안의 ‘한국 프로 축구 감독’ 자리에서 물러
나게 된다.
감독에 대한 평가는 성적으로 내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프로의 냉정한 논리지만, 리
그 우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약팀을 감독 생활 내내 우승을 노리는 강한 팀으로
바꾸어 놓은 차범근의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평가 절하될 수는 없다.

차범근의 유산 – 진정한 프로 축구인으로서의 모습

차범근은 4년 동안의 ‘현대’ 감독 생활을 통해, 그가 지니고 있던 이상, 선진 전술과
시스템 등을 한국 축구계에 쏟아 내었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던 한국 축구
계에 유럽식 선진 축구가 무엇이며 한국의 축구 발전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
지 명확하게 모든 이들에게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올바른 길을 위해서 고집을 피우
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차범근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선택한 전술도,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례를 한국의 축구계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 아직도 한국의 프로 선수들 중에는 자기 관리를 하지 못
하는 선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외국의 훌륭한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통제하면 ‘역
시’하는 탄성을 질러대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한국의 축구인들이요 냄비 같은 한국의
언론이건만, 축구 선진국 그 어느 나라에서도 감독은 보조적으로 선수를 관리할 뿐이
요 자신의 컨디션과 몸 상태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선수 본인이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한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면서 체
득한 것이요, 본능적으로 그것이 프로로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고 유일한 방
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계에는 이러한 것을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유일하게 최고의 프로 선수로서 세계 최고
의 프로 리그에서 자신이 몸소 체득한 것을 실천하는 유일한 프로페셔널의 예를 차범
근을 통해서야 비로소 눈으로 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차범근은 감독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프로 근성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스스로
프로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며 생활하였다. 그는 평상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
하는 모습 이외에도 ‘현대’ 감독이 되지 마자 울산으로 내려와 ‘조기 축구회’에 가입
하며 지역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나, 홈에서는 전술과 베스트 멤버까지 달
리하며 이기고자 했던 것들, 컴퓨터로 일일이 데이터를 관리하는 모습들, 자신이 옳
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타협하거나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축구로서만 보여주려
했던 모습들을 통해 프로페셔널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인간 차범근을 상상하면 철저한 프로로서 행동하는 그를 모습을 제일 먼저 연
상시킨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처음부터 일관되게 추구해오던 차범근의 철학들
은 ‘종교인 차범근’, ‘축구인 차범근’, ‘인간 차범근’ 위에 존재하는 ‘프로페셔널 차
범근’의 모습이다. 그가 보여주었고 시도하고자 했던 프로페셔널한 축구의 자산들을
우리는 지금 엄청난 돈을 들여 사서 쓰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당시 일개
프로구단에서 일개 감독이 이루려고 했던 것들이 대표팀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10년
전 차범근을 외면한 한국 축구 풍토와 여론… 그들이 버린 것은 차범근이 아닌 한국
축구 미래의 10년이었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별책부록
프로축구 현대 감독 차범근 전적
(정규리그 130전 53승 35무 42패, 아디다스컵 21전 9승 3무 9패)

’91 정규리그 (승점 : 승 2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대우 40 51 17 18 5 49 32 17
2 현대 40 42 13 16 11 36 34 2
3 포철 40 39 12 15 13 46 47 -1
4 유공 40 37 10 17 13 38 40 -2
5 일화 40 37 13 11 16 56 62 -8
6 LG 40 33 9 15 16 44 53 -9

’92 정규리그 (승점 : 승 2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포철 30 35 13 9 8 32 28 4
2 일화 30 34 10 14 6 27 21 6
3 현대 30 32 13 6 11 38 31 7
4 LG 30 29 8 13 9 30 35 -5
5 대우 30 28 7 14 9 26 33 -7
6 유공 30 22 7 8 15 33 38 -5

’92 아디다스컵 (T : 승부차기, 승점 : 승 3 T승 1.5 T패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10 16.0 3 4 1 2 11 10 1
2 LG 10 15.5 4 1 2 3 15 11 4
3 포철 10 15.0 3 2 3 2 15 12 3
4 유공 10 15.0 4 2 0 4 12 14 -2
5 현대 10 11.5 3 1 1 5 10 13 -3
6 대우 10 11.5 2 1 4 3 7 10 -3

‘93년 정규리그 (승점 : 승 4 T승 2 T패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30 68 13 5 6 6 35 23 12
2 LG 30 59 10 8 3 9 28 29 -1
3 현대 30 56 10 6 4 10 22 22 0
4 포철 30 52 8 6 8 8 34 29 5
5 유공 30 48 7 7 6 10 25 31 -6
6 대우 30 40 5 5 10 10 22 32 -10

’93 아디다스컵 (승점 : 승 2 T승 2 T패 0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포철 5 8 4 0 0 1 9 4 5
2 현대 5 8 4 0 0 1 8 5 3
3 대우 5 6 3 0 0 2 6 3 3
4 LG 5 4 1 1 0 3 5 6 -1
5 일화 5 4 1 1 0 3 4 10 -6
6 유공 5 0 0 0 2 3 1 5 -4

’94 정규리그 (승점 : 승 3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30 54 15 9 6 42 30 12
2 유공 30 51 14 9 7 47 31 16
3 포철 30 50 13 11 6 49 37 12
4 현대 30 46 11 13 6 38 30 8
5 LG 30 43 12 7 11 53 50 3
6 대우 30 27 7 6 17 37 56 -19
7 전북 30 14 3 5 22 30 62 -32

’94 아디다스컵 (승점 : 승 3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유공 6 11 3 2 1 11 7 4
2 LG 6 11 3 2 1 7 5 2
3 대우 6 9 2 3 1 8 5 3
4 일화 6 8 2 2 2 4 3 1
5 현대 6 6 1 3 2 7 8 -1
6 전북 6 6 2 0 4 7 15 -8
7 포철 6 5 1 2 3 7 8 -1

정면승부 2: 월드컵 감독 차범근

뛰어난 축구 비평과 그렇지 못한 비평의 차이를 규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장 근본적으로 비평의 차이
가 발생하는 부분으로는, 관전자의 시각차이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더 냉정을 유지
하는 가운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느냐’의 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쉽게 말해서 자신의 나라 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선
수 선발 및 기용 문제, 개인전술, 부분전술, 팀 전술을 포함한 매 상황마다의 전술변
화, 뜻하지 않는 문제 발생시 개개인 및 팀 단위의 대처능력 등과 같은 기술적인 부
분들에 대한 지적을 할 수 있고, 그에 필요한 자기 나름의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
며, 또한 날카로운 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고 본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 위에 말한 모든 것은 기억의 요단강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공의
진행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공의 흐름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게
되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한 승부를 요구하게 되는 거다. 패스 한 번 잘못하는 놈은
바로 역적이 되는 거고, 공 한 번 잘못 받거나 슛 한 번 허공으로 날리면 두고 두고
‘발야구 선수’로 회자되게 된다.
국가대표팀 감독이라고 다른가? 팬들이 원하는 선수와는 다른, 실수하는 선수를 기용
했다는 이유 하나로, 소위 축구를 좋아한다는 팬들에게 집중 질타 당하게 된다. 그리
고 감독의 선택 하에 경기를 뛰다가 실수를 한 선수, 특히 한 번 낙인이 찍혀버린 선
수는 아무리 좋은 경기를 펼쳤어도 평가는 똑같다. ‘50번에 한 번 잘 한 경기’가 되
고, ‘개 발에 땀난’ 경우가 되는 거다. 즉, 사람의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친 관점에
서 경기에 집중하게 되고, 그 결과 역시 이성으로 보다는 감성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사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건 바로,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이 우리 자신의 대변인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
는 매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실수 하나하나에 더욱 민감한 것일
지도 모르고,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훨씬 열광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대표팀의 경기를 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분석
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 국가 대표팀의 경기가 끝난 뒤,
축구와 관련된 여러 게시판을 보면 ‘누구는 잘했네’, 아님 ‘누구는 왜 들어갔냐’, 혹
은 ‘그 인간은 절대 안 된다’는 식의 얘기들만이 나도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부터 97년부터 98년 6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우리의 감성을 마비시키다시피한
‘붉은 악마’ 한국 대표팀의 감독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 글이 독자에게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좋은 비평’이 될 지, 엄청나게 주관적인 ‘나쁜
비평’이 될 지 역시 후추인의 관점에 맡기고 싶다.

96년 12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날아온 충격적인 스코어는 우리들 모두를 경악
시켰다. 대 이란전, 2:6 이라는 대패. 그것도 아시안 컵에서… 그것도 ‘가장 한국적
인 축구’를 구사한다던 박종환 사단의 발끝에서… 아, 그 당시 우리 축구 팬들이 느
꼈던 절망감과 허무함이란… 한 두 달 전에 나오던 ‘한국축구 위기론 Y2K 버전’에 비
해 결코 가볍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한국 축구’ 등의 헤드
라인이 각종 언론을 장식했고, ‘93년 ‘도하의 기적’(말이 ‘기적’이지 어찌 보면 ‘비
극’이었다)을 기억하던 많은 축구 팬들은 코 앞으로 닥쳐온 ‘94 월드컵 예선’이 마치
‘도살장 대문’처럼 느껴졌다.

97년 1월 8일. ‘위기의 한국축구’를 구원할 수 있는 인물로 낙점된 사람은, 다름 아
닌 차범근이었다.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서 새 인물이 필요하다’라는 이유로, 이사회
에서 만장일치로 선임되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년 동안 ‘차붐 신화’를 떨치며
귀국하여 국내 프로팀 감독직에서 4년 만에 퇴출 당하고 만 차범근이었지만, 당시 축
협의 차범근 카드를 놓고 반기를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젠 새로운 한국식 축
구를 만들어 나갈 때가 되었고, 차범근만한 적임자가 없다’ 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반기는 차범근 쪽에서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면서.
장고 끝에 수락한 국대 감독 자리는 차범근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흥분
되고도 치욕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 감독 데뷔전, 97년 1월에 벌어진 호주 4개국 친선 경기대회 대 노르웨이 전에서
의 승리.
▶ 97년 9월 28일.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민성’…으로 기억되는, 솔직히
아직도 그 순간을 상상하면 온 몸에 전율이 찌르르하고 흐르는 2:1의 역전승(소위
‘도쿄대첩’).
▶ ‘축구 대통령’, ‘모든 어려운 현실 속에서 유일한 삶의 낙’, 기자 협회 선정 ‘97
올해의 인물’ 등의 끊임없는 찬사, 광고 모델 요청 폭주
▶ 3.1절에 벌어진 다이너스티 컵 한일전의 패배로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독선론, 특
정선수 편애론, 무리한 신예 선발론…
▶ 불길한 징조. 월드컵을 바로 앞둔 시점, 대 중국 전에서 황선홍의 부상.
▶하석주의 퇴장, 최용수를 왜 기용하지 않았나, 대 네덜란드 전 0:5 패배
▶ 유례 없던 월드컵 대회 도중의 감독 경질
▶ 모 월간지 인터뷰 파문…등

(표) 차범근 감독 휘하의 국가대표팀 전적 (41전 22승 10무 9패)
날짜 경기 결과 득점
97년 1월7일 감독 선임
18일 호주4개국 초청축구 한국 1-0 노르웨이 김도훈
22일 호주4개국 초청축구 한국 1-2 호주 하석주
25일 호주4개국 초청축구 한국 3-1 뉴질랜드 박건하 고종수 유상철
2월 23일 98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한국 2-0 홍콩 서정원 최문식
3월 2일 98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한국 3-1 태국 노상래 하석주 최문식
4월 23일 한중 정기전 한국 2-0 중국 박건하 2
5월 21일 한일 정기전 한국 1-1 일본 유상철
28일 98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한국 4-0 홍콩 최용수 2 유상철 박건하
6월 1일 98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한국 0-0 태국
6월 12일 97 코리아컵 한국 3-1 이집트 박건하 최문식 유상철
14일 97 코리아컵 한국 3-0 가나 서정원 최문식 최용수
16일 97 코리아컵 한국 1-1 유고 서정원
8월 10일 친선축구 한국 1-2 브라질 김도근
24일 평가전 한국 4-1 타지키스탄 김도훈 2 최용수 유상철
30일 한중 정기전 한국 0-0 중국
9월 6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3-0 카자흐스탄 최용수 3
12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2-1 우즈베키스탄 최용수 이상윤
28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2-1 일본 서정원 이민성
10월 5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3-0 UAE 하석주 유상철 이상윤
11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1-1 카자흐스탄 최용수
18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5-1 우즈베키스탄 최용수2유상철고정운김도훈
11월 1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0-2 일본
9일 98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국 3-1 UAE 김도훈 2 이상윤
98년 1월 25일 98 킹스컵 한국 1-2 덴마크 신병호
27일 98 킹스컵 한국 2-0 이집트 최용수, 이상윤
29일 98 킹스컵 한국 2-0 태국 최용수 고종수
31일 98 킹스컵 결승 한국 1-1(5-4) 이집트 최용수
2월 11일 친선경기 한국 0-1 호주
3월 1일 제4회 다이너스티컵 한국 1-2 일본 이상윤
4일 제4회 다이너스티컵 한국 2-1 중국 이상윤 최성용
7일 제4회 다이너스티컵 한국 1-0 홍콩 최용수
4월 1일 월드컵 공동개최 기념 친선경기 한국 2-1 일본 이상윤 황선홍
16일 평가전 한국 0-0 슬로바키아
19일 평가전 한국 2-2 마케도니아 최용수 장형석
23일 평가전 한국 1-3 유고 황선홍
5월 16일 평가전 한국 2-1 자메이카 이상윤 2
19일 평가전 한국 0-0 자메이카
27일 평가전 한국 2-2 체코 황선홍 최용수
6월 5일 평가전 한국 1-1 중국 이상윤
14일 98 월드컵 한국 1-3 멕시코 하석주
21일 98 월드컵 한국 0-5 네덜란드

필자는 이 차트를 작성하면서 차범근이 벤치를 지키던 우리 국가 대표팀의 경기 하나
하나가 떠 올라가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 그러면 차범근 감독 시절의 한국
축구에 대해서 짚어보도록 하자.

차범근의 템포 축구

‘대인 방어, 스위퍼를 둔 위주의 3-5-2 시스템으로 수비를 두텁게 쌓고, 찬스가 왔을
때 양쪽 측면을 이용해 빠른 역습에 나서는 축구. 실리적으로, ‘지지 않는 축구’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재미없는 축구.’

탁 까놓고,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다른 대안은 없었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
황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갔고, 또한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고 본다. 거기다 자
신의 10년 간의 분데스리가에서의 경험 유러 96 대회에서 독일과 체코의 좋은 성적
으로 인해 전술측면에서 자신감이 배가된 상황이었다면?

예나 지금이나 (요즘에 히딩크 감독이 한국 선수들의 개인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
다고 밝혀서 다른 의견이 나오기는 하지만) 자신의 독창적인 축구관에 따른 창의성이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선수들의 개인능력 부족은 우리축구가 가진 가장 최대의 약점
으로 지적되고 있고, 세계축구가 나아가는 방향에 지금보다 훨씬 더 둔감했던 당시
한국축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축구 강대국과 상대할 때,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술축구
로 맞장떠서 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축구팬은 없으리라 믿는다. (있다고? 당분
간은 좌절감에 휩싸이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등록선수가 축구 강대국의
100분의 1도 안되는 한정된 인적자원을 가지고 강대국을 상대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
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지 체력전 위주의 뻥축구 (우리가 그렇게도 욕하는) 밖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지 않는가? 다른 선진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면 해결되었지 않냐고? 그렇다면 그 전
에 비쇼베츠 감독 시절에는 뭐가 틀렸나? 윤정환이라는 비교적 정교한 패싱력을 갖춘
선수가 있긴 했지만, 그 본질은 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두터운 수비를 갖추고, 역습
에 나서는 축구 아니었나? (결코 평가절하하자는 말이 아니다)

자, 98 월드컵 때를 되돌아보자. 사실, 차범근 감독이 사용한 전술을 생각해보면, 독
일을 제외하곤 월드컵 본선 출전국 유일의 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었다. 전통적인 한
국의 수비 라인과 같이 스위퍼가 최후방 수비의 보루로서 존재하며, 그 앞에는 상대
포워드를 맨투맨으로 밀착 마크하는 스토퍼를 2명 기용하고, 전체적으로 일대일의 개
인기를 위주로 하는 공격 보다는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의 활용으로 한 특
징적인 공격.

두번째로, 뻔히 집중마크 당할 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집중 마크를 뚫을 만
한 능력을 갖춘 선수가 보이지 않기에 누구 한 명을 내세우지 않고, 포지션 별로 경
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리더를 여러 명 두는 다핵화 전술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약점인 부족한 개인능력을 조직적인 체력 싸움과 수적인 우세
& 카운터로 버텨보겠다는 전술이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그럼 도대체 그 상황에
서 어떤 전술로서 세계의 강호에게 맞서길 바라는가? 아니, 절대적으로 개인 기량에
서 밀리는데 어떻게 부분 전술이 성립할 것이며, 어떻게 팀 전술이 성립하기를 바란
단 말인가?

독선적인 선수 기용?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전술? 그래 좋다. 관심 있는 독자
께서는, 아래 링크를 한 번 누르셔서 FIFA에서 작성한 98 월드컵 대 멕시코 전의 경
기 리포트를 보시기 바란다. 핵심만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한국의 outstanding
players의 말미에 누가 뽑혀있는지 보기 바란다.
http://www.fifa2.com/scripts/

아마, 98년도 FIFA 월드컵 match report를 작성한 사람들은 도대체 축구를 보는 눈이
하나도 없나 보다. 그런 실수만 하는, 공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선수를
‘훌륭한 선수’라고 칭찬해놓았으니 말이다.

그 경기를, 경기장에서 같이 관람한 필자의 프랑스인 친구 역시 축구 처음 보는 정말
멍청이인가 보다. 어떻게 그런 뭐 같은 선수를, 경기 후에 ‘한국에 저런 선수가 있었
냐.. No 9, 오늘 정말 적 진영에서 혼자서 고군분투했다’라고 평할 수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안 그랬다고? 당신, 그 경기 어디서 보셨습니까? 그 경기 경기장에서
직접 본 한국 사람 그렇게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늘상, 경기장에서 보는 축구랑
TV로 보는 축구가 틀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서 나왔던 사람들인지..

그래, 다 맞는 말이다. 기계같이, 단조로운 팀을 만들었으며, 뽑아야 될 선수를 뽑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선수를 선발했으며, 엔트리에 수비수만 잔뜩 늘어 놓았으며, 정
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상한 변칙 전술을 들고 나와 팀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못하
는 선수는 빼지도 않고 계속 기용했으며, 이상한 미드필더들만 죽자고 교체했었다.
압박은 하나도 없이, 상대에게 드넓은 중원을 그대로 다 내어줬으며 결국 우리의 전
진을 어렵게 만들고, 그 결과는 그대로 경기 결과로 반영되었다. 내친 김에 몇 마디
더할까? 아예 차범근의 축구를 화장시켜버려야 속이 시원할까?

그래. 합리적인 대표팀 운영 스타일과 선진적인 축구관, 하나의 인격체로서 선수들을
대하는 의식, 노력하는 모습… 그래.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냐? 팀이 졌는데. 그것
도 월드컵에서…

역사에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황선홍 선수가 월드컵 본선 직전에 다치지만 않았었더라면…
하석주 선수가 백태클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아니, 퇴장만 안 당했더라면..
차범근 감독이 ‘차범근’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믿는다. 우리나라 축구도 차범근도 지금처럼 이렇진 않았을 것이라고…
그 사이에 0:5를 잊었냐고? 그걸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하냐고? 아니, 당신이 보고 있
는 건 축구 아닌가? 모든 이변의 가능성이 높은? 뭐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떤 동구권의 팀이 네덜란드에게, 그것도 본선에서 1:6으로 박살나지 않았던가?
그래, 그 팀은 한 골이라도 넣었다. 경기 다 결판난 다음에.

필자가 이 글을 읽어도 짜증이 난다. 후추 특유의 예리함이나 매콤한 맛이라곤 없다.
이게 바로 차범근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너나 할 것 없이 범하는 ‘우’ 일런 지도 모른
다. 우리는 차범근을 너무 잘 알고 너무 믿었고 너무 기대했기 때문에 그 이하의 무
엇도 감정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차범근에 대한 수 많은 감정 중에도 미안하다
는 감정이 제일 큰 이유는… 그렇다. 필자 조차도 그 당시에, ‘한국이 졌다, 차범근
이 배신 때렸다’는 분노에 휩싸여 침묵으로 ‘마녀 사냥’에 일조했으므로. 차범근 감
독에 대한 ‘분노’는 어쩌면 ‘졌기 때문’이 아니라 ‘차범근이 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때는, 자신의 쓸개라도 빼
줄 것처럼 열광하다가 한 순간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로 밀어넣어서, 다시 나
오지 못하게 밟아버렸다가, 지금에서야 ‘잘못했다’며 다시 사과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 말한 대로, 이 글을 평가해 본다면? 나쁜 비평? 웃기고
있네. 그런 고상한 단어를 쓸 자격 요건 자체가 안된다. 어릴 때의 우상이, 한 순간
에 몰락해버리는 것이 가슴 아프게 느낀 사람의 ‘한 맺힌 넔두리’? 월드컵 감독 차범
근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단 한가지… ‘실패한 감독 차범근’으로 그를 몰아세우는 일
부 축구인, 언론 그리고 우리 팬들은 아마도 그가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를 달고 태
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몰지각한 발상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필자 역시 한때
는 그 대열의 중심에서 서서 ‘야유’보다도 어쩌면 더 몹쓸 ‘침묵’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 넣기도 했지만, 이젠 안다. 차범근의 전술, 용병술, 분석력.. 이런 것들에 대
한 비난은 단지 결과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97년 가을밤 우리 모두가 느꼈듯이 차
범근의 ‘소신’이 월드컵 본선에서도 ‘승리’로 이어졌다면 김도훈의 기용, 김주성의
탈락, 이동국의 실험… 이 모든 것이 ‘독선’ 아닌 ‘신념’으로 기억될 것이란 사실을…
월드컵 본선에서의 ‘2패’ 때문에, 언론의 부채질 덕분에 애당초 ‘우리가 이겨선 세상
이 너무 불공평해 보일’ 강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치 때문에, 96년 12월 두바이에
서 우리 모두가 느꼈던 ‘한국 축구의 처절함’을 한방에 날려보내주었던 월드컵 감독
차범근에 대한 매도는 결코 우리 축구를 사랑하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패’를 담보 삼아 차범근을 죽이기엔 그는 우리에게 너무
나 많은것을 남기고 떠났다. ‘축구 선수 차범근’ 아닌 ‘축구 감독 차범근’으로 말이다.

정면승부 3 : 종교인 차범근

차범근에게 있어 종교란 어떤 의미일까? 그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축구-신-가족”
은 그의 모든 것이자 삶이었다. 아마 그의 심장 박동이 멈추는 그 날까지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일 것이다. 그가 최고의 프로 축구 선수로서 독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
유 중에는 자기 뼈와 살을 깎는 듯한 부단한 신체적인 노력 외에도,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가 될 수 있었던 종교의 힘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다. 참고로 여기서 차범근이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믿던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단지 차범근 개인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있고, 그걸 믿어서 “차붐”이란 존재가 있
었다면 차범근이 어떤 종교를 믿고 의지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종교란 요소가 차범근의 축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대표팀 감독도 전체 사회로 봤을 때는 한 개인이고, 우리 나라 헌법에는 개인에게 명
백하게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아마도 이건 좋은(?) 초-중등 교육을 받
은 대한 민국의 건강한 남녀노소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제 아무리
국가 대표 감독이라도 자신의 종교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그 종
교가 철들면서부터 의지해온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는 차범근 감독의 갑작스러운 퇴임 이후 불미스러운 말들을 듣게 된다.
바로 차범근 감독이 종교 때문에 특정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
다. 그러면 이런 소문은 왜 갑자기 나타났던 것일까? 여기서 그 소문이 퍼지는 촉매
제 역할을 했던 작은 사건 하나를 살펴 보자.

이 1997년 10월 23일과 24일에 거쳐 중앙 일보를 통해 벌어진 해프닝의 경위는 다음
과 같다.
도올 김용옥씨가 차범근 감독님이 우리 나라 축구 대표팀 경기 후 기도하는 장면을
보고,
- 차감독은 대표팀 감독이며 그러므로 자신의 행실에 대해 조심을 해야 하는 공인이다
- 그리고 공인은 아무데서나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선 안 된다. 왜? 본의 아니게 영향
을 줄 수 있으므로
- 따라서 차 감독은 경기 승리 후 신에게 감사하는 모습을 방송에서 보여선 절대로
안 된다
- 그리고 현재 차 감독의 경기 후 기도하는 행동은 종교 본연의 자신의 신에 대해 감
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외부에 나타내기 위한 한국적인 기독교적 병폐
현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라고 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가장 중점적으로 말한 논리는 “주님의 은총은
나라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퍼지는데 그럼 한국팀이 주님의 은총 덕분에 이겼다고 가
정하면, 상대팀 나라에선 기도가 부족해서 아니면 주님의 저주 덕분에 경기에서 진
것인가”라고 말한 점이었다.

이에 대해 차 감독은

- 국가 대표팀 감독에 대해 모두들 무조건 이겨 주기를 바란다
- 때문에 국가 대표팀 감독 자리에 있는자에게 가해지는 중압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 그래서 자신은 이런 엄청난 중압감을 이겨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겼기 때문에 기도하고,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대표팀 감독이 공인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 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기도는 정당하다
- 마지막으로 경기 후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대표팀 감독 차범근의 심정을 이해해 달라
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보면 차 감독은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가 주는 살인적인
압박감을 이겨 내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비는 것이며, 자신이 경기 내내 이런 중압감을
버텨낼 수 있도록 해준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지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기도한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했었다.

여기서 도올 김용옥이란 사람에 대해서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그가 왜 차범근에게 신문지상으로 논란이 일어날 수 있는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대학 선배’로서 (편집자 주: 이상하게도 차
범근에 대한 몇 편의 공개 편지에는 이 ‘대학 선배’란 말이 자주 나오는 현상을
지나칠 수가 없다) 충고를 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우리가 알
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다음은 도올의 지지 사이트에 나온 프로필
을 옮겨 적은 것이다.

도올 김용옥
- 충남 천안 태생
- 고려대 생물과, 한국신학대학, 고려대 철학과 졸업
- 국립대만대학 철학과 석사 (74)
-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학과 석사 (77)
- 하바드대학 철학박사 (82)
- 고려대 철학과 부교수 부임 (82)
- 고려대 철학과 정교수 (85)
- 고려대 철학과 교수직을 사직 (86년 9월 1일 부)
- 그 후로 자유로운 예술, 저술, 저널리즘 활동
-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90~96)
- 한의사 면허 취득 (96.7.)
- 동숭동에 도올 한의원 개원 (96.9.)
-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교수
- 용인대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
- 중앙대 의과대학 한의학 담당교수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 역임 (96~98)
- EBS와 KBS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서 강좌를 했었고, KBS에선 지금도 진행 중

도올 김용옥의 개인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아마 현재 활동 중
인 모든 지식인들 중 그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동양 사
상부터 신학,무도, 예술, 한의학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도올의 능력는 모든 사
람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프로필을 본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경악에 가
깝다. 하지만 97년 당시에만 해도 도올 김용옥의 이름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해선 지식인층에선 이미 알려져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직접적인 사건이 바로 차범근 감독과의 신문지상에서
의 논쟁이었다. 특히 도올은 이 논쟁에서 차범근의 종교를 쟁점으로 삼은 이후 줄곧
지금까지 꾸준하게 “특정 종교”에 관해서 EBS나 KBS같은 공중파 강좌를 통해 지속
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사실 도올은 비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고, 자
신의 동양 사상을 좀 더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접근 시키기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말
했지만 그 방송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올의 강좌가 특정 종교에게 엄격하다는 것
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그 신도수가 우리 나라 국민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특정 종
교의 수뇌부 측에선 재판부에 방송금지을 요구해 놓은 상태이며 아직도 도올 김용옥
과 그 종교인들 사이에선 “도올 지지 사이트(http://myhome.naver.com/noja2000/)”
와 “안티 도올 사이트( http://www.taopsy.net/)”까지 생기면서 대립 관계가 지속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특정 종교와의 대결 구도는 도올 김용옥의 인기를 끌어 내리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가치를 높여주는 효과를 낳았으며, 그 시발점이 됐던 도올과 차범근의
‘그’ 논쟁이 도올이란 이름을 결정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촉매 역할
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차범근의 사퇴 이후 종교인 차범근을 공격하
는 무기로 사용되게 된다.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도올 김용옥 교수와 대표팀 차범근 감독” 간의 해프닝이
다. 사실 당시 민감한 종교 문제를 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폭발력에 비해
다소 그 파괴력이 약했던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당시 상황이 “도쿄 대첩”이라고
불리던 그 감동적인 승리가 있은 직후였고, 차범근 감독에 대한 국민들과 언론의 신
뢰가 절정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종교를 믿던 경기 후에 기도를 하건 말
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당시 차범근이 종교상의 이유로 대표
팀 선수를 뽑거나 특정 선수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으며, 우리 국민들에겐 차 감독이 광복이후 최고의 소원이라 할만한 “16강 진출”
을 일궈내 줄 난세의 영웅으로 보였던 거다. 적어도 도쿄 대첩 직후부터 월드컵 본선
1차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정말로 대표팀 감독 차범근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대표팀 감독 시절의 차범근 감독이 종교적인 이유
로 특정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루머를 그의 감독 사퇴 이후 정말 질리게 들어왔
다. 그리고 위에선 그런 루머를 만들어 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작은 해프닝을 살펴
봤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차범근 감독이 자기 휘하에 있는 선수가 자신
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고 정말로 생각하고 있나?

분명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미 97년도에 그런 비슷한 사건이 있었지만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잘 나가던 차범근에 대해서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는 점이
다. 그리고 월드컵 대회 기간 중 경질되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지난 97년의 사건에
서 “있을 수 없는 사실”을 유추해내며 차범근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그 바닥부터
의심했다는 점이다. 뭔가 냄새가 난다. 잘 나갈 때는 가만히 있다가, 감독에서 물러
나자 바로 그 감독의 종교적인 이유가 지도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다니 말이다.
그럼 97년에는 그 종교적인 이유가 차범근의 지도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고, 98년에는 똑같은 이유 때문에 감독 차범근의 능력이 무시당해야 한다는 말인
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혹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팀 감독은 공인이므로 자신의 종교를 공개
석상에서 드러내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인들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일. 왜냐하면 종교란 어떤 것을 막론하고 어느 때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언제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들
은 자신의 종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자
체가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만일 차범근 감독의 종교가
대표팀 감독을 수행하는데 문제가 된다면 이미 감독 선임 시점에서 그 문제가 고려
됐어야 했지만 당시엔 아무 문제 없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차범근 감독의 종교가 감
독직 수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종교와 축구를 연결시킬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고 따라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점은 대표팀 감독이
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같은 구기 종목인 배구 쪽으로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상 한국 여자 배구를 혼자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LG 정유의 김철용 감독
은, 모두들 알고 있는 것처럼 차범근 감독과 같은 특정 종교의 독실한 신도다. 특히
김철용 감독은 자신의 배구 코칭 철학에 신앙이란 요소를 깊숙하게 포함 시킨 것으로
유명하며, 그런 김 감독의 독특한 지도력은 단신의 한국 여자 배구를 세계 상위권에
올려 놓은 밑거름이 됐다. 그렇지만 배구계의 어떤 인사들도 김 감독이 종교적인 이
유로 선수 기용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거나 그의 지도력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하물며 평생동안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에 철저했던 차범근
감독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특히 다른 것도 아니고 축구에 관한 일인데 차
감독이 종교적인 이유로 특정 선수를 스타팅에서 기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일 뿐이다. 평생 축구에 목숨을 받쳐온 차범근이란 인간을 조금이라도 알
고 있는 축구팬이라면 절대로 그런 상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친구들을 위해서 딱 한마디만 더 해볼까? 차범근
사퇴이후 불거져 나온 “종교 때문에 최모 선수를 월드컵 경기에 출장 시키지 않았다”
란 기사가 꽤 알려진 신문에 나왔던 걸로 기억하나? 하지만 이미 알려졌듯 이 최모
선수의 종교는 차범근 감독과 같은 종교인 것으로 밝혀졌다. 더 할 말 있나?

다음은 차범근 감독과 도올 김용옥 교수간의 오고 간 필설을 올린 전문이다.

[발언대] 차범근 감독에게 – 김용옥 <철학자, 한의사> — (중앙일보 1997. 10. 23)
나는 사실 조용히 개인적으로 만나 오손도손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는 지
금 바쁜 사람, 나같은 서생을 만나줄 것 같지도 않고, 또 만나 이야기를 해도 실마리
가 풀릴 것 같질 않았다. 허나 꼭 이야기를 해야겠기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지성의 양심이라는 부담 때문에, 남들이 다 지나치고 있건만, 결코 후련할 것만 같지
않은 붓을 들었다.
나는 평소 텔레비젼을 즐겨보진 않지만 우연히 보게된 장면. 후반 17분을 남겨놓고
한꼴을 먹은 절박한 상황에서 당당히 2:1의 역전! 그것도 우리에게 모든 굴욕과 희한
의 역사를 안겨준 히노마루의 심장에! 그것도 너무 멋있게! 너무도 통쾌하게! 분명
그것은 실력이었다. 한국남아의 기상이요 우리민족의 저력이었다. 그대 바로 그대가
이러한 저력을 표출시켜주었다.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엊그제 우즈벡, 천년쌓인 회한
이 다 씻겨 내리는 듯한 통쾌함, 요즘같이 정치가 혼란된 리더쉽 부재의 소용돌이 속
에선 그대가 이끄는 대표팀의 쾌거야말로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우리역사와 민족
의 스트레스 해소였다.
우리는 기억한다. 말레이지아와의 경기에서 5분남겨 놓고 역전승의 꼴을 3개나 터트
렸던 그대의 우람찬 다리, 아마도 지금같이 텔레비전 위성 중계가 가능했더라면 그대
의 분데스리가 활약상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그것보다 더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그
렇게 쌓은 실력을 이젠 또 후학을 통하여 발휘하고 있다. 그대야말로 지금 이 순간
우리민족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나 도올, 그대를 사랑하는 대학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사랑
을 권력으로 표출해서는 아니 된다고. 텔레비전 마이크가 차감독에게 갔다.
첫 소감은? “하나님의 은혜로…”
첫 소감은? “주님의 은총으로. ..”
첫 소감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 .
신나는 꼴이 터질 때마다 카메라는 열렬히 기도하는 그대의 모습을 비춘다. 이제 그
대는 빌리 그래엄을 능가하는 세기적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대는 전도사가 아니
라 축구감독이다. 그대가 이끄는 축구팀은 어느 교회의 사설팀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
가대표팀이다. 그대는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
아야 할 공인이다. 분명 그대는 개인으로 TV화면 앞에 선 것이 아니라 대표팀을 이끄
는 공인으로 선 것이다.
공인의 공적마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적행위는 공적모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의 후계감독이 불교교도였다고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공덕으로. ..”
이슬람교 였다면 “알라신의 가호로. ..” ,
우리나라는 곧 종교분쟁국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여호와의 율법적 약속(구약)을 깨뜨린 새로운
약속 (신약), 즉 사랑의 복음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이긴 자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는 자에게도 가는 것이요, 우리 민족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 가
는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마디는 무엇이었던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야말로 복이있도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 팀이 주님의 은총으로 이겼다면 일본팀은, 아랍에미리트팀은, 우즈벡팀은 주님
의 저주때문에 졌나? 그것이 그대의 기도의 본질인가?
예수는 무어라 말했던가? 너희가 기도할 때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
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은 오른손이 하는 것
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말끝마다 매 행동마다 주님의 은총을 들먹이는 그대의 행태는 기독교신앙의 실천이
아니요, 한국기독교의 병폐적 현상의 말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대가 다니는 교
회의 목사님이라면, 그대를 사랑하는 독실한 아내라면 차범근! 그대의 기도하는 소맷
자락에 매달려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주님의 은총” 때문에 소외당하는 이땅
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 큰 은총을 베풀 수 있도록 차범근 그대 마음이 더 큰 사
랑으로 충만케 되기만을…

[발언대] 김용옥교수에 답한다 -차범근 <축구국가대표 감독> – (중앙일보1997.10.24)
그러잖아도 월드컵 최종예선이 끝나면 한가한 시간에 한번쯤 나의 신앙문제를 설명해
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김용옥 교수의 글을 읽고 바로 이 글을
쓰게 됐다.
국가대표팀 감독 – . 무조건 잘 싸워서 무조건 이겨주기를 바라는게 모든 국민의 바
람이다. 그 기대와 희망을 고스란히 해결하고 충족시켜줘야 하는게 바로 이 자리다.
국가대표 감독은 김교수나 나 자신이 그동안 막연하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힘
든 자리다. 때로는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고독하고 힘들어 자다 말고 일어나 아내에
게 전화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나는 대범하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인
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그릇이다.
그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을 더 꼭 쥐는 것처럼
지금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을 꼭 쥐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
그러나 경기 전 벤치에 앉아 기도할 때나 경기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할 때나 한번
도 김교수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이기 위해 그래본
적은 없다. 내가 인터뷰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 자체
이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기 전 나는 우리 선수들을 감
동시켜 90분 내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90분간 진두지휘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오차도 없이 매순간 정확히 판단하고 지
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경기가 무사히 끝나면 나는 바로 이런 나
의 기도가 이뤄졌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고 이기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는게 아니다. 나는 두손을 합장하
고 머리를 숙인 스님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부, 수녀님들을 볼 때면 그분들의
기도 모습이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코끝이 찡해옴을 느낀다. 나에겐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사도 아니고 종교 편싸움 선봉에 선 사람
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생기
는 우둔한 사람이다.
얼마전 KBS-TV가 우즈베키스탄전이 끝난 후 현장 인터뷰를 옮기는 과정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는 인터뷰 첫머리가 잘린 모양이었다. 기독교인들이 KBS에 전화를 해서
“일부러 그랬다” 며 항의를 수도 없이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종교를 가진 열성
신앙인들이 마음에 평화는 없고 편견과 피해의식으로 모든 것을 내 입맛에 맞추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아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비록 공부를 많이 한 종교학자가 아
니지만 어느 종교든 투쟁만 있고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게 아닐
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교수의 말대로 후임 감독이 부처님을 믿든, 알라를 믿든 그것은 나에게 묻고 따질
일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스스로 의지하는 신으로부터 용기와 힘, 그리고 평화를 얻
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
유가 있고 그가 아무리 공인이라 해도 그것은 지탄받아야 하는 ‘나쁜 짓’ 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범근이가 기도하고, 차범근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차범근이가 자꾸
이긴다고 해서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합리화되는 것도, 다른 종교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 자신이 공인의 룰을 어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
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지나친 종교논리로 비약하려는 것은 나로서도 유
감스럽다. 이전의 어느 감독은 월드컵을 앞둔 중압감에 입이 돌아가고 말았다. 또 유
럽의 많은 감독들이 알콜에 빠져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지금처럼 숨막히는 때에
나 역시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지금은 한 발짝 떨어져서 기
도하는 형식이나 모습보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끝)

차범근과 그의 종교 ‘문제’는 역시 대한민국의 저급한 스포츠 언론이란 집단에서
유포되어 확산시킨 ‘저질 중에 저질 음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주일마
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절을 찾는 사람도 아니다. 누가 예
수를 믿건 알라신을 믿건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종교 문제로 인해서 스
포츠 판 자체가 혼탁해 지는 현상은 참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성남 일화 구단과 성남
시 일부 기독교인과의 마찰에 있어서도 필자는 ‘스포츠’의 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차범근이 언론을 기피하는 이유… 월드컵 기간 중에 경질 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나 만신창이가 된 사람, 쓰러져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에게 몽둥이로 한대 더
‘확인사살’ 하듯 같지 않은 ‘종교에 의한 선수 기용’이란 졸렬한 루머를 퍼뜨리
는 이 나라의 스포츠 기자들과는 결코 같은 물에서 어울릴 수 없는 믿음과 중심이 있
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축구에 대한 믿음…
그 어떤 것을 믿던 간에 차범근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요즘 한창 필자의 눈을 거
슬리게 하는 신문 기사들이 속출하고 있다. 바로 ‘X 파일’ 이란 헤드라인이다. 불
과 4년 전에도 우린 똑 같은 단어를 수 없이 접했었다. 이번엔 ‘히딩크의 X-파일’
이다. 마음 같아선 그 ‘X-파일’ 이란 프로 자체를 방송 금지 처분 때려달라고 권유
하고 싶을 정도로 기자들 사이에선 남용되는 단어지만,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쩜 그
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똑같은 헤드라인들로 월드컵 대표팀 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에
매달리고 목숨 거는 것인지… 차범근의 종교 문제를 지금에서야 다시 한번 논하고 바
로 잡는 이유 역시 이점에서 비롯되었다. 동요되지 말자고, 믿지 말자고, 기대하지
말자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저질 기사 잘못 읽고 믿었다가 한 남자의, 한 가장의,
한 거목의 뿌리를 뒤흔든 적이 있었다. 그런 치욕을 다시 한번 경험한다는 것은 축구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적인 손실이며 망신일 수 밖에 없다.

정면승부 4 : 월간조선 인터뷰 파문

필자는 사실 이 인터뷰를 기사화 했던 당시 월간조선의 장원준 기자를 증오한 적이
있었다. 그 기사 때문에 차범근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조금은 이해하려고 한다. 그 노력이 늘 성공적이진 못 하지만 말이다.

1998년 8월, 월간조선 8월호의 커버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장식되어 있었다.
“조국을 떠난 차범근-오은미 부부, 격정 토로 8시간… 정치판 같은 축구판… 승부조
작까지” ‘월드컵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다수의 축구 팬들은 이 기사가 나간
후 일대 카오스(chaos)에 빠지게 된다. ‘차범근 죽일 놈이다’, ‘차범근 바른 말 했
다’.. 로 양분되는 여론 속에서 일반 속 사정 잘 모르는 팬들은 도무지 차범근에 대
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가 차범근의 명전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주제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묻어두고 싶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 다시 대외적인 활동을 재
개하고 나선,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축구협회와 해빙의 싹이 트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해묵은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어서 무슨 ‘긍정’을 찾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
래서 여기서는 소위 ‘차범근 인터뷰 파문’이 남긴 여러가지 의문점과 화두를 바탕으
로 필자가 알고 있는 이야기만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에 대한 판단과 후추의
입장은 가급적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렇게까지 후추가 민감한 부분을 잠시라도 짚
어야만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차범근에 대한 일부 팬들의 오해와 갈등은 바로 이
월간조선의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없지 않기 때문이고, 이 인터뷰로 인해
차범근의 축구 인생은 분명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Q. 이 인터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A. 당시 프랑스에서 경질된 차감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당시 월간조선 소속 장원준
기자의 결혼식에 참석, 장 기자의 즉석 인터뷰 요청에 극구 반대하지 않았고 신혼 여
행을 다녀온 장기자는 동부이촌동 차범근의 집에서 ‘정식 인터뷰(사진기와 녹음기를
사용한)’를 진행했다.

Q. 차범근과 장원준 기자는 어떤 관계인가? 기자에게 질릴 대로 질렸을 법한 차감독
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터뷰에 응했나?
A. 장원준 기자는 70년대 한국축구협회 회장직을 비롯해서 대한체육회 부회장, 농수
산부 장관직을 역임했던 장덕진 씨의 아들로서, 용산고-서울대를 나올 정도로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했던 사람이라고 차범근은 회고했다. 차범근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배경에도 장원준 기자의 부친인 장덕진 전 축협 회장의 배려가 있었다고 한
다. 19세의 어린 나이의 차범근을 국대 발탁한다는 의견에 반발을 했던 일부 축구인
들이 있었지만 장 전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가능했다고 한다. 차범근은 분명 장 회
장을 은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 기자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차범근은 그런 그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Q. 차범근 측은 인터뷰가 활자화 되어 나갈 것을 알고 있었나?
A. 장 기자의 99년 11월 12일 자 조선일보 이메일 클럽의 ‘변’을 살펴보면 사진기와
녹음기까지 틀고 진행된 ‘정식 인터뷰’였다고 한다. ‘사적 관계’를 이용해서
off-the-record 인터뷰를 기사화 시킨 게 아니냐는 장기자 주위의 질문에 장 기자 자
신 역시 일종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차감독 측이 인터뷰 자체가 전혀 기사화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 어떤 일반 기자와
도 나눌 수 없었던, 아니 그토록 친분이 두터운 ‘조카뻘 되는’ 기자와의 인터뷰가 아
니었더라면 차범근은 아마도 그의 속 마음을 전부 밝히지는 못했을 거란 얘기다.
이 점은 다시 말해 차범근은 ‘장 기자를 믿고’ 얘기했고, 믿는다는 얘기는 결국 ‘차
범근을 곤경에 빠지게 하지 않을 기자’로 믿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믿음’의 결과
는 후추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 후로 차범근은 장 기자와의 오랜 연을 끊고 지내
고 있다.

Q. ‘승부조작’ 있었나 없었나?
A. ‘차범근 인터뷰 파문’ 후 MBC에서 취재한 ‘PD 수첩’ 자료에 의하면 당시 울산 현
대 소속 김현석 선수는 “프로 선수들은 우승, 그리고 이기는 길 만이 연봉 협상 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데 져 주기를 한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
리냐?”며 부인했고 조중연 축협 전무는 “(승부조작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다.
프로축구연맹을 통해서 진상 조사를 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펄쩍 뛰었다. 한
편 축구인 최순호씨는 “설사 그런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축구계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식으로 지금 와서 문제 제기를 하고 외부에 공개하는 처사는
그 큰 사람으로써 할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한편, 당시 현대 울산 소속으
로 경기에 출전했던 (음성변조) 한 은퇴 선수의 고백에 따르면 “분명히 있었다. (김
현석 외) 일부 현역 선수들은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 입장 때문에
그런 얘기를 안 하지, 그건(김현석의 주장) 틀린 것이다.100% 틀린 말이다. 장담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조영증 당시 울산 현대 코치의 증언은 “차감독이 그 문
제를 나중에서야 알고난 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져 줬다는 데 조코치도 알고 있었
냐고 묻길래, 나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몰랐다고 답 했던 기억은 난다.’ 후추가 굳이
이 영상 자료를 다시 옮기는 이유는 1) 혹시라도 이 프로그램을 못 보고 넘어간 후추
인들에 대한 배려요, 2) 이 정도의 당시 상황 재 설명으로 후추인들의 판단이 섰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부조작 설’과 관련해서 후추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왜 지금?’ 이란 부분이다. ‘왜 지금 차범근이 승부조작 설을 퍼뜨렸냐?’ 가 아
니라, ‘왜 지금 승부조작 설을 문제시 하느냐?’ 란 얘기다. 차범근이 프로 축구 판에
서 벌어지고 있다는 ‘져주기’에 대해 언급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저서 ‘차범근의 그라운드 산책’과 스포츠 서울 연재 칼럼(96년 10월22일 자)에서도
과거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월드컵 패장 신분의 차범근’이 얘기하는 ‘승부
조작설’은 결코 용서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승부조작이 있었나? 없었나? 당시
MBC 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9286명 중 74.9% 가 ‘승부 조작 사실’ 쪽에 응답
했다.

Q. 축협의 중징계(5년 제명)에 대한 차범근의 당시 반응은 어땠나? 그후 지난해 초
‘사면’ 조치에 대한 그의 반응은?
A. 속으로는 분노와 배신감에 가득 차 있었는지 몰라도 겉으로 그는 항상 무덤덤했다.
5년간 제명 때도 사면 때도… 축협에서 ‘사면’ 되었다는 소식을 필자가 유선 상으로
얘기하자 마치 ‘내가 제명될 이유는 애당초 무엇이었나?’ 라고 반문 하듯 씁쓸한 웃
음만 지었다.

Q. 차범근과 축협의 현재 관계는 어떤가?
A. 지난 9월 귀국 후, 지속적으로 축협에서는 차범근과 축협의 ‘화해 자리’를 만들려
고 접촉해 왔다. 차범근은 침묵 만을 고집해 왔다.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서. 그의 가슴 속엔 아마도 수 많은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가 전부 아물
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상이 가능하다. 지난 9일 여의도교 축구부 창단식을 계기로 차
범근은 한걸음씩 서로를 향해 다가가려고 하고 있다. ‘언제 우리가 적이었냐?’는 식
의 방정맞고 염치없는 재회도 아닌, ‘끝까지 나만 잘났다’는 아집 섞인 자세도 아닌
순리에 맞게 천천히 한국 축구에 기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Q.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차범근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축
협과 발행인은?
A. 차범근, 축협, 월간조선이 잃은 것은 공통적으로 ‘믿음’이다. 차범근은 친구에 대
한 믿음과 언론에 대한 믿음을 잃었고, 축협은 팬들의 믿음을 잃었고, 월간조선은 차
범근의 믿음을 잃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차범근을 잃었다. 얻은 것? 차범근을
제물 삼아 우리 축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계기…

차범근 노컷 인터뷰 2부

차범근과 월드컵

후추:86년도 월드컵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이셨잖아요 멕시코. 그때 기억은 어떠
세요?
차범근:글쎄~ 그때 내가 86년이 마지막이잖아. 그리고 그 세대는 내가 못 봤지. 월
드컵 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구.
후추:박창선 김주성 최순호 이런 선수들?
차범근:그렇지 전혀 나하곤 아는 사이가 아닌데 이제 그때 보니까 많은 갭이 있었지.
생각 하는거 라든지 축구를 서로 하는게 이제 달랐으니까. 아마 그때 보면 워밍업 하
는거라든지 내 영향을 많이 받았더라구. 그 당시 생활하고 쭉 그랬으니까 어렵지.
후:아예 새로..
차:간단한거는 아니었지. 그러나 그 팀에 어쨌든 나이도 많고 걔내들은 나하고 같이
찬 세대가 아니니까… 대표선수 내가 나온 이후에 다 나온 스타들이구… 어, 그때 이
쪽 다리를 수술도 안 한 상태도 아니었고 경기를 하기는 상당히 조금… 그리고 이제
너무 유명해 있다 보니까 어렵지 내가… 이제 내 혼자 경기를 한다는 것은.

후:98년 월드컵 얘기 좀 할께요. 프랑스로 출국하시기 전에요, 김포 공항 레스토랑인
가 어디서 사모님한테 황선홍… 얘기 해 주신 거 있으셨죠?
차:그거, 뭐 니가 모르는 얘기야? 다 아는 얘기잖아.
후:그럼 제가 들은 대로, 건 제가 그냥.
차:그럼.
후:그거 할게요.
차:그날 아침에 찾아 왔더라고 선홍이가. 못 뛰겠… 안 될거 같다고. 근데 뭐… 아이
그니까 선홍이하고 용수랑 같이 서면 이상적이야. 근데 이제, 선홍이가 경험이 있으
니까 볼 관리를 잘 하거든, 근데 용수만 있으면 용수는 이제 관리가 어려우니까 혼
자. 그 공격의 비중이 확 떨어지지. 그래서 이제 어렵다고 그러니까 뭐… 그때만 해
도 선홍이 비중은 상당히 나한테 있어서 높았으니까. 그리고 선홍이가 있으므로 용수
랑 같이 설 수 있는 그런 공격의 그 파워가 다르니까. 근데 한 사람으로 공격을 세운
다? … 어 그러면은 또 바뀔 수 있는거거든. 그래서 아침에 인제 걔가 와서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나한테는 충격이지 뭐야. 그렇게 심한 저건지는 몰랐지. 근데, 본인
이 가장 잘 아는거 아냐. 우리 나도 선수생활 해 봤지만, 부상을 딱 입는 순간 아 이
게 감으로 느낌으로 온다고, 아 이게 어느 정도의 부상인지. 그랬다가도 또 아닌게
있겠지만, 글쎄 이제 걔는 뭐 어린 선수가 아니니까, 자기가 그 정도로 얘기했을때는
오:나중에 선홍이한테 한번 직접 좀 물어봐.
후:음.
차:아니 그래가지고 그것 때문에 내가 굉장히 곤욕을 한 게 뭐냐며는, 본인이 나한테
그렇게 얘길 했는데, 따른 식으로다가 기자들이 얘기를 하는거야. 현지에 가서 계속
체크를 했잖아.
후:맞아요
차:그래서 뛰어 봐라, 뛰고 나서 인제 뭐 계속 뭐… 뛰면 알잖아. 인제 조킹도 40프
로 조킹밖에 못해. 그거 뛸 수가 없는거야. 그럼 40프로 조킹만 가지도 어떻게 경기
를 한단말야. 풀로 해도 경기 될까 말깐데… 그래서 이제 뛰고 오면 나는 인제 얘기
를 하지, 안 되겠대는 거지. 안 되겠대는 데 저기서는 따르게 얘길 하면 그걸 어떡하
냐고. 그래서 이제 그 와중에 닥터가 뭐 주사를 맞고 뭐 하면 할 수 있다 이렇게 얘
기를 해 가지고 또 이게 뭐 신문에 그러니까 내가 이상하게 돼 버린거야. 그래서 내
가 불렀어. 닥터 이제 내가 불러가지고 당신 얘기 잘 하라고, 본인이 안 되겠다는거
지 내가 안 뛰겠다고,.. 당신 할 수 있어 백프로? 아 뭐 주사고 뭐… 확실하냐고,
확실하면 얘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얘기 하지 말라고 기다리라고. 그래서 해 보라고
방법이 뭐냐고 그러면은 풍 티에 뭐 우리 다 해봤거든. 여기서 뭐 어디가 아프면 마
지막에 그…

후:마취약 같은거?
차:응, 그거 하고 해서 잠깐 몇일 쉬고 하면 낫는게 있어. 그러나 그 경우는 좀 달른
거야. 이제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거 하고는 좀 경우가 좀 달라. 그래 가지고 인제
정식으로 거기 텀인을 잡아가지고… 나 이제 열 받아가지고, 당신 말 똑바로 하라고
응? 할 수 있어 없어? 당신이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마치 본인이 할려고
하는데 내가 안 뛰게 하는 것 처럼 하는데,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지금 백프로 하는
거 아냐. 있어 없어? 얘기 하라고. 그랬더니 아 뭐 그렇게 하면은 뭐… 아니, 해서
할 수 있냐고, 운동장에 내 보낼 수 있냐고, 나는 내가 의사가 아니니까 당신 책임
지라고. 자기도 인제 쭈리기지. 그래서 어떡해,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어? 아
하여튼 뭐…
오 : 근데 그 사람도 정형외과 의사가 아니잖아. 그 사람 도핑 때문에 와 있는…
차:그래서 인제 병원엘 갔다? 했지. 또 뛰었어 인제 기다렸다가. 안 되겠대는데 아
이, 벌서 애 뛰는거 보면 모르냐고 그거를. 그래서 내가 불렀어. 아니 보라고 말 똑
바로 하라고.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얼마나 지금 파장이 크냐고. 그 뒤로 그냥 입이
쑥 들어가가지고. 아 열 받쳐가지고 그냥. 아 내가 안 뛰게 하는 거냐고, 당신이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본인이 지금 안 되겠다는데, 응? 그리고 나도 그 정도 경험은 있고,
응? 아이 선수 얘기 들으면, 또 뛰는 거 보면 아는데, 아니 그냥 조킹 해 가지고 경
기 가 가지고 할 수 있겠냐고… 지금 아니 다 나아서 그냥 팔딱팔딱 뛰어도 지금 될
까 말깐데 부상한 선수는 응? 그래서 마지막 테스트 했는데 뭐야, 이틀 전인가 삼일
전 두 번인가 또 테스틀 했지? 감독님 안 되겠습니다야. 아 자기가 못 뛰겠대는데.
그래서 니 입으로 얘길해라 그럼. 니 입으로. 응. 내가 안 뛰게한다고 생각하는데,
의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의사 해 봐라 그럼. 안 됐지. 거기서 무슨 얘길
해. 그렇게 된거야.
오 : 월드컵 때 내 보내려고 선홍이 여기까지 보내 가지고… 여기 슈포렉(재활원)에
우리가 다 보내가지고.

후:봤어요 사진 다 찍었어요 ^^
차:그래서 나는 예선전 한 번도 못 써먹었잖아.
후맞아요. 예.
차:왜 못 써먹었어?
오 : 본선에 쓸려고.
차:그리구두 그 저 한국에 하권익 박사라고 뭐 제일 유명하다 그래서 보냈는데 진단
을 못하는거야. 십자가 나갔는데 그거를 진찰, 찾아내지를 못해. 그래가지구 애가 쉬
었다 계속 뛰면은 5개월이나 쉬고 또 했는데도 또 아프대는 거야. 환장하지. 그래서
예선은 포기를 하고 본선에 올라가서 하자. 그런데 안 되겠다… 여기를 찾고, 여기를
한 번 가 봐라. 오니까 끊어졌대는거 아냐. 그런 걸 나 하이구… 그래서 나 이제 안
가. 그 뒤로 나 이제 하권익 박사. 야, 삼성에 무슨 원장을 하고 있고. 내 뭐 웃,
기가 막히더라.

후:감독님, 개인기랑…
차:응?
후:개인기 있죠 개인기, 개인기랑 스피드랑 하나만 고르라면 뭐 고르시겠어요?
차:뭐를 골라? 누가? 뭐를…
후;아니 축구 선수가 있는데, 스피드만 있는 선수 있고 아주 그냥 스피드는 없는데
개인기 좋은 선수 있고 그러면, 꼭 둘 중에 하나만 선택을 하라고 그러면 어떤 선수
를 선택을 하시겠어요?
차:글쎄 인제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 뭐, 개인… 스피드가 있다고 해서 전혀 공을 전
혀 못할 수는… 나는 스피드를 택해.
후:그러세요?
차:그럼. 스피드가 있어야 돼, 뭐 스피드가 있어서 뭐 전혀 공을 못 차는 데 스피드
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뭐 얘기할 수 없는거지. 축구선수를 놓고, 스피드 있는 선
수냐 아니면 기술 있는 선수냐, 나는 스피드를 택해.
후:왜요?
차:응?
후:왜요?
차:아니, 현대축구가 요구하는게, 스피드가 없이는, 그러니까 기술이라고 하는거는
스피드가 없이는 그 기술이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우리 한국의 대학교에서 기술이
아무리 능란해도, 좀더 수준 높은데 가면 그것보다는 어느 정도 기술이, 저거 또 수
준 높은 데 가면은 기술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수준 높은 축구를 하거든, 응? 탁월하
지는 않아도 기본적으로 돼 있어야 돼. 거기에 기본적으로 돼 있어야 되는데, 큰 선
수가 될려면 스피드가 없으면 안 돼.
오 : 그니까 여기서 선수를 팔려 그러면은, 인제 어떤 선수를 갖고 와서 여기서 사라
고 얘길 하잖아? 제일 첫번째 묻는 질문이 크냐? 체격이. 두 번째가 빠르냐야. 크냐
빠르냐야.
차:아냐 아냐, 큰 것도 일단 두 번째. 스피드가 있으면 먹히거든. 어디서나. 작아도
스피드… 아 저기 영국의 그 쪼끄만 놈.
후:오웬?
차:얼마나 빨라~
후:서정원 같은 케이스는 왜 잘 안된거에요 프랑스에서? 걔 스피드는 끝내주잖아요.
차:에이 서정원이는 앓았잖아. 오기 전에 걔 수두 앓았잖아. 아 능력이 그거 밖에 안
되는거지 뭐. 아 뭐 스피드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지 뭘.

후:차감독님이 생각하시는…
차:그니까 서정원이 같은 경우는, 그 인제 글쎄… 그 선수의 그 어떤 질이 썩 그렇게
높지는 않잖아.
후:예. 더군다나…
차:그니까 빠른 거 하나 가지구
후:유럽무대에서 경쟁하기엔
차:뭐 여기는 다 빠른데 뭐. 그리구 그렇게 체구도 뭐.

후:신념하고 독선하고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차:허허… 글쎄… 글쎄, 뭐 사람들이 뭐 글쎄 뭐, 어떤 거를 독선이라고 도대체 그
일반적으로 나를 놓고 어떤 거를 놓고 독선이라고 얘기를 해?
후:모… ^^
차:예를 들어서, 응? 예를 들어서 선수를 놓고 응?
후:예예…
차:감독이, 감독은 빠른 선수의 어떤, 왜? 예를 들어서 인제 유럽 무대에 있다보니
깐 우리가 월드컵을 나가야 된다. 서기복이? 안된다 이거지 기술은 있지만. 그보다
는 빠른 선수를 원해. 그담에 인제 그… 인제 황선홍이가 감독이 인제, 그 어느게 정
답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건 감독의 생각이 우선해야 된다 왜? 자기가 원하는,
추구하는 축구가 있으니까. 황선홍이가, 황선홍이하고 최용수가 서면은 감독이 봤을
때 반드시 선홍이가 있어줘야 하는 이유는 후방… 그니까 우리가 수비를 하다가도 전
방에 공이 딱 나가면 그 볼을 딱 받아 줄 줄을 알아, 선홍이는. 그담에 그 공이 가
면 키프가 돼. 근데 그런 거에 비해서는 용수는 투박하고 그 파워가 있고 헤딩있고
슈팅있는 그런, 아주 강한 그런 면이 있는가 하면, 그니까 전술적으로 요구하는, 그
우리가 유럽 무대엘 나가든지 월드컵엘 나간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공격을 못한다 이
거지. 그랬을 경우에 공을 받아 감아쥐고 뭔가 그 우리 수비로, 우리가 공격할 수 있
는 그런 기회가 될 때까지 뭔가 가져주고 그 볼을 뒤에서 연결해서 받아 줄 수 있는
그런 선수가 필요하다 이거지. 근데, 그 두 선수를 놓고 봤을 때는 선홍이가 필요해.
근데, 두 선수가 아닐 때 한 사람을 놨을 때, 용수보다는, 전술적으로 도훈이가 더
필요하다 이거지.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또 다를 수 있어. 다른 감독이 봤을 때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지. 근데 이제 어떤 면에서 이제 거, 그런 면에서도 내가
뭐 누구를 썼다 그러면은 그걸 독선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글쎄 인제 이런
경우, 독선이라고 얘기를 들었던 경우가 선수를 뭐 선발하는데 독선이다 뭐 이런 경
우를 하는 경우가 있어 응? 선수를 선발하는 경우. 나는 내가 선수를 뽑으면서, 내
가 내 선수를 뽑으면서 한 번도 보지 않고 뽑은 경우는 없어. 다 가서 내가 보고
‘아, 이 정도면은 내가 적어도, 내가뿐 아니고 앞으로 큰 무대 가서 이게 가능하겠
다’ 내 나름대로 어떤 경험이나 그런거를 바탕으로 그렇게 해서 그… 외국, 예선전
이 끝나고 나서 외국을 다 나갔잖아? 그러구 그 일본서 한 대회가 무슨 대회지?

후:다이너스티
차:다이너스티컵. 대회를 하면서 내가 사전에 그런 얘기를 했거든. 걔네들 머니까 다
불러 들일 수 없으니까, 어차피 우리가 또 경험도 쌓고 젊은 선수들도 또 찾아서 해
야 되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그때 이제 대학에 있는 사람들, 왜 대학
에 있는 그 신인들을 내가 선택을 했냐면, 하도 프로축구 말이 많아 가지고… 어떤 말
이냐면, 결국은 프로에서 뛰는 아이들, 걔네들을 뽑아 가지구 빈 구멍을 채우고 다시
했을 때, 걔네들이 다시 들어왔을 때는 얘네들 썼다가 본선 갈 때는 결국 다 빠지게
돼. 그러면 그 사람들 입에서, 또 이거는 리그를 봤을 때도 사실은 바람직한거는 아
니지. 걔네들 뭐 수비 뛸 선수도 아니고. 팀에서 다 경기를 해야되고 팀 나름대로 중
요한 선수들인데, 내가 봤을 때는 그 선수들 보다는 차라리 대학에서… 여기(독일서)
우리가 대학, 여기서 대학을 따지면 여기서는 결코 걔네들이 빠른, 이른 연령은 아냐,
여기로 따진대면은. 나도 뭐 열 아홉 열 여덟 살 그때 (국대) 됐으니까. 근데, 내 경
험으로 봤을 때 그런 선수들은 대표 선수를 들어오고 한 경기 두 경기 뛰는 게 다르
다 이거지, 내 경험으로 봤을 때. 그거를 활용해서 뭔가 그런 선수도 찾고, 찾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앞으로 팀을 보강하는데 더 낫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선수를 하
나 빼오는데, 고종수나 뭐 대우에 있는 선수들 할 때 얼마나 괴롭혔어. 고종수 심재
욱이 가서 이거(무릎)까지 딱 째 가지고 안 들여보냈잖아. 근데 따른 선수를 데리고
왔다? 근데 나중에 본선 갈 때는 다 팀에 도로 보냈다? 아마 그랬으면 더 난리를 쳤
을거야. 그럼 그런 것도 없이 차라리 어린 선수를 그렇게 하는 게 더 앞으로 낫겠다.
걔네들 썼다가 다시 다 되돌려보내는 거 보다는. 그래서 첨부터 그렇게 얘기 하고,
걔네들 데리고 킹스컵도 가고 그것도 우승 하고, 호주도 가고 그러고 오면서 일본도
갔던거 아냐. 그런데, 걔네들 뽑고 그런게 뭐 독선이다 뭐 어쩐다 그러는데, 나중에
보니까 걔네들 결국 프로 1순위로 다 가잖아. 걔네들이 다 대표 선수 나중에 보면
뭐. 한국의 프로 무대…

오 : 아니 근데 인제 그때 당시 아빠한테 독선이라고 안 뽑는 게 독선이라고 지목을
했던 선수가 몇 명이 있어. 냉정하게 생각을 하면, 그때 당신이 안 뽑았다 저건 독선
이다 라고 얘길 했던 제1순위가 김주성이야, 응? 김주성이 안 뽑는건 독선이다.
차 : 허허… 참…
오 : 두 번째. 고정운이. 그담에 김현석이야.
차 : 아니, 김주성이는 공격 선수였었어 응? 그리고, 분데스리가에서 뛰다가 몇 년
지나서, 나이가 들어서, 내가 (96년) 아시안컵을 봤잖아 경기하는데. 누구때매 졌는
데 그래? 김주성이가 거 뒤에 있어서 진 거 아냐. 그러면, 내가 얘기했어 그때. 기
자들한테도. 나, 내가 감독인데, 지금 여기 홍명보가, 수비하는 홍명보가 있고, 젊
은 친구가. 얘는 얘 자리야 응? 공격하다가 체력 떨어져서, 전방에 능력이 안 돼서
뒤에 와서 섰는데, 이 수비를 하던 애, 내가 선택을 할 때는 얘가 더 낫다 이거지,
얘보다는. 왜? 얘는 저 (독일) 무대에서 결국 하지 못해서 온 아인데, 우리가 어떤
무대를 가야 돼? 저 (월드컵) 무대를 가야 되는데, 거기는 최고의 스타들만 오는데,
얘가 가서 통하겠냐 이거야. 안 되지. 자기들도 안 뽑으면서, 왜 내가 그걸 뽑아야
돼. 나는 홍명보 정도면은 충분하다 이거지. 이거 보다 훨씬 낫다 이거지. 젊고, 경
험도 있고, 월드컵 무대에서도 잘 했던 선수 아냐., 근데 그때 (96년) 당시에, 얘(홍
명보)를 앞으로 올리고 누구를 뒤로 섰어, 얘 (김주성)를 뒤로 섰잖아. 그래서 대패
한 거 아냐. 그래서 나는 (홍명보) 얘를 택하겠다. 이유가 그거야. 근데 어떻게 독선
이야 그게. 그리구, 그 이후에, 아니, 아 이 무대에서 나이가 그토록 들고 가서 경기
를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체력적으로 우선 안 돼. 물론, 한국 리그에서 하는 정도
는 그 동안에했던 경험 갖고 되겠지. 근데 우리는 지금 월드컵을 나가야 돼. 아 일개
분데스리가 클럽에서도 제대로 안 돼가지고 못 뛰고 온 선수를, 내가 그 선수를 데리
고 가겠냐고. 차라리 아니 지금 씽씽한, 94년 월드컵 때도 골 넣고 펄펄 날랐던, 아
니 홍명보… 경험 있고, 뭘로 보나 그 자리에. 공격을 봤다가 나중에 밀려 밀려 뒤에
까지 내려온 그 선수, 올해 지금 유로2000에 마테우스 경우하고 똑 같은 거야. 얼마
나 골치였었어. 거 결국 그렇게 끝나잖아, 응? 감독이 결국 과감하게 결단 못 해 가
지고, 그 전 경기서부터 계속 옆에서 밀어주잖아. 베켄바워도 그렇고, (마테우스) 자
진해서 은퇴해야 된다고, 빠져야 된다 그러고.

후:마테우스?
차:그럼. 결국, 야 서른 여덟 살이면 말이 서른 여덟 살이지 스피드가 달라. 응? 그
런데, 그 선수를 놓고 나는 홍명보를 택했어. 잘했잖아.
후:맞아요
차:그런데, 홍명보도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 그런 저거는 어렵다 이
거지, 그러나 그 중에서는 그 선수보다는 그 선수, 젊은 선수가 낫다 이거지. 그러고
나는 실제로 빠른 거를 원하는데, 지금도 사실은 얼마나 더 (세계 축구가) 빨라졌는
데, 빠른 거를 요구하는데 아 나이든 선수 못 뛰는 선수, 그거 되겠냐고… 안되는거
지. 그 담에 또 누구?
후:고정운 선수요
차;고정운이한테 내가 기회를 얼마나 줬어, 응?
후:그… 그 얘기 그만 할래요.
차:응? 고정운이한테도, 기회를 얼마나 줬냐고. 그렇게 해 가지고 내가, 리그에서 회
복한다든가 하면 쓰겠다는 거 아니야. 아 뛰지 못하고, 예선전에서 일본한테… 그…
다 얼마나 난리였는데… 나한테 직접 전화해 가지고. 그래도 그때 빼면 사기 떨어진
다고 계속 계속 내 보냈잖아. 그래서 언제까지 내보냈어? 골 넣을 때까지. 골 넣을
때까지 내가 내 보냈잖아 마지막. 근데 그거 가지고는 안되겠다 이거지 본선에 가서
는. 그니까 그 리그, 일본 리그에서 정말 다시 회복을 한다든지 어떤 그런 게 보이면
하겠다, 왜? 자 거기 내가 월드컵 무대 나가면서 김주성이 넣어? 고정운이, 고정운이
노장 아냐, 고정운이 넣어?

후추 단어 연상 게임

후:라이트하게 할게요, 라이트하게. 몇 개 남지도 않았구요. 감독님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골. 이거는 주관… 저, 객관식이거든요? 예 중에 하나가, 72년 7월 29일, 메
르데카 결승전 결승골. 기억나세요?
차:어어어…
후:73년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 전 왼발 결승골. 월드컵 예선이요, 73년도. 이것도 기
억나세요?
차:그럼. 아니, 내가 골 넣은게 기억 안 나면 어떡해?
후:예, 그담에 아까 말씀하셨던, 말레이시아 5분 남겨 놓고 내리 3골, 그담에 88년
UEFA컵 결승전 2차전 헤딩골. 그담에 97년 9월 28일 이민성이 왼발슛. 그 다섯 개
중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골이 어느 거세요?
차:다 맘에 들어. 거기 있는거 하나두… 다 감격적인 골이고,
후:그죠? ^^
차:그럼, 메르데카 그 첫 경기 그 골도, 기가 막혔고. 어린 데 처음 나가서 그랬으니
까, 신인 때니까, 처음 나가서 뜰 때니까, 왼발슛 노래도 나왔었지 그때. 광화문 네
거리 차가 안 다니고. 응? 그 다음에 이민성 그 골 뭐 온 국민이 그때 그랬던 거고.
UEFA컵 골 전 독일이 소름, 저 닭살이 돋았대는 거고. 어떤거 하나도…

후:버릴 게 없으세요?
차:그럼. 다 감격적인 골이었지.
후:이제요 제가 무슨 단어나 누구 인물에 대한 이름을 말씀을 드릴게요. 그러면은 제
일 먼저 그 이름이나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것을 단어로만 얘기해 주세요. 예를 들어
서 제가 누가 나한테 “야, 너한테 결혼이란 뭐냐?” 그러면 난 어디 가면 항상 “구
속 아니냐?” 그러거든요? ^^ 그니까 그런 식으로, 감독님이 긴 말로 설명해 주실 필
요도 없구요, 짧게 짧게 대답해 주세요. 단어로 가급적.
차:뭐가 이렇게 모, 복잡하냐?
후:안 복잡해요. 장운수. 장운수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뭐에요?
차;장운수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뭐냐구? 아 스승이지 뭐야.
후:스승?
차:그럼.

후:경희대 뭐 이런거 생각 안나세요?
차:아니 아니, 나의 선생이니까.
후:오케이. 박종환
차:박종환?
후:예
차:에 거기는 뭐 왠지 좀, 싸웁한 느낌이 안 들어.
후:무슨 느낌요?
차:근데 내가 받은 걸로는 그래. 늘 그런… 운동장에서 늘 싸움하자고 맨날 와서 어
거지 쓰니까.
후:오케이. 장덕진.
차:은인이지 뭐.
후:은인? 오케이. 분데스리가.
차:글쎄 분데스리가? 하아… 분데스리가… 꿈이지 꿈.

후:중국 심천
차:심천? 거기도 아주 정들었던 곳이고…
후:축구교실
차:그건 내 몸이지 뭐.
후:이회택
차;이회택. 의리의 사나이. 하하하…
후:베켄바워.
차:영웅이지 영웅. 베켄바워.
후:리누스 미셸 감독
차:리누스 미셸… 존경스러운 분이지.

후:하석주
차:하석주. 미운 오리? 하하하… 아냐…
후:황선홍
차:황선홍. 황선홍인 늘 비가 내려. 어… 나한테서 있어서. 흐려 늘, 흐려 있어 늘.
후:황선홍 한테요, 똑 같은 식으로 질문을 해 가지고 차범근 그랬더니 ‘안타까움’
딱 그러더라구요. 두 분이 똑 같은 거 같애요 필이, 예? 서로에 대한 필이…
오 : 서로 너무 원하는데 이게 안 맞는거야, 이게 안 맞는거야. 언제 한 번 딱 맞어
야지… 이제 이게 끝나는데 선홍이도.

후:자 이동국
차:이동국? 이동국인 참 신선해. 어린 선순데.
후:조중연. 긴 말로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차:용감해. 한 마디로
후:오은미
차:오은미? 나의 최고의 친구지 뭐.
후:1월 7일 (프랑크푸르트 입단일)
차:1월 7일? 행운이지 행운.
후:5월 22일이요. (차범근과 큰딸 하나의 생일)
차:5월 22일은 저… 아주 기쁜 날이잖아. 우리 딸내미도 그날 낳고.

그렇게 차범근과의 노컷 인터뷰는 끝났다. 준비해 간 질문 100여 개 중에서 ‘반타
작’이나 했을까? 중간 중간에 필자는 차범근의 말문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인터뷰였지만, 한번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 거침없이 얘기를 꺼내는
그를 보면서 ‘그의 가슴 속에 묻어둔 얘기들을 내가 또 끄집어 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혹시라도 필자에게 쏟아내던 그 ‘한 맺힌 얘기’들이 ‘또
한번의 파문’으로 이어진다면 필자는 아마도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추인의 상상에 맡기기로 했다. 거듭 얘기
하지만, ‘후추의 용기 넘치는 질문, 앞뒤 가리지 않고 물어보는 무대뽀 정신’… 차
범근은 적용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필자의 이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고, 이해하지 못 하는 자들에겐 차라리 ‘실망’이 유일한 ‘정답’이
었다. 필자가 인터뷰를 했던 시점은 지금과 여러가지 사정이 달랐던 지난 8월 말이
었다. 그에게서 ‘다 못 들은 얘기’들은 공식 활동을 재개한 차범근의 입을 통해 앞
으로 천천히 듣기로 한다. 우리가 앞으로도 그를 주목하고 관심 가져 준다면 그는 언
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우리가 ‘98 월드컵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감이
지금처럼 꿈틀거리지 않을 때가 된다면 그때는 아마도 차범근은 좀 더 자유롭게 그
누구의 ‘기우’도 불필요한 상태에서 얘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The Finale: 차범근의 눈물’

1999년 7월15일… 중국 심천의 한 자그마한 주택 안에서 차범근은 무릎을 꿇고 기도
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한줄기 흘려 내렸다.

2001년 2월9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여의도고등학교 축구부 창단식 자리에서 필자
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불과 3미터 앞 무대 위 단상에 선 차범근의 모습을 보면서
99년 7월15일 남몰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난 99년 7월16일, 스포츠 면의 작은 한 구석을 장식한 기사가 있었다. ‘백록기 축
구 – 중경고 창단 3년 만에 우승 감격’… 차범근이 이 땅에 ‘축구교실’이란 개념을
선 보인지 정확히 10년 만에 결실을 맺은 ‘새로운 축구 교육의 승리’였다. 학원 스포
츠의 3대 병패인 ‘구타, 뇌물, 문맹’을 추방하고 ‘축구의 조기화’와 ‘즐기는 축구’를
실천하며 실추된 축구 지도자들의 권위를 회복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사비를 털어 ‘차
범근 축구 교실’이란 간판을 내다 건지 정확히 10년… 이 소식을 중국 땅에서 접하게
된 차범근은 지난 10년 동안의 외로운 투쟁의 순간들이 그림 엽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 한다. 구청장, 교육감, 학부형,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축구교실 창설을 위해서라
면 밤낮으로 쫓아 다니며 축구교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던 자신의 모습, 지난
10년 동안 자신과 함께 축구교실을 지켜주었던 코치들과 꼬맹이들 생각에 차범근은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도 안 된다고 했었다. 모두 다 미쳤다고 했었다.
10년 전 차범근이 공개한 ‘십년대계 – 유소년 축구 활성화’에 대한 우리 축구계, 우
리 교육계의 반응이 그랬다. 차범근의 평생 지지자 오은미 마저도 고개를 저을 때가
있었다. 차범근 혼자서 그렇게 믿었다. ‘분명 이 땅에서도 맞지 않고 공 차는, 웃으
면서 즐기면서, 볼도 차고 글도 쓰는 축구 선수들이 태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1978년 일본에서 열렸던 재팬컵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청년 차범근은 일대 위
기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축구에 있어선 ‘한국의 밥’으로 취급 받던 일본의 유
소년 육성 프로그램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는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건데..’
하는 생각과 함께 결심한다. ‘내가 축구 유니폼을 벗는 순간부터는 우리나라의 축구
풀뿌리 육성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겠다’ 라고… 차범근은 소망했다. 공을 차고 싶어
도 그럴 수 없는 형편의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최우선적으로 가르치겠다고. 그랬기
때문에 그가 독일에서 벌어온 외화는 고스란히 축구교실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차범근이 지금 어디서 ‘손가락 빨고 있는 신세’는 결코 아니지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사회 환원이 이 정도로만 이루어지더라도 이 사회의 소외 받는 계층에게는
희망과 꿈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시작한 축구교실은 현재 3개의 ‘엘리트
팀(신용산 초등학교, 용강중학교, 여의도 고등학교)’, 7개의 지역교실(용산구, 부천
시/강서구, 강동구/중랑구, 광진구, 은평구) 그리고 3개의 일반부(유치부, 초등부,
주니어/성인) 팀을 구성해 총 500여명의 ‘미래 축구인’들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각
지역 축구 교실 팀들은 한 달에 한번씩 서울 동부이촌동 한강 둔치에 모여서 지역 리
그를 치르며 차범근 축구교실의 전 선수(회원)는 실력과 연령을 막론하고 무조건 공
부와 축구를 병행해야 한다는 철칙에 따라야 한다. 일부 우리나라 국가 대표팀 선수
들도 해외 원정 나갈 때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
대학교 2학년 까지는 무조건 학업 병행’ 이라는 원칙을 고수한 차범근의 신념에서 비
롯된 규칙이다. 필자는 차감독 내외로부터 항상 듣는 얘기가 있다. ‘축구선수도 공부
해야 된다’는 소리 말이다. 확률적으로 볼 때도 전체 축구 인구의 극소수 만이 프로
와 대표팀에 발탁되어 소위 ‘축구로 밥벌이 할 수 있는 형편’인데 어릴 때부터 공만
차던 학생들은 나이 서른도 채 되지 않아서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맞
이할 수 밖에 없고 이건 국가적 차원에서도 낭비라고…

차범근 축구교실의 꼬맹이들이 훈련하는 모습, 아니 ‘노는 모습’을 가끔씩 들러서 보
고 있노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즐겁게 공을 차고 있다. 한강이 내다보이는 차범근 축
구교실이 가져 다 주는 ‘축구 그림’이야 말로 우리나라 축구의 미래의 한 장면을 바
라보는 것과도 같고 그들이 있기에 결코 우리 축구는 암울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나라 학원 축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진학 문제’… 뇌물과 부정 입학
이 판 치는 우리 학원 축구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서 차범근은 ‘차범근 축구
교실 출신’들을 한 학교로 모아서 진학시키고 있다. 결코 그들만큼은 ‘차범근 철학
대로 키워보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제도이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
이 손발을 맞추며 함께 공을 찬 동료들과 나누는 그들의 플레이 수준은 유럽 축구에
눈높이를 맞춘 차범근마저 감동시킬 수준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 우리 고등부 애들
한번 해 볼만 해…” 라고 얘기하며 익숙치 않은 흥분에 넘친 설명을 하는 차범근의
얼굴이 떠 오른다.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차범근의 입을 트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토픽은 바로 ‘차범근 축구교실’이다. 그 역사와 곡절 그리고 얼마 전부터 보이기 시
작한 희망의 결실… 차범근에게 축구교실은 그의 표현 대로 ‘몸’이요, ‘열정’이요,
인생의 ‘비아그라’이다.

그렇다면 차범근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월드컵 대표팀 경질에 따
른 ‘자존심 먹칠’도 아니다. 일부 축협 관계자과의 지난 불협화음도 아닐 것이다.
그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 역시 축구교실에 관계된 낭설들일 것이다. 지난 11년 동
안, 아니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당시부터 14년 째 매년 500만원 씩 사비를 들여
운영해 오고 있는 ‘차범근 어린이 축구대상(역대 수상자 명단엔 이동국, 이천수의 이
름도 포함)’을 비롯, 그 얼마나 남 모르는 우여곡절이 많았겠느냐 만은, 필자가 개인
적으로 알고 있는 ‘축구교실 비극 2가지’를 간단하게 얘기한다.

온 세상이 ‘차범근 물결’로 들끓고 있던 지난 97-98년 차범근 축구교실의 회원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다. 2,000여명에 육박하는 ‘꼬맹이 11번’들이 그저 ‘차감독의
그늘 안에서 놀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 부모님들의 손을 잡고 축구교실 운영본부를
노크했다고 한다. 차감독이 직접 지도할 시간이 없더라도 좋으니 그저 차범근 축구교
실 소속으로 뛰게만 해 달라고 조르는 사람부터, 주말마다 동부이촌동 경기장을 찾는
학부형 인파… 당시의 ‘차범근 열풍’이 그대로 반영된 현상이었다. 그렇게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학생들이 찾았던 차범근 축구교실이 문제의 ‘월간조선 인터뷰 파문’
이후 하나, 둘씩 회원들을 잃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의 ‘차범근 죽이기’는 그의 돈과
명예 뿐만 아니라 그의 ‘꿈’ 마저 앗아간 것이었다.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비
우면서 축구교실의 회원수도 지금의 500여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지난 9월 귀국 이후,
오직 축구교실에만 전념하겠다는 차범근의 뜻이 전파되면서 차범근 축구교실은 ‘제2
의 도약’을 맞이하고 있다.

후추가 작년 8월 독일에서 차범근을 인터뷰한 후로, 명전 재개 시점이 늦어진 이유
는 차범근의 조기 귀국이란 이유도 한 몫을 했었다. 2년 넘게 외국 땅에서 보내온 그
의 근황을 ‘목 마른’ 후추인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기획된 취재였지만, 인터뷰 직
후 바로 귀국한 차범근은 더 이상 ‘궁금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귀국
은 메이저 언론사의 촉각을 세우기에 충분한 이슈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기
귀국은 왜 이루어진 것일까? 바로 축구교실 문제와 막내 아들 세찌의 입학 문제 때문
이었다.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이란 감격스러운 결실을 가져 다 주었던 중경고
등학교의 당시 축구 지도부와 학교 측이 담합을 해서 ‘차범근 제거 작전’에 돌입했다.
몇 년 전 중경고 축구부의 지도자 자리에 발탁하기 위해 당시 사립학교 체육교사 신
분의 모 감독을 축구교실을 믿고 지지하던 서울시 교육감의 특별 배려로 공립학교
교사로 전근까지 시키며 여러 모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차범근에게 아주
쉽게 말해서 뒷통수를 치려는 움직임이 들통난 것이었다. ‘차범근은 이제 축구교실
에서 손 떼었다, 지원도 끊었다…’ 라는 악성 루머를 학부형들에게 퍼뜨리며 불안감
을 조성하고 이단 종교 집단을 방불케 하는 배후세력에 의해 조정 당한 당시 감독은
차범근을 중경고 프로그램에서 몰아내려고 들었다.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쌍 소리’
를 해 봤다는 차범근의 당시 심정은 슬픔과 분노를 뛰어넘어 오랜 만에 돌아온 조국
에 대한 배신감이 또 한번 들었을 것이다. 그 어떤 음해나 모략도 받아드릴 수 있던
차범근이었지만, 그의 분신이기도 한 축구교실을 포기하고 그를 믿고 따라주었던 수
많은 학부형들과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외면할 수 없다는 일념 하에 ‘전국대회 우승
의 주역’ 중경고와 결별을 결심을 한다. 귀국하자 마자 그에게 몰아 닥친 시련은 한
달이 넘어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된다. 중경고 축구부 학부형들을 상대로 ‘옛
감독과 함께 중경고에 남겠느냐 아니면 차감독과 새로운 고등학교 팀으로 옮기겠느
냐?’는 투표에서 대다수의 학부형들은 차범근을 택했고 그렇게 해서 창단된 팀이 바
로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였다.

99년 겨울 잠시 서울을 방문했던 차범근과의 만남에서 그는 그런 말을 필자에게 한
적이 있다. “두고 봐… 두고 보라니까… 내가 축구교실 시작한지 딱 10년 만에 전국
대회 우승 했잖아? 그렇게 하면 우리도 되잖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이렇
게 제대로 가르치고 바르게 교육시켜서 축구해도 우승 하잖아? 이젠 대학교 팀이랑
연결만 되면 우리 고등학교 애들 그대로 대학가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공도 차고… 우
리 애들은 대학도 시험 봐서 가겠다는 애들이 있다니까? 공부 잘 하는 놈들이 꽤 많
아.^^ 10년 후엔 프로 팀 못 만들 거 같아? 10년 전에 이거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
도 안 된다고 그랬는데 되잖아? 두고 보라고…” 난 차범근의 이 말을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다.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그 누구도 끝내지 못하는 일
을 차범근은 하나씩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분데스리가에 처음 진출했을 때도
대다수의 축구인들은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한민국 축
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 단 한명을 선택하라면 난 차범근 쪽에 내 마지막 동
전 하나까지 걸 것이다.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한 강당에서 K-League가 주최했던 ‘한국 프로 축구 살리기 공청
회’ 성격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국 축구 개선점하면 늘 나오는 ‘단골 메
뉴’가 안건으로 준비되었고 그 중엔 ‘유소년 축구 활성화’에 대한 토론도 이루어졌
다. 이용수 당시 해설위원을 필두로 모 스포츠 신문의 체육부장, 프로 축구팀 관계
자… 소위 축구 판에서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모여서 우리 축구 미래가 살길에 대해
서 논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솔직한 말로 하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위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유소년 축구 활성화 안’은 더도 덜도 없이 차범근이 10년 전부터 묵묵히
실천해 오고 있던 ‘차범근 축구교실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마디만 던지고 싶었지만 마음 속으로만 외치고 말았다. ‘어이, 아저씨들… 당신네들
이 그토록 갈아 마시려고 하던 차범근 짜르고 나니까 유소년 축구 얘기할 때 되게 민
망하지? 차범근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런 거창한 토론회 중에는 차범근의 ‘차’ 자도 꺼내지 못하는 당신들의 영혼이 불쌍
할 뿐이요’ 라고 말이다.

별책부록: ‘Live –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 창단식’

3년 만에 공개 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차범근의 얼굴은 상기 되어 있었다. 필자를 비
롯한 수 많은 팬들 역시 이날을 기다려왔지만, 막상 그날이 오니 긴장과 흥분이 교차
했다. 단상 위에는 대한민국 축구 계의 ‘거물’ 2명이 나란히 앉아있다. 정몽준 회장
과 차범근… 혹자는 ‘대한민국 축구 판에 투톱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범근이
제거 되었다’ 란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필자는 알고 있다. 돈, 명예, 머리, 외모,
그리고 야망까지 갖춘 정몽준 회장의 입장에서 그는 최대한으로 월드컵 감독 차감독
에게 배려했던 과거를… 그가 ‘부리는’ 그 누구에게 보다도 정회장은 차감독에게 정
성을 쏟았다. 하지만, 이 두 명의 중년 남성들이 한국 축구 판에서 공생해 나가는 과
정에 있어서의 충돌을 어쩌면 불가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만
큼은 필자의 마음이 든든했다. 가식이 있었는지 정치적인 발언이 깔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정몽준과 차범근이 다시 한번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엿봤다. 독일엔 베켄바워가 있고 프랑스엔 플라티니가 앞장서서 성공적인 월
드컵을 유치, 개최했다고 하지만, 우리 곁엔 정몽준과 차범근이 있기에 그 누구도 부
럽지 않았다.

한 나라의 축구 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주목하는 정몽준 회장의 축사는 ‘과연 정몽준’
이란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부드러웠고 소박했고 적절했다. 차범근과의 3년 만의 재
회가 자칫 어색해 질 수도 있었지만, 정치인 정몽준 회장은 역시 프로였다. 차범근의
차례가 되어서 단상 마이크 앞으로 다가간다. 무대 뒷편에 걸려있는 대형 태극기가
차범근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3년 만에 다시 보는 ‘태극기 속의 차
범근’이었다. ‘차범근의 자리는 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의 품 안에서
우리나라의 이름으로… 인사말 도중 차범근은 울먹였다. 그리고 약속했다.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위해서 힘 쓰겠다고. 우리가 그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우리 곁에 머무르며 우리 축구를 위해 생각하고 뛰어달라고… 돌아온 차범근에게 바
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여의도고 축구부 창단식 스케치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축사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 선수 여러분들의 밝고 건강하신 모습,
또 우리 축구계의 원로 김화집 선생님과 또 민용식 OB회 회장님들. 우리 축구계의 여
러분들 이 자리에서 건강히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신 유임종 교육감님, 한광수 교장선생님 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늘 여의도 고등하교 축구부 창단에 산파 역할을 하신 차
범근 감독과 창단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교직원 여러분 학생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
을 드립니다. 앞으로 이 선수를 가르치게 되실 정성진 감독과 선수 여러분들에게도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린이 축구교실 시절부터 함께 축구를 했던 선수들이 그대로 한 학교에 진학을 이제
여의도고에 축구부를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께서 다 저와 같은 생각이구나 짐작을 합니다. 학교 수업을 충실히
하면서도, 운동을 해 나가는, 학원 스포츠의 새로운 모델이 이제 보여진다고 하겠습
니다.

우리 김화집 원로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 말씀하셨다고 제가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선
수 학생이 되지 말고, 학생 선수가 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주 우리 김 선생
님의 말씀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승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즐기며 배우는 축구
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그렇게 해야지만이 우리 나라의 축구가 한 단계 높이 발전한
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에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만은, 불
란서에, 지난 월드컵 대회 우승한 불란서에 국립 축구 기술학교라는 것이 있는데, 이
학교에는 전국, 불란서 전국에서 뽑힌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하는데, 축구만 가르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 공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서 거기 계신 선생님들이
매일매일 학생들의 수업을 지도하는데 축구 지도하는 것 만큼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불란서 축구가 그렇게 성공했다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창단되는 여
의도고 축구부가 우리나라의 유소년, 청소년 축구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을 확
신을 합니다.

어제 저녁에 밤 늦게 중동의 두바이에서 지금 우리 나라 대표팀 선수들이 가서 시합
을 하는데요, 그 텔레비전 중계를 보시느라고 아마 밤 늦게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저도 그 경기를 열심히 봤습니다. 앞으로 이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 선수들은 우리 지금 대표 선수 못지 않고 우리 지금 대표 선수보다 더 잘하는,
차범근 감독과 같이 세계적인 선수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여의도고 축구부 선수들이 소개를 받을 때 꽃다발을 전해준 어린 아이들이 차범
근 축구교실의 유아라고, 유아부 아이들이라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봤어요. 유아부는 몇 살부터 시작을 하냐고 그랬더니 다섯 살부터 시작을 한다고 그
럽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보니까 저희 집에 막내 아이가 하나 있는데 막내 아이가
이제 금년 3월이면 다섯 살이 됩니다. 그래서 유아부에 들어갈 나이가 되기 때문에
일단은 신청을 한 번 하라고 권유를 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물론 신청해서 다 받아
주진 않겠죠.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면 우리 아이도 한 번 보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축구부 창단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도와 주시고 노력을 하신 유일용 교육감님,
한광수 교장 선생님, 그리고 교직원 여러분들 그리고 차범근 감독께 다시 한 번 감사
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차범근 축구교실 회장 인사말씀

오늘 아침 우리 꼬마들이 훈련하는 이촌동 그 고수부지에서 훈련을 하는데 굉장히 눈
이 많이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 축구교실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가 창단되는 날인데,
그동안 눈이 너무 많이 왔었기 때문에 오는 길이 미끄럽지 않을까 굉장히 염려가 됐
었는데, 그래도 눈이 멎고 많은 분들이 이렇게 여의도 고등학교의 축구팀 창단을 축
하해 주기 위해서 참석해 주신 것, 정말 감격스럽고, 저는 오늘 운동장을 뛰면서 어
른들의 그런 얘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왜 결혼식날 시집 가고 장가가는 날 눈이 내리
면 복이 있다는 그런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우리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가
잘 되기 위해서 축하하느라고 이랗게 함박눈이 쏟아지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여기 계신 모든 사람들, 그리고 저를 아끼고 사
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의 빚을 지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렇게 고르지 못한 그런 날씨에도 93세의 고령이신 우리 김화집 원로, 대 선생님, 저
를 늘 아껴 주시고 때마다 찾아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우리 원로님, 대 선배님들 저
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
다. 그리고 우리 축구교실 초등학교 중학교, 이 고등학교의 축구팀 창단을 적극적으
로 뒤에서 관심을 갖고 도와 주신 우리 유잉용 교육감님께 정말 감사를 드리고, 아마
영원히 이것은 제 마음 속에 그리고 우리 축구사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고
맙습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여의도 고등학교의 한강수 교장선생님, 축구부의 창단을
승낙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교감 선생님 이하 체육 교사님들 축구부
창단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주신 것에 대해서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
리 축구교실이 특별히 어려울 때에도 계속적으로 우리 축구교실을 지원해 주셨던 우
리 코카콜라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귀국 후에도 제가 유소년 축구에 도움
을 요청을 했을 때 쾌히 승낙을 해 주신 한국 바이엘 코리아의 고메즈 사장님, 그리
고 아디다스의 슈트라퍼 사장님, 독일인 친구들입니다.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국 축구는 유소년 방향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축구를 조금 알고 또 축구
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유소년의 축
구, 그 축구는 그 나라 축구발전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역
시 우리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11년 전
에 은평구를 시작으로 지금 현재까지 7개 지역에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게 됐습니
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시점에 신용산 초등학교, 용강 중학교
를 거쳐서 오늘 여의도 고등학교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11년 동안 이 축구 교실을
운영하면서 저는 나름대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 또 성적이 나고 있다
고 생각이 돼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 한국 유소년 축구에 모델이고 그
리고 희망이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우리 학생들이 좀 더 학생의 신분을 지키면서 그
리고 축구의 기본기를 배우고 기술을 익히면서 커 나가기를 저는 바랍니다. 제가 어
려웠을 때 우리 축구교실에 많은 선수들, 어린이들은 저에게 굉장한 위로를 주었습니
다. 커나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고 또 각종 대회에 나가서 성적을
내고 잘 뛰어 주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저는 기쁨과 용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이
들을 가르칠 때 저는 내일의 우리 한국 축구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일
은 나에게는 가장 보람있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고 가장 자신있는 일입니다.

스포츠의 생명은 페어 플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선수뿐 아니라 모두가 원칙을 지켜
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현재는 관중, 흥행, 성적 위주의 스포츠가 중요한 부분으
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러나 스포츠가 갖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원칙
과 룰을 지키는 페어 플레이 정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이런 정신
을 키우는 것이 사회 질서나 원칙을 지킬수 있는 인격이 키워진다고 믿기 때문에 선
진국에서는 학교 교육 중 체육을 어떤 과목보다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분을 학교와 더불어 우리 선수들에게 교육시켜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의 많은 관심과 사랑과 격려와 도움을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2002년 한일 월
드컵 공동개최, 우리 모든 국민의 관심사죠. 아마 지금은 모든 국민들이 축구에 전문
인이 된 그런 느낌이 들 정돕니다. 우리 한국 축구를 위해서, 또 2002년 한국 월드컵
성공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쓰시고 또 바쁘신 중에도 이곳에 참석을 해 주신 대한
축구협회 정몽준 회장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모든 여러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별책부록: ‘Live – 차범근 축구교실 유아부’

말을 무척이나 아끼는 차범근이 유독 필자에게 가끔씩 건네는 ‘독촉’이 하나 있다.
“우리 유아부 애들 공 차는 거 한번 와서 봐라… 걔 중에 될만한 놈들이 꽤 있다.”
였다. 작정을 하고 ‘유아부 공 차는 날’ 후추가 달려갔다. 올 들어 가장 눈이 많이
왔던 지난 15일날 이후, 그 눈 구덩이 속에서 애들이 어떻게 공을 찰는지 반신반의하
며 도착했다. 강 바람 사납기로 유명한 한 겨울 한강 둔치… 온 세상이 하얗고 그 누
구도 눈 치울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 같았던 한강 변의 공원… 그 가운데 차범근 축
구교실의 다목적 운동장의 모습이 보였다. 3개의 다른 크기의 축구장이 있는 곳이었
지만, 축구장 안에는 눈이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눈이 오던 날부터 치우기 시
작해서 이틀 만에 완전히 싹쓸이를 했던 것이었다. 평소에 차범근 축구교실을 실질적
으로 운영하고 있는 코치 선생님들을 참 존경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차범근이
‘대통령’일 때나 차범근이 ‘역적’일 때나… 언제나 변함 없이 차범근이란 지울 수 없
는 그늘 안에서 조용히 묵묵히 자신들의 이름을 희생해 가며 ‘차범근 축구교실’에 어
린이들과 열정을 태웠던 그 양반들의 위대함이 그날 따라 유독 돋보였다. ‘그 많은
눈을 어느새…’

‘눈도 많이 오고 날이 워낙 추운 아침이라 유아부 학생들이 과연 나타날까? 오늘은
후추가 제대로 헛탕 친 것 같다’ 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10시가 가까워지자 어
른 축구공보다 정말 쬐금 더 커 보이는 유아부 ‘얼라’ 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
했다. 운동복에서부터 축구화까지… 털모자, 목도리, 파카… 아주 제대로 ‘월동 준
비’를 한 친구들이 엄마 손을 잡고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운동장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날씨가 아무리 춥고 눈이 아무리 많이 쌓여있어도 그들은 뛰어야만 했다. 20
여명 가까이 되는 ‘병아리 군단’이 몸을 풀 고 있을 때 차범근의 짚차가 운동장 앞에
서 섰다. 애들 보다 더 심하게 월동 장비를 갖춰 입은 차감독이 내리자 마자 애들이
모여있는 운동장으로 달려갔고, 차범근을 본 ‘선수’들은 ‘회장님’, ‘선생님’, 급기야
‘아저씨’까지… 제 멋대로 차범근을 불러대며 에워쌌다.

같이 뛰고 차고 뒹굴고 웃으며 소리 질러대는 차범근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그가 예전에 필자에게 했던 말이 떠 올랐다. “난 애들하고 노는 게 천성인가봐… 그
때가 제일 좋거든…” 그에게 가장 큰 행복함과 즐거움을 주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필
자의 머리 속엔 단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저 친구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지금 함
께 뒹굴고 있는 저 사람이 바로 차범근이란 사실을…? 차범근의 명성을, 차범근의 무
게를, 그리고 차범근의 상처를…’ 그저 ‘옆집에 살고 있는 공 잘 차는 아저씨’ 이상
도 이하도 아닐 텐데… 그래서 차범근은 아이들을 더 좋아 할런지도 모른다. 그들 만
큼은 차범근을 자기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만 보아주기 때문에…

유럽이나 일본의 자료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유소년 선수들의 트레이닝 광경을 코 앞
에서 봤다. 기분이 묘했다.
말로만 듣던 ‘선진 유소년 트레이닝 기법’이 이거란 생각이 들어서, 지도자가 고함
안 지르고 어린 애들 고개 떨구지 않고 있는 모습이 낯설어서, 고종수와 이동국을 가
르치던 똑 같은 사람이 저 꼬맹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기막혀서… 30여분의
‘부분 전술 훈련’^^ 을 마치고 본격적인 꼬맹이들의 실전 연습이 시작되었다.
시합이라고 조차 말하기 민망했지만, 선수들과 심판(차범근)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공 가는 곳으로 열댓 명 씩 우르르, 한 놈 넘어지면 다 같이 넘어지고, 누가 공에 맞
아 울기라도 하면 플레이 스톱… 옆에서 ‘입 축구’를 해대던 열렬 학부형들도 필자도
차범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차범근의 웃음은 그렇게 나왔다. 말로 표현하기도 힘
든 어린이들의 공 차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한바탕 뛰어 논 아이들을 중앙으로 집합시켜 차범근은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오늘 누가 반장할래?” “저요, 저요, 저요!!!” 매번 훈련이 끝나면 반장을 정해서
“차렷, 선생님께 경례!”를 외치나 보다. 반장도 떨어졌겠다(^^), 이미 숨도 턱까지
차 올라오고 슬슬 한기도 느끼기 시작한 나머지 아이들은 반장이 아무리 정렬을 외치
고 선창을 해도 제 각기 딴청 피우기 바쁘다. 차범근이 호루라기 한방으로 군기를 잡
는다. “야,야,야… 반장이 차렷, 경례.. 하면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하면서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제대로 하는 거야. 그냥 고개만 깔딱하고 하는 건 어른한테 하는 인사
가 아냐. 자, 다시… 잘 할 때까지 할 거야!!” 차범근의 시범으로 그나마 정신을 차
린 아이들 그래도 3번 만에 ‘인사’를 마친다. 1시간 반 동안의 훈련 중에 차범근이
제일 긴 ‘연설’을 했던 부분이 바로 이 ‘인사’ 얘기였다. 차범근이 그 아이들에게 가
르치려고 하는 건 히딩크의 4-4-2도, 선진 축구의 오버헤드킥도, ‘타도 일본’의 정신
력도 아니었다. 그저 공과 친해지는 게 뭔지, 한 팀이 되는 것이 뭔지, 그리고 축구
선수 이전에 바른 인간이 되는 것이 뭔지를 가르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공간은 좁아지고 점점 더 우리의 새싹들은 아파트
안으로, 게임방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추운 날씨에도 ‘눈에 넣어도 안 아
플 내 자식’들을 축구장으로 데리고 나와 아이들과 함께 (입으로라도^^) 공을 차는
부모들이 멋져 보였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디지몽’도 ‘이메일’도 ‘구몬 수학’도 없
었다. 그래서 ‘안’ 보단 ‘밖’이 훨씬 더 좋았던 적이 있었다. 헌데, 요즘은 아이들이
‘밖’에 나갈 일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아쉽기만 하다. 필자가 봤던 그 아이
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내년에도 공을 차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빚을 내가며 그 아
이들을 바깥으로 불러내는 차범근이 야속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이 보다도 더
서글픈 현실은 그런 그를 고마워하는 우리보다도 ‘오래된 안식처’처럼 자신과 함께
해 주는 그 아이들을 차범근 본인이 더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EPILOGUE

필자는 A4 용지 100여장에 가까운 차범근의 명전 기사 1,2부 중에서 차범근의 유소년
축구 열정에 대한 부분에 가장 치중했다. ‘갈색폭격기 차범근’, ‘Chaboom 차범근’,
‘차기 대통령 차범근’ 이란 수식어 보다도 ‘유소년 축구의 Visionary 차범근’ 이란
말이 가장 그에게 적합한 표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차범근은 이 땅에서 가장 위대
한 축구 선수였고 가장 주목 받는 축구 감독이었지만, 필자의 눈에 차범근이 위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우리들의 내일을 위해 뛰고 있기 때문이다. 후추가 존재하는 이
유, 바로 기득권을 누리는 기성 세대들이 ‘변화’에 앞장서지 못 한다면 오직 어린이
들 만이 그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에 후추는 이 땅에 태어났다. ‘내
세대에 못한다면 다음 세대라도..’ 하는 바람에서 말이다. 그런 후추의 존재 이유를
차범근이란 ‘커다란 거울’ 앞에서 견주어 본다. 차범근이야 말로 이젠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해 줘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후추는 오늘도 움직인다. 차범근
의 비전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차범근의 멈춰있던 심장은 다시 박동하려고 한다. 모 방송국의 해설위원으로 다시 한
번 우리 곁에서 축구를 위해 박동하려고 한다. 왜 하필이면 ‘해설자’냐?는 질문에 그
는 평소 늘상 그랬던 것처럼 짤막하게 대답한다. ‘국민들의 축구 수준과 관점을 좌우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해설자니까…” 그는 평생토록 공만
차왔고 평생토록 축구만 공부해 온 사람이다. 방송에 적합한 쇼맨쉽도 기억에 남을만
한 ‘어록’도 없는, 방송 타기 참 싫어하는 차범근이 마이크를 잡기까지, 그의 결심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 하다. 문명이 발달하면
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축구 전문가’로 변신하고 있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자유로
운 토론도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새 그 토론의 결론은 ‘여론’으로 자리잡고 그 여론
을 반영한다는 언론은 조기 축구회도 한번 나가보지 않은, 감독 벤치 근처에서 물도
한번 따라보지 못한, TV 수상기 앞에서만 그리고 인터넷 게시판에서만 주름잡는 ‘검
증되지 않은 의견’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기사화하고 있다. 말빨 좋은 해설자나 글빨
좋은 기자의 그럴싸한 한마디에 동요되어 그 말이 곧 여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위험한 현실에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려고 차범근이 그 어색한 방송물을 먹으려고 한
다. 팬들의 반응이 가장 빠르고 예민할 수 있는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이크를
택했다. 그 만큼 그에겐 우리 팬들의 ‘수준’이 월드컵 경기장 시설과 국대 전력 만큼
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차범근에게 우린 과연
어떻게 그를 대할런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얼마 전 필자는 경향신문에 ‘제보’를 한 적이 있었다. 차범근 축구교실에 다니는 김
태풍이란 학생이 ‘차범근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나서 말이다. 그 글을 복사하고 첨
부된 사진 한장을 캡쳐해서 경향신문사 체육부에 이메일로 보냈다. ‘비리와 부정, 사
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자극제가 될 수 있는 어느 꼬맹이의
글과 사진을 동봉한다는 메모와 함께… 다음날 경향신문 기자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왔다. 그날 밤 가판부터 기사가 실릴 것이라면서. 뒤져 본 기사엔 바로 차범근의 사
진 한장과 태풍이의 글이 실려있었다.

털모자에 추리닝을 걸쳐 입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동부이촌동 차범근 축구교실 운
동장의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 넘어질까봐 망치로 얼음을 깨고 있는 차범근
의 사진 한장이 신문 지면에 실려 있었다. 그게 바로 차범근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
가 그토록 욕하고 죽이려고 했던 차범근의 삶이었다.

여의도 고등학교 창단식을 치룬 지난 9일 저녁 필자는 길거리에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차범근이었다. 필자는 말 했다. “오늘 단상에 서서 말씀 하시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서
혼 났어요.”… “흠… 그래? … 나도 그 동안 많이 울었어…” 이례적으로 후추 주방 식
구 전원이 참여해서 차범근 명전 2부의 기사를 작성했다. 필자 한 사람의 목소리 보단
우리 모두의 목소리가 합해져서 그에게 다가간다면 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아서
말이다. 차범근의 명예회복이란 거창한 취지도 없었던 후추 명예의 전당이었다. 그
누구의 명전과는 달리 그냥 필자가 알고 있는 차범근의 모습만 대신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 밖에 없었다. 마치 그와 ‘5분만이라도 함께 보낸 느낌’을 받은 독자가 한명이라
도 있었다면 필자는 만족한다. 그리고 3년 전 중국에서 그에게 못했던 한마디를 후추
란 온라인 지면을 통해서 지금에서야 꼭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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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1)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06년 현재 한국축구선수 중 가장 영예스러웠던 선수는 차범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발간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라는 고급 일간지에서는 “1980년을 가장 빛낼 상승세 인물”로 영국의 마거릿 대처수상과 한국의 축구선수 차범근을 선정했다. 서독 프로축구 1부리그인 분데스리가에 진출한지 1년도 채 못 된 시점에서 서독언론들은 이미 차범근의 기량과 능력에 합격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1953년 5월 22일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한 차범근은 아버지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마차를 끄는 마부였던 차범근의 아버지는 차범근이 달리기에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얼마 안되는 논과 밭을 모두 팔아서 유학비를 마련한 아버지는 차범근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기는 했으나 학원스포츠의 분포와 정보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영등포에 있는 영도중학에 차범근을 입학시켰다. 그러나 영등포공업고등학교와 같은 계열인 영도중학에는 유감스럽게도 축구부가 없었다. 차범근은 자기가 원했던 축구대신 필드하키를 하게 됐다. 차범근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용단을 내리고 차범근을 경신중학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다. 고교축구의 명문 경신고등학교의 계열중학인 경신중학 축구팀에서 테스트를 받았으나 스피드가 뛰어나다는 것 하나 외에 축구선수로서의 재능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3학년이었던 차범근을 2학년으로 한 학년 떨어뜨려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 차범근의 부인 오은미씨가 밝힌 당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작고한 당시의 경신중학교 체육교사였던 선영제씨(전 국제심판,KBS축구해설위원)가 남긴 말은 조금 달랐다.

“영도중학 필드하키 선수 중에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필드하키보다는 축구선수로 대성할 수 있는 소질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나돌기에 경신고등학교 축구감독 장운수감독의 지시를 받고 자기가 직접 영도중학에 가서 차범근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차범근은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장운수감독에 의해 세계적인 수퍼 스타로 각광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던 것이다. 차범근이 경신고등학교 축구선수로 한창 이름을 떨치던 때 그의 키는 1백78센티미터였다. 지금은 축구선수 중에 1백80센티미터를 넘는 선수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때만 해도 1백78센티미터는 장신선수로 분류되고 있었다.

차범근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197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 청소년축구대회에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다. 제1회, 제2회 대회에서 우승, 제5회 대회에서 버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던 한국청소년 팀은 차범근이라는 새로운 스타플레이어가 출현했기 때문에 모처럼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승전에서 이스라엘 팀에게 0-1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년 뒤,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14회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도 차범근은 한국청소년대표선수로 출전했다. 이때 차범근의 스피드는 1백미터를 11초3에 주파하는 놀라운 준족이었다. 여기에 돌파력과 슈팅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차범근에 거는 국내축구팬들의 기대는 컸다.

4월 14일부터 모두 17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벌어진 제 14회 대회에서 한국은 라오스, 이란,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등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의 상대는 또 다시 이스라엘 팀. 1년전 제13회 대회 결승전에서 한국을 준우승에 머물게 했던 바로 그 팀이었는데 제14회 대회에서도 한국팀은 0-1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침통해진 한국청소년 팀 선수들은 모두 귀국했으나 황재만과 함께 차범근은 방콕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2)

차범근과 황재만은 청소년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양쪽에 모두 선발돼 있었으며 1972년 5월7일부터 19일까지 방콕에서 제5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됐었기 때문에 그대로 방콕에서 국가대표팀을 기다리게 됐던 것이다.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은 제1회 제2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뿐 그 뒤에는 우승권으로부터 멀어져있었다. 한국, 이란, 이라크, 태국, 쿠웨이트, 크메르등 6개국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전까지 무난히 올라갔으나 중동의 강호 이란에게 0-1로 패하고 말았다. 청소년 팀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도 준우승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대표팀은 같은 해 7월 12일부터 29일까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연린 제16회 메르데카컵대회에 출전했으며 차범근은 이때도 국가대표선수로서 이 대회에 출전했다. 이때 차범근은 여러 차례의 국제경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자신과 적응력을 갖추게 됐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말레이시아B팀,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준결승에서 만나게 된 일본팀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축구종목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던 일본축구팀은 “탈(脫) 아시아”를 선언했었다. “이제 일본축구는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하지 않고 유럽이나 남미의 축구정상권 국가들만 상대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메르데카컵에는 일본의 국가대표 2진팀을 출전시켰는데 말레이시아축구협회 회장 겸 국가원수(수상)였던 압툴 퉁크 라만씨에 의해 일본국가대표 2진팀은 하루만 자고 말레이시아로부터 쫓겨나는 신세가 됐었다. “우리는 일본국가대표 1진을 초청했지 2진을 초청한 일은 없다. 당장 돌아가라”는 라만수상의 호통에 질겁을 하고 쫓겨났던 일본은 1972년 제16회 메르데카컵에는 최정예들로 구성된 제1진을 출전시켰던 것이다. 한국팀으로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강팀이었으나 경기결과는 3-0으로 한국팀이 가볍게 이겼다. 결승전에서는 말레이시아A팀과 대결하게 됐다.

이때 말레이시아는 뮌헨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전지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가대표축구팀의 전력강화에 온갖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팀과의 결승전에서는 2골을 빼앗기고 1골을 만회하는데 그침으로서 한국이 우승을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차범근은 말레이시아와의 결승전에서 한국팀의 2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수훈선수가 됐다. 1년 전인 1971년 9월25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졌던 제20회 뮌헨올림픽 지역 예선전에서 말레이시아에게 0-1로 패하면서 뮌헨올림픽 출전권을 빼앗긴지 3백8일만의 설욕이었다.

1973년 5월 19일 서울에서는 제10회 뮌헨월드컵 지역예선전이 시작됐다. 국가대표팀 감독은 민병대씨, 코치는 문정식씨, 그리고 주전선수들로는 김정남, 김호, 황재만, 이차만, 고재욱, 김호곤, 정강지, 박이천, 정규풍, 김진국, 김재한 등 쟁쟁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차범근은 가장 어린 선수로서 이들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뛰게 됐다. 특히 1백90센티미터의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의 등장은 국내 축구팬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1백78센티미터인 차범근을 장신선수라고 하던 시절에 무려 1백90센티미터라는 키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축구의 전통과 체질을 크게 변형시키는 일대 모험이기도 했다. 장신선수 김재한을 최전방에 포진시키는 이른바 포스트 플레이를 민병대감독이 최초로 시도했던 것이다.

한국은 첫 경기를 태국과 갖게 됐으며 입장권이 모두 매진된 상태에서도 4만 여명의 축구팬이 경기장 밖에서 암표를 사기에 바쁜 상태였다. 5백원짜리 입장권이 2천원씩에 암매되는 대성황이었다. 전반전은 양팀 모두 득점 없이 0-0으로 끝마쳤다. 후반 7분경 드디어 김재한에 의한 포스트 플레이가 불길을 내 뿜기 시작했다. 태국선수들을 어깨 밑으로 내려다보던 김재한이 높게 떠 오는 볼을 점프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헤딩슛, 귀중한 선취골을 뽑아냈다. 뒤이어 차범근이 2골 정규풍이 1골을 성공시키며 4-0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3)

두 번째 경기의 상대팀은 말레이시아였는데 한국팀은 첫 경기에서 압승한 기분에 들떠 있었던 때문인지 졸전 끝에 0-0으로 겨우 비겼다. 물론 김재한을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도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김재한의 큰 키를 이용하려면 일단 상대진영 양쪽 사이드를 깊숙이 돌파한 다음 크로스(그때는 “센터링”이라는 용어를 썼다.)를 해야 하는데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한국선수들은 측면 돌파를 생략한 채 경기장 중앙, 그러니까 미드필드에서 공중볼만을 차주는 것이었다. 김재한을 마크하는 개인 및 부분전술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나온 말레이시아 선수들은 김재한을 2중으로 마크하면서 그의 헤딩볼이 목표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경기에서 한국은 이스라엘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B조 2위로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A조에서는 홍콩이 1위, 일본이 2위로 올라왔기 때문에 한국은 준결승에서 홍콩과 대결하게 됐다. 경기개시 5분만에 한국은 어이없이 1골을 먼저 내주었다. 당시 홍콩에는 콕카밍, 엔코엔추 같은 본격적인 프로선수들이 있었다. 전반전 44분경 미드필드에서 길게 띄워 준 볼을 김재한이 가슴으로 트래핑 했다. 그 순간 홍콩 골키퍼가 볼을 낚워채려고 달려 나왔다. 김재한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면서 발등으로 볼을 차 올렸다. 볼은 홍콩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어 홍콩팀 골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전반전을 1-1로 마친 한국팀은 후반전에 박이천과 정규풍이 각 각 1골씩 넣으면서 3-1로 홍콩을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의 상대는 예상했던 대로 이스라엘이었다. 5월 28일, 한국과 이스라엘의 결승전이 벌어지게 됐으며 과거 번번이 마지막 순간에 발목을 붙잡혔던 이스라엘에 대해 한국선수들은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 요행이라고 할까 이스라엘은 일본팀과의 준결승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선수전원이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 약세를 본 한국선수들은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시 강팀이었다. 전후반 90분 경기에서 한국팀이 퍼부은 슈팅수는 14개였으며 이스라엘 팀은 5개뿐이었으나 스코어는 0-0이었다. 연장전에 들어갔다. 연장전에서도 전반전은 양팀 모두 득점이 없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3분경, 승리를 확정 짓는 절호의 기회가 한국팀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진영 왼쪽, 하프라인으로부터 약 15미터 앞선 지점에서 한국팀이 프리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박영태였다. 왼발이 특히 강한 박영태가 힘껏 찬 볼은 이스라엘 수비진에 의해 튕겨 나왔다. 이때 한국팀 사령탑에서는 총공격령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 수비수 김호곤까지 공격에 가담해 있었다. 이스라엘 수비수가 밀어 낸 볼은 김호곤을 향했으며 김호곤이 논스톱으로 때린 볼이 일직선을 그리며 이스라엘 골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탕”하는 둔탁한 소리를 남기며 볼은 다시 튕겨 나왔다.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오는 볼은 다시 차범근 앞으로 떨어졌으며 차범근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하게 발리킥으로 되받아 찼다. 시속 1백20㎞가 넘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볼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이스라엘 골대 속에 안착했다. 이 한방의 골이 스무살짜리 막내둥이 차범근을 일약 한국축구의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제10회 뮌헨월드컵 지역예선 아시아A조 수위의 자리를 확보했으며 B조 수위 호주와의 최종예선전을 남겨 놓게 됐다. 호주와의 최종예선전을 앞두고 한국팀은 1973년 6월23일 서울운동장에서 제2회 한,일축구정기전을 갖게 됐다. 1년 전 도쿄에서 있은 제1회 정기전에서 2-2 무승부로 아쉽게 승리를 놓쳤던 한국팀은 제2회 정기전에서 박이천과 김재한의 골로 2-0승을 거두었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4)

호주와의 뮌헨월드컵 최종예선전은 1973년 10월 28일 호주의 시드니에서, 그리고 11월 10일 서울에서 홈 앤드 어웨이방식으로 치러지게 돼 있었다.

한편 아시아B조 결승전, 호주와 이란의 경기를 직접 현지에 가서 면밀하게 살피고 돌아온 문정식 코치는 짐 메케이, 존 웨렌, 레이 리처드등 미드필드를 맡고 있는 선수들이 노련하며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점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는 스트라이커 아틸라 애보니로서 돌파력과 슈팅의 위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점등을 한국선수들에게 주지시켰다.

10월 28일 시드니에서 있은 어웨이경기에서 한국팀은 0-0 무승부로 경기를 끝마쳤다. 어웨이경기에서의 무승부는 일단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다.

홈경기가 벌어지는 11월 10일 서울의 날씨는 쌀쌀한 편이었으나 서울운동장은 3만명의 관중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로 화끈거리고 있었다. 스탠드와 통로까지 가득 메운 관중은 1960년대에 유행한 “노란셔츠의 사나이” “빨간 마후라” “서울의 찬가”등을 열심히 합창했다. 전반 15분경 한국팀은 김재한이 발로 슈팅한 볼에 의해 1-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뒤이어 28분경 혼전중인 호주팀 문전에서 흘러나오는 볼을 고재욱이 인스텝으로 강하게 찼다. 마치 잠수함에서 발사된 어뢰처럼 낮게 일직선으로 날아간 볼은 정확하게 호주골에 명중했다. 스코어는 2-0. 한국의 승리는 확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고재욱의 두 번째 골이 성공한지 1분만에 기습을 펼친 호주팀에게 한국팀은 1골을 허용했다.

후반전에 한국팀은 또 한골을 잃었다. 문정식 코치가 지적했던 호주팀의 미드필더 레이 리처드의 롱 드로우인을 막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코너킥에 못지 않는 롱 드로우인을 짐 메케이가 헤딩슛~ 골인. 결국 승부는 2-2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FIFA의 지시에 의해 11월 13일 제3국인 홍콩에서 재경기를 갖게 됐다.

재경기는 홍콩 가번먼트 스타디움에서 벌어지게 되었으며 TV중계로 이 경기를 지켜보는 국내축구팬들은 차범근이 다시 한 번 빛나는 플레이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국 0-1로 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팀의 포켓 속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뮌헨행 티켓은 호주팀에게 돌아갔으며 차범근은 같은 해 12월 29일에 있은 ‘축구인의 밤’에서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장덕진씨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되면서 한국에서도 아시아권의 국제축구대회를 주최하게 됐으며 그 명칭은 “박대통령 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였다. 1971년에 제 1회대회가 개최됐는데 한국은 주최국이면서도 제3회 대회 때까지 단독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제1회대회에서는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고 제 2회 대회에서는 버마의 단독우승, 그리고 제3회는 버마와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의 공동우승이었다. 차범근은 제 2회대회때부터 한국팀의 주전선수로 출전했으나 단독우승으로 이끄는 주역은 되지 못했었다.

1974년 5월11일 드디어 제4회 박대통령컵쟁탈아시아축구대회의 막은 올랐다. 한국을 비롯 일본, 말레이시아, 크메르, 인도네시아, 버마, 태국 등 아시아 7개국이 출전한 이 대회 첫날 첫 경기에서 한국팀은 일본팀을 3-0으로 격침시켰다. 두번째 경기에서 한국팀은 크메르와 만났다. 비록 제 3회대회에서 버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선수들의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 크메르팀은 도저히 한국팀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키도 작고 깡마른 크메르선수들의 외형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선수들의 몸집과 비슷했다. 그러나 경기결과는 한국팀의 0-1패였다. 패배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한국선수들이 크메르선수들을 너무 얕보았기 때문이었으며 둘째는 비가 몹시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벌어진 경기였기 때문에 한국선수들의 패스 연결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경기에서 말레이시아에게 4-0으로 이기면서 한국팀은 예선리그 A조 1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5)

B조에서는 인도네시아가 1위, 버마가 2위로 올라왔기 때문에 한국팀은 준결승에서 버마와 맞붙게 됐다. 제 1회 대회 때부터 제 3회 대회 때까지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버마. 한국팀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고 버티던 버마. 그 버마와의 준결승에서 한국은 1-0으로 이겼다. 여전히 어렵게 이긴 승리였으나 한국선수들로서는 쌓이고 쌓였던 한이 일시에 풀어져 버리는듯한 통쾌함이었다.

5월 20일, 제 4회 박대통령컵대회의 결승전은 한국팀과 인도네시아팀과의 대결로 벌어졌다. 한국선수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출전했으나 조명탑의 밝은 불빛 속에서 벌어진 야간경기에서 한국팀은 7-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장식했다. 이날의 수훈선수는 차범근, 박이천, 김재한, 고재욱이었다. 이로써 한국팀은 우리나라에서 주최하는 국제규모의 축구대회에서 처음으로 단독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아시아지역에는 박대통령컵축구대회 외에 메르데카컵과 태국에서 개최하는 킹스컵이 가장 권위 있는 초청대회였다. 1974년 12월 10일 한국대표축구팀은 제 7회 킹스컵 대회에 출전했다. 코칭스태프는 함흥철감독과 김정남코치체제로 바뀌었으며 선수 중에는 연세대의 허정무가 새로 선발 되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차범근은 축구대표팀의 막내둥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방콕에서 벌어진 첫 경기에서 한국팀은 인도네시아를 4-0으로, 두 번째 경기에서 크메르를 2-1로 누르고 세 번째 경기에서는 고전 끝에 월남(지금의 베트남)과 2-2 무승부가 되면서 A조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만난 말레이시아는 그야말로 난적이었다. 90분 경기를 0-0으로 끝내고 연장전에 들어갔으나 스코어는 여전히 0-0인 채 30분 경기도 끝났다. 이 때부터 FIFA에서는 “연장전 끝에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을 경우 승부차기로 끝내도록 해도 좋다”는 승부차기제도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한국팀은 승부차기에서 5-3으로 말레이시아를 어렵게 물리치고 결승전에 나섰다. 열대국가에서 벌어지는 대회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때도 한국선수들은 대회 초반에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으나 중반 이후 점차 체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살인적인 무더위 때문이었다.

결승전에서 만난 팀은 홈팀인 태국이었다. 태국 선수들은 다른 대회에서도 그랬지만 이날 경기에서는 더욱 거칠게 나왔다. 태국선수들의 난폭한 플레이로 한국선수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가운데 90분 경기가 끝났으며 스코어는 1-1이었다. 연장전에서 한국팀의 김진국이 1골을 넣었고 막내둥이 허정무가 1골을 더 추가함으로서 한국은 3-1로 승리, 제 7회 킹스컵의 주인이 됐다.

1976년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실업팀에 입단하게 됐을 때 차범근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차범근은 고대 2학년 때부터 신탁은행으로부터 월급을 받아왔다. 고대 졸업과 동시에 신탁은행 축구팀선수로 뛰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은 월급이었다. 그런데 차범근이 고대를 졸업했을 때 신탁은행은 서울은행과 합병이 됐기 때문에 차범근은 신탁은행축구팀이 해체되는 것으로 보고 자동차보험축구팀에 입단했다. 이것이 말썽이 됐다.

서울은행과 합병한 서울신탁은행측에서는 “신탁은행축구팀이 해체된 것이 아니고 명칭만 바꾸었기 때문에 차범근의 이적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축구협회의 선수등록규정에 의하면 “실업팀에 입단한 선수는 2년이 경과하지 않는 한 소속팀 감독 및 단장의 승인없이는 다른팀으로 이적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단, 해체되는 팀의 선수는 자유이적이 가능하다고 밝혀져 있었는데 차범근의 경우는 신탁은행축구팀이 해체된 것이 아니고 서울신탁은행으로 흡수 통합된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보험축구팀에 등록한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는 유권해석이 내려졌다. 그러나 차범근은 서울신탁은행축구팀으로의 복귀를 거부했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6)

자동차보험축구팀에서는 차범근의 등록이 자동적으로 취소됐고 차범근은 서울신탁은행축구팀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적(無籍)선수가 되어 버렸다. 무적선수는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구축구팀은 제 6회 박대통령배대회를 맞게 되었다.

제 5회대회까지는 아시아지역 국가만을 초청하는 아시아규모였던 이 대회가 제6회대회부터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국들도 초청하는 세계규모대회로 크게 성장했다. 한국축구로서는 당연히 모처럼의 세계규모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고 싶었으나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아시아지역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지목받던 대형 스트라이커 차범근이 무적선수로 손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이 커다란 고민이었다. 여기서 김윤하축구협회 회장이 기지를 발동했다. 차범근을 축구협회 소속 선수로 등록시켰던 것이다. 축구협회가 단독으로 거느리는 축구팀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차범근을 그렇게 등록시킴으로써 대한축구협가 관장하는 국가대표선수로 뛸 수 있는 길은 마련됐다.

9월 11일 제6회 박대통령컵대회 첫 경기에서 한국팀은 말레이시아팀과 대결했다. 한국팀은 전력을 충분히 가다듬고 나섰으나 이날따라 골기퍼 김진복과 수비수 김철수의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 그 때는 필드 플레이어가 자기 팀 골키퍼에게 백패스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김철수가, 김진복골키퍼에게 백패스하는 것을 말레이시아선수가 가로 채더니 먼저 1골을 선취 득점했다. 두번째 골은 김진복골키퍼가 김철수에게 차 준 볼이 역시 말레이시아선수에게 인터셉트당하면서 멍청하게 빼앗겼다. 비슷한 형태로 3골을 연속해서 허용한 한국선수들은 전원이 제정신을 잃은 사람들 같았으며 스탠드에서는 김진복과 김철수를 욕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후반전에서 정신을 가다듬은 한국팀은 박상인에 의해 1골을 만회했다.그러나 곧 이어 말레이시아의 목타르 다하리의 번개같은 중거리슛에 또 한골을 잃으면서 1-4로 골차는 여전히 3골이나 벌여져 있었다. 한국선수들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으나 말레이시아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으며 스탠드에서는 한국선수들을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소리가 점 점 높아지고 있었다. 전광판의 시계는 경기종료 9분을 남겨 놓고 있었다.

이때 차범근이 연출하는 기적적인 드라마가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숲속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던 표범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한 차례 기지개를 한 뒤에 먹이를 향해 사납게 돌진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오른쪽 윙으로 포진했던 차범근이 크게 포효하면서 적진을 헤집더니 강하게 때린 볼이 그대로 말레이시아의 골을 갈라놓았다. 실의와 환멸에 빠졌던 스탠드의 관중석에서 약간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멋진 플레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으로 한국이 패배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박수소리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4분이 경과했을 무렵 차범근의 발끝에서 튕긴 볼이 또 한 번 말레이시아팀 골속으로 들어갔다. 스탠드의 박수소리는 갑자기 커졌으며 돌아가려던 일부 축구팬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뒤이어 말레이시아수비수가 차내는 볼을 가로챈 차범근이 3번째 골을 성공시켰으며 이때 전광판의 시계는 경기종료를 2분 남겨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7분 동안 차범근이 혼자 3골을 연속적으로 뽑아냈던 것이다. 스탠드의 관중은 완전히 미쳐있었으며 한국선수들도 차범근을 중심으로 서로 얼싸 안았다. 경기는 끝났으며 스코어는 4-4 무승부였다.

비록 역전까지 시키지는 못했으나 만약 이 경기에서 한국팀이 졌더라면 우승은커녕 결승 토너먼트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예선 탈락하는 큰 망신을 당할 뻔 했다. 소속팀 없는 無籍선수 차범근. 그는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축구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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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범근 (7)

이 대회에는 한국 측에서 “화랑”이라고 이름 붙인 대표팀 1진과 “충무”라고 이름 붙인 대표팀 2진 등 2개팀을 출전시켰으며 브라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뉴질랜드, 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 출전했는데 한국화랑팀은 말레이시아와 4-4로 비긴 뒤 인도를 4-0, 싱가포르를 7-0으로 물리쳤다. 조별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는 브라질팀과 갖게 됐다. 이 대회에 출전했던 브라질팀은 상파울로주(州)에 있는 7개 프로팀에서 선발된 혼성팀으로서 그 수준은 브라질축구의 2부리그에서 뛸 정도의 실력을 지닌 팀이었다. 그러나 한국화랑팀 보다는 분명히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경기는 한국화랑팀이 0-1로 지고 있는 상태에서 90분 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한국화랑팀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을 무렵 이번에도 차범근에 의한 극적인 타이 골이 터졌다. 만약 이 경기에서 한국이 패했더라면 말레이시아가 준결승에 올라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준결승에서 한국화랑팀은 뉴질랜드를 2-0으로 누르면서 힘겹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의 상대는 다시 브라질이었다. 예선리그에서 1-1무승부를 기록했던 한국화랑팀은 심기일전해서 잘 싸웠다. 경기결과는 0-0 무승부. 타이틀이 걸린 대회가 아니고 초청대회이기 때문에 한국화랑팀과 브라질팀은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따지고 보면 차범근 한 사람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공동우승이나마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은 제 11회 아르헨티나월드컵 예선전의 해였다. 2월 27일에 시작된 지역예선전이 12월 4일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국대표팀은 최정민감독, 김정남코치 체제로 출범했으며 차범근은 공군축구팀 소속선수가 돼 있었다.

예선전 첫 경기는 한국팀과 이스라엘팀의 경기로 시작됐으며 텔아비브에서 거행된 첫 경기에서 한국은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사실은 한국팀이 1-0으로 이겼었다. 차범근의 도움을 받은 김진국의 논스톱 슛 볼은 이스라엘 골 크로스바를 맞고 골대 속에 떨어졌으며 이스라엘 골키퍼가 허둥지둥 볼을 잡았으나 볼은 이미 골라인을 넘어선 다음이었기 때문에 골인이 분명했다. 볼을 잡은 이스라엘 골키퍼 소리노프의 몸이 골대 속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두말 할 여지없는 골인이었다. 그러나 주심이나 부심(그때는 선심이라고 했음) 모두 노골로 인정했다. 1977년 2월 28일자 이스라엘 신문 ‘더 예루살렘 포스트’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보도하면서 “그것은 틀림없는 골이었으나 주심과 부심이 모두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3월 20일 한국과 이스라엘의 2차전은 서울에서 열렸다. 어웨이게임에서 억울하게 1골을 도둑맞았던 한국선수들은 작심한 듯이 무서운 기세로 뛰었다. 전반전 22분 차범근이 첫 골을 뽑아내면서 기선을 제압했던 한국팀은 후반전에서 1골을 빼앗기면서 약간 흔들리는 듯 했으나 박상인이 1골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한국이 앞서 나가고 있었다. 경기가 거의 끝날무렵 이스라엘 진영 오른쪽, 골과의 거리는 30미터가 넘는 위치에서 최종덕이 프리킥한 볼이 그대로 이스라엘골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한국팀이 3-1로 가장 어려운 1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2차전에서 일본팀과 싸우게 된 한국팀은 3월 26일 도쿄의 어웨이게임에서 0-0, 4월 3일 서울에서의 홈게임에서 1-0으로 이기면서 아시아지역 제2조의 승자가 됐다. 이때 다른조에서는 1조 1위 홍콩, 3조 1위 이란, 4조 1위 쿠웨이트, 5조 1위 호주로 결정 돼 있었다. 이들 5개국이 역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최종 예선을 치르게 돼있었다. 한국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국가는 홍콩 하나뿐이었으며 6월 26일 한국팀은 홍콩에서 어웨이게임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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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범근 (8)

홍콩 스타디움에서 열린 어웨이게임에서 한국은 1-0 승을 기록했다. 7월 3일에는 부산에서 이란과의 홈게임이 벌어졌다. 최정민감독은 이 경기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을 최전방에 내세우는 투톱 시스템을 구사했다. 이회택도 1백미터를 11초대에 주파하던 준족이었기 때문에 차범근과 함께 투톱으로 나서면 적진을 교란시키기에 훌륭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최정민감독은 이회택이 이미 30살을 넘긴 노장이기 때문에 지난날의 번개같은 스피드를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차범근과의 투톱 시스템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하프타임을 이용해서 최감독은 이회택을 빼고 김재한을 그 자리에 기용했다. 민병대 감독이 곧잘 썼던 김재한을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를 최감독도 따라서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으며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이 경기에서는 차범근의 플레이도 박수를 받을만하지 못했다.

8월 27일 시드니에서 있은 호주와의 어웨이게임에서 한국팀은 1-2로 패했다. 이때까지의 전적은 1승 1무 1패. 나머지 다섯 차례의 경기에서 모두 이기지 못한다면 한국팀의 아르헨티나월드컵 출전은 어렵게 되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10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쿠웨이트와의 홈게임에서 한국팀은 1-0으로 이겼다. 그러나 10월 25일 역시 서울에서 열린 호주와의 홈게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한국팀은 0-0으로 비겨 버렸다. 여전히 어두운 구름이 한국축구팀을 억누르고 있었다.

11월 5일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있은 어웨이게임에서마저 2-2로 비김에 따라 어두운 구름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11월 11일 테헤란의 아리야메르 스타디움에서 있은 이란과의 어웨이게임에서 다시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한국축구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출전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 선두를 달리던 이란은 승점 14점, 쿠웨이트는 9점, 한국은 8점, 호주는 7점, 홍콩은 0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승리=2점, 무승부=1점으로 계산되는 승점제도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무려 6점이나 뒤져 있었기 때문에 홍콩과의 나머지 경기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경기가 돼 버렸다. 그래도 경기는 해야 했으며 12월 4일 부산에서 있은 홍콩과의 홈게임에서 한국팀은 5-2로 이겼다. 차범근에게 기대했던 국내축구팬의 실망은 참으로 컸다. 멀리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11회 월드컵을 TV중계방송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차범근의 심정도 편할 수는 없었다.

1978년 5월 20일부터 일본에서는 제1회 재팬컵 쟁탈 국제축구대회가 거행됐으며 한국축구팀도 이 대회에 초청을 받고 출전했다. 아시아지역에서 벌어지는 초청대회에는 상금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이나 남미의 명문팀들은 초청을 해도 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축구협회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재팬컵에서 우승하는 팀에게는 10만 달러, 준 우승팀에게는 5만 달러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브라질프로축구 77~78시즌에 우승을 차지한 팔메이라스팀과 서독프로축구에서 우승을 차지한 보르시아 MG팀을 초청하면서 한국팀과 태국팀도 초청했던 것이다

차범근으로서는 서독 프로축구 분데스리가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이 대회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도 있다. 한국팀은 첫 경기에서 팔메이라스팀에 0-1로 패한데 이어 두 번째 경기에서도 보르시아 MG팀에게 3-4로 졌다. 그러나 보르시아 MG팀과의 경기는 비록 패했으나 명승부였다. 1977년도 유럽최우수선수로 선정됐던 알란 시몬센과 서독축구대표팀의 주전공격수인 델 하이에선수가 포진한 보르시아 MG팀에게 한국팀은 전반전에만 4골을 빼앗겼다. 그러나 후반전에서 차범근이 단독 드리블로 보르시아 MG팀 선수들을 헤치더니 25미터가 넘는 먼 거리에서 통렬한 롱슛을 성공시켰다. 뒤이어 김호곤과 김재한의 연속골로 3-4로 바짝 추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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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범근 (9)

보루시아 MG팀과의 경기는 차범근에게 새로운 야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보루시아 MG팀을 이끌고 왔던 우도 라텍 감독이 한국팀에 4-3으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선수들을 질책했던 것으로 보더라도 이때 서독선수들은 한국선수들, 특히 차범근에 대해 비상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78년 12월 9일 하오 6시, 태국 방콕에서는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의 막이 올랐다. 축구종목 조별 예선리그에서 한국팀은 바레인과 첫 경기를 갖게 됐으며 5-1로 쉽게 이겼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중동의 강호 쿠웨이트를 2-0으로 격파한 한국팀은 세 번째 경기에서도 일본을 3-1로 물리쳤다. 한국팀은 준결승리그에 진출, 중국팀을 1-0으로 눌렀다. 중국이 공산화된 뒤 처음 갖는 경기라 임원과 선수전원이 긴장했었으나 차범근이 멋진 골로 모든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중국을 깬 여세로 한국팀은 말레이시아를 1-0 , 태국을 3-1로 모두 물리치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대결하게 된 팀은 북한팀이었다. 1974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개최됐던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 축구종목에서 한국축구팀은 북한축구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가능한 한 결승전 이전에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하다가 예선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자초했었다. 4년이 지난 뒤에 다시 나타난 북한축구팀.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일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1978년 12월 20일. 방콕국립경기장. 준결승리그에서 인도에게 3-1 승, 이라크에게 1-0 승, 쿠웨이트와 2-2 무승부로 결승전에 올라온 북한팀의 전력은 결코 두려울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축구 플러스알파라는 강력한 경쟁의식이 양 팀 선수 모두를 긴장과 초조 속으로 몰아넣었다. 경기는 연장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양상으로 시종 잠시도 숨 쉴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치러졌으나 결과는 0-0. 초청대회가 아니고 아시아 경기대회라는 타이틀이 걸린 경기였으나 대회 본부 측에서는 양 팀 관계자의 양해 아래 공동우승으로 끝냈다. 이때까지도 승부차기는 강제규정이 아니고 권장사항이었기 때문에 공동우승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승팀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는 시상식 자리에서 조그마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한국팀 주장 김호곤을 북한선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는 통에 김호곤이 시상대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분노와 부끄러움을 참고 다시 시상대에 올라선 김호곤에게 북한선수는 또 한 번 시비를 걸었다. 김호곤이 조용한 소리로 타일렀다. “이곳은 지금은 너하고 나하고 단둘이 있는게 아니야, 텔레비전으로 전 세계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려면 점잖게 가만있어” 이 말 한마디에 북한선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비록 공동우승이지만 차범근으로서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자기가 해야 할 몫을 다 했다는 안도감도 느꼈다. 한편 이 대회로서 자기가 한국축구를 위해 기여해야 할 기회도 없어지게 됐다는 서운함도 있었다. 차범근이 방콕으로 가기 전부터 재서독한인회 회장인 여우종씨와 건국대학교 교수로 대한축구협회의 일도 도와주던 박동희씨사이에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차범근의 서독프로축구팀 입단을 주선해 왔다.

결국 차범근은 여회장과 박교수의 도움에 의해 서독으로 가게 됐으며 그 시간이 제8회 아시아 경기대회가 모두 끝난 1978년 12월 21일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허름한 손가방 하나 들고 서독으로 간 차범근은 여우종회장과 현지 한국교민들의 도움으로 다름슈타트라는 프로축구팀에 입단하게 됐다. 그러나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이 차범근의 서독프로축구무대 등장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앙일보의 박군배기자에 의해 제동이 걸리게 됐으며 차범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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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범근 (9)

중앙일보의 박군배기자는 서울대 법대출신으로 당시 축구담당기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민완한 기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그는 “현역군인이 어떻게 외국의 프로축구팀에 입단할 수 있느냐? 이것은 엄연한 병역법 위반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중앙일보에 게재했던 것이다.

공군당국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에 공군축구팀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차범근의 공군입대를 권유할때는 “적당한 시기에 조기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는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차범근으로서는 그런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병역법 같은 것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채 서독으로 갔던 것인데 중앙일보에서 “병역법 위반”을 지적하는 통에 공군의 소환명령을 받고 즉시 귀국하게 됐던 것이다.

1979년 6월 22일 차범근은 공군으로부터 정식으로 제대한 뒤, 두번째 서독행 여객기를 탔다. 그러나 서독에 도착한 차범근은 앞뒤가 콱 막히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됐다. 처음에 입단했던 다름슈타트팀에서는 “잠시 한국에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 떠난 뒤 아무 소식도 없기 때문에 계약위반을 이유로 내세우면서 재입단은 커녕 위약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밖의 다른 팀들은 모두 여름휴가로 구단 사무실이 텅 텅 비어 있었다. 뒷날 차범금은 “그때가 내 선수 시절을 통 털어 가장 괴로웠던 시기”라고 했다.

그러나 길은 있었다. 아헨이라는 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던 이성문이라는 사람이 차범근 앞에 나타났다. 열렬한 축구광으로서 서독축구협회에 등록된 정식 축구심판이기도 했던 이성문씨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모든 선수, 모든 임원들과도 친면이 두터웠으며 축구담당 신문기자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한국의 축구영웅 차범근이 서독에 와서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문씨는 본으로 달려왔다. 차범근이 본에 있는 여우종회장집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이성문씨는 차범근의 통역겸 운전기사로 자진해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것이 무료봉사였다. 이성문씨는 재서독 한인축구협회회장 한일동씨와 함께 사방팔방으로 알아본 끝에 베르더 브레멘팀의 베버코치와 선이 닿았다. 베버코치는 차범근에 관한 얘기를 들은 다음 “한번 데리고 와 보라”고 했다.

이성문씨는 지체 없이 차범근을 데리고 베르더 브레멘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베버코치가 볼을 던져 주면서 ” 한번 차 보라”고 했다. 넓은 경기장에는 이들 3명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휴가기간 이었기 때문에 경기장에 다른 선수들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차범근은 멋 적은 자세로 골을 향해 뻥 뻥 볼을 몇 차례 찼다. 베버코치는 “그만하라”고 했으며 이성문씨와 차범근은 허전한 마음으로 베르더 브레멘을 떠났다. 그러니까 그것은 차범근을 입단시키기 위한 정식 테스트가 아니고 이성문씨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겉치례 인사였던 것이다. 그날이 7월 11일이었다. 다시 본으로 돌아 온 이성문씨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축구담당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온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오늘 베르더 브레멘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연습경기에서 혼자 4골이나 넣었다.”
‘4골’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없는 빈 골에 차범근 혼자 뻥 뻥 차 넣은 것이지 연습경기는 있지도 않았다. 따지고보면 차범근의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성문씨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몇몇 기자는 다음날 신문에 1단짜리 기사로 차범근에 관한 얘기를 써 주었다. 신문을 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팀의 부감독 슐테가 이성문씨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차범근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슐테라는 사람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박대통령컵대회(제8회)에 프랑크푸르트의 아마추어팀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차범근의 출중한 기량을 이미 확인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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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범근 (11)

스카우트 담당 슐테로부터 연락을 받고 프랑크푸르트에 이성문씨와 함께 차범근이 나타난 것은 7월 15일이었다. 차범근은 슐테씨에 의해 라우시 감독에게 소개됐으며 정식 테스트를 받은 결과 “합격”이라는 큰소리를 이성문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7월 16일,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팀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1981년 7월 15일까지. 계약금은 연봉 24만마르크(당시의 환율로는 약 7천 2백만원)였으며 그밖에 다름슈타트에서 요구하는 위약금 20만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측에서 부담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이렇게해서 차범근은 한국축구사상 최초로 서독 프로축구 1부리그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선수가 됐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유럽에서 빅 리그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 리그,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 A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독의 분데스리가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런데 서독정부에서 사회복지정책을 과다하게 실시했고 특히 동독과 흡수 통일된 이후에는 프로축구선수들로부터 너무 많은 세금을 빼앗아갔다. 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에서는 프로축구선수들로부터 받아내는 세금이 독일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우수한 선수들이 독일행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분데스리가의 권위가 한 단계 내려앉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팀의 유니폼을 입었을 때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보다 서독프로축구가 훨씬 앞서 있었다.

프랑크푸르트팀에서의 차범근은 단연 두드러진 선수였다. 모두가 노란머리들인데 차범근 혼자 까만 머리라는 것이 우선 첫 눈에 띄었고 1백미터 주파기록이 여전히 11초대라는 놀라운 스피드가 관중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 하나 차범근을 분데스리가에서 돋보이게 한 것은 브르노 페짜이라는 오스트리아선수의 도움 때문이기도 했다. “외국인 선수는 2명만 보유할 수 있다”는 분데스리가의 규정에 따라 프랑크푸루트팀에는 차범근과 페짜이 2명만 외국인선수로 등록돼 있었다. 그런데 같은 “외국인 선수”라는 심리적작용 때문이었는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에서 스위퍼 바로 앞에 위치하는 수비수)였던 페짜이는 볼만 잡으면 거의 대부분 차범근에게 패스해 주었던 것이다. 그만큼 차범근에게는 공격기회가 많아졌으며 관중들의 눈에도 마치 차범근 혼자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됐다.

당시 유럽에는 국내 프로리그에서 우승한 팀들만의 대결장인 ‘챔피언스컵’이라는 클럽 대항전이 있었고 프로와 아마추어팀이 모두 출전하는 이른바 FA컵에서 우승한 팀들끼리만 자웅을 겨루는 ‘컵위너스컵’대회 그리고 국내 프로리그에서 4위이내에 올라간 팀들이 출전하는 ‘UEFA컵’이라는 대회가 있었다. UEFA컵 출전자격이 국내리그 4위이상이지만 ‘챔피언스컵’이나 ‘컵위너스컵’에 출전하는 팀을 제외하면 5위나 6위를 차지하는 팀이 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3개 대회 모두 유럽축구연맹에서 주관하고 있었는데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팀에 몸담고 있을동안 2차례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팀에 처음 입단해서 몇 년동안은 항상 분데스리가 18개팀 중 상위권에 있었는데 팀의 재정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우수선수들을 다른 팀에 팔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팀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차범근은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팔려가는 몸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바이엘 약품회사’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바이어 제약회사가 모체가 돼서 운영하는 팀이었다. 이 팀에서도 차범근의 활약은 빛났으며 1988년도 UEFA컵에서는 차범근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차범근이 36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분데스리가에 진출한지 꼭 10년이 되던 해에 그는 은퇴했다. “할 만큼 했다”는 흡족한 포만감속에서 차범근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행 여객기에 몸을 싣게 됐던 것이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12)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한참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그러니까 1980년에 유니세프(UN산하의 국제아동보호기금)에서는 세계올스타축구팀과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팀의 자선축구경기를 바르셀로나에서 가졌었다. 차범근은 올스타팀 일원으로 뽑혔다. 동양에서는 차범근 외에 일본의 가마모또 구니시게 선수가 선발됐는데 가마모또선수가 볼에 자기 발을 갖다 댄 기회는 단 두 번뿐이었다. 그야말로 말뚝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종횡무진 경기장 전체를 누비면서 세계올스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경기결과는 3-2로 FC바르셀로나팀의 승리였으나 이때 차범근이 보여준 플레이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이라고 해서 언제 어느경기에서나 잘 차고 잘 뛰는 것은 아니었다.

1986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제13회 월드컵에서 보여준 차범근의 플레이는 너무도 실망적이었다. 물론 분데스리가의 A급 선수라해서 상대팀 선수들이 집중적으로 마크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의 마크는 어느게임에서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하는 월드컵이었는데 득점은 고사하고 이렇다하게 내 세울 도움도 전혀 없었다. 화려하고 빛나기만 했던 차범근으로서는 제13회 멕시코 월드컵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지 3년만에 차범근은 독일프로축구무대에서 물러나 한국으로 귀국했다. 어린이축구교실을 운영하면서 한국프로축구의 지도자생활도 하던 차범근은 1997년 1월7일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제16회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할 한국축구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으라는 대명을 받게 됐다.

한국팀은 지역예선전에서 홍콩, 태국과 함께 제6조에 속했는데 홈 앤드 어웨이방식으로 치러진 4차례의 경기에서 3승 1무스승부로 제1라운드를 쉽게 통과했다. 이때의 지역예선은 출전국을 10개조로 나누고 각조 1위국끼리 역시 홈앤드 어웨이방식으로 경기를 갖고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본선에 자동출전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팀은 최종예선에서 카자흐스탄을 3-0(9월6일, 잠실올림픽경기장)으로 이기고 9월 12일 같은 장소에서 우즈베키스탄을 2-1로 물리쳤다. 멀고 험한 항해였으나 한국팀의 출범은 순조로웠다. 9월 28일 한국팀은 일본과의 어웨이게임을 갖게 됐다. 이때의 일본축구는 지난날의 일본축구가 아니었다.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우승, 아프로-아시안컵 우승등으로 한국축구보다 저 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도쿄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팀과 일본팀의 경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까지 했다. 한국팀은 먼저 1골을 허용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일본쪽으로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전 38분경, 장신 스트라이커 최용수가 단신의 스트라이커 서정원에 헤딩으로 도움볼을 띄워 주었으며 서정원은 일본수비의 빈틈으로 역시 헤딩슛, 동점골을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다시 3분이 흘렀을 무렵, 수비수 이민성이 과감하게 미드필드를 돌파하더니 그대로 롱슛, 볼은 깨끗하게 일본골속에 파고들었다. 한국팀은 최종예선에서 승점 16을 기록하면서 당당히 프랑스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축구팀은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유고슬라비아(지금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자메이카, 체코, 중국등과 연속적으로 평가전을 가졌다. 1998년 6월 5일 서울을 떠난 한국팀은 6월 13일 리용에 있는 스타드제를랑에서 멕시코와의 첫 경기를 치렀다.

출발은 좋았다. 한국팀은 전반 28분 적진 아크서클 바로 밖에서 프리킥의 기회를 얻어냈다. 키커로 나선 선수는 하석주. 하석주가 강하게 찬 볼은 멕시코 수비수의 머리에 맞으면서 방향을 바꾸더니 그대로 멕시코 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국축구 인물사

② 차범근 (끝)

하석주는 기뻤다. 기운이 펄 펄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있던 하석주는 골을 넣은지 2분만에 하프라인 근처에서 깊은 백태클로 멕시코선수를 쓰러뜨렸다. 전혀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서 하지 않아도 될 백태클을 한 하석주는 즉석에서 주심으로부터 퇴장명령을 받게됐다.

주심이 높이 쳐든 빨간 딱지를 멍하게 쳐다보던 하석주는 경기장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은 그런대로 한국팀이 1-0으로 이긴 가운데 경기를 끝냈으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한국선수들의 움직임은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10명만으로 싸워야하는 불리함속에서 한국팀은 5분만에 멕시코의 펠라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했다. 뒤 이어 29분과 39분에 멕시코 제1의 스트라이커라는 에르난데스에게 연속골을 허용하면서 한국팀은 1-3으로 무너졌다. 한국팀의 두 번째 상대는 네델란드팀이었으며 경기 장소는 마르세이유 벨로드롬이었다.

당초부터 한국팀은 네델란드팀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경기결과는 너무도 참담했다.

0-5 패였다.

이것으로 프랑스월드컵 조별 예선리그에서 한국팀의 탈락은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벨기에와의 경기를 하나 더 남겨 놓고 있기는 했지만 그 것은 한국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만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경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때 한국팀 내에서는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전무 겸 기술위원장으로 한국축구팀 단장자격으로 현지에 갔던 조중연씨에 의해 긴급 기술위원회가 현지에서 소집됐다.

그리고 차범근감독을 전격적으로 해임 시켰다.

“벨기에팀과의 마지막경기나마 잘 해 보자”는 취지에서 차감독을 해임시키고 김평석코치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 차감독 전격해임의 이유였으나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어차피 예선탈락이 확정된 상태에서 감독을 중도하차 시키는 것은 차범근이라는 축구인에게 너무도 엄청나고 무거운 치욕적인 불명예를 씌워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지에 갔던 취재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선수기용등 감독 고유의 권한에 부인 오은미씨가 너무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조중연씨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기술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차범근은 그야말로 패장의 초라한 모습으로 귀국했다.

차범근 파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시사잡지 ‘월간조선’ 8월호에는 또 한 번 국내팬을 놀라게 하는 기사가 실렸다.

차범근이 “한국축구는 정치판 같다 국내경기에서는 승부조작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 ⓒ황민국

차범근이 어떤 심정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축구인으로서 한국축구가 마치 파렴치한들의 집단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것은 칭찬 받을만한 일이 아니었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8월12일 상벌위원회를 소집하고 차범근에게 “5년간 축구지도자 자격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 차범근, 1백년에 1명 나올까 말까하는 발군의 기량을 갖춘 선수로서 세계축구에 우뚝 올라섰던 차범근.

그의 선수생활은 너무도 화려하고 영예스러웠다. 그러나 지도자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중국 선천 핑안팀 감독의 자리를 맡았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 8월 현재 차범근은 한국프로축구 수원삼성팀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2005년 3월17일 한국축구를 빛낸 7명의 축구인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 했으며 차범근의 이름도 함께 헌액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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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범근의 서독행 과정과 활약상◈

—–이하 중앙일보기사 발췌—-

서독 프로축구서 차범근 「스카웃」교섭

게재일 : 1978년 11월 14일 [6면]

기고자 : 박군배

축구 국가대표 차범근 선수가 서독 「프로」계에 진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아 국내 「스포츠」계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차 선수의 서독행은 결정된 바 없으며
다만 서독축구계의 한 관계자가 차 선수의 「스카우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움직임이 과장되어 얘기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로는 서독축구계가 차범근의 「스카우트」를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온데 대해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의 측근 인사들이
그것에 응할 것인지 여부를 신중히 고려하고 있는 단계다.

지난 9월 제8회 박대통령「컵」쟁탈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했던
서독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팀」의 「코치」인 「슐테」씨가
지난 10, 11일 이틀동안 대한 축구협회 국제위원인 박동희씨(건국대 교수)에게 사신을 보내
『차범근을 서독으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슐테」씨는 지난 9월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차범근과
「스카우트」에 관한 의사를 서로 타진한 바 있었는데 귀국 후 그 동안 서독내 관계자들과
논의한 끝에 재차 「스카우트」를 실현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해온 것이다.

「슐테」씨는 그러나 서독 「분데스·리가」관계자들이
『차범근은 자격이 있는 훌륭한 선수』라는 「슐테」씨의 주장만 믿고
곧바로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차범근을 서독으로 불러들여
실기「테스트」를 일단 해보아야 하며 12월초 안에 차범근을 보내주도록
박 교수에게 요청했다.

그는 이 서한에서 차범근이 서독으로 가겠다는 회신이 있으면 즉시
왕복항공표를 보내겠으며 그 비용은
서독의 운동구「메이커」인 「반두스」회사가 부담한다고 밝혔다.
「슐테」씨는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클럽」에는
이미 2명의 외국인 선수가 있어 「분데스·리가」규정에 따라
더 이상의 외국인선수를 고용할 수 없으므로
외국인 선수가 1명 이하만 보유한 다른 「클럽」과 계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차범근 선수는 현재 공군소속으로
내년 1월에야 제대하며 오는 12월에는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야하기 때문에
「슐테」씨의 요청대로 12월초에 「테스트」를 받기 위해 서독으로 간다는 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형편이다.

「슐테」씨가 11월초까지라는 시한을 둔 것은
서독「프로」축구 1부「리그」인 「분데스·리가」의 「스카우트」및 이적 등
선수이동은 12월말까지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차범근 및 그의 측근 인사들은 차 선수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며 1년후에는 그만큼 계약조건이 불리해진다는 점을 들어
대한축구협회가 차범근을 서독으로 보내는데 협조해야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국축구대표「팀」이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계속해서 「아시아」선수권대회예선, 「모스크바·올림픽」예선 등을
연말과 내년에 치르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축구의 대들보인 차범근의 해외유출은
다소 개인의 희망을 희생시켜서라도 국가적인 견지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 귀추가 주목된다.

【박군배 기자】
<원하면 어쩔 수 없다>
박준홍 대한축구협회장의 말=차범근이 서독에 「스카우트」되어 간다는 것은
본인이 꼭 원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 선수는 「슐테」씨의 요청대로 12월초에
「테스트」받기 위해 서독으로 갈 수 없는 형편이며 내 개인의견으로는
서독축구계가 꼭 차 선수를 원한다면 「방콕」「아시아」경기대회때
직접 관계자들이 와서 「플레이」를 보거나 아니면 내년 초
우리 대표「팀」이 서독으로 전지훈련갈 때 「테스트」해보면 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차 선수의 「스카우트」가 결정되더라도
내년 하반기 「시즌」에나 차 선수가 한국을 떠나 서독으로 가게 될 것이다.

차범근 서독행 포기

게재일 : 1978년 11월 18일 [8면]

서독 「프로」 축구계로의 진출을 시도함으로씨
국내 축구계에 파문을 던졌던 차범근 선수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분 및 기타 여건이
적당치 않아 이를 포기했다.
차범근은 그 동안 서독과의 연락을 맡았던
박동희 교수(건국대)를 통해 17일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클럽」의 「슐테」「코치」에게 편지를 보내
『12월초까지 서독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당분간 해외 진출의 계획을 고려하지 않겠다』
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서독축구계의 차범근 「스카우트」설은 일단락 되었으며
차범근은 「아시아」 경기대회에 대비, 태릉 선수촌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훈련에 전념하고있다.
한편 축구계 일각에서는 차범근이 서독행을 열망했었기 때문에
현재 정신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다는 점과
내년 초 제대 후 그의 거취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들어
범축구계가 적극적인 성원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곧 창단 될 현대축구 「팀」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입단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차범근 선수 서독행 안막아”|(축구협)

게재일 : 1978년 12월 07일 [8면]

대한축구협회는 6일
「차범근선수의 해외진출」문제에 대한 협회의 입장을 공식표명,
『차선수가 서독「프로」계로 가겠다는 의사를 막지 않을 것이며
언제든지 이적서를 떼어주겠다』고 밝혔다.
축구협회의 이러한 성명은 최근에 마치 협회가 차선수의
서독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오해를 사고있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다.
현재 차선수는 「스위스」의 「프로」선수「스카우트」「브로커」인
「스포츠」용구사 「반듀즈」사로부터
『12월말까지 서독에 오면 소정의 「데스트」를 받아 서독
「분데스·리가」의 어느 「팀」에든지 입단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며
입단이 결정될 때까지의 서독체재비로 월4천「마르크」(약1백만원)을 지급하겠다』
는 제의를 받고 있다.

차범근 기대밖의 가계약 월봉 천불에, 서독 2류팀과

게재일 : 1978년 12월 26일 [8면]

서독으로간 차범근선수가 SV「다름슈타트」「팀」과
가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국내 축구계는 착잡한 우려에 빠졌다.

25일 이근량본사 서독특파원은 차범근이 25일
「다름슈타트·팀」과 79년1월부터 6개월간 1「게임」당 5백「마르크」
(약13만원)에 l득점당 5백 「마르크」의 상여금을 받기로 가계약을 했다고 알려왔다.

당초 26일에 소정의「테스트」경기를 갖기로 한 계획을 변경,
이날 간단한 공개「트레이너」만 가진후 전격적으로 실시된 가계약체결에는
재독한인연합회장 여우종씨와 유학중인 유현철씨(한전감독) 및
「다름슈타트」측에서 「게오르크·셰퍼」단장등 임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차범근의 이러한 가계약체결에 국내의 많은 축구인이
환영보다 충격을 받는 것은 입단「팀」이 「다름슈타트」라는 것과
계약내용 때문이다.

1「게임」당 5백 「마르크」라는것은
월봉이 2천「마르크」(약50만원)임을 의미한다.
서독 「분데스·리가」의 한「팀」은 「시즌」중 1주일에 1번 「게임」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액수는 차범근이 당초 서독진출을 결심할 때
서독측에서 언질을 준 『월수입 7천「달러」(약3백50만원)이상 보장』
이라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다름슈타트」「팀」은 지난 8월「분데스·리가」가
78∼79년「시즌」이 시작될때 비로소 2부「리가」로부터 승격된 「팀」으로
전반 「시즌」을 마친 현재 「분데스·리가」18개 「팀」중
최하위를 맴돌고있는 가장 초라한 「팀」이다.

약 l년반동안 서독축구유학을 하고 최근 귀국한 한양대 최은택감독은 26일
『차범근의 가계약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다소의 상여금등이 추가되는 것을 감안해도 월2천「마르크」를 수락했다는 것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서독2부「리가」의 선수중에도 2∼3천「마르크」를 받는 선수가 수두룩하다.

특히 「다름슈타트」는 「분데스·리가」소속 「팀」중 가장 재정이 빈약한 무명「클럽」이다.
재정빈곤 때문에 이「팀」은 서독유일의 「세미·프로」다.
소속선수들은 모두 「다름슈타트」지방의 공장등에 직업을 갖고있으며
틈틈이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 「팀」에 외국인선수가 아직 없었던 것도 많은「개런티」로
「스카우트」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름슈타트」는 또 최약체의 인기없는 「팀」이어서
관객이 모여들지 않으며 언제나 적자로 허덕인다.

한국축구의 대들보이며 수많은 어린이들의 우상적 존재인 차범근이
일본「오꾸데라」선수와는 엄청난 대조를 보이는 가운데
이런 치욕적인 조건으로 하필「다름슈타트」에 입단키로 했다니
차라리 믿고싶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최감독은 『차선수의 주위에서 일을 이런 지경으로 추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무모하고 무책임한 것 같이 여겨진다』고 안타까와했고
차선수가 한「게임」이라도 뛰게되면
「아마추어」자격까지 상실, 어디에도 발붙일수 없는 미아(미아)신세가 될 것을 염려하면서
『당장 귀국토록하여 장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부 축구인들은 공군복무중인 차범근은
내년5월31일이 만기제대일인데 어떻게해서 새해부터
「다름슈타트」에서 뛰겠다고 계약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있다.
차범근은 고려대 재학때 소정의 교련과목을 이수했을 경우
복무기간이 단축, 내년1월말께 제대가 가능하지만
교련 이수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범근, 첫 출전 화려하게 장식

게재일 : 1979년 01월 04일 [8면]

기고자 : 이근량

【본(서독)=이근량특파원】차범근이 서독에 온 후 이곳 교민들은 흥분 속에 바쁜 나날이다.
1만5천여 교민의 지대한 관심 속에
아예 차선수와 생활을 같이하는 열성파가 평균 1백50여명.

「게임」때는 물론, 연습시의 응원까지 담당할 뿐 아니라
교통 및 김치찌개 작전까지 다투어가면서 한국축구 「스타」의 독일「데뷔」에
활력소를 넣고있다.

차범근의 내독이 확정되자
재독 한인연합회(회장 여우종)는 우선 축구장이외의 모든 것을
회원들이 담당하자고 결정, 회원들로부터 전폭적인 호응을 얻게된 것이다.

문제는 같은 1급인 「분데스·리가」의 강호FC 「필른·팀」에 속해있는
일본 「오꾸데라」선수에 대한 재독 일본인후원회만큼
활발한 지원을 통해 거의 「프로」생활을 돕자는 것이 여회장의 생각.

이 같은 지원방침에 따라 24일 이후 3차에 걸친 연습 때마다
연3백여명이 동원되었고 특히 30일의 「다름슈타트」「보쿰」의 경기가 거행된
「다름슈타트」구장엔 현지로부터 5백여km나 떨어진 「아켄」등지를 비롯해
5백여 교포가 응원, 겨울비를 맞아가며 첫 「데뷔」전을 힘껏 응원했다.

「로타르·부크만」감독이 후반 10∼20분쯤 선보이겠다는 계획을 변경,
놀랍게도 「스타팅·멤버」로 기용 전후반 75분 동안 뛰게한 것도 실은 이 같은
서독교민들의 열성 탓이다.

차범근의 「데뷔」는 아주 성공적-.
「레프트·윙」으로서 2개의 「골·어시스트」등
「다름슈타트」가 3-1로 승리하는데 수훈을 세우고 후반25분 교체되어 나오자
교포응원석은 일제 축제분위기로 바뀌었다.

이곳 언론의 반응도 대단하다.
당일자 제l·제2TV 「스포츠」시간은 거의 「데뷔」를 「톱」기사로 올렸고
발행부수 5백만부를 자랑하는 독일최대의 신문 「빌트·차이퉁」지는
파격적으로 1면「톱」.
그런가하면 신년 첫 신문인 2일자 「디·벨트」지와
「프랑크루프터·알게마이네·차이툼」도 「스포츠」면 머리기사로 소개,
『황색의 폭격기, 3만의 관중을 매혹』이라고 격찬했다.

현지교포들은 앞으로의 응원문제로 연일 회의중.
우선 「바이에르·워딩엔」과의 6일자 친선경기와 「베를린」과의 13일자
금년 첫 「분데스·리가」대전도 중요하지만 오는 20일
「쾰른」과의 경기에는 1천명 정도의 대대적인 응원단을 편성키로 결정-.

재독 한인회는 그만큼 차범근과 「오꾸데라」와의 비교를 중시한다는
배경설명이다.
이곳 교포들은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벌써부터 후원회를 조직,
생활지원 및 응원문제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오꾸데라」후원회처럼 「리셉션」을 열어 「매스컴」PR까지 펴 폭넓은 구상.

그러나 제대문제와 여권연장문제로 4일 일시
귀국해야하는 차선수 때문에 이곳 교민들은 물론
「다름슈타트·팀」에서도 큰 걱정을 하고있다.

교민들은 차선수의 「팀」이탈이 장기화될 경우 13일의 올해
「분데스·리가」첫 경기인 대 「베를린」전에 결장케 되어
거의 위치가 흔들리게 되고 더욱이 부상중인 3명의 공격수가 다시 들어오면
그만큼 차선수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민들과 차선수에게 호의적인 「팀」관계자들은
차선수가 서울에서 일을 빨리 마치고 하루라도 일찍 돌아오기를 바라고있다.

「성급」이 무너뜨린 공든 탑|차범근 서독행 도중하차의 안팎

게재일 : 1979년 01월 08일 [8면]

기고자 : 박군배

관계당국이 6일
『누구라도 소정의 군복무는 마쳐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써 일단락된 차범근의 서독행 사건은
당초부터 좌절의 요인을 안고있었던 무분별한 소동이었다.
지난 11월 처음 서독으로부터 차범근 초청사실이 밝혀졌을 때
곧바로 제기된 문제가 병역관계였다.

대한축구협회도 그때 군당국에 차범근의 제대관계를 건의했고
이에 대해 79년5월말이 제대날짜라는 서면회신을 받았다.
이것은 또 신문지상에도 보도 되었었다.

그럼에도 차범근 측은 서독행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어떤 구제책이 있겠지』하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일을 계속 추진했다.
차범근 측이 제대일을 12월31일이라고 오인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며 최근에는 병역관계를 초월하여 한사코
서독행을 성사시키려 발버둥친 것이다.

거의 후견인격이었던 박동희씨(건국대교수)도 지난 5일
『이러한 장애가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워낙 차선수 측이 열망하기에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었다』고 실토했다.

차선수 측은 서독행을 환영하는 축구계의 일반적인 반응으로
일이 꼭 성사되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고 있는
지난 12월 하순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의 도움으로 「방콕」으로부터
서독으로 건너간 차범근은 「테스트」만 받을 줄 알았던 국내의 예측을 깨고
「프로」입단계약을 전격적으로 체결하고 만 것이라.

차선수의 서독행 노력은 한마디로 무분별과 졸속이었다.
그리고 「스타·플레이어」에 보내는 만인의 갈채와 칭송을 사회적인
「특혜」와 혼동하는 몰지각을 범했다.
이 점에 관해 차선수 자신은 물론,
그의 주변에서 일을 도와준 사람들 깊이 자성해야 한다.

『차범근 같은 국민적 「스포츠」영웅에게 왜 병역특혜를주지 못하는가』
하는 많은 외침은 소박한 인간적 감정이며 열렬한
「스포츠·팬」의 바람일 뿐 이것으로 엄연한 국가의 법질서를 혼란시킬 수는 없다.

사회각분야의 특기자들에게 병역상의 특혜를 주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최근에 강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하나의 과제에 불과하다.
요컨대 이번 사건은 차범근 측에서 조금이라도 냉정을 기하고
건전한 사회상식을 유지했더라면 부작용만 낳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성공을 확신하고 그가 설사
「돈방석에 앉을 것」이 틀림없더라도 한국의 사회는
일개 운동선수 내지 「스포츠」계에 법을 초월한 특별배려를
해줄 수는 없음을 깊이 깨달아야 산다.

또 지엽적인 문제지만 「다름슈타트」 및 「바듀즈」「스포츠·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이 차범근에게 당장 월1만「달러」선의 소득을 보장했다는
터무니없는 과장선전으로 여론을 충돌질하여 일을 성취시키려는
일부의 발상도 앞으로는 없어야 한다.

차가 보장받는 수입은 「바듀즈」가 지급하는 임시책정보증금 4천「마르크」에
최저생활보조금 2천「마르크」등 「알파」가 추가되는 것이다.

한편 차범근이 12월25일 계약을 체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12월30일 경기에 출전한다는 「스케쥴」이 발표되었을 때
국내의 관계기관들은 「아마」자격상실 등 문제의 발생을 예견,
그것을 저지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왜 취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있다.
이러한 관계기관들의 실책은 「방콕」에서 서독으로 떠나보낼 때도
마찬가지로 범한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축구의 차범근 시대(70∼78년)는 일단 끝나는 것 같다.
【박군배기자】

서독행 미련 버린 차범근|성무 정상노려 훈련전념

게재일 : 1979년 01월 24일 [8면]

서독 「프로」축구계 진출여부로
한동안 마음의 방황을 했던 차범근 선수가 이제는 소속 성무 「팀」에서
평상시와 같이 훈련에 전념하고 있다.

차범근은 지난 5일 서독으로부터 돌아온 뒤
당국의 「조기 재출국 불가」라는 확인을 받고도 계속 수일동안
『혹시 특별 배려가 내려지지나 않을까』하는 한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는 곧 서독으로 갔으면 하는 간절한 생각에
얼굴이 초췌해질 정도로 안정을 잃기도 했다고.
그러나 차범근은 약 1주일 전부터 서독행의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운동은 물론, 내무생활에서도 황재만 등 동료들과 더불어
성실을 다하고 있다고 23일 허윤정 「코치」가 전했다.

허 「코치」는 차범근이 쓸데없는 잡음을 피하고
또 약 5개월 남은 군생활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지난 19일의
「축구인의 밤」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등 스스로 외출을 삼가하고
훈련과 독서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면서 훈련은 오는 3월의
대통령배쟁탈 전국대회에 대비하여 아침 6시반부터 약 1시간,
그리고 오후에 약2시간씩 공군본부구장에서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대전에 성무를 꼭 전국정상에 한번 올려 보겠다』는 것이
요즈음 차범근의 다짐이라고 말한 허「코치」는
차범근이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활달하고
의욕적인 모습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어 성무 「팀」이 올해 실업축구에서
틀림없이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장담했다.

차범근 보내줬으면

게재일 : 1979년 01월 27일 [8면]

기고자 : DPA 합동

서독 「프로」축구 「다름슈타트·팀」의 대변인은
26일 『서독 하원 부의장인 「헤르만·슈미트·보켄하우젠」의원이
차범근 선수를 가능한 한 빨리 서독으로 보내주도록
한국의 국방부와 문교부에 서한을 발송했다』고 공개했다.

「보켄하우젠」부의장은 열렬한 축구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 서한에서 『차범근 선수가 지난 12월말 「다름슈타트」 소속으로
서독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줘 한국「스포츠」와 한국에 대해 커다란 존경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DPA 합동】

차범근의 소속은 어딜까?

게재일 : 1979년 02월 05일 [8면]

『차범근은 서독 「분데스리가」 소속이냐,
아니면 여전히 한국 축구계에 적을 두고 있는가』-.

요즈음 축구계는 이러한 문제로 차범근이 오는 3월
대통령배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일부에서는 차범근이 서독의 「다름슈타트·팀」과 입단 계약을 맺었으므로
국내 대회에 출전하면 「다름슈타트」로부터 제재를 받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서독 축구 협회가 3일
대한 축구 협회에 차범근의 이적 동의서 발급을 요청해옴으로써 사정은 명백해졌다.
원칙적으로 「분데스리가」에 등록키 위해서는
대한 축구 협회의 이적 동의서 첨부가 요건이 되며
이것 없이는 서독 축구계로의 이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다름슈타트」는 작년 12월30일 차범근을
「분데스리가」 공식 경기에 출전시켰지만 실제로는
가등록과 같은 편법을 쓴 셈이다.

결국 대한 축구 협회의 이적 동의서를 사후 보완할 참이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차범근의 정식
「분데스리가」전입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해석이 된다.

한편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상으로도
차범근이 외국인이므로 서독에의 취업 및 체류 허가를 정식으로 받아야
계약이 효력을 발생케 되어 있다 (본보 1월9일 보도).

그러나 차범근은 「기술 연수 견학차」
불과 수일간의 일시 입국을 했던데 지나지 않으므로
이적 동의서 불비와 함께 「분데스리가」 미등록 상태인 것이 명백하며
「다름슈타트」와도 서독 한인 회장 여우종씨의 당초 표현대로
가계약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차범근이 아직까지는 국내 대회에 출전하는데
아무런 장애는 없다는 것이 유력한 해석이다.
그렇지만 차범근은 제대 후 재차 서독행을 시도하려 하고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서독 측과의 관계를
마찰 없이 원만히 조정·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시에 차범근이 국내 대회에 출전 못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니
차범근 측이나 대한 축구 협회가 서독 측과 활발한 의견 교환을 하여
차범근 자신이나 한국 축구에 손실이 없도록 노력해야할 듯-.

발묶인 차범근

게재일 : 1979년 02월 15일 [8면]

대한축구협회는 14일 제2차 이사회를 열어 그동안
서독「다름슈타트98」「팀」에 입단, 국내 출전여부를 싸고 물의를 빚어낸
차범근선수에 대해 국내대회 출전을 금지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를 차선수소속「팀」인 성무에 통보했다.

따라서 차범근은 오는 3월11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27회 대통령배대회를 비롯한 각종 국내대회의
출전길이 막혔다.

대한축구협회의 이같은 결정은
국제축구연뱅(FIBA)이『대한축구협회가 차선수의 이적서를
서독「팀」에 떼어줬으므로 국내대회에 출전하면 자격을 박탈당할것』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데 따른것이다.

대한축구협회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차선수의 소속「팀」인 성무「팀」에서는
서독「프로팀」입단에 동의한 사실이 없기때문에 승복할 수 없으며
국내대회에 출전시킬 방침이라고 맞서고 있어 또 한차례의 말썽이 예상되고 있다.

차선수는 현재 서독「다름슈타트98」「팀」과 성무「팀」에
동시에 등록돼있어 2중등록선수인데
구제될 수 있는 길은 군복무가 끝나는
5월31일까지 국내대회에 출전않고 제대후 서독「프로·팀」에 가는 길뿐이다

차범근 해외취업허가 받아|서독 프로축구진출 문열려

게재일 : 1979년 06월 16일 [8면]

축구선수 차범근(사진)이 정부로부터 해외취업허가를 정식으로 받았다.
노동청의 한 관계자는 16일
차범근에 대해 「국외개별취업송출」을 이 날짜로 허가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차범근은 서독「프로」축구계로 진출하기 위해
출국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으며 여권이 나오는대로 떠날 것으로 보인다.
차범근은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신체검사와 소정의 교육 및 신원확인을 받았다는 관계서류를 첨부하여
지난 1일 노동청에 「국외개별취업 허가신청서」를 제출했으며 노동청은
서독주재 공관에 조회한 결과 초청자인 「서독축구단」이
건실하고 보수가 양호하다는 회신을 접수, 이날 허가서를 발급한 것이다.

차범근은 지난5월31일 공군을 제대했으며
복무중이던 작년말 기술연수 명목으로 서독에 가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구단과 전격적으로 입단 계약을 체결했으나
1월5일 귀국 후 군복무중이라는 신분 등 해외취업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출국이 좌절되었었다.

“많이 배우고 돌아오겠다”

게재일 : 1979년 06월 23일 [8면]

○…한국축구의 간판「스타」인 차범근 선수가
22일 하오9시 대한항공편으로 서독으로 떠났다.

작년말 이래 서독행을 둘러싸고 우여곡절을 겪었던 차범근은
이번엔 해외취업을 위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프로」선수로서의
대성을 꿈꾸며 장도에 오른 것이다.

시종 명랑한 표정의 차범근은
환송 나온 친지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재독교민 김영수·강옥철씨와 동행한 차범근은
이날 공항에서 박준홍 대한축구협회명예회장을 비롯,
김진국·김호곤·조광내·박성화 등 선후배들의 격려를 받았다.

차범근은 작년말 계약을 맺었던
「다르류타트· 팀」(2부「리그」로 전락)및 용역회사인
「바듀즈」사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번에 서독에 가서 새로운「팀」에 입단키 위해
교섭을 벌일 계획이다.

차범근은 79년6월19일부터 81년12월31일까지 2년5개월12일간
머무를 수 있는 여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분데스리가」에서 최고연봉을 받는 선수는
「함부르크」SV의 「키건」선수로 연30만「달러」(약1억5천만원).
여기에 각종「게임」수당이 붙는다.

일본의 「오꾸데라」는 13만「달러」약6천5백만원).
따라서 차범근은 어느「팀」으로 가든 「오꾸데랏」보다는 높은
연봉으로 계약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있다.

파격적 대우받은 차범근

게재일 : 1979년 07월 17일 [8면]

기고자 : 이근량

【본=이근량 특파원】차범근 선수는 16일 상오11시(한국시간 하오7시)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팀 」(78∼79년「시즌」 「분데스·리가」5위」)과
계약을 체결, 서독「프로」축구에 정식으로 「데뷔」케 됐다.

차선수의 계약기간은 2년(81년7월15일까지)으로
연봉은 24만「마르크」(한화 약6천3백12만원)이며
금년 예정「스케줄」40 「게임」중 21「게임」이상 출전하는 경우
등원관중 숫자에 따라 5∼6만「마르크」(한화 약1천3백15만∼1천5백78만원) 의
「프리미엄」(특별수당)을 추가로 받게된다.

차 선수의 연봉은 「그라보므스키」「필젠바인」 「페트지」선수에 이어
이「팀」안에서 4번째로 높은 수준의 파격적인 것으로
「프랑크푸르트」외에도 「베르더· 브레멘」이 끝까지 입단교섭을 벌여 옴으로써
「스카우트」경합이 벌어져 「필른」소속
일본 「오꾸대라」 의 12만5천 「마르크」(한화 약3천2백88만원) 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대우를 받게됨 것이다.

또 절차상 차 선수를 방출하게 된 「다름수타트·팀」 은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액수미상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에 동의했다.

이날 계약 서명식에는
차 선수 이외에 여우종 재독한인연합회 회장과 이성문 재독한인회 축구협 부회장,
그리고 구단 측으로부터「폰·퇴멘」단장,
「좌침멜프스」재정부장, 「우도 크러크」「매니저」등이 참석했으며
구단 측은 차 선수의 입단을 기념해「메르세데스·벤츠」승용차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차선수의 선수자격은 「프랑크푸르트·팀」의 선수명단이
서독축구협회에 접수되는 18일부터 정식으로 부여된다.

한편 「팀」창설88년만에 처음으로 「아시아」선수를 맞은
「프랑크푸르트」소속의 「그라보므스키」등 고참선수들은 차 선수가
「분데스·리가」의 「스타」가 되도록 전면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배우는 자세로 정진>
▲차범근 선수의 말=명문「팀」인데다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있어 대만족이다.
앞으로 배운다는 정신자세로 노력하겠다.
그러나 서구축구를 몸에 익히기엔 적어도 반년 혹은 1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팬」 여러분에 감사한다.

<열심히 성원하겠다>
▲여우종씨 (서독한인연합회장)의 말=15일과 16일에 걸쳐 7시간의 협상 끝에 간신히 타결되었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계약체결최후 순간까지
「브레멘· 팀」과의 접촉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차 선수에 대해 이곳 교민들의 열렬한 성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재빠른 돌파·정확한 센터링 과시|차범근, 서독 분데스리가에 데뷔

게재일 : 1979년 08월 13일 [8면]

기고자 : 이근량

【본=이근량 특파원】차범근 선수가 11일 서독 「분데스리가」에 「데뷔」,
「프로」 축구 선수로서 본격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 소속의 차범근은 이날
「보르시아·도르트문트」「팀」과의 첫 경기에서
「백·넘버」 11번을 달고 「라이트·윙」으로 출전,
전·후반 90분 동안 좋은 활약을 했다.

「프랑크푸르트」는 「골·키퍼」 「푼크」의 실책으로 1-0으로 패했으나
차범근은 재빠른 돌파력과 정확한 「센터링」으로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평을 얻었다.

「프랑푸르트」 구단을 출입하는 기자단은 경기 후 선수별 평가에서
차범근과 「헬무트·뮐러」에게 최고 점수 (4점)를 주었다.
「프랑크푸르트」의 「홈」 경기장에서 벌어진 미 79∼80년도
「시즌」 첫 경기에는 2만2천여명의 관중이 입장했으며
(수용 능력은 5만9천명) 2백여명의 한국 교민이 차범근을 성원했다.

경기 후 「프리델·야우시」 감독은
『차범근의 진가를 확인했다』고 말했으며 차범근은
『모든 점에서 다소 벅차다는 느낌이 있으나 하면 된다는 신념을 얻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차범근이 한국에서의
고정 번호 11번을 단 것은 「야우시」 감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다.
원래 「분데스리가」에선 선수별 고정 번호가 없으며
경기 직전 감독이 1번부터 16번까지 번호를 매겨 명단을 제출하는데
11번 이하는 후보가 된다.
「야우시」 감독은 차범근을 출전시킬 경우엔 꼭
11번을 달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차범근 기다리던 첫골

게재일 : 1979년 08월 29일 [8면]

서독 「프로」축구「프랑크푸르트·팀」에서 활약중인
차범근선수가「프로」 「데뷔」 3번째 경기에서 첫「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은 29일새벽 (한국시간)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
「슈트트가르트· 팀」 과의 경기에서 후반 7분께 멋진
「헤딩·슛」을 성공시켜 「프랑크푸르트」가 2-0으로 이기는데 수훈을 세웠으며
「분데스·리」가태서 첫번째 「볼」 을 성공시킨 것이다.

차범근은 이날 「백· 넘버」 1번을 달고 「라이트·윌」 으로 출전해
「그로보프스키」 · 「펠첸바인」 등의 공격수와 함께 경기초반부터
적진을 헤집는 등위협적인 공격을 시도해 관증들의 갈채를 받았다.

차범근은 후반 5분깨「폘첸바인」이 선제득점을 올린직후
「수트트가르트」문전오른쪽에서 날아오는「볼」 을 뛰어들면서
「헤딩·슛」, 그대로「네트」에 꽂음으로써 그동안에쌓였던 체증을 풀었다.

특히 이날 경기는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2위를 「마크」 했던
「슈트트가르트」와의 경기였기 때문에 차범근의 득점은「프랑크푸르트」 관중들로부터
더욱 열렬한 갈채를받았다.

「프랑쿠푸르트·팀」 은 이로써 2승1패를 기록했으며
오는9월1일 「브라운·슈바이큰」와 4차전을 갖는다.
이날 경기장에는 1천여명의 교포들이나와「플랜카드」 를 흔들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동양의 호랑이 차범근”

게재일 : 1979년 10월 08일 [8면]

기고자 : 외지서

○…『그는 일류 축구선수에 필요한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예를들면 내가 「플레이」하고자 하는 것을 그는 순간적으로 이해하여 반응해온다.
또 그가 의도하는것은 우리쪽에 충분히 전달돼온다.
그는 축구선수로서 본능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것 같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동양인으로는 일본의 「오꾸데라」(오사강언)에 이어 두번째로
서독「프로」축구계에 진출한 차범근에 대해 차가 소속한
「아인트라하트·프랑크푸르트」은 「팀」의 주장
「그라보프스키」가 서독기자「슈뢰더」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슈뢰더」 기자는 일본의 축구전문지 「일리에븐」에 기고한 글에서
모「그라보프스키」와 함께 서독대표를 지낸
「팀·메이트」 「헤르첸바인」은 차에 대해
『이 사내는 축구를 위해 태어난것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차는 축구선수로서 「헤딩」이 뛰어나 「클라우스·피셔」선수와 나란히
「헤딩」에서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게 됐다.

본격적으로 「데뷔」 한지 불과 50일만에
이같은 찬사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차범근은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고 있다.

서독의 「타임즈」지를 자처하며 「스포츠」에는 거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지까지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차의 활약상에 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차는 서독에서 4∼6년간 선수생활을 한뒤
귀국하여 청소년축구학교를 설립하는게 꿈이라고.

차의 경이적인 활약은 열렬한 교포응원과 함께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있는데 서독국가대표 「팀」의
「데아발」감독도 『만일 그에게 서독국적이 있다면 대표「팀」의 고민인
「윙」날개)부족이 당장 해소될텐데…』라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틈틈이 성서를 읽으며 제2의 축구인생을 힘차게 다져나가고 있는 차는
금년「시즌」의 포부를 『10「골」을 「마크」하는것,
그리고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6「게임」에서 3「골」을 기록한만큼 10「골」의
목표달성은 어렵지 않은것 같다.
다만 한가지 걱정은 점점 더 부풀어가는 「팬」들의 기대에
순진한 성격의 그가 견디어내줄것인가 하는 점이다. <외지서>

“차범근기사 싣게돼 영광입니다”

게재일 : 1979년 10월 29일 [8면]

기고자 : 이근량

○…서독최대의 일간지인 「빌트」 지가
차범근선수에 대해 이색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발행붓수 4백50만부를 자랑하는 「빌트」 지는
지난12일 차선수와 차선수를 응원하는 한국교포들의「컬러」사진,
그리고 한국어로된 광고형식의 인사말을 게재한것이다.

「빌트」지의 체육편집부 이름으로된 이 한국어기사는
『친애하는 한국인축구「팬」 여러분! 페사 체육편집부는
여러분이 아끼는 차범근 선수에 관한 기사를 싣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독일 축구계는 차선수를 통하여 한국축구의 묘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감명깊은 묘기를…』라고 게재했다.
서독신문에 한국어로된 이같은 기사가 게재된것은 처음있는 일인데
한국교포들은 차선수의 서독「프로」축구「데뷔」이래
가판용「빌트」지를 1백부이상 구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이근량특파원>

$$<스포츠계 70년대>(5) 서독축구계에 차범근 돌풍

게재일 : 1979년 12월 25일 [8면]

기고자 : 박군배

70년대에 들어 한국 「스포츠맨」의 해외진출이 꼬리를 물어
이들의 성공적인 활동은 괄목할 민간외교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중 특기할 일이 축구선수 차범근의 서독「프로」「분데스·리가」진출이다.
「아시아」가 낳은 명선수 차범근은
우리나라선수로는 환상의 무대였던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아인트라하트·팀」에 79년7월16일 입단한후
8월11일 정식 「데뷔」를 했고 이후 12월15일 79년도 「시즌」이 끝날때까지
불과 4개월동안 빛나는 활약을 펼쳐 일약 서독「프로」계의「톱·클라스」 선수로 부각,
선풍적인 명성을 떨쳤다.

발군의 「스피드」로 「갈색의 폭격기」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차범근은 단숨에 「프랑크푸르트」의 부동의 공격수로 자리를 굳혔으며
「분데스·리가」 득점「랭킹」 공동4위에 올라 한국축구 뿐 만 아니라 서독 「프로」 축구계에 79년도의 최대화제거리가 된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생소한 서독축구계에 던진 차범근충격은 실로 한국「스포츠」사를 빛낼 쾌거였다.
차범근은 서독「프로」진출 이전에도 70년대의 시작과 함께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어 한국축구가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굳히는데 핵심적인 공헌을 했다.

이 때문에 70년대 한국축구는 「차범근시대」라는 표현으로 압축되기도 했다.
「슈퍼스타」 차범근의 성공은 한국선수도 세계정상「프로」축구에서 뛸수있다는 입증을 보여 처녀지 개척은
높게 평가되고있다.

이외에도 60년대부터 줄기차게 해외로나간 1천여명의 태권도사범,
l백29명의 유도사범등 무도지도자들은 세계6대주 곳곳으로 확산,
스포츠」한국의 전위기수가 되었으며 변호영의 75년「홍콩」 「세미·프로」 축구진출을 비롯,
배구·농구·탁구·축구등 일부 구기종목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대거 수출된 것도 70년대 한국「스포츠」의 득이한 일면인 동시에 커다란 변천상의 하나였다.

태권도·유도등 제외한 구기종목 지도자와 선수의 70년대 해외진출 현황을 보면.
◇배구 ▲지도자=박대희(서독) 박무 (캐나다·현재는 전업)
박지국(멕시코) 유승환(캐나다) 박만복 석학수(이상 페루)
손영완(아르헨티나) 김영대 표공일(이상 쿠웨이트) 구연묵(바레인)
심재화 장종구 한명섭 박윤권 정동기 황승언(이상 사우디아라비아)
민웅기(카타르) ▲선수=이선구 이춘표 이순직(아랍토후국) 박기원 조혜정(이상 이탈리아)
◇농구 ▲지도자=이상욱 김동규 김계완 정윤수(이상 사우디아라비아)
유희형 방렬 최종규 이재흠(쿠웨이트) 주희봉(대만)
▲선수=최혜란 신인섭 이옥자 조경자 조명옥(이상 일본)
◇탁구 ▲지도자=김창제 홍종찬(이상 리비아) 김명호 이재화 소영인(이상 아랍토후국)
주한송 김진업(이상·바레인) 주창석(베네쉘라) 윤현채 윤세룡 유중렬(이상 사우디아라비아)
◇복싱 ▲지도자=신현옥(카타르)
◇축구 ▲지도자=박경화(아랍토후국)
▲선수=변호영 김재한 박수덕 박이천 강기욱 임태주 문구호 강봉현(이상 홍콩)
차범근 김진국(이상 서독)

출처 :포에버 차붐(Forever Chaboom!!!)
<박군배기자> 후추닷컴,플라마 등에서 차범근 관련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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