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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 홍의장군과 말무덤

작성자남마|작성시간14.01.20|조회수118 목록 댓글 0

대여소를 출발하여 유채밭을 가로 질러 국토종주 자전거 길을 따라 3.5km 정도 올라가면 억새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 앞의 강이 진주에서 흘러오는 남강이 낙동강에 합류되는 지점으로 걸음강(岐江. 岐音江 기강. 기음강)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으며 합천의 대야성 까지는 강을 따라 100여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주요 전투지며 조선군이 왜적과 싸워서 이긴 최초의 전승지로 기록된 곳이다. 장군의 전술로 의병이 강물위로 걸어 다녔다하여 걸음강(岐江.岐音江)이라 부르며, 기음강과 박진(전쟁기념관이 있는 곳)에는 강물 속에 말뚝(목장 木杖)을 박아 올라오는 왜선이 여기에 걸려 전복되거나 파손되게 하여 전과를 올린 곳이다.

 

그리고 강을 따라 이어진 산자락 절벽면의 좁은 오솔길이 안행부걷고 싶은 옛길 100에 선정된 개 한 마리가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인 개비리 길이다. 그리고 개비리길이 있는 산이 장군의 죽은 말을 묻은 무덤이 있다하여, 원래 전도산(前刀山)에서 신라 때는 백제와의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하여 창진산(倉津山창고가 있는 나룻가 산)이던 것이 마분산(馬墳山 말무덤산)으로 이름이 고쳐진 산으로,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도굴 흔적을 간직한체 방치되어 있는 의병무덤과 곽장군이 쌓은 토성의 유적이 있으나 말무덤의 위치는 지역의 원로주민들의 주장이 엇갈려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마분산 앞의 작은 마을은 창날(倉津 창진.창나루) 마을로 신라 때 강건너 함안과 의령은 백제의 영토로 강이 국경으로 강 건너 백제의 군사와 대치할 적에 신라의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의 마을이다. 그리고 강 건너 남쪽의 산이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용화산(龍華山)으로, 장군은 용화산과 용산리 뒷산인 용암산(龍巖山)산에 긴 밧줄을 연결하여 여기에 허수아비를 달아서 밧줄을 감고 풀기를 반복하여 멀리서 왜병들이 볼 적에 의병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출귀몰함을 보여준 전장이다.

장군은 32세 때인 1585(선조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선조는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그 별시의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 후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岐音江)의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하고자 낚시로 소일하던 39세 봄인 1592, 선조(宣祖)25413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약 700척의 병선에 군마와 병기를 싣고 대마도를 출발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宣祖)이 의주로 피난하는 등 나라가 위급해지자, 장군은 매부인 허언심과 함께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22일에 외가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부자였던 모든 재산과 가재를 모두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의 기의(起義)는 호남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처음에 장군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명 정도로 유지되었다(1593년 선조 26).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걸음강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임란이 일어 난지 21일째 의병을 일으킨 14일 째인 1592(선조25) 54일로 부산에서부터 아무런 저항도 없이 기세 좋게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왜선 14척을 격퇴시킨 것이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78년(선조 11)에는 25세 나이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을 맞아 그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홍의(紅衣)를 지어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장군은 비정예 소수의 의병으로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고 위장과ㆍ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 유물 일괄은 곽재우 장군이 사용했던 장검과 마구, 포도연(포도무늬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 6점의 유물이다. 보물 제671. 경상남도 의령군 충익사 소장.<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걸음강(기음강岐音江)

 

창날 앞의 낙동강을 걸음강(기음강岐音江)이라 부르는데 기록에 의하면, 부산의 동래성과 김해성을 함락시킨 왜장(倭將)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黑田長政). 오토모 요시무네(대우의통大友義統). 모리 요시나리(삼길성 森吉成) 등이 이끈 왜군은 창원과 남지, 영산, 창녕, 현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성주에 이르렀다.

왜군이 창녕군 남지를 침공한 것은 선조 25년(1592년) 5월 초순이었다.  이때, 남지 용산리 걸음강 건너 남강변의 의령군 돈지에서 살던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으로 제일 먼저 일어났다. 그는 영남 일대 유생들에게 통문{通文}을 내어 궐기(蹶起)할 것을 격려(激勵)하고 4월 27일 의병을 일으켜 5월4일 용산리 기음강(걸음강)에서 첫 전투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 14척(隻)을 쫒고 승리를 하였는데 임진왜란이 터진지 21일 후의 전투로 임진왜란의 첫 승전이며, 최초로 조직된 의병들의 항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전투다. 이 후 곽재우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은 이 부근에서 오랫동안 유격전투를 전개했다

합강정에서 바라 본  말무덤산

 

 남지읍지와 남지읍 향토지에 기록되기를..., !!

 

임진왜란 때 용산리 앞 낙동강 건너 함안 땅 백사장에서 왜놈 개다니(모곡) 장군의 명령을 받고 수천명의 왜병이 창녕군을 점령하려고 도강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남강은 수심이 얕아서 도강은 문제없지만 낙동강은 넓고 수심을 알 수 없어 도강을 못하고 있는 것을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미리 짐작하고 있어 낙동강 도선을 모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왜군들에게 도강이 큰 문제였다.

꾀 많은 곽재우장군은 의병들과 같이 달밤에 사다리 5개를 길이대로 이어서 창나루 수심이 깊은 곳에 물 위에서는 안 보일 정도로 사다리로 물속에 다리를 만들었다. 그 다음 날 의병들은 하의를 걷고 사다리 다리를 타고 걸어서 강을 건너갔다. 왜병들은 멀리서 사람들이 낙동강을 걸어서 다니는 것을 보고 수심이 얕은 강이라 생각하였다. 왜놈들은 밤이되면 낙동강을 건너 창녕군을 점령하는데 문제없다 생각하고 승리의 축배주까지 마셨다.

해가지고 밤이 되었다. 곽재우장군은 의병들과 같이 강물속의 사다리를 잡아 당겨 거두어 치웠다. 왜병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캄캄한 밤 자정이 되자 군기와 군량을 짊어지고 죽음의 낙동강변, 사람들이 하의를 걷고 강을 건너던 곳까지 와서 정말 수심이 얕은 줄로만 알고 용감하게 진군하기 위해 하나 둘 셋 상관의 구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낙동강에 뛰어들어 갔다. 으악!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수심이 얕다고 믿었는데 상상 밖이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10척 이상이나 되는 깊은 강물에 뛰어 들어간 왜병들은 갑자기 서로 잡고 당기고 밀고 군기와 군량을 짊어진 채 한 놈도 남김없이 수마들이 통쾌하게 삼킨 것이다. 그 이틑날 왜놈들의 시체가 낙동강을 메웠다고 한다.

 

그 당시 사다리 다리를 타고 걸어서 강을 건너 왔다고 해서 지금까지  ‘걸음강(걸어온 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홍의장군이 쌓은 말무덤산의 토성 흔적(상.하)

 억새전망대에서 말무덤산의 첫번째 봉우리까지 약 10분 정도 오르면 도착 할 수 있다. 여기에 오르면 남강과 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각각 30여리를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임란 당시에는 벌거숭이 민둥산으로 사방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며 특히 발아래 걸음강 백사장의 왜군의 진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흙으로 토성을 쌓은 흔적이 4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확연히 볼 수 있다. 

토성을 지나 마분산 정상을 향하여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20여분을 가면 의병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말무덤산 정상인 이곳에는, 1592년(선조25년) 4월13일 일어난 임진왜란과 이후 정유재란을 맞아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열이 전사한 이름 없는 의병들이 합장되어 잠들어 있는 의병들의 거대한 무덤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덤의 둘래가 20m 높이 5m로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다”고 기록에 전하며 현존(現存)하고 있다.

 

산의 표토가 1자(尺)도 못되는 돌산인 말무덤산의 특성상 전사한 의병들을 매장하기 위해서 깊은 구덩이를 팔수가 없으니 얕게 판 구덩이에 전사한 의병의 시신을 누이고 흙을 얕게 덮고, 또 다시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 위에 전사자를 묻으며 무너지지 않게 둘레에는 돌을 쌓아가며 한 구덩이에 전사한 의병을 지속적으로 매장하여 거대한 의병 무덤이 만들어졌다고 추정 할 수가 있다.

 

전면에는 개인 무덤 2기가 조성되고, 또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고, 420여년이 지나는 풍상에 많이 훼손되어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개인의 사유지라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마분산 즉 말무덤산馬墳山)의 유래는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장 하시바(羽紫)가 이끄는 왜병이 이 근처를 침공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이 구진산성을 근거로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병을 게릴라식으로 격퇴할 즈음이었다. 홍의장군은 쳐들어오는 왜병을 막기 위해 자신의 말 엉덩이에다 벌통을 매달아 적진에 돌입케했다. 벌통이 말의 뜀박질에 흔들리자 벌이 쏟아져 나와 왜군을 닥치는 대로 쏘아대니 적진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며 큰 혼란이 벌어졌다. 이틈을 타서 의병군이 공격하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의병은 대승하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말은 적에게 사살되었다. 뒤에 말의 공을 높이는 뜻으로 그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이 말무덤산은 6.25동란 때에도 유엔군과 북괴군이 일대 격전을 벌인 곳으로 여기서 공산군이 섬멸되고 진격의 공세를 유엔군이 가다듬은 계기를 가져오게 한 곳이다.(빛벌문화 수록)

곽재우장군의 말무덤이라 전하는 곳은 이외에 도천면 우강리 망우당이 만년을 보낸 망우정 북쪽 지금의 송진 공동묘지 위에 1개 더 있다.

 이 말무덤은 전사한 의병들의 시체를 격전장소의 산봉우리에 합장(合葬)하고 커다랗게 봉분을 지어 자손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2012년 6월 1일부터 매년 6월1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여 무공을 세운 장군을 중심으로 추모하고 있다. 이 말무덤도 과학적인 조사를 하여 말무덤인지 의병의 무덤인지를 규명하고 또 원형을 복원하여 의병의 큰 무덤이라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민초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선혈을 뿌리고 장열히 전사한 이들에게 의병의 날에 술 잔 이라도 올리며 추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짜 말의 무덤이라면 미물인 짐승이지만 구국의 대열에서 장열히 전사하였으니 이 또한 격에 맞는 예를 의병의 날에 거행하여야 할 것이다.

 

장군의 부대는 의령을 거점으로 창녕(남지)ㆍ현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7월에는 창녕현풍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김시민(金時敏)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의병으로 임란에 참여한지 3개월도 못되는 15926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6) 그리고 두달 뒤인 8월에는 형조정랑(5)을 거쳐 절충장군 겸 조방장(折衝將軍兼助防將 3)에 임명되었고, 임란 참전 1년 만인 1593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곽재우 의병장이 의병으로 전쟁을 치룬 것은 초기 몇 개월 이내며, 이후는 관직을 가지고 전투를 하였으므로 의병이 아닌 관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병으로서의 주 활동전장은 의령의 정암나루에서 거룬강과 마분산과 구진산성과 박진나루 그리고 강아래로 우강리(망우정) 일대이다.

 

聞道紅衣將

逐倭如逐獐

爲言終戮力

須似郭汾陽

들으니 홍의장군은

왜군을 노루 쫓듯 한다고 하네.

그대를 위해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해

곽분양처럼 되소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좌찬성을 지내고 호성(扈聖)공신에 책봉된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이런 시를 지어 곽재우를 칭송했다.([망우집], <망우선생전> [연려실기술]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곽분양은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 697~781),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관원으로 성공했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해 세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노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손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곽분양 행락도(行樂圖)>는 성공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억새전망대를 출발하여 강을 따라 유채밭 자전거 길로 내려와 고속도로 남지 IC앞을 지나 지방도 1022호를 따라 8km 정도 내려오면 망우정을 만나게 된다. 망우정이 있는 이곳 우강마을은 임란때 장군이 왜적과 싸운 전장으로 장군이 쌓은 우강산성과 무명(無名)용사 의병들을 합장한 큰 무덤과 장군의 애마(愛馬) 무덤이 있는 곳이다. 또한 망우정이 있는 암반은 예로부터 계성천과 영산천 그리고 덕곡천의 맑은 물이 모두 모여들어 창암(滄巖)이라 했다. 장군은 창암에 강사(江舍) 창암사(滄巖舍)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쪽배로 강건너 반구정의 두암공과 교류하며, 영산, 창녕. 함안 등 인근의 많은 문사(文士)들과도 교우하며 여생을 보내면서 세상 생각을 잊으려 했다고 한다.  마을의 신씨 노인은 옛날부터 구전(口傳) 되어 오는  이야기로 '홍의장군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곳에 강사를 지은 것은  빼어난 절경도 아니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곳도 아니다. 다만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한눈에 상하 30여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왜선(倭船)의 재침을 감시 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이곳에서 살면서 왜적의 침입하는 걱정을 없게 하겠다(망우 忘憂)는 깊은 뜻에서 1602년(선조35)망우정을 지어 1617년(광해9) 생애 마지막 15년을 살면서 이 곳에서 고종(古終)하였다.'고 한다.

 

  

망우정(忘憂亭)

 

망우정 안내판에 이르기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망우정(忘憂亭)과 요강원(要江院)

 

도천면 우강리 산 931번지 소재. 향토문화제 경승지 제23

풍광이 빼어난 아름다운 곳으로, 창암(滄岩)에 곽재우가 만년을 보낸 망우정과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곽장군이 수축했다는 우강산성(友江山城)이 성담산에 있다. 1972년부터 동리 청년회에서 망우정 주변 700여평을 가꾸어 창암공원(滄岩公園)이라하여 보호하고 있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임종시 외손인 벽진이씨에게 물려 주었다고 하며 그 후는 여현정(與賢亭)으로 개칭되기도 했고, 6.25때 소실된 것을 1972년 벽진이씨 문중에서 세웠다. 단층 팔작(八作) 지붕 기와집으로 망우정 현판 및 여현정 중수기(重修記)가 보관되어 있다. 1979년 군에서 전면 보수 했다.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은  1552년(명종 7) 828일 의령 세간리 외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현풍(玄風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현풍에서 영남학파의 맥을 이어온 명문가이다. 장군의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곽지번(郭之藩)이고, 아버지는 승지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장인 김행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인 남명 조식(曺植)의 사위였고, 따라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外孫婿)가 된 것이었다. 손위 동서도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장군이 제일먼저 의병을 일으킨 것은,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헸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임란 당시 경상우도의 의병운동은 경(공경)과 의(옳음)를 중시하는 남명(曺植)학파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실천되었는데 임란 때 경상우도를 대표했던 의병장에는 송암 김면 (淞菴 金沔)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망우당 곽재우 (忘優當 郭再佑)가 있는데 이들은 남명에게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망우정의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

 

159310월에는 이순신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장군은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장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장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이런 마찰로 형성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국왕 선조가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장군은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그 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 장군은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2)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며,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1597(선조 30)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다. 복상(服喪) 중에도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이라고 거절했다.

그동안 거대한 전란은 끝났다. 탈상한 장군은 159910월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2)에 임명되어 그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 당시로서는 노년의 초입에 접어든 48세였다.

충익공망우당곽재우유허비 ( 忠翼公忘憂堂郭再祐遺墟碑 )

 

충익공 망우곽재우 유허비 (忠翼公忘憂郭再佑遺墟碑). 망우정 뒷편에 서 있는 비는 의병을 일으켰던 공의 뜻을 후세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들이 세워놓은 것으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에 비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모습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 경남 창녕군 도천면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장군은 1600(선조 33) 2월 붕당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직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지도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는 1백 대에 멀리 유배 보내도 모자란다면서 대노했다. 결국 그는 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전라도 영암(靈巖)3년 동안 유배되었다. 1602(선조 35)에 전라도 영암(靈巖)3년 동안 유배에서 해배되어 현풍으로 돌아온 뒤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1604(선조 37)년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곧 이어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같은 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1월에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승진하였다. 

 

국왕의 분노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212).”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1605(선조 38)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2)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16071월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방문해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광해군은 즉위(1608년)하자마자 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상경을 재촉했다. 그때 곽재우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를 갖고 찾아갔던 금군(禁軍)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고 보고했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타고 갈 말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왕은 즉시 의복을 지급하라고 하명했다(1608년(광해군 0) 9월 14일).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 그 뒤 1610년(광해군 2)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ㆍ한성부 좌윤(종2품)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했지만,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 58세에 영산(靈山. 지금 창녕)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연보>에서는 망우정의 생활을 “쓸쓸한 도인 같았다(蕭然若一道人也)”고 적었다.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는 망우정을 지어 놓고 스스로 아래와 같이 시를 지어 지난 세월의 영욕과 남은 생애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江舍偶昑 강사에서 우연히 읇노라

 

 

下有長江上有山 아래는 긴 강 흐르고 위에는 산이 있는데

忘憂一舍在其間 세상 시름 잊으려고 여기에 집 지었네

忘憂仙子忘憂臥 시름 잊은 신선이 근심 잊고 누웠으니

明月淸風相對閑 밝은 달 맑은 바람이 한가로이 찾아드네.

 

巖間犬吠知聲應 바위틈에서 개 짖으니 메아리로 들려오고

水裡鳩飛見影孤 물 위에 비둘기 나니 외로운 그림자만 비치네.

江湖開適無한적한 강호라 세상일 관계없으니 

月夜磯邊酒一壺 달빛 어린 강가에 술 한 병만이 벗이네

 

丘土治巖自階成 언덕에 바위를 다듬어 계단을 만들었다.

層層如削路危頃 층층이 깎은 길의 경사가 위태로운데

莫道此間無外護 끝나는 길에는 울타리도 없네.

李三蘇百玩空明 이삼소의 그 많은 재산도 부질없구나.

 

* 삼소(三蘇) : 중국 송나라 때,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의 삼부자(三父子) 를 말하는데,  이삼소 (李三蘇)는 아마도 임난 전후로 이씨 왕가를 말한 듯....

공명(空明):부질 없다. 헛되다. 백완(百玩) : 많은 노리개나 장난감. 재산

 

곽재우는 이곳에 배 한 척과 거문고 하나를 두고 책상에 경전(經典)과 선술(仙術), 의약(醫藥)등 서적을 쌓고,혼자 즐기며 금서(琴書)로 벗을 삼고 풍월을 읊조리며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살아간 만년(晩年)은 누구나 그를 선생(先生) 혹은 도인(道人)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장군은 세상 생각을 잊으려 했다.또 영산, 창녕 등 인근 문사(文士)들과도 교우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타계할 때에 이곳의 어진 선비 모제(慕齊) 이도순(李道純)에게 망우정을 물려주어 그 이름을 사후에는 여현정(與賢亭)이라 개칭하게 하여 지금도 망우정과 여현정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으며, 남지 용산의 간송 조임도가 기(記)한 여현정기가 망우정에 있다.

 

망우정과 함께 있는 여현정 현판

 

 

간송 조임도가 기()한 상기 여현정기(與賢亭記) 해설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여현정기(與賢亭記)

여현정은 영산읍에서 십여리 남쪽에 있으니 북은 단록(斷麓)을 베고 남은 낙동강에 임하여 푸른 절벽은 병풍(屛風)되어 둘러치고 앞 강사(江沙)는 눈처럼 펼쳤는데 사방은 틔어서 멀리 보이는 산과 산은 구름이 감돌아 빛나니 진실로 하늘이 이룬 승경(勝景)이로다. 이에 옛 곽상공 망우당의 정사가 지금은 우리 이군(李君) 자수(子粹)의 가지는바 되었으니, 어찌해서 상공의 사()가 이군이 이를 가지게 되었으며, 어찌하여 구편액 망우정이 신호(新號)인 여현정으로 되었느냐, 이는 현자에게 양여(讓與)한 연고이니라.

내 일찍이 상공께서 이자수에게 양여하는 글을 읽었으니, 이르기를 ()께서는 현자인 순()에게 천하를 사양(嗣孃)함이요. 나는 이 강사를 현자에게 양여함이니 주는 바의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넓은 하늘과 좁은 못에 비함과 같으나 그 양여하는 뜻인즉 요순과 더불어 나와 같을 따름이니라. 

나는 강상에 정사를 지은 것을 보았는데 능히 이를 지키는 자가 드문 것은 왜냐? 이는 현자에게 양여하지 아니함이로다. 오늘 내가 한 정자를 사유하지 않고 자네에게 주는 것은 자네가 산수를 좋아함에 있어서 가히 내 정사를 지킬 수 있음에서 이니라

나는 여기서 상공(相公)의 주는 바와 이군의 얻는 바를 알았도다. 상공께서 산수간에 은둔(隱遁) 하셔서 장차 몸을 마칠 것 같더니 때마침 왜란을 당하여 창의하셔 적을 토벌하여 이름이 일세에 떨쳐 벼슬이 이품에 올랐으나 신을 벗고 용퇴하여 속주(俗麈)를 뛰어 넘어 선도에 의탁하여 곡식을 물리치고 솔잎을 먹으며 강호 자연 속에 늙고 평생을 마침에 뉘우침과 괴로움이 없었으니 밝지 않고서야 이를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군은 본시 평정공(平靖公)의 풍도를 이어 받고 충간공(忠簡公)의 아름다움에 젖었으니 그 문체 기품이 타 씨족과 다름이 있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세상에 처해서는 모나는 버릇을 끊어 그 성정은 초연히 출주하는 생각이 있으니 어질지 않고서야 능히 이러하겠느냐. 나는 말하노니 상공의 밝음이 능히 이군의 어짐을 알지 못하고서 강사(江舍)를 의탁하며, 이군의 어짐이 능히 상공의 밝음에 당()하지 않고서야 지기(知己)함을 허()했을까 함이다. 이는 밝음과 어짐의 앎이 서로 합쳐서 이루어 졌느니 하나의 좋은 일을 얻어 장차 천년까지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미담(美談)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군은 상공의 외손서(外孫婿), 상공께서는 자손이 많지 않아 강사를 의탁함이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함은 이런 까닭이 있음이 아니냐. 나는 여기에서 더욱 상공의 밝음()과 이군의 어짐()을 믿는 바로다.

정자 이름을 여현정(與賢亭)이라 함이 가하지 않겠느냐. ()하건대 망우정(忘憂亭)을 여현정(與賢亭)으로 바꿈이 옳지 않으랴. 내 또한 여현정(與賢亭)으로 고쳐 부름이 옳으리라는 이유를 풀어 말하자면 여현(與賢)이란 말이 상공의 글에서 나온 말이니 군()은 어이 이것을 허물하여 굳이 강사 지킴을 피하느냐.()하건데 자그만 허물을 피하지 않고 그 성실(誠實)에 힘쓰는 것이 선()이로다. 이군이 말하기를 어떻게 함이 성실에 힘쓰는 것이냐. 나는 대답하기를 자연에 한유(閑遊)하여 속욕주세(俗慾麈世 부귀영화의 탐욕)를 벗어나는 구로지맹(鷗鷺之盟 갈매기와 백로의 맹세)을 그대는 가히 불심(不尋)하지 말고, 상공께서의 자연에 노니던 그 연수지유(烟水之遊)의 정신을 가히 잊지 말고 풍원(風月)을 등한(等閑)히 하지 말고 시주(詩酒)를 폐()하지 말고 무릇 상공의 여흘 낚시와 고깃배 그리고 금() () () () 약로(藥爐) 다정(茶鼎)을 모두 이것을 황량(荒凉)하게 아니한즉 상공께선 비록 멀리 돌아가셔도 상공의 끼치신 자취가 영구히 바꿔지지 않을 것이니라. 의탁(依託)하는 뜻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랴. 그대는 힘쓰고 힘쓸 것이며 또한 힘쓰고 힘쓸 것이니라. 이군이 말하기를 승낙(承諾)하노라 하니 드디어 이 글을 쓰노라.

함안 조임도 기(咸安 趙任道 記)

1617(광해군 9) 3월 병이 깊어지자 그는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했고, 410일 망우정에서 별세했다. 향년 65세였다.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곽재우는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의 비슬산 기슭의 유가면 가태리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忘憂堂)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 문헌 : 곽재우 -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홍의장군한국사 민족사/글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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