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역사를 품다 20>
같은 시대, 다른 삶
-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김덕남
공무원 5급 을류(현 9급) 2차 시험인 면접 시간이었다. 면접관이 카르텔과 트러스트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에 엉겁결에 신사임당이라고 답했다. 왜지요? 라는 물음에 잠시 막막하다 십만양병설의 주인공 이율곡 선생을 낳은 어머니이며 현모양처의 본보기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고3 때 학교 내 ‘원화료’라는 생활관에서 1주 동안 10여 명의 학우와 함께 선생님과 합숙하며 생활 예절을 익혔다. 한지 창에 댓잎이 일렁이는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메뉴대로 음식을 만들고 도시락을 샀다. 선생님이 수저를 드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수저를 들면 짧은 밥상머리 교육이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 후는 시장 보기, 밥 짓기, 식사 예절, 설거지, 그날의 일을 반성하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성이 가정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위인이나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중에서도 신사임당의 이야기에 가장 매료되었다. 곤충을 그리면 마당의 닭이 와 쪼았다는 말에 우리가 “진짜요?” 하고 반문하면 “솔거도 벽에 소나무를 그렸을 때 새가 날아와 부딪혔잖아” 하고 말씀하셨다. 1주일의 ‘원화료’ 생활이 끝나는 날, 음식을 장만하여 어머니들을 초청하였다. 한복을 차려입고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장한 우리 딸!” 하고 안아주실 때 눈시울을 붉혔던 게 어제만 같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신사임당(1504~1551)을 만나기 위해 강릉 오죽헌烏竹軒을 찾았다. 정문을 들어서자 율곡 이이 선생이 왼손에 책을 들고 서 있다. 사임당은 아들을 밖에 세워 손님을 맞이하라고 했나 보다.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율곡 선생 친필 ‘견득사의見得思義’란 돌비의 글이 날렵하면서도 절의가 느껴진다. 조선의 천재 유학자로 성리학을 대표하면서도 현실 개혁가라 일컬어지는 그는 열세 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 장원을 한 ‘구도장원공’이다. 또한 5천 원권 지폐의 인물로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기와집으로 조선 초기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 이사온을 거쳐 이사온의 외동딸이자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 씨(1480~1569)의 소유가 되었다. 용인 이 씨는 신명화와 혼인하여 친정에서 살면서 딸만 다섯을 두었다.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19세에 22세의 이원수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낳으며 오죽헌에서 살게 된다.
사임당보다 오래 산 어머니 이 씨 부인은 오죽헌을 넷째 딸에게서 태어난 외손 권처균(1541~1620)에게 물려주었다. 권처균이 물려받음으로써 안동 권씨 종택이 되었다. 권처균은 까마귀처럼 검은 대를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이라 하고 당호를 오죽헌이라 하였다. 지금도 건물 주변에 오죽이 빼곡하다.
푸르게 타들어가며
비워내는 오롯한 길
바람을 놓지 않고
휘어지던 침묵으로
어둠을
뿌리째 삼키며
현玄이 되어 걸어간 길
- 정경화 「오죽烏竹」 전문
별당채인 오죽헌, 오른쪽 방은 율곡을 낳은 몽룡실夢龍室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방안의 열린 문으로 사임당 영정을 바라본다. 눈빛은 맑고 이목구비는 정결하다. 왼쪽 마루방으로 눈을 돌렸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격몽요결』 중 몸을 닦는 글귀를 입간판으로 세워 놓았다. 두런두런 읽으니 조선 선비의 올곧음이 율곡 선생의 이 가르침에서 나왔구나 싶다. 율곡이 여섯 살까지 공부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옆 건물은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다. 원래 이 자리에 어제각御製閣이 있었으나 안채 위로 옮기고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문성사 문 앞에는 어린 율곡이 타고 놀았음 직한 기이한 형상의 ‘율곡송栗谷松’이 고고하다. 오랜 세월 버티기가 힘들었는가 몸통 두 곳을 버팀목이 괴고 있다. 그 옆의 ‘사임당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후손으로 600살이 넘는다고 한다. 사람들의 손을 얼마나 탔기에 만지지 말라는 문구를 이름표로 달고 있을까. 미인의 피부처럼 하얗고 매끈하다. 몸통 군데군데에는 시멘트로 임플란트를 하였지만, 나목의 자태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과 함께 오죽헌의 수호목 역할을 하고 있다.
‘율곡매’ 앞에 섰다. 선비의 고매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매화나무다. 오죽헌 건립 당시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는데 목숨이 아슬하다. 맏딸 이름을 매창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한 사임당이었다. 매화는 고난 속에서도 고고함을 지켜내고 꽃을 피워 향기로 주위를 맑힌다. ‘율곡매’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래로부터 갈라진 세 둥치 중 두 둥치는 이미 목숨이 다하였고 한 둥치에서 뻗어 올린 가지에서 봉오리가 눈을 틔우려 한다. 살아내어야 한다는 매화의 안간힘이 느껴져 자꾸 용이 쓰인다. 오만 원권 뒷면의 <묵매도>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듯하다.
백두대간 바람 따라 살 시린 물줄기는
전율하듯 절규하듯 온몸을 헤집으며
사임당 젖은 눈매에 꽃망울 틔우리라
봄 마중 햇살 받아 고요도 몸을 풀고
오죽헌 너른 마당 먹물을 갈아내어
매창의 매운 붓끝은 묵매도를 그리더라
득음을 기다리는 육백 년 긴 세월은
버성긴 별을 모아 주광등 내어 걸고
율곡은 하얀 목덜미 구곡담을 읊조린다
- 김복근 「율곡매」 전문
오죽헌 뒤 쪽문을 통해 안채로 향한다. 안채는 복원하였으나 사랑채는 옛 그대로다. 추사의 주련 글씨가 묵향을 뿜어 건물의 품격을 더한다. 보통 사대부 집안의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장을 두었으나 여기엔 그렇지 않다. 주인의 성격이 개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안채에는 사임당이 36세 때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을 향해 대관령을 넘으며 쓴 시도 보인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할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어제각御製閣은 바로 이 건물 뒤에 있다. 정조 임금은 오죽헌에 벼루와 『격몽요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가져오게 하여 벼루 뒷면에 치하의 글을 쓰고 『격몽요결』에는 머리글을 써서 별도의 집을 지어 잘 보관하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그녀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고 스승으로 삼고자 스스로 ‘사임師任’이란 호를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41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신명화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의 외증손자다. 이 시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벼슬을 하지 않을 작정을 하고 강릉의 오죽헌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은 일찍 글을 읽고 쓰며 한시와 붓글씨에도 능해 친정어머니를 그리는 「사친시思親詩」, 전서 7자, 해 행서 1점, 초서 병풍 6폭, 초서 1점 등이 남아 있다.(임해리 『사임당』 p240)
율곡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율곡과 더불어 어머니 사임당의 생애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십 년간 떨어져 살며 과거 공부에 몰두하도록 청하여 약조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가 번번이 돌아오고 말았다. 사임당은 이를 바에야 내가 중이 되어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잠시 정신을 차리는 듯하였으나 그뿐, 주막집 권씨(사임당이 죽고 나서 후처가 됨)의 집을 들락거리며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아들 율곡이 쓴 「선비행장先妣行狀」에 “어머니는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략) 평소에 목적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쓸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사임당의 집에 잔치가 있는 날, 이웃의 부인이 치마를 빌려 입고 왔는데 그만 얼룩이 져서 매우 난처해지자 그 치마에 포도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포도 그림은 5만 원권 앞면의 배경으로 신사임당 얼굴과 함께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산수화는 대부분 중국풍이어서 우리 가까이 있는 풀, 곤충, 벌레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초충도이다. 초충도는 수를 놓기 위한 수본이었다고 한다.
사임당의 초충도 8폭 병풍 앞에 섰다. 오이와 메뚜기,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수박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곤충이다. 메뚜기는 금방이라도 병풍 밖을 뛰쳐나올 것 같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 <산수도> <초충도> <묵포도도> <묵매도> 등의 그림이 있다.
사임당의 재능은 그 자녀들에게 이어져 셋째 율곡 이이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맏딸 매창은 조선 중기의 묵매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묵매도> <매창화첩> 등을 남겼으며, 막내아들 옥산 이우는 활달한 필치를 보여주는 초서와 그림 <어해도> <묵란도> <옥산 화첩> 등을 남겼다. 송시열은 “옥산의 글씨는 정묘하고 웅건하여 용과 뱀이 날아 올라가는 것 같아 그 글씨를 얻은 자는 값진 보석보다 더 귀중히 여겼다.”라고 했다.
강릉은 또 한 명의 여성 천재를 낳았다. 바로 허난설헌이다. 절경을 자랑하는 경포대와 가까운 곳에 그녀의 생가가 있다. 생가와 기념관, 생가 뒤의 소나무공원을 거닐며 허난설헌의 생애를 생각한다.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여성, 난설헌 허초희(1563~1589)는 화담 서경덕의 문하인 초당 허엽의 딸이자 허성과 허봉의 동생이요 허균의 누나였다. 허 씨 5문장가로 불린 그들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나는 왜 조선이라는 소천지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하고 세상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녀는 조선에서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죽고 난 뒤의 일이다.
당시 임진왜란이 터지고 명의 지원군과 함께 온 사신 오명제는 허균으로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최치원, 김시습 등과 함께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받아 명으로 돌아가 『조선 시선』이란 시집을 발간한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오자 문인들이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조선시와 허난설헌의 신선시를 구하고 싶어 했다.”라고 시집 서문에 올렸다. 그 이후 여러 시집에 수록되어 중국 땅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1700년대에는 일본에서도 널리 애독되었다고 한다.
당시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한문을 배우고 한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문가의 후손인 허엽은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교육했다. 그 결과 동생 허균의 공부를 직접 돌볼 정도로 난설헌의 실력은 뛰어났다. 훗날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라고 했다. 8세에 지은 「백옥루 상량문」의 글이 한석봉 글씨로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표현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중국 문인들이 먼저 감탄했으니까. 난설헌은 그림에도 뛰어나 아버지와 딸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앙간비금도>을 남겼다. 붉은 옷을 입은 그 소녀가 바로 자신을 그린 것이 아니냐고 후세의 미술가들은 말한다.
오빠 허봉은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며 두보의 시 등을 구해 난설헌에게 전해 주었다. 허봉은 친구 손곡 이달을 난설헌의 가정교사로 모시어 학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달은 뛰어난 재능에도 서자 출신이라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난설헌이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키운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 아닐까. 배움의 폭을 넓혀가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채련곡采蓮曲」
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양가 부모의 결정에 따라 김성립과 결혼했다. 안동 김씨 자재인 김성립은 5대에 걸쳐 문과에 합격한 문벌 가문이었다. 당시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남귀여가 풍습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러한 풍습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친영제인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종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과거 공부를 위해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남편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애틋한 마음을 잘 드러난 시가 전해진다.
“보배로워라 정금이여/ 반달 모양 새긴 노리개/ 시집올 때 시부모님 주신 거라서/ 이제껏 다홍치마에 차고 있었죠/ 오늘 길 떠나는 당신에게 드리오니/ 서방님 정표로 차고 다니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으나/ 새 여인 허리띠에 달아 주면 아니 되어요”「견흥遣興」
번번이 과거에 낙방한 김성립은 아내에 대한 열등감으로 기생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난설헌은 두 아이 키우는 것으로 낙을 삼고 시를 쓰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허균의 문장 중에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좋았으나 그 시어머니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는 글귀가 있어 시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백일홍 가지마다 초서로 앉힌 서사
행간에 숨겨놓은 위태로운 꽃의 안부
화르르 불에 덴 듯이 붉었다가 툭 진다
남매의 이야기는 솔숲에 깃들었나
환하게 열린 햇살 슬픔조차 다정하다
바람이 꾹꾹 눌러쓴 정한 맺힌 필담들
꽃 같은 스물일곱 슬픔의 속앓이를
이제사 피우는지 겹겹이 붉은 꽃잎
누이여, 이번 생애는 또 아프지 말기를
- 김희동 『허난설헌에 기대어』 전문
1580년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관찰사 직에서 물러나 돌아오던 중 객사하고 말았다. 이어서 사랑하는 두 아이도 떠났다.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 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 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 숲속에는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 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 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 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곡자哭子」
1588년, 열두 살 아래인 난설헌을 글동무라 칭한 정신적 지주이던 오빠 허봉이 객사하였다. 허봉은 동인의 선봉장으로 서인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종성, 갑산 등에 유배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생을 마감했다. 난설헌은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읊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
자기의 운명을 예언한 것일까. 스물일곱에 지고 말았으니.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시를 불태워달라고 했으나 다행히 허균이 외우고 있던 시와 친정에 남아 있던 시가 있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같은 시대 다른 삶을 살았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사임당은 모자가 같이 화폐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우리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현모양처의 틀에 갇힌 게 아니라 독립적 인격체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구가하며 예술을 통해 자아 완성의 길을 걸었다. 난설헌도 사임당과 같이 명문가에서 태어나 강릉 경포호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허난설헌의 생애는 불우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그들의 예술혼은 지금도 살아있다.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 덕분에, 허난설헌은 능지처사 당한 동생 허균 덕분에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
* 허난설헌의 한시 번역문은 『허난설헌 시선집』(나태주 편역. 2018. RHK)에서 가져옴.
참고문헌
임해리 『사임당』 2015. 인문서원
이숙인 『신사임당』 2017. 문학동네
나태주 편역 『그래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허난설헌 시선집)』 2018. RHK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문워크moonwalk』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등 수상
- 《시조21》 2026.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