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시창고
4-2 : 신(神)이 아닌 자의 집 /기형도
검은 새 흰 새 난다. 강 옆의 마을, 해는 뉘엿뉘엿 지고 새들은 물위를 걸어다니다 옥수수 밭으로도 날아온다. 작은 배들이 지나고 강물들은 황금빛 태양의 부스러기들을 마음대로 흘리고 있다. 강 옆의 마을, 흰 수건을 쓴 중년 아낙네가 허리쯤 차오르는 갈대밭을 헤치며 가고 있고,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낙동강이다. 강 건너 마을 뒷산엔 무덤들과 나무들이 섞여있다. 사과나무 잎새들이 잠시 햇살을 묻히고 흘려버린다. 모래톱 부근에 떠 있는 포크레인으로도 새들은 날아간다. 혼자 떨어져 사색에 잠긴 목이 긴 새들도 많다. 먼 들판에서 흰 연기가 솟아 강물 위를 흘러가고 사내들은 내의를 벗고 물속으로 갔다. 산들은 지는 해의 빛 속에서 흰 먼지덩어리처럼 솟아있는데 기차는 달리고 있다. '유천'이라는 간이역을 지난다. 흰 자갈밭, 얕은 강물, 원족 나온 행락객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산에는 무덤이 너무 많다. 죽은 자들은 국토(國土)에 깊다. 살기 좋은 낙동강변 마을이다. 수면도 아니고, 몽상도, 명상도 아닌 가수(假睡)의 상태가 1시간 이상 흘렀다. 밤 10시, 열차는 이미 대전을 지났다.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 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영등포 역에 내리다. 밤 11시. 또 다시 움직이는 세계. 낮게 소리 없이 서울에 섞여든다. 축복의 나날들을 내 스스로 피워내기 위하여,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이 짧은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이 글은 '1988년 8월 2일 저녁 5시부터 8월 5일 밤 11시까지 3박4일 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는 노트의 전문이다.
[출처]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