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18
비어 있는 호주머니
내 호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다. 동전 몇 개가 겨우 짤랑거릴 뿐, 빳빳한 지폐 한 장 들어 있는 날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가볍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언젠가는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와 바람이 늘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호주머니에 동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세월이 쌓인 만큼 추억이 들어 있고, 사람을 향한 마음이 들어 있다.
요즘 손주들이 집에 다녀갈 때면 꼭 손에 돈을 쥐여 주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채우지 못했던 내 마음을 대신 채우듯, 돌아가는 길에 따뜻함 하나쯤 안겨 주고 싶어서다. 지폐 한두 장을 건네고 나면 뒤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더욱 예뻐 보인다. 그 작은 손에 쥐어진 것은 돈이지만, 내 마음에는 사랑을 건넨 것 같은 뿌듯함이 남는다.
어린 시절 내게는 용돈이라는 것이 없었다. 필요한 것은 아버지가 마련해 주셨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없었다. 동네 구멍가게에 진열된 독사탕이 먹고 싶을 때가 많았다. 친구들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이 사탕을 살까 저 사탕을 살까 망설이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우리는 자주 동전 치기를 하며 놀았다. 땅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동전을 넣기도 하고, 벽에 튕겨 누가 더 멀리 보내는지 겨루기도 했다. 조약돌로 동전을 맞혀 따는 놀이도 있었다.
나는 늘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친구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놀이판에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동전을 딸 기쁨보다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한두 개의 동전은 내게 너무 소중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그 작은 금속의 촉감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놀이가 시작되면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부러워한 것은 동전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동전이 가진 자유였다.
친구들은 동전으로 사탕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작은 동전 하나가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처럼 보였다. 내게는 그 자유가 부러웠다.
간혹 내 호주머니에 들어온 동전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물 흐르듯 금세 사라져 버렸다. 손에 쥔 힘도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아 허전함을 느끼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손주들에게 용돈을 준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 하나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힘은 남을 누르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는 힘이었으면 좋겠다. 힘에 밀리지도 말고, 그렇다고 힘을 휘두르지도 말고, 마음속에 든든한 자신감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 내 호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빈 호주머니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결핍의 자리였고, 누군가를 이해하게 만든 배움의 자리였다.
이제 내 호주머니 속에 있던 것들이 손주들의 호주머니로 옮겨 가고 있다. 동전과 지폐만이 아니다. 내가 살아오며 품어 온 사랑과 바람도 함께 건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비어 있던 호주머니는 결코 비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언젠가 누군가를 채워 주기 위해 오래도록 비워 두었던 자리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