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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내화 수필가의 방

내 안의 묵정밭

작성자조내화-푸른바위|작성시간26.06.14|조회수22 목록 댓글 0

수필-219

내 안의 묵정밭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 다녀왔다.

 

우리집 뒤 텃밭은 언제나 열려 있는 반찬 창고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놓고도 잠시 들러 고추를 따고, 가지를 따다, 금세 반찬을 만들곤 했다. 손바닥만 한 땅이었지만 열 가지가 넘는 채소들이 계절마다 자리를 지키며 우리 식탁을 채워 주었다.

 

집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 밭은 묵정밭이 되어 있었다. 식용 채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 모를 풀들만 사람 키만큼 자라 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만 한쪽에 서 있는 감나무만은 예전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끊긴 자리에서 자연은 저만의 질서를 세우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비어 있는 집들이 눈에 띄었다. 새벽마다 빗자루를 들고 골목을 쓸던 철이 아버지도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자리를 자연은 조금씩 되찾아 간다. 담 밑으로 풀이 번지고 빈집 마당은 잡목으로 채워진다.

 

한때는 무엇이든 배우고 받아들이던 마음이 어느새 무뎌지고, 또렷하던 기억도 잡초가 무성한 밭처럼 뒤엉켜 버린다.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세월은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간다. 주인이 사라진 땅에 자연이 다시 주인이 되어 가듯, 마음에도 언제부턴가 낯선 것들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해 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삶에도 늘 비옥한 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던 황량한 시간도 있었고,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힘겨운 날들도 있었다. 아픈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밭에 돋아난 잡초처럼, 뽑아도 뽑아도 마음 한구석에 깊게 뿌리를 내린다.

 

묵정밭을 다시 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다. 땅은 스스로 밭이 되지 않는다. 잡초를 뽑고 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어야 비로소 새 생명을 품는다.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묵묵히 곁을 지켜 준 사람들. 어떤 날은 밤새 울었고, 어떤 날은 간절히 매달렸으며, 어떤 날은 지쳐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밭에 나갔다. 봄에 심어 둔 작물들은 잡초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풀 속에 숨어 있던 쪽파를 찾아 세워 주고, 흙 위를 덮은 잡초를 걷어 냈다. 조금씩 맨땅이 드러나고 작물들이 제 모습을 찾아갔다. 한참 일을 마치고 뒤돌아보니 정리된 밭이 환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묵정밭은 영원하지 않다.

잠시 묵혀질 수는 있어도, 부지런한 손을 만나면 다시 옥답이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잡초가 무성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시 호미를 들면 된다. 뽑고, 고르고, 심으면 된다. 그 손이 내 손이든, 누군가 내밀어 준 손이든.

내 삶의 밭은 결국 가꾸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손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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