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타 카페자료실

[스크랩] <필독> 파조 7세 의산군 남휘와 정선공주

작성시간11.08.20|조회수225 목록 댓글 0

제5장 의산군파의 내력

 제1편 파조7세조 남휘와 정선공주

  제2편 불세출의 명장 남이장군

  제3편 정착조 13세조 남응생 이후 사적

 ▲ 당시 파조 남휘와 정선공주가 기거하였던 수강궁(창경궁)으로 사적 123호   로 지정되어있다.

세종대왕은 당시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은 공사중에 있었으므로, 이궁(離宮)인 창덕궁에서 정사(正事)를 보았는데, 이 수강궁은 상왕인 태종이 여기에 기거하게되자, 이에 세종은 대대적인 수리와 증축을 행하여, 궁궐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단종이 잠깐 거처한 적이 있고, 세조가 이곳에서 죽었으며, 예종이 이곳에서 즉위하기도 하였다.

그후 성종의 代에 이르러 다시 중창하면서, 이름도 창경궁(昌慶宮)이라 하엿는데, 이후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불타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1편 파조 7세조

의산군 남휘와 정선공주

 

 ● 빛나는 명문대가(名聞大家)의 가문

● 정선공주와의 혼인으로 태종의 부마(駙馬)가 되다

● 왕실의 최측근으로 총애(寵愛)를 받다.

● 최고의 官職과 화려한 대외 外來行蹟

● 王女 정선공주의 別世

● 대신들의 탄핵과 세종대왕의 보호

● 보국 숭록대부 의산군 南暉의 별세

● 수(壽)는 비록 짧다하나 그 남은 것은 길도다

 

☞ 개국공신의 명문족벌 가문

 

공의 할아버지이신 남재(在)는, 남은(南誾)의 형으로서, 이성계를 도와 왕으로 옹립할 때, 기여한 공로로 조선왕조개국 1등 공신이시다.

공의 둘째 할아버지 남은(誾)은, 고려 말 때 삼척에서 왜구를 물리친바 있고, 우왕 때 요동 정벌 시에는, 이성계의 막하로서 위화도 회군을 주도하여, 남씨가 최초로 역사상에 등장하게 되는 인물이었는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세자 방석을 옹립하려다, 정도전과 함께 방원(후에 태종)에게 피살 되었으나, 사후(死後) 곧 복권 되었다.

남재는 대마도를 정벌한 바도 있으며, 태종 때 우의정으로 의령부원군에 봉해진 후, 영의정까지 지내신 1급 정치가이셨다. 1419년(세종1년)에 돌아가셨는데 충경(忠景)이란 시호를 받으셨으며, 서울 종묘(宗廟)에 태조대왕과 함께 신주가 모셔져, 제사 시에 함께 배식(配食)을 받는 최고의 영예(榮譽)를 받으셨으며,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에 있는 묘역(基域)은 향토유적 제 5호 문화재로 지정되고 있다.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에 있는 의산군파 우리 선조들도 당시 구봉서원(龜峯書院: 현 농화당 남씨 재실)에서도 제사를 드린바 있었다.

공의 아버지 남경문(景文)은, 병조의랑을 지내신후 26세로 돌아가셨는데, 부인 온양 方氏 사이에 지(智), 휘(暉), 간(簡)이 있었는데, 이 3형제 代에 더욱 번창하였다.

둘째 휘(暉)는, 태종대왕의 4녀 정선공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종친으로 중국 명나라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여, 나중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고, 첫째 지(智)는 문종 때 우의정을, 셋째 간(簡)은 예문관 직제학에 까지 이르러는 등 남재(在), 남은(誾) 두형제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중앙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숱한 현신(賢臣)들과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므로서, 조선 초기 역시 인구수는 적었지만 20대 명문 족벌(名門族閥)로 손꼽히었다.

그래서 문종원년 6월 28일 실록기록엔, 당시 우의정을 지내고 있었던 남지(智)는 선대로부터 대대로 영예를 누리고, 또 3형제 모두가 높은 벼슬에 이르기까지 하니, 사직 상소까지 올렸던 기록도 보인다.

여기에서 족보상으로는 智, 簡, 暉로 전해져 왔으나, 실록 기록에서 둘째임이 확인되어, 智, 暉, 簡 으로 바로 잡았으니 상세한 내용은 정선공주 졸기 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 정선공주와의 혼인으로 태종대왕의 부마(駙馬)가 되다

 

태종대왕(이방원)은 아들이 4명(셋째가 세종대왕), 공주가 4명, 옹주가13명으로 자녀가 많았다.

첫째 정순공주(貞順公主)는 이백강에게 하가하여, 태종의 정선공주와 동시(同媤)가 된다. 즉 이거이의 長男은 태조의 부마(駙馬)이고, 4남은 태종의 부마가 되었다.

둘째 경정공주(慶貞公主)는 개국공신으로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준의 아들 조대림(趙大臨)에게, 셋재 경안공주(慶安公主)는 권규에게 각각 하가하였다. 이중 조대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세력을 배경으로 교만하고 사치스러웠는데, 부마(駙馬)까지 되고나니 안하무인격이었다.

이것을 본 목인해(睦仁海)는 조대림을 제거하려고 모함을 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태종8년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대사헌 맹사성과 지평 박안신은, 임금의 사위에 관한 일을 태종에게 상주하지도 않고, 호된 고문을 가하였다하여, 한산(韓山)과 영덕으로 귀양보내고, 목인해는 환형(轘刑)에 처하였다.

조대림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상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일로 인하여 조선초기의 조정을 떠들석하게 하였다.

태종은 그 이후로부터 “사족(士族)의 자제 중에 교만하고 사치스런 풍이 없는 자를 사위로 간택하라”고 하교(下敎)하면서, 이번에는“4-5품 이하의 집 아들”을 사위감으로 구하고자 하였다.

남휘(暉)는 부친 경문(景文)이 일찍 돌아가셔서 모친의 손에서 자라났고, 당대 현관이 아니라는 점과, 어려서부터 사서오경 등 중국의 성인과 현인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나 역사책을 통달하였고, 용모 또한 준수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이 “남휘는 공이 많은 신하(남재)의 손자요,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많고, 집안의 가풍(家風)이 다른 족벌들과는 달리 덕이 있고 화목하기로 이름난 집안이오니, 공주를 시집 보내소서”하였다.

이에 태종도 “남휘는 비록 영의정의 손자로 모친 손에서 자라났지만, 몸가짐이 단정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므로 간택한다”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남씨 중에 왕실과 혼인한 사람은 성종 때 경순옹주와 결혼한 의성위군 남치원(致元)과, 휘정옹주와 결혼한 의천위군 남섭원(燮元)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정비의 소생인 공주(公主)와 결혼한 것이 아니고, 후궁 소생인 옹주(翁主)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남휘는 1416년 (태종16년) 2월2일 태종대왕의 넷째딸이자 세종대왕의 여동생 되는 정선공주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인 남재가 돌아가시기 3년 전의 일이었다.

태종 16년 2월24일 기록에, 남휘의 길례(吉禮)날 파촉인(把燭人)을 늦게 보낸 죄로, 병조정랑 박안신이 파직되기도 하는등 부마(駙馬)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였다.

남휘는 결혼하자마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산군(宜山君)으로 피봉되어, 왕자와 같은 예우를 받게 되었다.

품계는 종1품에 해당되는 대우와 부마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 편집자 註

(1)의산군(君)과 의산위(尉) 호칭과 파명에 대하여

태종 때에 정실부인에게서 난 딸은 공주(公主)라 불렀고,서녀는 옹주(翁主)라 불렀다. 공주와 혼인한 임금의 사위는 조선초기에는 황제의 사위를 뜻하는 부마(駙馬)라 하였다.

이시기의 부마들은 이성제군부(異姓諸君府)에 소속되어 위(尉)의 호칭을 쓰느것이 아니라 군(君)의 호칭을 붙였다.

이 때 君칭호 앞에 자신의 본향을 붙였는데 남휘(暉)의 경우 할아버지되는 남재(在)가 이미 의령군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의령의 옛 이름을 따 의산군(宜山君)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사위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세종 26년에는 부마부(駙馬府)로 고치고, 한 급수 아래인 尉로 강등되면서 부마의 입지가 크게 약화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부마부는 다시 의빈부(儀賓府)로 격하되면서 공주나 옹주의 입지에 따라 급수가 차등 적용되었다.

후에 남이장군도 의산군(宜山君)칭호를 받았는데, 의산위(宜山尉)로 호칭하는 것은 스스로 격하시켜 부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 왕실의 최측근으로 총애(寵愛)를 받다.

 

공주와 결혼한 부마(駙馬:사위)들은 특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남휘는 다른 사위들과는 달리, 수강궁(壽康宮) 즉 오늘날의 창경궁(昌慶宮)에서 살게되는 은총(恩寵)을 입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태종은 5월 남휘의 할아버지되는 남재(在)를 영의정 부사를 시켜므로서 남문(南門)을 일약 명문대가로 부각시켰다.

태종 17년 12월6일 세제와 왕자, 부마(駙馬:사위)등이 광연루에서 태종에게 헌수(獻壽)할적에, 태종이 이르기를 “남휘 등은 왕실과 혼인을 맺은 사람들이니 만치, 이후부터는 종친의 내연(內宴)에 모두 와서 참여하라”고 일렀다.

남휘와 정선공주가 결혼하여, 수강궁에서 살던 3년째 되던 해인 1418년 (태종18년)8월에, 태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는 형제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겪으며, 왕위에 올랐던 경험이 있는 분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갑자기 죽더라도, 왕권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면서도, 자신이 이루고저 하던 꿈을, 세종으로 하여금 이루고자하는 의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군사력은 장악한 채, 세종의 권력기반이 확고히 다져질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태종이 붕어한 것은 아니지 마는 왕위를 이양하고 난 1월 태종에 대한 신도비문을 당대의 문장가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는데, 이 비명 내용은 약 5P에 달하는 문장인데 그 중에 태종의 4녀 정선공주가 의산군 남휘(暉)에게 시집간 내용이 적혀 있다.

변계량은 바로 밀양 초동 사람으로 후손이 없어 신호리 사거리에 조그마한 비각이 서 있을 뿐이지마는 태종 때 예조판서, 세종 때에 집현전을 설치해 대제학을 겸하여 민족 문화 창달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대유학자이었는데, 남휘.정선공주 묘소를 이장해 와 그때의 동시대 사람이 오늘날 이웃에 있게되니 우연의 일치인가? 인연인가?

그 후 태종은 세종의 왕권도 차츰 안정 되어가고, 자녀들도 거의 다 출가하게 되자, 세종1년 12월20일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와 함께, 창덕궁으로 부터 담하나 사이에 있는 수강궁 남휘(暉)의 집에 이어(移御)하여 같이 살게 되었다.

아마도 남휘의 부친 경문(景文)은 일찍 죽고 없는데다, 할아버지인 남재(在)가 6일 전에 죽어, 이를 위로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남휘의 입지(立地)를 고양시킬 의도였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자 창덕궁에 있는 세종대왕은 날마다 남휘가 살고있는 수강궁의 이어소(移御所)에 문안을 드렸다.

세종2년 1월 15일에는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어머니로 태종으로서는 장모가 도는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아내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송씨가 남휘의 집에 기거함에 따라, 대비가 헌수하기위해 오기도 하였다.

세종4년 5월9일에는,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와, 세자(후에 문종)가 남휘의 집에 거처를 옮겨,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막내 딸 정선공주와 부마 남휘를 총애 해 주던 태종은 1422년(세종4년)55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렇듯 태조대왕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도 정선공주가 막내 여동생 이였으므로, 각별히 아껴주었고, 남휘 또한 왕실의 최측근으로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덕궁 옆 창경궁의 이름이다.

당시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은 공사 중에 있었으므로, 세종대왕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에서 정사(正事)를 보았는데, 이 수강궁은 왕이 행차 길에 나설 경우, 따로 머무를 곳이 필요했고, 정궁이나 이궁이 천재지변 등이 있을 경우 등을 고려해서, 하나 더 새로 지었던 것인데, 태종이 여기에 기거 하게 되자, 이에 세종은 대대적인 수리와 증축을 행하여, 궁궐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단종이 잠깐 거처한 적이 있고, 세조가 이곳에서 죽었으며, 예종이 이곳에서 즉위하기도 하였다.

그후 성종의 代에 이르러,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려고, 다시 중창하면서, 이름도 창경궁(昌慶宮)이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덕궁에 관하여 알아보자면, 임진왜란시 불타 없어졌다가, 광해군 8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이괄의 난 때 또다시 일부가 불탔던 것을, 병자호란 후 인조가 중수하여, 통명전에 기거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7년(융희원년)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순종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창경원에 이어하게 되고, 여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수많은 벚꽃을 옮겨심어, 일반에게 공개하기까지 하면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려 하였다.

일제가 물러간지 41년이 지나서야, 1986년8월에 옛 모습대로 일부를 중창하기 시작하여, 본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되돌아 왔음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러 하였으므로, 당시 남휘와 정선공주가 살았던 수강궁 건물은, 오늘날 찾아 볼 수가 없고, 다만 창경궁 궁궐지에 의하면, 저승전과 시민전 일대가 수강궁 이였을 것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다.

 

             ▲ 광화문에 잇는 세종대왕 동상

 

☞ 최고의 官職과 화려한 대외 外交行蹟

 

임금의 사위는 판서나 정승 등의 관직을 수행하지 않았고, 그 직위에 걸맞는 군대의 통솔상 일종의 명예직에 임명되어 예우를 받으면서, 주로 왕실의 행사 참석과 외척으로서 나라를 대표하여, 주로 대외 외교 활동을 담당하였다.

파조 의산군 남휘의 직위는

태종18년 6월22일에는 의금부의 사법권을 관장하는 의용위 절제사(義勇衛 節制使)로, 세종원년 8월 12일에는 궁중의 경비를 관장하는 내금위 절제사(內禁衛 節制使),

세종3년 5월14일에는 군대를 총괄하는 오위도총부 중의 하나인 충좌위에 공신의 자손들로 구성된 충의위 절제사(忠義衛 節制使)로 임명되어었다.

주 업무는 왕실의 외척으로 조선을 대표하여 주로 明나라와의 외교활동으로 활약하였다.

당시의 조선은 明나라의 속방(屬邦)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明나라와의 외교는 한 국가로서의 인정을 완전히 받는 것이어서. 국운(國運)을 건 중요한 일이였다. 더구나 세종대왕은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는 것을 明나라로부 책명(冊命)을 받은 뒤여서, 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의 기쁨을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세종1년 8월17일 상왕인 태종과 세종이 태평관에 거둥하여, 명나라 사신을 위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명나라 사신 황엄이 상왕에게 아뢰기를 “누구를 보내어 사은(謝恩)하시렵니까?” 하니, 상왕이 “나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큰 자식은 멀리 밖에 있고, 둘째는 병으로 누워있고, 셋째는 이제 국왕이 되었고, 넷째는 일찍 죽었고, 또 두 자식이 있기는 하나, 모두가 정비(正妃)의 소생이 아니라, 감히 보낼 수가 없소,

또 딸이 넷이 있는데, 위로 세 사람은 모두다 조정에 가 뵈었으나, 끝에 사위 남휘(暉)가 아직 뵙지 못하였으므로, 이번에 보낼 가 하오.” 하니, 황엄이 “성상이 조선을 대우하심이 오늘날과 같이 후하신 적이 없었으니, 친 왕자가 아니면 보내실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정비의 소생은 아니더라도, 역시 친 왕자일 것입니다” 하니, 상왕이 “ 끝에 자식은 나이가 어리니, 경녕군 이비를 보내겠소” 하면서, 전날 세종과 함께 수강궁에서 사은사(謝恩使) 남휘와 판한성부사 정역, 형조참판 홍여방등 일행에 전송연을 베푼바와 같이, 경녕군 이비를 대표로 하되, 사실상은 남휘가 사은사로 다녀오게 하였다.

사은사(謝恩使)란 무엇인가?

당시 명나라 천자께서 조선에 베푼 은혜에 대해서, 조선을 대표하여 감사의 예를 올리는 사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은사는 자연 격이 높아야만 했고. 그것이 上國에 대한 예의라고 믿었던 시대이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되면, 천자를 배알하는 것은 물론, 천자가 신임하는 대소 공경(公卿)들과 학문을 논하고, 외교를 논하며, 경륜을 시험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은사의 인품과 위엄은, 곧 나라의 체면과 연결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명나라에 까지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광영중의 광영인 것이었다.

그래서 사은사를 선정할 때에는 조정 중신들과 공론에 부쳐, 신중하게 결정되는 것인데, 공은 여러 차례나 사은사로 갔다 왔으니, 당시 그가 조정 내에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얼마만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의주를 출발하여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게 된다. 산해관은 뒤로는 산이 펼쳐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진다하여 산해관(山海關)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만리장성 동쪽 첫 관문이기에 <천하 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관문을 통해 북경으로 들어간다. 당시의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입성하여 묵는 곳은 옥하관이란 숙소이다.

자금성에서 흘러나온 냇물이 옥하의 근처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 캐피탈 호텔>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지금은 헐려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王女 정선공주의 別世

 

1424년(세종6년) 1월25일 21세의 젊은 나이에, 1남1녀를 두고 돌아가셨다.

이에 세종대왕은 친 여동생이 먼저 죽 되자, 슬퍼하며 찬수를 거두고,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자녀가 어리니, 남휘의 아우 사헌부 감찰 남간(南簡) 이 주장하여, 어느 예에 못지않게 성 대하게 치르도록 하교(下敎)하였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파조 의산군 남휘 (暉)가 족보상으로 남재의 손자가 지 (智), 간(簡), 휘(暉)로 알고 있었는 데 이 대목에서 둘째임이 확인된다.

이 부분에 원문과 해설을 다시한번 보 면 다음과 같다.

 

<세종6년1월25일(임인)/ 정선공주의 졸기

정선 공주가 졸(卒)하였다. 세종대왕과 같은 어머니인 여동생으로서 의산군 남휘에게 시집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21세로 돌아가니, 세종대왕이 슬퍼하여 찬수를 거두고 조회를 3일동안 정지하였다.

염빈(염빈). 예장(禮葬). 조묘(造墓)를 삼도감(三都監)에게 설치하게 하니,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보고하기를

“을미년 경안공주의 초상 때에 은례(恩禮)가 진실로 상례(常例)와 달랐으나, 홍안공주의 상(喪)에는 태종의 매씨(妹氏)이면서도 그 상장(喪葬)의 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였나이다. 신은 생각건대 친소(親疎)로 말하면 왕의 딸이 왕의 매씨와 다릅니다.”라고 하니,

세종대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옛글에서 보았는데, 왕의 달이 왕의 매(妹)에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보았으나, 왕매(王妹)가 하가할 때에 자장(資粧) 과 예물이 진실로 왕녀보다 낫게 하는 것인데, 어찌 매의 초상이라하여 도리어 박하게 할 것인가? 일체로 경안 공주 상장의 예에 의하도록 하라”하고 또 임금이 말하기를

“공주의 주상(主喪)은 당연히 동성(同姓)으로 할 것이나, 원윤과 정윤 중에 한사람도 할 자가 없고, 또 공주의 아들이 어리니, 남휘(南暉)의 아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남간(南簡)이 주장하게 하라”하고 초상 소용으로 정포 50필을 내려 주었다.

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사관(史官)이 옆에서 보고 기록 한 것인데, 어떤 사(私)가 있을 수 없고 전후 상황을 보았을 때 실수를 범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족보는 앞으로 발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수정이 불가피 하다.

그래야만 족보가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 해 나가 신뢰를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종 6년 2월2일 정선 공주의 제사에 내관을 시켜 교시를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 죽게 되는 것은 기수(氣數)에 관계된다 하나, 동기되는 마음은 유명이 다를 지라도 간격은 있을 수 없도다. 오직 너 공주는 성품이 정숙하고 곧으며, 행실은 공손하고 착하였다. 대궐 안에 있을 때부터 효성이 극진 하였고, 혼인을 하고 나서는 더욱 근검하였도다. 바로 가정의 화목함을 이루었고, 이로서 척리(戚里)의 규범을 보여 주었다.

이러므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특히 총애 하셨고, 나도 두터이 사랑하였다. 바야흐로 길이 오래 살고 함께 안락한 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더니, 어찌 뜻했으랴.

젊은 나이에 우연히 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나, 수족이 이지러짐을 생각하니, 어찌 심간(心肝)을 베어내는 듯하는 아픔을 이기리오. 하물며 부왕의 상복도 끝나기도 전에 작은 능금나무가 꺾어졌다.

고요히 생각하여 보니, 어찌 이렇게 서러울수가 있는가? 슬픔을 머금고 말을 엮어 내관을 보내어 전(奠)을 드리노라. 슬프다 살아서는 도기로서 항상 친애한 마음을 두터이 하였고, 죽어가니 유명의 길이 다르므로 특히 조휼(弔恤)하는 마음을 전레를 더하노라”하였다

 

한편 묘지명(墓誌銘)은 당시 남수문(秀文)과 함께 최고의 문장가였던 윤회(尹淮)로 하여금 짓도록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세종 6년 3월 6일(임오) /

예문 제학 윤회가 찬한 정선 공주의 묘지명 》

정선 공주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정선 공주는 우리 태종비(太宗妃)

원경 왕태후의 막내따님이니, 여흥 부원군 문도공민제(民霽)가 그의 외조(外祖)이다.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출가하였으니, 의령 부원군 충경공 남재(南在)의 손부(孫婦)이었다.

공주(公主)는 나면서부터 어질고 아름다웠으며, 덕과 용모가 아름다웠다. 이미 출가하여 남편을 순하게 받들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예로 하였고, 치가(治家)함에 부지런하고 검박하게 하여 조금도 귀한 세력이라 자긍(自矜)하지 아니 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원손(元孫)이요, 딸 하나는 어리다. 영락 22년 정월 임인에 병환으로 돌아가니, 나이 2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주(某州)의 모원(某原)에 장사하였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왕가의 파벌로서 무성한 오얏나무에 광채가 더하였다. 엄숙하고 화한 덕은 남편이나 집 사람들에게 마땅하게 하였다. 수(壽)는 비록 짧다 하나, 그 남은 것은 길도다. 좋은 돌에다 명(銘)을 새겨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 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동천리 사후동에 장사 하였다.

 

☞ 대신들의 탄핵과 세종대왕의 보호

 

임금의 사위로서 수강궁에서 살던 의산군 남휘는 정선공주가 죽고 나자, 세종대왕은, 수강궁과 가까운 지금의 연건동 126번지 일대에다, 세종7년 7월25일 남휘의 어머니인 方氏앞으로 영숙택주(寧淑宅主)에 봉하면서, 새로 지은 집을 하사하여 이사하게 하였다.

정선공주가 죽고나자 23세의 부마(駙馬)로서의 남휘로서도 남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부마는 왕녀(공주 또는 옹주)가 죽고나면 재혼은 할수 없었다.

부마가 업은 부인은 첨으로 간주 되었고, 그의 자식들도 서자로 처리되는 것이었다.

의산군 남이는 하는 수 없이, 윤이(閏伊)란 후처를 맞아들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세종6년7월25일-8월4일까지,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이에 세종대왕은 윤허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마지못해 구사(丘史: 관노비 중에서 뽑아 쓴 하인)와 조례만 거두었다가 나중에 도로 돌려주었다.

세종9년 10월25일 세자가 나갈 때 배송(拜送)하지 않는다고 하여, 또한 탄핵을 받아, 경기도 이천(利川)에 잠시 부처 하였다가 돌아왔다.

문종1년 11월26일 사위인 정랑(正郞) 신자승(申自繩)이 보충군(補充軍)의 진고하는 법을 위반했다 하여, 직책을 파면토록 할 때도, 세종대왕은 “신자승은 남휘의 사위이니 만치, 다음에 반드시 서용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비밀히 도승지에게 명하기도 하였다.

문종2년 3월13일 당시 금과 은은 희귀하여,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불교를 배척하고 있었는데도, “금, 은으로 불상을 만들어 숭배한다”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불상만 회수하면서 없었던 일로 무마하였다.

이렇듯 정선공주의 별세 이후에 남휘(暉)를 겨냥한 대신들의 끊임없는 탄핵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전례(前例)없이 이를 두둔하면서, 오히려 조선을 대표한 사은사(謝恩使)로서 明나라에 다녀오게 하기도 하고, 명나라 使臣을 영접하는 선위사(宣慰使)로서 화려한 대외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인품과 경륜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까지 널리 이름이 떨치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문종 때의 불교를 숭상한데 대한 탄핵에 대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에 대해서 좀더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통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정비되면서부터, 고려조적인 불교사회가 儒敎사회로 대체되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15세기 말까지도 당시의 사회는, 불교를 그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개국공신들이 주축으로 한, 새로운 지배 세력인 신흥 사대부가,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솔선하여 영도해 나가는 과도기적 시대였다.

이러한 과도기적 시대였으므로, 임금도 정사(政事)에 나와서는 억불책(抑佛策)을 강조하지만 내정(內庭)에 돌아가서는 내불당(內佛堂)이 기다리는 형편이었고, 대신들도 조정에서는 억불론(排佛論)을 준렬하게 논하지만, 자신의 婦女子들은 寺院을 출입하면서, 불교적인 儀式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도 광평대군과 평원대군 2명의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게되자, 불교를 숭상하기도 하여, 한때는 억불정책(抑佛政策)이 누그러지는 경향도 있었다.

유교가 일반화되기까지는 16세기 말 이후에 가서야, 완전 정착된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탄핵은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계속해서 높은 대우를 해온데 대해,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문종대에 들어서자, 불교숭상을 구실로 이를 배척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해 두어야 할 것이다.

 

  위사진은 심덕부의 의뢰로 제작된 삼존불로 조선시대 불상중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심덕부는 개국공신으로 죄의정을 지낸 세종대왕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부친인 심온으로

  당시 억불정책하 불상을 제작할수 있었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지위가 아니면 제작할수 없

  던 것으로 남휘가 제작한 것도 이와 같은 불상이었을 것이다. 2008.9.8 조선일보 기사  

 

의산군 南暉의 별세

 

1454년(단종2년) 11월19일 돌아가시니, 단종은 2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베50필, 쌀과 콩 70석, 종이 200권(券)을 하사 하면서, 시호(諡號)를 “소간(昭簡)”이라 하였다.

이는 용의(容儀)가 바르고, 아름답다 하여 “소(昭)”라 하고, 공경하여 선(善)을 행한다 하여 “간(簡)”이라 이름 하였다.

시호는 종친과 문, 무관 중에서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내렸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이름난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 절개를 지킨 충신 등은 정2품이 못되어도 시호를 주었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家門이나 後孫들로서는 가장 영예스런 표창으로 존중되어, 족보나 묘비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호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예조에 보내면, 예조에서 이를 심의한 후 홍문관에 보낸다.

홍문관에서는 文,忠,貞,敬,武 등 고대로 중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120자 이내에서 생전의 行蹟에 알맞은 두 글자를 조합한 후 “公”자를 붙혀서 내리게 된다.

문, 무관들은 文, 忠 자가 든 시호를 선호하는 경향이나, 공의“昭簡”이란 시호는 왕실과의 외척으로서 평소 그의 인품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공의 묘소는 최초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장서리 능곡에 장사 하였다.

그러나 직계 후손들은 경남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일대에 살다보니, 해마다 원거리에 묘사(墓祀)나 벌초 등에 경비가 많이 소요되었고, 더구나 공주의 묘역은 3차례나 도굴을 당하는 등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1974년 봄에 오랫동안 숙원사업이던 이장 문제를 파종회 일을 맡아오던 남종희(남종희)유사와 당시 통일 주체 대의원 이었던 남보희가 주최가 되어 당시 석물 그대로 구산리 강태골 현 위치에 이장 해 와 쌍분으로 안치하였다.

당시 정선공주 묘터는 깊이 파서 숯과 석회로 채워져 있었고 여러 차례 도굴되고 난 이후라 특별한 유물은 없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76년에 고려 말 길재의 후손인 길준섭과 국무총리를 지낸 방손 남덕우의 자문을 받아 입구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아울러 준공식을 성대히 치렀는데,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종회운영을 유사체제에서 회장 체제로 하기로 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000를 선출하였다.

1997년 1월 파종회 회장 남상수(南相洙)씨가 주관하여 경남 향토 문화재 제236호로 공인받아 문화재 관리 예산을 지원 받아 왔다.

209년에는 1억 5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대대적인 묘역 정화 공사를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강태골에 있는 묘소 

* 편집자 註

의산군 묘비에는 성록대부(成祿大夫), 정선공주 묘비에는 왕녀(王女)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 3년 이전 고려 말에 불리워 왔던 호칭을 그대로 쓴 것이나, 이후로는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있는 그대로 <보국 숭록 대부 의산군>과 <정선공주>라고 하여아 할 것이다.

 

* 참고 자료

조선왕조 실록(남휘 검색어), 다음 카페 신자승 검색. 계유보

* 본문은 필자가 1997.12.2일 종중에 유인물로 여러차례 배포한 바 있으나, 한계가 있었고, 남상수 카페 운영자(겸 구산 향친회 총무)의 도움으로 다시수정 보완하여 2009.11.15 카페에 다시 싣는다.

        아름다운 만추의 계절에 해운대에서 남인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