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지역 입향성씨-<의령남씨>-남재의 손자로 좌의정을 지낸 충간공 남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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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남씨>
의령남씨는 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이다. 의령남씨(宜寧南氏)는 755년(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 풍랑을 만나 신라에 표류했던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신라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덕왕이 김충에게 남씨를 사성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리자, 김충은 남민(南敏)으로 개명하였다.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의 둘째 아들 남군보(南君甫)가 의령(宜寧)에 본관을 둔 의령남씨의 시조이다. 남씨의 본관은 50본 이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민의 세 아들이 시조가 된 영양(英陽)·의령·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은 정확하지 않다. 현재는 영양·의령·고성 3본 역시 합본되었다.
<입향경위> 의령남씨 중 진천군에 입향한 인물과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토성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두드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묘소와 신도비가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안능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0여 년 전에 의령남씨가 진천군에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산지(常山誌)』의 능묘조에 남지 묘소가 보이고, 충신에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이 기록되어 있다. 남지는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손자로, 17세에 벼슬에 올라 1449년(세종 31) 우의정을 거쳐 1451년(문종 1)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병으로 화를 피하고, 1489년(성종 20) 손자 남기(南祈)의 상소로 시호를 받았다. 남연년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의령남씨는 103가구 310명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안능마을[윗배티]에 대성을 이루며 세거(世居)하고 있다. 남연년의 묘가 있는 백곡면 명암리 명암마을 60여 가구 가운데에도 의령남씨와 강릉김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유적> 충간공 남지 묘소 및 신도비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 18-1번지에 있다. 1988년 9월 30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사다리꼴 평면이다. 묘소 입구에는 8세손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충장공 남연년은 청주 표충사에 배향되었고, 묘소 앞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유고를 모아 편찬한 남충장공시고판목(南忠壯公詩稿板木)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에는 충신문이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남지의 묘소 및 묘비.신도비> 남지(南智)[?~?]의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지숙(智叔)이다. 세종~단종 대의 문신으로,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좌의정으로 있을 때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문종으로부터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풍질로 낙향하였다가 병사하였다. 남지가 죽은 뒤인 1489년(성종 20) 손자 남기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의성군에 봉해졌다.
진천읍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청주 방향으로 가다 문백면에서 양천산(凉泉山) 쪽으로 좌회전하거나, 군도 3호선을 따라 청주 방향이나 증평나들목 쪽으로 직진하다가 평산리에서 우회전하여 양천산 쪽으로 가면 산자락 끝에 충간공 남지 묘소 및 신도비가 있다.
충간공 남지의 묘소는 조선 전기에 조성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동창이 밝았느냐’로 이름난 조선 후기 문신인 8세손 남구만(南九萬)이 지었으며, 신도비는 1713년(숙종 39)에 세워졌다. 묘소의 비석은 1732년(영조 8)에 다시 세웠다.
묘소는 사다리꼴의 대형 분묘로, 봉분의 크기는 760×665×300㎝이며 남동향이다. 봉분의 아래쪽에 돌로 테를 두른 점이 특이하다. 묘소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1기가 있고, 오른쪽으로 비석, 장명등 1기, 문인석 한 쌍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높이 214㎝, 폭 82㎝, 두께 42㎝이며, 묘소 아래 150m 지점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좌의정충간공남지묘(左議政忠簡公南智墓)’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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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남씨 송원공파(추풍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