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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오성(南五星)장군-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 12세

작성자남원우25세손|작성시간12.12.14|조회수692 목록 댓글 0

 

오래전 기사입니다. 관심이 있어 글을 올려봅니다.

 

확인결과 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12세손 남오성 장군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남오성 장군의 관한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의 의령 선조역사의 충경공 충간공 간성성공파 메뉴에 있습니다.  

 

 

 

 

Re: [대전일보]3백년전 모습 그대로| 30大 국제뉴스
미르 | 조회 34 |추천 0 | 2003.01.0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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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10일 오전 10시쯤 태안군 태안읍 삭선리 금굴산 의령남씨 선산에서 분묘이장 도중 3백여년 동안 썩지않고 본디 형상이 그대로 보존된 완벽한 미라가 발견됐다.
태안폐기물종합처리장 진입로 공사과정에서 발견된 이 미라는 발견당시 피부가 살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눈동자와 치아, 손톱, 수염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으나 발굴후 햇빛을 받자 피부가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미라의 주인공은 조선시대인 1643년(인조21년)에 태어나 1676년(숙종 2년) 무과급제후 1712년(숙종 38년) 3월16일에 사망한 3도통제사를 지낸 남오성(南五星)장군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남장군의 8대손인 남종일씨(73·서울 관악구 신림동)가 가지고 온 족보와 비문에 새겨진 문구와도 일치돼 신빙성을 뒷받침 하고 있다.
키 1백90㎝정도의 미라는 두께 12㎝, 길이 2@의 육송관에 중국산으로 보이는 비단 등으로 50여겹 쌓여 있었으며 외관과 내관 등 두개의 관을 사용했고 굴껍질을 이용해 만든 석회석이 2@가량 덮혀 있었으며 남장군의 유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태안장의사 최모씨는 "장의사 13년동안 이런일은 처음"이라면서 "두꺼운 관을 이중으로 사용하고 그 위에 석회석으로 덮혀 흙과 공기 등이 차단된 밀폐 공간이라 썩지 않은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남장군의 묘는 부인 성씨와 함께 나란히 합장돼 있었으나 부인의 유골은 거의 없어진 상태 였으며 후손들은 남장군의 유해를 이날 화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鄭明泳 기자>

2002/10/11 09:27

 

 

 

 

 

 

 

 

 

 

 

 

 

 

 

이미지출처 : 태안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남오성 장군묘 출토유물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오마이뉴스 | 신문웅 | 입력 2002.10.30 08:16

 

 

300여년이 지났으나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았던 남오성(南五星. 1643-1712)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이종철)에 기증됐다.

30일 남 장군 후손인 남정일(南廷日.72)씨에 따르면 지난달 10일 태안읍 삭선리 금굴산 태안군 환경센터 매립시설 진입로 공사를 위한 이장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수의와 염습 용품, 묘비 등 약 40점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남씨에 따르면 남오성 장군은 조선개국 1등공신인 남재(南在)의 9세손인 남오성은 5형제 중 남유성(南有星)을 비롯한 세 형이 문과에 급제한 가운데 자신은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까지 오른 인물로 발견 당시 300여년이 지났음에도 시신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채 발견됐다.

이번에 기증된 출토 복식 대부분은 사(紗), 단(緞), 능(綾) 등의 다양한 직물로 구성돼 있으며 여기에는 모란문(牧丹文), 포도문(葡萄文), 운문(雲文) 등의 무늬가 관찰되고 있어 당시 복식 문화를 고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전하고 있는 가운데 박물관측은 이들 유물을 보존처리 하게 된다.

 

 

 

조선시대 키(신장)....삼도수군통제사 남오성(南五星.1643-1712) 키 190cm 회곽묘 발견

hyun(gimh****) | 2010-06-19 12:16 | 조회 402 | 출처: 본인작성

 


국립민속박물관, 남오성 묘 출토복식 정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002년 10월10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 삭선2리 소재 의령남씨(宜寧南氏) 공동묘역에서 태안군 환경센터매립시설 진입로 공사를 앞두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자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종2품)를 역임한 남오성(南五星.1643-1712) 묘가 이장(移葬)을 위해 약 300년 만에 속살을 드러냈다.

그 결과 이 분묘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가 묘제인 회곽묘(灰槨墓)임이 드러났다. 땅을 파 묘광(墓壙)을 만들고, 회(灰)로 덧널(槨)을 만든 다음 그 안에는 시신을 안치한 목관(木棺)을 넣었다.

조선왕조는 이미 개국과 더불어 왕을 필두로 사대부 묘는 이러한 회곽묘를 도입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 태종 8년 7월9일자 기사에는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 능실을 회곽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이 기사에는 회곽묘를 쓰는 이유로 "석회는 모래를 얻으면 단단해지고 흙을 얻으면 들러 붙어 여러 해가 되면 굳어져 전석(塼石. 벽돌)이 되어 개미와 도적이 모두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도굴이라든가 곤충 등에 의해 시신이 손상됨을 막자는 취지에서 회곽묘를 고집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 요즘 발굴현장에서 이 같은 회곽묘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사람 손만으로 회곽묘를 열 수는 없다. 굴착기를 동원해 깨뜨려야만 한다.

회곽묘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워낙 밀폐성이 강해 매장 당시 모습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때에 따라서 시신조차 미라 상태로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남오성 묘는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염습 풍속과 그 골자가 거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각종 염습의가 출토됐다. 미라 상태인 남오성 시신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키가 190㎝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거 최희섭이 196cm라고 하니, 미라가 실제보다 줄어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남오성의 살아 생전 모습은 최희섭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이 남오성 시신은 출토 당시 눈동자와 치아, 수염, 손ㆍ발톱, 성기 등은 물론 피부가 살색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나 후손들에 의해 곧바로 화장됐다. 그러나 남오성은 그의 시신을 장착했던 많은 복식유물을 남기고 다시 산화(散化)했다.

이들 복식유물은 칠을 한 목관과 칠성판(七星板) 등과 함께 곧바로 국립민속박물관에 일괄 기증됐다. 복식은 단령 3건ㆍ대창의 4건ㆍ중치막 8건ㆍ소창의 15건ㆍ저고리 1건ㆍ바지 3건ㆍ허리띠 2건ㆍ관내 배접용 직물 1건ㆍ염포 1건ㆍ지요 1건ㆍ천금 1건ㆍ이불 2건ㆍ베개 1건ㆍ낭(주머니) 1건ㆍ악수 1건ㆍ멱목 1건ㆍ망건 1건ㆍ사모 1건ㆍ신발 1건의 모두 50건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출토복식에 대해 박물관은 2003년 8월 이후 지난해 10월까지 보존처리를 실시했다. 박물관에 최근 펴낸 유물보존총서Ⅰ `남오성 묘 출토복식'은 이들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 과정과 유물의 조사 연구성과를 총괄 정리하고 있다.

이번 조사성과 중 복식 직물에 대한 심연옥 교수의 글이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남오성 묘 출토복식은 대마포 1점을 제외하는 모두 견직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면직물과 모직물, 저마포는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 복식에서는 모두 34종류에 달하는 문양이 확인됐다. 구름 무늬를 형상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연꽃무늬, 석류꽃 무늬, 포도다람쥐 무늬 등이 있다.

 

 


민속박물관 보고서 ""남오성 묘 출토복식"" 출간

세계일보 | 입력 2005.01.16 05:08

 

300년 전 사대부 복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연구자료가 출간됐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최근 발간한 ‘남오성 묘 출토복식’(유물보존총서1) 보고서가 그것. 민속박물관은 2002년 충남 태안의 의령 남씨 묘역 이장 과정 중 발견돼 기증받은 삼도통제사를 지낸 남오성(1643〜1712) 장군 묘 출토 복식을 2년간 보존처리 및 유물의 조사연구를 실시했는데, 보고서에는 복식 유물의 수습, 남오성의 생애, 보존처리 등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특히 복식사, 직물사 논고와 개개 복식 유물 실측도 등이 담겨 조선시대 복식 연구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남오성 장군 무덤은 이장 당시 미라가 발森?세간의 관심을 끌었는데, 관내에서는 원형이 잘 보존된 소창, 저고리, 바지, 망건 등 복식류와 목관 1건, 칠성판 1건, 석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복식 유물은 형태는 잘 유지하고 있었으나, 색상은 갈색으로 변색된 상태였다. 복식은 연화만초문, 석류화문 등 풍부한 문양이 사용돼 있었다.

정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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