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비윤씨(廢妃尹氏)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계비로 1479년(성종 10년) 폐위 되었다. 제10대 왕 연산군의 친모이며 아들 연산군이 즉위 후에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였으나 중종반정 이후 추탈되었다. 능호는 '회묘(懷墓)'이다. 1455년 7월 24일~1482년 9월 18일, 향년 27세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고령 신씨의 딸이자 4남 1녀 중 장녀이다. 고려시대 명장 윤관 장군의 직계 후손인 함안 윤씨(咸安尹氏)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윤씨는 윤관의 장남의 후손인 함안 윤씨이며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 다른 비빈들은 윤관의 4남의 후손인 파평 윤씨이다. 외가 쪽으로는 친정 어머니의 친사촌 오빠가 신숙주여서 윤씨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중궁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몸이 약하고, 혼인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첫 후궁으로 간택돼 입궁하여 숙의로 책봉되었다.
1년 후 중전이 승하하고, 그로부터 공혜왕후의 3년상이 끝난 2년 후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였다. 당시 숙의 신분이었던 윤씨를 포함해서 소용 신분이었던 숙용 정씨와 숙의 엄씨 등 총 4명의 후궁들이 있었는데 결국 왕에게 제일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고 유일하게 임신 중이었던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또한 어렵게 자라 소박한 차림과 성격에다 아버지 윤기견이 일찍 죽어 원경왕후의 경우처럼 외척이 발호할 염려도 없고 무엇보다 당시 성종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태아가 아들이라면 중전의 몸에서 적장자를 얻으려는 의도가 겹쳐 면접에서 높은 점수도 얻었다. 윤씨의 집안은 매우 쇠락해서 길거리의 아이들과 동네 아낙네들은 윤씨가 매우 가난하여 반포를 짜서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마침내 입궁하니 팔자가 좋아진 것이 어찌 우연이겠냐고 말하였다고 한다. 보시다시피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이 집현전 학자 출신임에도 일찍 사망하여 가장을 잃다보니 이후 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왕의 계비가 된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훗날의 연산군이다. 전술했듯 연산군은 왕의 적장자였으므로 자연스레 원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중전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윤씨는 남편 성종과의 불화가 발생했다. 1477년(성종 8)에는 왕이 중전의 방에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이 난다. 격분한 성종은 중전 윤씨를 폐위하고자 했다. 이 때는 폐위하여 빈으로 삼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간곡한 반대와 부탁으로 철회하였다. 원자가 있는데 그 친모인 중전의 폐위는 안된다는 것과 빈으로 강등하면 추후 잘못을 뉘우쳐도 복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다수 신하들의 의견이었다. 결국 성종은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 그리고 삼월과 사비의 주인인 부부인 신씨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린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고 장흥부부인 신씨의 작위를 빼앗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의외로 윤씨는 남편 성종과의 관계가 파탄난 상황에서도, 서로 할건 다했는지 이로부터 2년 뒤인 1479년(성종 10년)에 두번째 적자를 낳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도 남편과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지다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왕은 중전을 폐위시켜 궁궐에서 아예 쫓아내기로 완전히 결심을 굳힌다. 결국 1479년(성종 10년), 성종은 대부분 신하들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전을 끝내 폐위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국모이자 원자의 생모를 어떻게 함부로 폐위하냐는 원칙론에 입각하여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이미 왕의 결심이 확고한데다가 자성대왕대비 윤씨부터 인수왕대비 한씨까지 윤씨의 폐위에 적극 찬동(찬성)한터라 소용이 없었다.
폐위 전날 성종은 아직까지 중전이던 윤씨에게 하례를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 이 무렵 둘째 아들을 낳은 윤씨는 성종에게 싸대기를 맞았다며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성종이 이 편지를 보고 제대로 진노하여 자신은 중전을 때린 적도 없는데, 왜 멋대로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냐며 항변하고 윤씨가 멋대로 데리고 나가려던 두 아들을 궁에서 양육케 하고 정식으로 폐위되지 않아 엄연히 중전이었던 윤씨를 사실상 친정으로 내쫒는다. 그렇게 두 아들을 두고 궁에서 쫓겨나 친정살이를 하고 있던 윤씨는 그 날로 폐위되었고, 궁에 두고 온 젖먹이 차남까지 백일도 안 되어 갑자기 사망했다.
이처럼 윤씨를 폐위시키려는 성종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했지만 비단 성종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 할머니 자성대왕대비까지 나서서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왕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폐비의 아들인 원자가 왕위에 오를 텐데, 그 원자의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니 신하들은 한뜻으로 그냥 왕이 끝까지 참고 살길 바랐다.
그리고 후계 문제도 있다. 죄를 저질러야 폐위당하는 만큼 폐비가 되었다는 것은 죄인이라는건데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자식에게도 영향이 간다는게 문제. 즉 이후에 왕으로 즉위하는 왕세자에게도 분명한 약점이 된다. 그나마 왕이 이 문제를 잘 수습했기 망정이지 혹시라도 문제를 잘 수습하는데 실패했다면 폐비 소생의 세자와 제2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 소생의 진성대군(중종)의 대립구도로 갈 수도 있다. 멀리갈것 없이 중종 말기 대윤+세자(인종) VS 소윤+경원대군(명종) 구도가 딱 비슷한데 세자는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생전에 저지른 잘못이 없었지만 자신을 낳고 죽어버려 생모가 없다는 문제점에 기껏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기 전에는 조용했지만 아들을 낳자마자 돌변해버렸고 여기다가 왕도 대윤 수장인 윤임이 아니라 소윤 핵심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총애하며 심지어 세자의 지위를 흔들뻔한 명령을 내리기도 해서 인종의 입지가 약해지기도 했으니 아주 허황된 얘기는 아니다. 당시 인종과 경원대군의 나이차는 연산군과 중종의 나이차보다 많이 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았는데도 이정도다. 즉 웬만하면 한번 맞이한 왕비와 백년해로 해야 후계구도가 꼬일 여지가 줄어든다.
성종이 윤씨에 대해 애정이나 미련은 커녕 그녀를 매우 증오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윤씨가 폐서인이 된 이후 3년 동안 매우 조용히 근신하면서 슬슬 동정론이 나오고, 조정 내에서도 원자의 생모이니 그만 용서해주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하지만 윤씨의 패악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었던 성종은 그녀와 두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은데다, 윤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는데 대신들까지 이리 나오자 상황이 심상치않음을 눈치챘는지 결국 윤씨의 사사를 집행했다. 성종 입장에서는 윤씨가 자신이 죽고 원자가 즉위한 후까지 살아남아 존버에 성공하면 그 성격에 무슨 짓을 할지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성종의 계비인 폐비윤씨 회묘(懷墓) <국가문화유산청>
성종의 계비인 폐비윤씨 회묘(懷墓)
폐위 후 왕은 이세좌를 보내 사약을 내렸고 윤씨는 폐위된지 3년만에 사사(賜死)된다. 아들인 연산군 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다시 복위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懷陵)'이라고 불렀지만, 중종반정 이후 호칭을 되돌렸다. 대신 묘를 부수진 않았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있는 회묘(懷墓).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왕비의 자격을 다시 박탈당하였으나, 반정 세력들이 무덤에는 손을 대지 않아서 연산군에 의하여 왕비의 예로 단장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공개 능역이라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안내자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으니, 이때 시간 맞춰서 고양 서삼릉에 가면 답사해 볼 수 있다. 본래 묘는 양주 망우리에 있었으나, 연산군 2년(1498년)에 경기도 양주 천장산(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교 부속병원 뒷 뜰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25일에 서삼릉 내의 후궁들 묘역인 현재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조선 역사의 인물들 중 한 명이다. 제 명을 재촉한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첫 번째 평, 그리고 과거의 부조리와 왕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라는 두 번째 평으로 나뉜다. 하지만 후자는 야사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불화가 있는 남편과 시댁이 일제히 모함을 한 것이라 쳐도 폐비가 저지른 죄에 대한 서술이 담긴《성종실록》은 비록 사림 출신 사관들의 입김이 강했지만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 때 편찬됐다.
제10대 왕 연산군의 즉위로 친모의 폐비윤씨 사사 사건을 알게 되어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 갑자사화에 관련된 의령남씨 선조
- 남효온(南孝溫)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0세
- 남충세(南忠世)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1세
- 남진(南振) : 충경공 직제학공 목사공파 11세
<출처>
나무위키-폐비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