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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란/내란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작성자남원우 25세|작성시간25.05.28|조회수71 목록 댓글 0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숙종 15)에 원자 정호와 폐비 사건으로 인해 공신, 외척,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고 남인을 재기용한 사건이다.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은 보복성 숙청도 짙었던 환국이었다.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자가 태어나자 그동안 왕권의 안정성을 공신과 외척에 의지했던 숙종은 독자적인 왕권 강화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숙종은 원자 정호(定號) 문제와 인현왕후폐비(廢妃) 문제를 제기하여 조정을 일신하고 원자에게 위협적인 당파·공신·외척·궁중 세력을 일시에 제거했다. 원자란 정궁에서 난 임금의 맏아들로 중전이 적장자를 생산하면 자연스럽게 원자라 불렸다. , 서출 원자정호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였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정국의 논쟁은 인현왕후 의리론과 동궁 보호론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688(숙종 14) 1028일에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가 왕자 이윤(李昀-훗날 경종)을 낳았다. 오랫동안 아들을 얻지 못했던 숙종은 바로 다음 해 1689(숙종 15) 110일에 원자(元子)로 정호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등은 잇따라 원자 정호의 연기를 주장했지만 숙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한편 115일에 유위한(柳緯漢)은 원자 정호에 반대한 김수흥 등을 극력 비판하고, 권대운(權大運) 등의 석방을 요청하기도 했다. 마침내 숙종은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고, 소의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높였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1689(숙종 15) 2월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송나라 철종(哲宗)의 사례를 들어 원자 정호의 연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숙종은 이미 군신 간의 분의(分義)가 정해졌는데도 뒤늦게 불만을 표시한 송시열의 행위에 대해 그 일파의 조직적인 반항으로 간주하여 송시열을 삭탈관작(削奪官爵)했다. 중전인 인현왕후가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로써 서인 명문 출신이고 반면에 장희빈은 중인 출신으로 역관 장현의 딸이니 서인 입장으로썬 당연히 원호를 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인현왕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선왕조 역사상 이 때까지는 서출에게 원호를 정해주는 것은 전례가 없고 왕의 나이도 고작 28~29세라서 얼마든지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즉 기껏 원호를 정해놨더니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왕위 계승 순서가 꼬여서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서인들의 반대는 정치적인 면도 있었지만 적법한 절차와 후대를 위한 측면이라는 현실적인 면에서도 일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장희빈 집안이 '고작' 중인 따위이니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명분이든 현실이든 서인측이 한참 앞서 있었다.

 

  이를 빌미로 숙종은 서인들을 대거 숙청한다.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민정중, 조사석, 이상진, 김익훈, 김만중, 이사명, 여성제, 남구만(전 영의정 당시 판중추부사 소론 거두), 박세채, 윤지완, 남용익(이조판서, 서인중진 형조판서,예조판서 대제학), 유상운, 홍만용, 이익, 윤계, 이익상, 남정중 등 서인의 거두들이나 중진들이 줄줄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떠나거나 파직된다. 언어가 불손하다는 죄목으로 영의정 김수흥은 파직되었고, 김수항도 풍파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삼사(三司)에서는 송시열의 효종에 대한 폄강(貶降), 원자 정호 반대 등을 역심(逆心)으로 거론하며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 민암(閔黯권대재(權大載)도 계속해서 송시열의 처벌을 요청했다. 결국 김수항은 진도에서, 송시열은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숙종실록1563). 여기서 청년 군주 숙종의 강경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송시열과 김수항을 사사한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 - 현종 - 숙종 세 임금의 사부이자 당시 서인 산림의 영수였다. 그리고 김수항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충절을 지킨 그 대사헌 김상헌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신환국 직전 철원에 가 있었던 상황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어 경신환국 기간에 급하게 서울로 돌아왔던 사람이었다.

 

  숙종은 "윤증을 처음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했던 이전의 지시를 환수하고,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각각 삼정승으로, 목창명(睦昌明)을 승지로 임명하는 등 남인을 대거 등용했다. 그리고 윤휴(尹鑴유혁연(柳赫然허목(許穆) 등 남인에 대한 명예 회복과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 등 소론에 대한 포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남인의 마지막 집권기였다. 반면에 보사공신(保社功臣),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관련자 김익훈, 박빈, 남두북(南斗北), 남후(南珝)와 김만중(金萬重) 등을 신문하고 처벌했다. 더불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키고 318일에 위패(位牌)를 묻어 기사환국을 일단락 지었다(숙종실록15318).

 

  그런데 421일에 숙종은 갑자기 인현왕후의 폐출 문제를 거론했고, 또한 장씨(張氏)가 숙원(淑媛)이 되었을 때, 인현왕후가 투기(妬忌)한 사실을 공개했다(숙종실록15421). 그리고 귀인김씨(貴人金氏)가 김수항, 숙안공주(淑安公主)의 아들 홍치상(洪致祥)과 결탁해 왕의 동정을 엿보고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으로 간주했다. 홍치상이 장렬왕후(莊烈王后)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조사석(趙師錫)은 장씨 친정의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사석이 장씨의 외가와 친밀했고, 장씨가 숙원으로 승격된 다음해에 우의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사명은 홍치상과 결탁해 조사석과 동평군(東平君)이항(李杭)을 감시했다. 이를 통해 조사석과 동평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실을 알아차린 이사명은 숙종의 밀지(密旨)를 얻어 내려는 계획으로 장희재(張希載)와 결탁하기도 했다.

 

  숙종이 423일에 인현왕후를 폐출(廢黜)시키는 전교를 내리자 대신들은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했으나 숙종의 폐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425일에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세화 등 86명이 상소를 올려 인현왕후 폐출을 강력히 비판하자 숙종은 친국(親鞫)을 밤새도록 진행했다. 이때 박태보는 모진 형벌을 당하다가 귀양길에 사망했고 오두인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52일 인현왕후는 폐서인(廢庶人)되어 안국방(安國坊)에 있는 친정으로 보내고, 513일 희빈장씨를 왕비(王妃)로 삼아 고묘(告廟)함으로써 기사환국은 마무리되었다.

 

 

기로연회도(耆老宴會圖) 일부 1690(숙종 16)<국립중앙박물관>

남인세력이 재집권을 자축하는 연회, 좌측-이옥, 목임일, 이관징, 목내선, 권대운, 오정위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소론 거두 남구만(南九萬)

 

 

 

 

▲ 기시환국(己巳換局)과 관련 된 의령남씨 선조

 

- 남두북(南斗北) :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4, 경신환국, 서인지지

- 남후(南珝) :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5세 서인지지

- 남구만(南九萬) : 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15, 전영의정,판중추부사,소론거두

- 남용익(南龍翼)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6, 서인의 중진

- 남정중(南正重)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7, 서인

 

 

 

 

 

 


<참고문헌>

의령남씨족보

나무위키-기사환국

위키실록사전-기사환국(집필자:이상식)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은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이희환, 『조선 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원, 1995.

정석종,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연구』, 일조각, 1983.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 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학』2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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