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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란/내란

1655년(효종 6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작성자남원우 25세|작성시간25.05.29|조회수103 목록 댓글 0

 

▲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 당시 어휘 '통신''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는 1607(선조 40)부터 1811(순조 11)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들을 가리키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파견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대부터 '통신사' 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으로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사'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후대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당대의 공식 명칭은 그냥 통신사(通信使), 조선시대에 '조선통신사'라는 호칭을 조선측이 스스로 쓴 적은 전혀 없었다. 조선시대에 파견된 통신사라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후대에 '조선'이라는 말이 앞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면서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에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

 

 이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

 

 

통신사의 여정<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는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뒤 사행을 떠나고,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여 국왕에게 복명함으로써 사행을 마무리한다. 육로로 가는 중국의 사행길과 달리 일본의 사행길은 바다를 건너가기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국가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함께 짊어지고 다녀와야 했다. 따라서 일본 사행은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200년간 새긴 걸음을 조금씩 평화와 우호의 길로 바꾸어 갔다.

 

  통신사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거리만 왕복 4,000km에 달하는데다 일정에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껴있으면 시간이 더 걸렸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부산까지 가는 도중에 충주, 안동, 경주 등을 거치며 전별연(餞別宴)을 받았고 격군(格軍), 기수(旗手), 노자(奴子) 등 사행에 필요한 인원을 합류시켰다. 부산에 도착해도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길일(吉日)을 정해 출발하였으며 또한 무사히 갔다오길 바라며 부산 영가대(永嘉臺)에서 용왕에게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일본까지 타고 갈 배는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이 기선 3척과 복선 3, 6척을 제작했으며 삼사(三使)를 구성하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이 각각 기선 1척씩을 나눠 타고 복선 3척에는 짐을 실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날씨와 바다가 도와줘야 출항이 가능했다.

 

  부산을 떠날 때는 대마도주가 보내온 배를 따라 갔는데 풍향에 따라 대마도의 좌수포(佐須浦, 사스우라) 또는 악포(鰐浦, 와니우라)에 입항하였다. 그 후 바람이 잘 불어주기를 기다렸다가 대마도 해안을 시계 방향으로 따라 돌면서 내려가 최종적으로 대마도주가 있는 부중포(府中浦,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영접을 받았다. 이때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통신사가 대마도에 온 시점부터 에도로의 여정, 쇼군 알현,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통신사 일행과 함께 하면서 안내를 맡았다. 그 후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키섬,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 내해로 진입하는데 여기서부터 지나가는 지역의 번주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로를 따라 오사카의 정포(淀浦, 요도우라)까지 가 배를 남겨두고 육로로 교토로 간 후 에도까지의 여정을 이어나갔다. 교토부터는 막부가 만든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특별한 길로 행차하였으며 에도에 도착하면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에서 머물렀다.

 

 

통신사선의 대마도(쓰시마) 입항그림(통신사 가이드북) <서울역사박물관>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항해 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돛과 노를 썼으니 당연하지만 파도가 높거나 역풍이 부는 날에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행록을 보면 몇 날 며칠 동안 같은 마을에 머무니 답답하다는 구절이 많이 보이며, 이 정도면 갈 만하지 않느냐는 통신사 측과 충분히 위험하니 내일 떠나자는 대마도 측의 언쟁도 적잖게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고 도중에 왜구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 항해 도중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

 

에도성에서의 통신사 행렬과 국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_1655

종이에 금박채색, 센뉴지_교토시 지정문화재 <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는 길일을 정하여 방문 일정을 통보하는데 그때까지 통신사는 숙소에 머물며 대기하였다. 일정이 정해지면 통신사는 국서와 예물 리스트를 가지고 에도 성에 입성하여 각지에서 온 다이묘와 신하들이 도열한 혼마루의 연회장에 가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그 후 쇼군은 통신사와 면담하면서 국서를 확인하고 조선에서 가져온 예물을 살펴본 다음 통신사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일정이 끝난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를 받을 때까지 에도에서 기다리며 다이묘나 로주들과 어울리다 답서와 조선으로 가지고 갈 예물이 나오면 그간 어울렸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마도주와 함께 귀로에 올랐다. 그 후 한양에 도착해 임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이 끝났다. 보통은 이런 일정이지만 1636년의 4대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닛코 동조궁에 처음 방문하였고 1643, 1655년에 파견된 5, 6대 통신사들은 참배까지 하고 돌아갔다.

 

 

에도성에서의 통신사 행렬과 국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_1655

종이에 금박채색, 센뉴즈_교토시 지정문화재 <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의 총 책임자인 정사(正使),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副使),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고 한편으로 통신사의 행렬을 모두 기록한 후 조정에 보고해야 하는 종사관(從事官)이 삼사(三使)라고 하여 전체 사절단의 대표들이었으며, 그 외에 일본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당상역관(堂上譯官) 및 역관, 통사(通事), 일본측과 문서를 주고 받으며 글을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문서를 베껴 쓰는 사자관(寫字官), 축문을 읽는 독축관(讀祝官), 문서와 기록 등을 담당하는 서기(書記),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醫員),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는 화원(畵員), 호위를 맡는 군관(軍官)들이 있었다.

 

 마상재(馬上才), 악공들의 지휘자격인 전악(典樂), 악기 연주자인 악공(樂工), 요리 담당인 도척(刀尺), 잔심부름을 맡는 아이들인 소동(小童), 행렬에 깃발을 드는 기수(旗手), 풍악을 담당하는 풍악수(風樂手), 노를 젓거나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격군(格軍) 등은 정해진 수가 없어서, 각 사행마다 총인원은 제각각이었다.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으며, 보통은 400명 대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일본은 통신사 접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예산을 투입했다. 이 문제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기까지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일본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을 정도. 현지 일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통신사들을 배려해서 3끼 음식이 모두 일식이 아닌 퓨전 일식으로 만들어져 체류 기간 동안 사절단 모두에게 제공되었으며[31], 간혹 통신사 측에서 "우리가 알아서 만들어 먹을 테니 음식 재료만 달라" 라고 요청하는 경우 그렇게 하기도 했다

 

 다만 최후의 사행인 1811년에는 규모가 줄어들어 336명이 파견되었는데, 정조 11(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당시 막부의 재정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기를 희망했고(1794), 마찬가지로 살림이 어려웠으나 전례(前禮)를 중시하던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1811) 와서야 승인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이들과의 우호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제대로 전쟁을 걸어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조선은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야겠다. 즉 전쟁을 사전에 미리 방지해야 하며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언제쯤 터질지는 알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탐할 필요가 있었고 전쟁을 걸어오지 않도록 우호적으로 지낼 필요가 있었는데, 통신사는 바로 이를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이 대마도를 넘어 일본 내지에까지 파견하는 유일한 공식 사절단으로서, 일본과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때 쇼군이나 일본의 대신들과 직접 교섭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록 쇼군이 새로 즉위할 때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지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 곧바로 보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1711년 통신사의 경우 왜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줄이기 위해 신묘약조를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밖에는 1회성 사건이기는 했지만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고,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것도 1763년 당시 통신정사였던 조엄의 덕이었다.

조선 통신사가 진행되었던 과정에서 서로 시를 지어주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마상재(馬上才) 같은 공연을 선보였으며, 통신사의 행렬을 그림이나 기행문 등으로 기록하는 등 파생된 문화 교류가 많아 가치가 높다. 한일 양국은 이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하여, 201710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조선국통신사 행렬도(朝鮮國通信使 行列圖) 일부

1636(인조 14) 통신사입강호성도(通信使入江戶城圖)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제 4차 통신사 일행이 일본 에도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조선 통신사행렬도<대영 박물관>

 

 

 

통신사를 본 일본 민중의 생생한 반응이 담긴 통신사 행렬 그림_1748

종이에 채색, 시모노세키시림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의 총 책임자인 정사(正使),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副使),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고 통신사의 행렬을 모두 기록한 후 조정에 보고하는 종사관(從事官) 삼사(三使) 행렬

 

 

 

통신사를 본 일본 민중의 생생한 반응이 담긴 통신사 행렬 그림_1748

종이에 채색시모노세키시림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 국교 재개후의 역대 조선통신사

순서연도정사부사종사관총인원출발
/귀환
목적
및 특징
사행록
초대1607
(선조40)
여우길
(呂祐吉)
경섬
(慶暹)
정호관
(丁好寬)
46716071
~16077
국정탐색
해사록 (경섬)
해사록 (경섬)
21617
(광해군9)
오윤겸
[吳允謙]
박재
(朴梓)
이경직
(李景稷)
42816175
~161711
탐색포로송환
오사카 전투 직후 방문
동사상일록 (오윤겸)
동사일기 (박재)
부상록 (이경직)
31624
(인조2)
정립
(鄭岦)
강홍중
(姜弘重)
신계영
(辛啓榮)
300
(역대 최소 인원)
16248
~16253
포로송환
도쿠가와 이에미츠취임
동사록 (강홍중)
41636
(인조14)
임광
(任絖)
김세렴
(金世濂)
황호
(黃帍)
47516368
~163612
국정탐색
중국대책
병자호란 중 방문
병자일본일기 (임광)
해사록 (김세렴)
사상록 (김세렴)
동사록 (황호)
51643
(인조21)
윤순지
(尹順之)
조경
(趙絅)
신유
(申濡)
46216432
~164310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동사록 (조경)
해사록 (신유)
계미동사일기 (미상)

6
1655
(효종6)
조형
(趙珩)
유창
(兪瑒)
남용익
(南龍翼)
48816554
~16562
도쿠가와 이에츠나 취임부상일기 (조형)
부상록 (남용익)
일본기행 (이동로)
71682
(숙종8)
윤지완
(尹趾完)
이언강
(李彦綱)
박경준
(朴慶俊)
47516825
~168211
도쿠가와 츠나요시 취임동사일록 (김지남)
동사록 (홍우재)
81711
(숙종37)
조태억
[趙泰億]
임수간
(任守幹)
이방언
(李邦彦)
500
(역대 최대 규모)
17115
~17123
도쿠가와 이에노부 취임동사록 (조태억)
동사록 (임수간)
동사록 (김현문)
91719
(숙종45)
홍치중
(洪致中)
황선
(黃璿)
이명언
(李明彦)
47917194
~17201
도쿠가와 요시무네 취임해사일록 (홍치중)
해유록 (신유한)
부상기행 (정후교)
부상록 (김흡)

10
1748
(영조24)
홍계희
(洪啓禧)
남태기
(南泰耆)
조명채
(曺命采)
475174711
~17488
도쿠가와 이에시게 취임봉사일본시견문록
(조명채)
수사일록 (홍경해)
일본일기 (미상)
일관요고 (미상)
11763
(영조39)
조엄
[趙曮]
이인배
(李仁培)
김상익
(金相翊)
47217638
~17647
도쿠가와 이에하루 취임해사일기 (조엄)
일관기 (남옥)
사상기 (성대중)
일본록 (성대중)
승사록 (원중거)
화국지 (원중거)
일동장유가 (김인겸)
동사록 (민혜수)
동사일기 (오대령)
계미수사록 (미상)
121811
(순조11)
김이교
[金履喬]
이면구
(李勉求)
없음33618112
~18117
도쿠가와 이에나리취임
대마도에서 이루어짐.
마지막통신사
신미통신일록 (김이교)
도유록 (김선신)
동사록 (유상필)

 

 

 

▲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로  임명 된 의령남씨 선조

 

남용익(南龍翼)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6, 1655(효종 6)

남태기(南泰耆) :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8, 1748(영조 24)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한국측 기록물 일부

 

부상록, 남용익, 2, 국립중앙도서관

견문별록, 남용익, 1, 국립중앙도서관

일관기, 남옥, 4, 국사편찬위원회

일관창수, 남옥, 2, 국립중앙도서관

일관시초, 남옥, 2, 국립중앙도서관

 

동문휘고, 36, 서울대학교 규장각

동명해사록, 김세렴, 2, 국립중앙도서관

동사록, 강홍중, 1, 국립중앙도서관

동사록, 황호, 1, 국립중앙도서관

동사록·해사록, 조경·신유, 1, 국립중앙도서관

동사록, 홍우재, 1, 국립중앙도서관

 

인조 2년 통신사행렬도, 1, 국립중앙도서관

인조 14년 통신사입강호성도, 1, 국립중앙박물관

숙종 37년 통신사행렬도, 타와라 기자에몬, 4, 국사편찬위원회

사로승구도, 이성린, 1, 국립중앙박물관

왜관도, 변박, 1, 국립중앙박물관

국서누선도, 작자미상, 1, 국립중앙박물관

김세렴 등 필적(), 1, 국사편찬위원회

유창 필적(), 1,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나무위키-조선 통신사

조선통신사 기록물

계미동사일기

서울역사박물관

빨간아로하 블로그-박물관 오딧세이 이미지

기유약조

동문휘고

동명해사록

동사록

동사일기

동사일록

변례집요

병자일본일기

일동장유가

첩해신어

통신사등록

통신사로

해행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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