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보(1979년)는 지금 시점에서는 구입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족보 경매를 통해 구입하기에는 최근 본이라 매물 건이 없을 것 같고
유명한 헌 책방 전화번호를 알아서 지속적으로 탐색하다보면
구입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에 비해 노력이 과하게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원양씨 전체의 족보를 편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또한 병부공파 전체의 대동보도 편찬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입니다.
제주(좨주)공파의 족보를 편찬하는 것도
어려운 여건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분파 단위로 인터넷 족보를 편찬하는 것이
최대의 성과인 것 같습니다.
기미보(1979)년 梁氏 대동보이기 때문에
엄청난 성과물이며
편찬에 힘쓴 모든 분들은 존경과 감사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간에 없었던 내용을 편찬한 족보이기 때문에
검증의 과정이 부족했던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나 좨주공파는 분단된 이후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들이
급하게 들고 내려오신 자료만을 근거로 기미보(1979)를 편찬하다 보니
급하게 검증할 수 없이 정리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미보(1979)의 원본을 소장하려는 노력보다는
계보를 바르게 정립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좨주공파가 왜 남원양씨인가
좨주공파가 왜 병부공파인가
기미보(1979) 좨주공파 족보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변대도호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영변대도호부 연산(延山)지역에 사민정책으로 여섯 성씨가 들어왔는데
그중에 하나가 梁氏이며 본은 南原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영변 연산의 양씨는 남원양씨가 분명한 것입니다.
다만 언제 입향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4군6진을 개척하고
사민정책으로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북방으로 이주되었으니
세종대왕 시대에 이주하였을 수도 있고
조선 개국시기에 이주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조선 초기에 병부공파의 계보가 편찬되었지만
조선 개국을 반대한 계보를 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개국을 반대한 계보는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과
조선 초기에 편찬한 족보는 전승되지 않았다는 점과
후대에서 조선 초기에 편찬한 족보를 고증하는 내용들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점들을 고려하면
여러 부분에서 신뢰성에 금이 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한국양씨 최고본인 병인보(1686)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병인보(1686)의 좨주공파 계보는 아래에 첨부하겠습니다.
살펴보시면 남원양씨인 것은 분명한데
어떤 파에 해당하는지는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좨주공파가 등록된 두 번째 족보는 을해보(1755)입니다.
을해보에서도 좨주공파의 선대계보는 누락되었는데
용성군파의 자손인 것처럼 등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에 병부공파 선대의 계보를 확정해 놓고
그 계보에 제외된 자손은 병부공파가 아니라는
확정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성군의 자손인 것처럼 등록하였던 것입니다.
을해보(1755)는 기미보(1979)처럼 梁氏가 합본한 족보인데
족보 편찬과정에 계보 다툼으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 고발하고 족보 전체를 불태워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을해보는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족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부 소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일부가 전해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충격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梁氏가 족보를 합본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백여년이 지난 1979년에 다시 梁氏족보를 합본하였으니
기미보(1979)가 얼마나 대단한 성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단절된 족보이었기 때문에
단절된 계보에서는 여러 검증이 요청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좨주공파의 계보를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기미보(1979)보다는 을해보(1755)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파에서는 족보를 계속해서 편찬했지만
좨주공파는
을해보(1755) 편찬이후
가승보를 제외한 어떠한 족보 편찬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좨주공파는 왜 병부공파인가?
병인보(1686)와 을해보(1755[원본:무진보])
모두 용성군파 종인이 주관하여 편찬한 족보이며
좨주공파는 용성군파의 자손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용성군파 후예로 등록해도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용성군파는 명망 높은 사대부로 성장한 가문이기 때문에
명예 때문에 계보를 수정해야하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0년 중반이후부터 1800년 끝날 때까지
남원양씨 족보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병부공파의 후예를 자처하였습니다.
그 한 예로
임시정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양기탁 선생님 또한
북한 땅에 세거한
남원양씨 병부공파의 자손임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좨주공파 자손 스스로가 스스로를 증명했습니다.
세종대왕이 4군6진을 개척하면서
사민정책으로 영변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태조를 반대하여 북방으로 유배를 간 것이라고
그래서 저는 좨주공파의 역사가 잘 전승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