邏州 梁氏(나주 양씨)의 시조는,
濟州 梁氏(제주 양씨)에서 分籍(분적)한 본관으로
나주 梁氏(양씨) 시조는 조선朝 중종 24년(1528년)
戊子年(무자년) 時(시) 文科(문과) 출신으로
관직은 都事(도사)이었으며, 字(자)는 魯欽(노흠),
諱(휘)는 梁認(양인)이라는 인물이다.
📜 別試(별시) 丙科(병과) 16위에 급제하였다.
거주 지역은,
오늘 날 경상남도 金海(김해)이라고 나온다.
부친의 품계는,
종 9품에 해당되는 從士郞(종사랑)이며,
관직은 箕子殿 參奉(기자전 참봉)에,
임명되는 분으로 諱(휘)는 梁忱(양침)이다.
梁認(양인)은 濟州 梁氏(제주 양씨)의 시조
양을나(良乙那)으로부터 원손(遠孫)이다.
▶ 통계청 인구조사 ◀
이 姓本(성본)의 淵遠(연원)은 물론이고, 계파 및 분파
등은 접할 수 없었고, 국내 통계청 인구조사에 議(의)하면
全國(전국)에 이러하다.
[ 1985년 ] 49가구 240명 [ 2000년 ] 514가구 1,671명
[ 2015년 ] 18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 梁氏(양씨)의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