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양씨 최고보인 병인보(1686)의 병부공파 족보입니다.
한 페이지가 6열이므로 1대에서 6대까지 등재하고
6대는 이후 페이지 첫 열에 등재하고 마지막열에 11대를 등재합니다.
마지막 열에 등재한 11대는 이후 페이지 첫열에 등재합니다.
병부공의 11대 장손 松秀는 判事를 지내셨는데 첫 페이지 6열에 등재하고
이후 止페이지 첫 열에 등재합니다.
止페이지 첫 열에 松秀는 判事를 지내신 것으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병부공 10대 祐 의 아들 友龍, 天龍, 仁龍은 자손을 두지 못하여
페이지가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병인보의 계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병인보(1686)는 제주 남원 최초의 합본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입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1700년대에 병부공의 자손이 편찬한 족보에 의하면
병인보(1686) 이전에 병부공파의 족보가 꾸준하게 편찬되었는데
정해보(1587) 이후부터 병인보(1686) 직전까지 병부공파의 족보에는
병부공 10대 祐 의 아들 友龍은 繕工寺丞을 지내시고 東洛隱士로 以文章嗚世라 등재하였고
이후 본파보 첫 페이지에 祐의 長子이신 諱 友龍은 繕工寺丞을 지내시고 東洛隱士로 以文章嗚世라 등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은
友龍의 장자 思貴의 자손 세거지는 단성지역인데
병인보(1686) 이전에 단성지가 편찬되었는데(1640)
友龍은 병부공 10세 祐 의 아들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대방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 종인들께서는
타 성씨가 우리 성씨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기록한 것이라 하였으나
단성지는 학술적으로 신뢰도가 높고
타 성씨이므로 더욱 객관적이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병부공 후 문양공의 자손들은 정해보(1587)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思貴선조님이 友龍선조님의 손자로 등재하지 않은 족보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1700년대에 병부공의 자손이 편찬한 족보에 의하면
병인보(1686) 편찬 시기에
友龍의 자손 중에 한 종인이 祐 의 초휘가 汴이라 하며 보청에 제출했는데
보청에서 그대로 등재하여 그 이후에 대방군의 계보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병부공 10대 祐 선조님의 불천위 제사를
思貴선조님의 자손이 주관하였다는 사실을
현대 思貴선조님은 병부공의 자손일 수 없다고 믿고 계시는 자손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병부공파입니까?
대방군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