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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유학 양현조 상소문(평창공 17대손)

작성자淳模(大龍)|작성시간22.10.28|조회수71 목록 댓글 0
東萊幼學梁顯祚謹再拜上書于       □ 梁顯祚(양현조 27세)는 平昌公(평창공) 希曾(희증)의 11代孫(대손)   동래 유학 梁顯祚(양현조)는 재배하옵고 삼가 수의사또(어사)전에 글을 올립니다. 생각하옵건대 忠良(충량)을 顯酬(현수)함은 나라의 典範(전범)이요. 숨은 공적을 밝혀 들어냄은 어사또의 직분이라 봅니다. 千年(천년)이 지났어도 철천지 통한으로 小生(소생)은 홀로 외람되게도 죽음을 무릅쓰고 어사또에게 울부짖어 아뢰오니 굽어 살피시고 採納(채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小生(소생)의 8代祖(대조) 故(고)訓導(훈도) 梁朝漢(양조한)은 成宗(성종)때, 大堤學(대제학) 文襄公(문양공) 訥齋先生(눌재선생)의 6代孫(대손)으로, 참혹한 家禍(가화)를 입어 南道(남도)로 流落(유락)하다가 東萊(동래)에 轉入(전입)하여. 好學能文(호학능문)으로 네 고을의 訓導職(훈도직)을 제수받아 古經(고경)을 講明(강명)하고 後進(후진)을 養成(양성)했습니다. 壬辰(임진)癸巳(계사)의 倭亂(왜란)을 당하여 몸을 일으켜 피를 뿜어 맹세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로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면서(이런 위급한 때에) 몸을 숨겨 살기만을 꾀하는 것이 어찌 신하된자의 도리이겠는가, 하물며 文廟(문묘)(공자 이하 여러 선현을 모신 향교사당)를 지킬 사람이 없어 聖域(성역)을 더럽힐 위급한 지경임에랴”하고 그 아들 鴻(홍)과 芹宮(근궁)으로 바로 달러가 從享(종향)된 여러 先賢(선현)의 位牌(위패)를 정결한 땅에 묻고 또 五聖(오성)(공자, 맹자, 증자. 안자, 자사)의 위패를 域中(성중) 靖遠樓(정원루) 에 받들어 모시고.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과 교수 盧蓋邦(노개방)과 동래선비 文德謙(문덕겸)과 함께 左右(좌우)로 호위하여 눈비같이 쏟아지는 탄환과 칼날에도 조금도 두려움없이 꿋꿋이 서 버티다가 아아 하느님도 무심하게, 小生(소생)의 선조께서 먼저 적의 탄환에 맞아 돌아가시자 7대조 鴻(홍)께서는 그 시신을 안고 적의 창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때 宋公(송공)께서 盧公(문공)을 돌아 보시고, "참으로 壯烈(장렬)하도다. 이 사람이여! 하시고 이어 또 그 宋·盧·文(송.노.문) 三賢(삼공)이 차례로 돌아가셨으니 아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신 일입니까? 小生(소생)의 6代祖(대조) 梁敷河(양부하)는 나이 겨우 13세로 뒤따르다가 父祖(부조)가 모두 被害(피해)됨을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의 품에 숨어 엎드렸다가 왜놈에게 붙들려 포로가 되어 잡혀가서 갖은 위협에도 굽히지 않고 19년 후인 庚戌年(경술년) 7월에 귀국하였습니다. 아아. 아비는 忠(충)을 위해 殉死(순사)하시고. 아들은 孝(효)를 위해 돌아가시고, 다시 그 손자는 節槪(절개)로 항거했으니. 三代(삼대)의 이런 忠孝(충효)는 옛사람도 어려운 일인데, 요즘 세상에는 매우 드문 일로서 선조의 이런 同時一體(동시일체)의 節義(절의)가 홀로 褒享(포향)에 빠진 사례가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나라에서 때때로 殉擧(순거)한다 하면서 다만 한 글자 잘못으로, 褒享(포향)의 恩典(은전)을 입지 못했음에 대하여 百年(백년) 후에도 公論(공론)이 사라지지 않아서, 己丑(기축)년에는 부사 權以鎭(권이진)이 殉節圖(순절도)를 세우면서 梁某(양모)의 이름이 빠져 표창되지 않았음은 슬픈 일이다고 기록했습니다. 英祖(영조) 己卯(을묘)년에 崔命相(최명상)은 그 사적을 조사하여 巡相(순상) 閔應沬(민응수)가 狀啓(장계)올려 通訓大夫(통훈대부)戶曹正郞(호조정랑)으로 追贈(추증)되었고, 丙戌(병술)년에는 姜必履(강필리)가 宋公壇(송공단)에 配享(배향)되었으며, 戊辰(무진)년에는 吳翰源(오한원)도 그 靈前(영전)에 壇石(단석)이 세워 묻혔던 공적이 이렇게 밝혀지니. 무릇 사람으로서 누군들 感頌(감송) 않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小生(소생)의 7代祖(대조) 衛(위)가 거룩하게 殉國(순국)하신 節義(절의)는 앞에 말한 宋.盧.文(송.노.문) 三公(삼공)에 뒤질 것이 없는데, 그 三賢(삼현)과 그 부하, 백성까지 다 從祀(종사)를 받는 터에, 저의 7代祖(대조)는 같은 때, 같은 공로를 세운 분으로 아무 享祀(향사)의 恩典(은전)을 입지 못한 일을 道內(도내) 士林(사림)들이 함께 통탄하고 애석하게 여겨, 通文(통문)을 올린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구중궁궐(임금계신곳)이 깊고 멀며, 바다와 산이 가려 못난 자손들이 상감께 직접 아뢰지 못하고 다만 官衙(관아)에만 하소연하였으나 褒賢(포현)의 享祀(향사)를 입지 못하여, 억울한 마음으로 세월만 흘러 이 지경이 되었으니 간을 베고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우러러 묻힌 忠節(충절)을 밝히어 오신 어사또님께 伏乞(복걸)하오니 이 비바람도 울부짖을 저 忠魂(충혼)으로 하여금, 宋忠烈立祠(송충렬입사)충렬사에 配享(배향)하게 해 주신다면 이 어찌 忠節(충절)을 격려 권장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우매한 小生(소생)이 당돌히 어사또 계신 동헌하에 이렇게 아뢰옵니다. 庚寅(1830년) 三月 日(수결) 경인 3월   [내용요악] 후손 양현조는 임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양조한(梁朝漢) 공과 함께 순직한 7대조 양홍(梁鴻) 공의 묻힌 충절을 밝히어 충렬사 본전에 배향토록 암행어사께 청원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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