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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원부 설원기

작성자천산|작성시간14.11.22|조회수89 목록 댓글 0

차원부 설원기

 

차원부는 고려의 충신이었으나 조선으로 출사를 거부하고 은거하면서 차씨문중의 족보를 작성하였는데 차씨 집안의 서얼 자손들이 조선의 창업공신들이었다고 하며 그 내용을 차씨 족보에 등재한 것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 세력이 차원부 일족을 몰살하였다. 태조가 분노하자 이방원 세력은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고 했고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한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를 펴내게 됐다. 설원기는 왕명을 받들어 박팽년이 짓고 당대에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주석을 달고 추모시를 지었다고 한다.

 

차원부 설원기는 1456년 편찬되었으며 그것이 만약 위작이라면 편찬에 참여한 수십여명의 대학자들의 사후이라야 할 것이니 1500년대 중반 이후일 것이다. 1500년대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근 200년간 설원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1700년대 중반에는 일부의 학자들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대가 지나고 나서는 설원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한미한 차씨 집안을 감추기 위해 조선 전 사대부가를 상대로 위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만을 통해서 차원부의 역사를 평가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차원부의 외후손인 관계로 다소의 주관이 개입될 수 있을 것이고 설원기에 등재된 선대조부의 추모시와 관련해서는 감정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차원부의 증시(贈諡)

나라로부터 시호를 내려받으면(贈諡)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불천지위의 자격이 부여되고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가 되거나 유림에서 인정한 향불천위가 되거나 문중에서 인정한 사불천위가 되는 것이 문중의 자랑이었고 불천위 선조가 있어야 종가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호를 내려 받고(贈諡) 불천위 선조를 모시기 위해 후손들은 많은 노력들을 하였다.

증시(贈諡)는 왕의 특별한 교시가 있거나 후손이나 유림에서 증시(贈諡)를 요청하고 왕이 승인할 경우 시호를 받을 사람의 행장을 예조에 제출하고 예조에서 행장을 검토한 뒤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에서 세가지 시호를 정해서 홍문관과 함께 검토하고 이를 이조에 넘기면 이조에서 국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이렇게 확정된 시호은 국왕의 교지로 증시된다.

시호가 결정되면 시호를 내려주는 행사인 선시(宣諡)를 진행하고 집안에서는 시호를 받는 행사인 연시(延諡)를 진행한다. 증시(贈諡)가 대단한 영광이었기 때문에 연시(延諡) 행사도 엄청났던 것 같다.

 

1) 1804년(순조 4년) 승정원 일기의 내용

문절공에 증시된 차원부의 연시(延諡) 행사가 전라도 순천에서 거행 된다고 왕에게 보고한다.

증시를 받으려는 노력은 전대부터 있어왔는데 마침내 증시 되었다. 그리고 서원을 건립하고 불천위로 배향한다.

 

2) 1786년(정조 10년) 일성록의 내용

광주유학자 유급(柳汲)이 고려조 간의대부 차원부에게 시호를 주청하였으나, 단종 때 시호를 하사하는 명을 받기는 하였지만 수백년 동안 거행하지 못 한 일을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아뢰고 왕이 알았다고 수긍하였다.

연이어 1787년(정조 11년) 유학자 차세진과 1788년(정조 12년) 유학자 차석주가 차원부의 증시를 요청하였지만 오래 전의 일이라 상고하여 믿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아뢰고 왕이 수긍하였다.

 

증시(贈諡)와 정려를 내리는 일들은 확실한 공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쉽게 승인되지 않았다. 정조 당대에 삭령의 표절사에 임진왜란 때 4충신을 배향하였지만 4위중 1위는 증시와 증려가 누락되어서 후손이 지속적으로 요청하였지만 매번 거절 당하였다가 그 후손이 절제에서 장원을 하고 왕과 알현할 기회가 주어지고 나서야 자세한 내막을 듣고서 증시와 증려가 이루어졌다.

 

차원부의 증시에 대해서는 단종 때 증시를 허락하였지만 흉흉한 사정으로 증시가 거행되지 못했다고 상언하였지만

오래 되어서 상고하여 믿을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 10여년이 지난 후 정조의 아들 순조가 차원부의 증시를 승인한다.

그래서 10여년 동안 공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3) 정조시대 이전의 차원부에 대한 공적인 기록

선조실록(1601년)에 기축옥사 때 옥사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경상도 생원이 올린 상소가 등재되어 있는데 정종이 차원부에게 제사를 지내 준 것처럼 기축옥사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선조실록은 1609년부터 시작하여 1616년에 편찬을 마쳤다. 차원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정종이 제사를 지내게 해 준 사건에 대해서 선조실록에 별다른 주기를 달지 않았고 동일 내용에 대하여 수정실록도 편찬되었지만 별 다른 언급이 없었다.

 

이는 차원부의 억울함을 풀어준 조선 초기의 사건에 대해서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1600년경에는 차원부의 설원기가 통용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설원기가 위작된 것이라면 그 작성 시기는 언제일까? 분명한 것은 1600년경에 사대부가에서 통용되고 있었으니 그 이전 시대이라야 한다.

 

차원부 설원기는 권문해(1534년~1591년)가 찬한 대동운부군옥(1589년)에 등재되어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권문해가 1589년에 완성하였지만 저자 당대에 간행되지 않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간행되지 않았으며 1800년대에 완간되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대동운부군옥이 1589년에 찬한 원문이 아닐 수는 있지만 1601년 선조실록에 차원부의 역사가 등재되어 있으므로 차원부 설원기는 1589년 이전에 유통되고 있었고 그것을 권문해가 기록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만약 차원부 설원기가 위작된 것이라면 1589년 이전이라야 하고 갑자기 흘러나온 위작은 될 수가 없다. 왕명을 참칭하고 명망 학자의 글을 위작하였다면 그것을 갑자기 읽게 될 경우 충격이 완하될 시간적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위작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을 처음 접한 후손들의 충격은 어떠하였을까? 당대의 명망을 들어낸 수십여명의 학자들이 설원기를 짓고 추모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것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그 후손들은 그냥 그대로 믿었을까? 차원부 설원기는 1456년대에 편찬되었다고 하며 그것이 만약 위작이라면 설원기 참여 저자의 당대에 위작될 수는 없으니 1500년대 이후에 위작되어야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설원기가 위작이라는 주장할 때 위작자는 문장이 우수한 차천로(1556년~1615년) 3부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위작이라면 그 시기는 대략적으로 1500년대 중후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 200년 가까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가 1750년 이후부터 일부 학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을 시작한다. 또한 이 때부터 차원부의 시호를 내려받기 위한 노력이 시도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1800년대 이후에는 그 의심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왜 200년 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증시의 노력의 시도되었고 검토하지 않았던 위작 문제가 제기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임진란과 병자란이 지나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기 위해 충신자손과 공신자손에 대한 후손의 예우가 달라지고 실질적인 군역과 각종의 부역의무도 달라졌기에 시호를 내려받기 위한 그간에 없었던 노력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또한 고려말과 단종조의 충신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추모 문집을 간행하기 시작하면서 학자적 고뇌가 시도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1750년대 이후 이익 같은 학자는 이익은 설원기의 내용은 믿기 어렵지만 차원부의 설원과정은 믿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몇몇 학자들은 설원기 자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설원기에 등재된 글들은 원 저자의 글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차원부의 증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700년대 후반 차원부 설원기에 대한 위작의 검토가 이루어졌고 1804년에 증시가 내려졌다. 그래서 1787년 시호를 거절당하고 1790년대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1791년 규장각에서 발행한 차원부에 대한 기록

정조 즉위년(1776년)에 어필 등을 보관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이후 규장각은 모든 중요한 서적을 찾아내서 보관하였고 규장각 관원들이 실학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런데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고 보니 그 모델이 이미 300년 전의 양성지가 제안한 모델임을 알고서 양성지를 알고자 그가 남긴 글들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정조는 양성지가 남긴 글을 읽어 보고 모든 분야에 탁월한 양성지의 식견에 놀랐고 실용적인 양성지의 제안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였으며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정조는 양성지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정조는 규장각 관원에게 명하여 양성지가 남긴 글을 찾아서 문집(눌재집)을 간행하게 하였는데 알고보니 규장각 관원 전원이 양성지의 외후손들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양성지 외예보라는 족보도 함께 편찬하게 하였다.

 

1776년 규장각이 설치된 이후 전 시대의 다양한 책과 글들이 규장각에 수집이 되었고 규장각 관원들은 뛰어난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정조는 양성지의 글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눌재집이 편찬되었을 때 관원들에게 눌재집을 읽어라는 명까지 내렸다. 이러한 눌재집을 눌재의 외후손들이 규장각에서 편찬하였다.

규장각 관원들이 편찬한 눌재집에 의하면 양성지는 차원부 추모시를 지었다.

 

높고 높은 북두성같이 공의 이름을 흠앙하오

온 세상이 다 현철한 님의 심정을 알고 있소외다.

어쩌자고 서너 너덧 차례의 문초에 겁이나서

공도를 닦지 않고 사사로운 길을 지키었오

 

물론 당대에 유통되었던 설원기의 내용을 보고 잘 못 수집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에는 이미 설원기의 의문이 제기된 시대이었고 그리하여 차원부의 증시도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정조가 동의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눌재집의 간행을 정조가 명하였고 서문도 내려주었고 편찬된 이후에는 관원들에게 읽어라고 훈시까지 한 문집이었다. 그리고 그 문집을 편찬한 규장각 관원들은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이었고 눌재의 외후손들이었다.

 

그리고 눌재집에 의하면 눌재께서 직접 설원기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고 한다. [박팽년이 여러번 왕에게 말씀을 드렸으나 원조의 충직한 실적을 쓰지 않은 것은 다만 자기 집안의 후환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반대하였던 차원부의 증시가 1804년에 이루어졌다.

 

1788년 차원부의 증시(贈諡)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일부는 단종 때 차원부의 증시(贈諡)가 있었던 것을 믿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거행되지 않은 것을 가볍게 승인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눌재집은 1791년에 간행하였다.

눌재집은 정조의 명에 의해 1791년에 간행하였다.

눌재집은 정조의 명에 의해 규장각 관원들이 1791년에 간행하였다.

그리고 1804년 차원부의 증시가 거행되었고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설원기의 공적인 의혹은 제기되지 않았다.

 

차원부 설원기는 1500년 후반부터 1700년 초반까지 사대부들이 믿어왔고 1750년대 이후에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의심히 제기되었고 1790년대 눌재집을 간행하면서 공적인 사실여부를 판단하고 1804년에 증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그렇게 지나왔다고 그 역사가 반드시 사실의 역사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렇게 지나온 역사를 다르게 지나온 역사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차씨집안의 외손으로 차원부 설원기를 믿고 싶고 눌재의 후손으로 규장각에서 눌재집을 어떻게 하여 간행한 것인지 알고 있고 또 그들이 눌재의 외후예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판단하지 않았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규장각의 판단을 존중한다. 


눌재의 21세손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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