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집 5권 고금시
應制書車雲巖原?雪寃錄後
巍巍星斗仰公名。一世皆知哲者情。如何恐怯三四達。不修公道護私程。公自註。朴彭年累次陳達不書原?罔僕之實跡者。只慮私門之後禍而然也。
어명으로 차운암(원부)(應制書 車雲巖原?) 설원록을 지은뒤에 씀(雪寃錄後)
이 문장으로 보면 운암공 차원부 설원록의 발문은 눌재께서 지었다
그리고 발문을 짓고 난 다음 추모시를 쓴 것이다.
(巍巍星斗仰公名) 높고 높은 북두칠성 같이 공의 이름을 흠양하오
(一世皆知哲者情) 온 세상이 다 현철한 님의 심정을 알고 있소외다
(如何恐怯三四達) 어쩌자고 서너 너덧차례의 문초에 겁이나서
(不修公道護私程) 공도를 닦지 않고 사사로운 길을 지키시었소
공이 스스로 주석을 달기를(公自註) 박팽년(朴彭年)이 여러번 왕에게 말씀을 드렸으나(累次陳達) 원부의 충직한 실적을 쓰지 않은 것은(不書原?罔僕之實跡者) 다만 자기집안의 후환을 두려워 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只慮私門之後禍而然也)
눌재집은 정조의 명에 의해 규장각에서 편찬하였다.
정조께서는 눌재집의 서문을 내려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금시에 대한 부분만 언급]
양눌재의 고금시를 내가 일찍이 들었노라
규장각 관료들에게 이르노니 문양의 글을 널리 찾아 가려내어서 고금시 약간 편은 부록에 붙이고 판에 새겨서 책을 만들어 내놓도록 하여라 그리고 서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글은 우선 책의 머리에 적어서 다음 사람들이 본받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눌재의 외손인 규장각 관원의 이름을 등재하였다.
황경원/이복원/서명응/채제공/이휘지/김종수/유원호/오재순/조경/이성원/정민시/서호수/심념조/정지검/서유방/박우원/이병모/김희/김재찬/김면주/서정수/서용보/김동준/정대용/이만수/윤행임/서영보/이곤수/김조순/심상규
그리고 발문은 정조의 명에 의해 이복원이 지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조께서는 문장을 존중하시어 동방의 이름있는 석학의 글은 글자 한자 말 한마디를 훑어 보시지 않은 글이 없으신데, 공이 남긴 문고를 특별하게 판에 새겨서 찍어 내라고 명령하시고 그 책 머리에 손수 서문을 지으시는 총애를 내리셨다./공의 문장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빛나게 남겨두기로 결단하시었다.
눌재집은 개인의 문집이지만 편찬과정에서 충분한 공적인 기능이 작용하였다. 정조께서 차원부의 증시를 세 차례나 거절하셨는데 눌재집에 차원부 추모시를 실었다. 또한 눌재집에 의하면 차원부 설원록의 발문은 눌재께서 지은 것이 된다. 몰라서 올렸다거나 실수로 올렸던 것이 아니다. 규장각 관원인 눌재의 외예중에 차원부의 증시를 거절할 때 규장각이 아닌 연관 기관에 있었던 관료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차원부의 설원록에 대한 시대적 문제를 함께 살펴 보았던 관료들이었다.
김 희 : 사헌부 대사헌/성균관 대사성/이조판서
정대용 : 승정원 승지
오제순 : 홍문관 대제학/이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
유언호 : 우의정
윤행임 : 승정원 승지
김면주 : 승정원 승지
정동준 : 사간원 대사간/승정원 승지
김종수 : 홍문관 대제학/공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이병모 : 이조참판/승정원 승지/예조판서/형조판서
서용보 : 승정원 승지/성균관 대사성/이조참의/관찰사
서유방 : 사헌부 대사헌/관찰사/한성판윤
박우원 : 이조참판/성균관 대사성
차원부의 증시(贈諡)를 1786년, 1787년, 1788년 세 차례 거절하였다.
그러나 증시의 거부가 차원부의 설원 과정이 거짓임을 확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왕명을 참칭하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너무 오래되어서 믿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명에 의해 규장각에서 눌재집을 간행하였다
눌재집을 간행할 때 규장각에 있었던 눌재의 외예들 중에는
차원부 증시를 거부할 때는 관련기관이 있었다.
우선 이 모든 과정에 정조께서 있었다.
눌재집의 서문을 직접 내려주신 정조와 정조께서 믿고 아끼셨던 규장각 관원이 편찬한 눌재집이며 차원부의 설원록을 완전히 믿지 았았던 분들이 편찬한 눌재집이다.
그래서 더 공적인 평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며
1804년 정조의 아들 순조 시대에 차원부 증시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이 반영되었던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