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대룡리
<대룡마을>에는,
(남원양씨 문양공파 대룡리 문중 진성단) 이 있으며, 그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순절하신(양조한 공 손자) 분의 고고한 이야기가 같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양씨 종가집의 우물 맛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고 전해오며, 1619년 39세의 젊은
청년 <양부하 공이> 이곳에 정착 하였으며, 이곳은 그 이후로 한동안 <남원 양씨의 집성촌> 이었다.
<동래(東莱)에 양부하(梁敷河)란 사람>이 있는데,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倭)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태어나 95세가 되었지만 다니면서
지팡이를 짚지 아니하고 술을 마시면서 찌꺼기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신을 말할 적이면 조금씩 일본말을 하여 잠깐 귀머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지역에 태어나서 바다건너 (일본 땅에서) 자라면서,
생사(生死)의 험악한 틈바구니에서 떠돌며 지낸 것이 저절로 기이하고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내가 글자를 몰라 차례를 정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누가 글을 잘하는 분이오?”
하기에, 내가 그의 나이가 많음을 가련하게 여기고 그의 뜻을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서문을 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梁)은 바로 본부(本府)의 양가(良家)이며, 조부(祖父)의 이름은 조한(朝漢)인데 선비로 벼슬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조부의) 아우 양통한(梁通漢)도 제생(諸生)이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 12일, 왜가 부산(釜山)을 함락시키고 15일에 동래(東萊)를
함락시키자 양조한과 양통한은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전사하였다.
지금 송공(宋公)의 비(碑)에 통한은 언급이 되고 그의 조부는 기록되지 않았다.
<양조한>은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 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梁潮漢)은,
임진란 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 사시말(梁潮漢事始末)에 의해 살펴보면, 본래 부곡리(釜谷里)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패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을 가려 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그 아들 양홍(梁鴻)도 동시에 전사하였으며,
그 때 겨우 13세된 손자 부하(敷河)는 시체 밑에 깔려 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부하는 일본으로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보고 일본말을 배워서 그 곳에 살다가,
31세 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어서 이윽고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형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항상 자기 할아버지의 사절한 사실을 감격한 마음으로 평생 말했다.
그는 신장이 8척에 힘이 대단하였으며,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춘 3월과 추 9월에는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을 모아 포식하였는데,
옛일을 늘 비분강개하였으며,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이, 남문비기(南門碑記)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戊申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庚戌)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 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 사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死節功臣)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亂後)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火旺守城錄)≫에도 이름이 보이므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功臣錄券)에 실려 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火旺城)에서 곽재우 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을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양부하>는,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에서, 양조한(梁朝漢)의 손자 양부하(梁敷河, 1580∼1676)는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 왜군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양부하는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에게 헌신하겠다’고 하였다.
일본에 가서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모의해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모의하여 일조하였다.
일본에 끌려간 지 27년만인 1619년(39세)에 모리휘원이 거느리던 조선인 100여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거쳐
동래 감만포로 돌아와, 동래 북면 대룡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에 대룡 마을은 남원 양씨 집성촌이 되었다
(양부하의 행적을 KBS 부산방송국에서 보도하기도 했음).
양씨 종가집(노포동 608-1번지)의 우물 물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1년 농사를 지으면 4촌․6촌 중 한 사람은 장가보낸다는 말이 있는 명당지이다.
지금은 주류도매상으로 양씨가 살고 있지 않다.
대룡 마을(노포동 87-1번지)에는, 현재 「남원양씨 문양공파 대룡리(조한) 진성단(盡城壇)」이 있다.
이 재실에는 남원양씨 17대∼32대의 선조를 모신 진성단으로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올린다.
진성단 위쪽에 「의사남원양공부하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