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의 동이족과 요하의 동이족이 같은 종족일까요?
1) 선진시대 화허족은 산동이 동쪽이라서 산동 사람을 동이족이라 불렀고
2)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나서는 요하가 동쪽이 되어서 요하 사람을 동이족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산동의 동이족이 진한교체기를 거치면서 요하문명권으로 이주해 왔기도 했지만 요하문명이 산동문명에 뒤쳐진 문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하의 동이족 기원이 산동의 동이족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조선이 망하고 고조선 수도권 사람들은 낙랑(樂浪)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은
동이족 중에 고조선 수도권 사람들을 양이(良夷)족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양이(良夷)족의 유예는 세 부류 정도로 분리 되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그래도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며 낙랑(樂浪)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소수맥 유역에 살던 양맥(梁貊)족입니다. 물론 중원 사가들의 역사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양맥(梁貊)의 “梁”은 양이(良夷)의 “良”이 전가된 글이고 맥(貊)족은 통칭으로 쓰일 때는 이(夷)족과 같은 뜻이니 양맥(梁貊)은 梁夷(양이) 또는 良夷(양이)가 된다고 하는 중원 사가들의 견해는 동의합니다.
제주출신의 인문학 거목이신 신용하 교수님은 탐라양씨의 기원을 양맥(梁貊)족에서 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신라 사람들입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3세기에 편찬되었는데 그 때는 아직 신라가 진한지역을 통합하지 못 했던 때이고 3세기에 진한 사람들은 낙랑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이탈한 사람들인데 잔류민을 낙랑 사람이라 하였으니 그들 역시 낙랑 사람들이며 고조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이(良夷)→양이(梁夷)→양맥(梁貊)으로 전가된 것은
중원의 사가들이 동북고민족 발전 과정의 하나로 바라보고 있고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양이(良夷)족 중에 신라 사람들
즉 진한 사람들의 출처는 기원전3~4세기경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천 여리의 땅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나라는 그 지역에 5군(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연나라는 곧 진시황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진시황은 연나라가 설치한 가장 동쪽의 요동군 밖으로 나가서
요동외요(상하장)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는 노역을 시킵니다.
요동외요에 살았던 고조선 사람들은
진나라 고역을 피해 신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동외요는 비어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한나라는 요동외요를 상실하였습니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격파하고 설치한 요동군은 한나라 땅이 되었지만
진시황이 추가 격파한 요동외요는 빈 땅이 되었습니다.
그 때 연나라 장수 위만이 요동군의 고조선 선주민을 이끌고
요동외요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위만조선 사람이 되었고
낙랑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양이(良夷)족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 양씨도 양이족이겠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우리 씨족의 기원을 그리 오래 잡지는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제주도에 사람들이 살았고
대륙과의 교류도 아주 오래전 부터 있었지만
탐라국의 실체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한 때는 5세기 후반입니다.
백제가 탐라를 신속했던 과정이 기록되었습니다.
탐라국의 실체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만 정황으로 보면
5세기 후반 이전에도 탐라국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탐라를 신속하고 백제가 중국 남조왕조와 일본과의 교류를 막았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해군이 탐라에 주둔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탐라국의 실체는
5세기 중반 이전에는 고구려의 신속을 받았던 것을 추정할 수 있고
5세기 후반 이전에는 백제의 신속을 받았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5세기 중반 이전에 탐라에 해군력을 주둔시켰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시기를 고려하면 5세기 초반 광개토 대왕 때 일 것 같습니다.
백제와 가야와 일본이 연합하여 신라를 정벌하자
신라는 고구려에게 원병을 요청하였고
광개토 대왕은 신라를 구원하면서 김해의 금관가야까지 정벌하였습니다.
물론 고구려 해군력이 양맥(梁貊)족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양맥(梁貊)족은 소수맥 유역에 살았기 때문에 해군력에 동원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딱히 근거는 없습니다.
탐라양씨의 족원을 양맥(梁貊)족으로 추정하는 분들이 계서서
추정해 보는 것일 뿐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양맥(梁貊)족은 3세기 까지 고구려 서쪽에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존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에 고구려 서쪽을 위협하는 모용선비족이 등장하면서 양맥족은 위축되었고 모용선비족이 일시적으로 와해된 시기에 양맥족은 거란족에게 격파되어서 거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이 거란족을 격파하고 거란 사람이 되었던 양맥족을 대리고 다시 고구려로 귀환하였습니다. 이들이 고구려 해군력이 되었던 것인지, 그리고 탐라에 주둔하였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탐라양씨의 족원이 양맥(梁貊)족이라면 양맥(梁貊)족이 고구려 해군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해군력이 탐라에 주둔한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라에 주둔한 고구려 해군력이 탐라국 기원의 실체로 보지는 않습니다.
고구려가 탐라에 해군력을 주둔한 이유는
백제의 남방연합을 막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해군력이 탐라에 주둔하기 전의 탐라는
중원남조왕조, 백제, 탐라, 일본과 함께
북방 세력(북조 왕조, 고구려)에 대항하는 하나의 남방 연맹이었고
그래서
남방연맹의 결성시기가 탐라국 건국시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남방연맹의 결성 시기는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때이며
중개자 역할은 가야의 부여인들이었습니다.
모용선비족에게 와해된 요하유역의 부여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새로운 가야야
새로운 일본(왜)이 세워졌고
근초고왕이 이들 세력을 연합하여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탐라 또한 4세기 부여인들의 남하에 의해 형성되었고
백제의 남방연맹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탐라의 삼성 시조의 부인이 일본국 공주인 것도
이러한 연맹선상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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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 작성시간 18.11.21 고려와 대조선의 황실은 모두가 대륙에 있었다
[자료의 근거]
글쓴이 : 慧光 http://cafe.daum.net/chosunsa/1O6C/12
고려황실과 조선황실은 대륙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우리조상들이 대대로 한반도에 살아왔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물론 한반도는 대대로 우리민족의 터전이었지만 근세까지도 대륙은 바로 우리민족...동이족의 땅이었습니다. 조선황실은 현재의 한반도 서울이 아닌 대륙의 서안에 있었습니다....북경과 서안 둘중에 하나였던 것은확실하다고 봅니다. 서울을 여러곳에 두어서 전시에 대비햇다는 것으로 보아서.....남경,서경,동경,중경,북경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