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 자유 게시판

역사의 소중함 (왜 가야의 실체)

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작성시간18.12.12|조회수82 목록 댓글 0

왜 가야의 실체(8월 31일 한배달 강의)


작성자:동방청림

정길선 강의 내용

1. 우리나라에는 가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역사 좀 한다는 사람도 가야를 이야기하면 입을 다문다. 그중에서 좀 안다는 사람들은 신화적인 내용이나 유물ㆍ유적 발굴 보도에 관한 내용으로서 “가야는 약소국으로 단결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다가 신라에 망했다.”는 것 정도를 이야기한다. 이런 내용은 반도가야에 국한해서 볼 때는 어느 정도 맞다. 그러나 이게 가야 전체를 본 것이 아니다.

2. 일본에서는 가야 연구가 매우 많이 되어 있다. 먼저 가야에는 반도가야와 왜가야가 있다. 후지모토 가쓰야가 혼휴, 큐수 등에서 일본이 기원했다고 했으며, 특히 이 부분의 권뤼자인 에가노 나오미는 ‘일본이 흉노에서 나와 요서지방을 거쳐 배로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여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가로 이것이 임나 일본부 설의 핵심 근거이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만주전쟁 등의 명분이다. 즉 옛날의 가야 땅을 찾는다는 ‘고토회복’을 하겠다는 것이며, 그를 위해서 백제의 22담로를 따라 점령했던 게 태평양 전쟁이다.
특히 일본 개화기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시다 쇼인이 이런 ‘고토회복’ 논리의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사카모토 료카, 사이토오 다카모리, 후무자와 유카키(?) 등 개화논리 인물을 키워낸 사람이다.

3. 가야를 일본에서는 BC 1세기, 한국에서는 AD42년에 건국되었다고 다르게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임나의 나는 신라, 사로에서 온 말로 신라와 백제로부터 따지니까 그런데, 일본은 고구려의 기록으로 따져서 부여로부터 본다. ‘부여’란 사실 국명이라기보다 임금의 이름을 ‘단군’에서 ‘부여’로 바꾼 왕의 직함을 말하는 것으로, 임금을 ‘단군’이라 부르던 조선 연방이 깨어지면서 ‘부여’라고 했다. 처음에는 대부여라고 하여 조선을 이었는데, 이것이 여러 소국으로 나뉘면서 막부여(일본인들이 마한이라고 함), 진부여(진한), 서부여, 북부여, 동부여 등이 나타나는데, 반도의 여러 부여 가운데에 ‘임나부여’가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가야가 되었다. 고구려 기록에서는 가야, 신라, 왜를 모두 암나, 즉 임나가야로 본다. 이것을 가지고 일본이 장난을 친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대응할 수 있다.

4. 예를 들어 김수로를 보자. 김수로는 김해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지만 일본에서의 시각은 좀 다르다. 김은 금관가야의 금에서 왔고, ‘수로’는 대족장의 명칭, 즉 직함 이름이다. 당시 한반도에는 300여개의 소국(부족, 종족 개념)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대표들이 모여 대족장을 뽑았으며 그 명칭이 ‘수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로’는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연방체의 대표였으므로 남쪽, 북쪽, 중간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제사(천제)를 지냈는데, 그 제사 유물이 한반도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청동방울, 거울, 검 등이다.

5. 이때 족장이나 대족장의 무덤을 만들 때는 무덤 속에 시체를 넣고 그 시체의 위쪽으로 한 곳에 작은 구명을 뚫어놓았다. 하늘 신과 통하여 언젠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런 흔적은 많은 패총에서 나온다. 따라서 가야를 알기위해서는 패총을 연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없다.

6.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세워지면서 300여개 부족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지속되고, 이를 합치려는 통합전쟁도 일어나게 되자, 가야는 점점 남쪽으로 밀리게 된다. 상고시대 12한국, 81종족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일부(선비, 흉노, 말갈 등)가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본다. 실제로 농경족인 신라의 기마 유물 등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도 이들과 같은 것이 많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신라의 기마유물은 신라의 것이 아니라 가야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기후와 자연조건에 맞추어 살게 되므로 원래 기마 종족이던 가야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농경족이 되고, 바닷가에 와서는 해양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7. 우산국과 탐라국도 가야에 속해 있었다. 독도 문제와 우산국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일본에서는 많은 연구가 되고 자료도 있다. 그러나 그 중 50%는 날조된 것으로 보인다. 종이의 질 등으로 이의 진위를 구별할 수가 있다. 우산국과 탐라국에도 별도로 수로가 있었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우산국과 탐라국을 점령한 후에는 그 칭호가 바뀌어 총독 같은 개념이 되었다. 이 시기는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탐라는 원나라 때였다.

8. 남쪽해안에 온 가야는 소금무역으로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철광성이 많아 고구려, 신라보다 일찍이 철기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사철을 제련하는 거푸집이 전남, 경남에서 발견되는 데서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3,4세기에 가야가 일본을 정벌하러 가고시마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전인 1세기부터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반도의 소국과 같은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이 가야인들과 원래 살고 있던 아이누족과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가 일본인의 원류이며, 이들이 만든 나라가 ‘왜가야’라고 볼 수 있으며, 양자강 이남의 ‘왜’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데, 이 ‘왜’도 해상무역으로 개척된 왜가야라고 볼 수 있다.

9. ‘왜’라는 말이 생긴 것은 중국이다. 중국에서 볼 때 해상무역으로 자기들 앞에 나타난 ‘왜가야’ 사람들이 키도 작고 볼품이 없어 이들을 야만인이라고 비하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 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이런 용어와 관념이 들어왔으므로 김부식이 일본지역을 가야라 하기도 그렇고 하여 중국이 붙인 왜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해상강국 가야는 3세기까지 신라보다 강했고 백제와 대등했다. 이 3~4세기가 가야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이사금을 일본에서는 족장의 우두머리, ‘간’이 태양이니 거서간도 대족장이 되므로 이 둘은 모두 ‘수로’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 즉 정치적 통치자와 제사장을 겸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통치자의 이념으로 쓰이고, 산관은 따로 두게 된다. 이때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6대 태조, 백제 8대 고이, 신라 17대 내물 마립간 때쯤이다.

10. 공개토호태왕 비문에 AD400년경에 신라가 왜의 공격을 받아 광개토대왕에 지원을 요청하고 고구려가 이를 지원하게 됨으로서 백제, 가야, 왜와 고구려 신라의 연합군이 대결을 하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 병사만 5만이라 했으니 병참, 공병(기술병), 정찰병들까지 합치면 각 연합군은 약 20만~30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대병력이 싸울 수 있는 장소가 한반도에는 없다. 그런데 일본의 오카야마 긴끼 평야에서 1915~20년 사이에 엄청난 병장기가 발굴되었으며 그 병기의 연대가 400연대(5세기)로 판명되었으며, 이런 자료들이 한반도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이 연합군이 싸운 전장이 일본, 긴끼 평야라고 본다. 일본에서도 그랬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아혀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이부분 기록을 삭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는 기록을 내가 직접 보았다. 그러나 극비문서이기 때문에 아직은 밝힐 수가 없다.
즉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일본지명, 자기들이 졌다는 내용 등을 석회를 바르거나 쪼아내어 지워버리도록 한 것이다. 그 흔적을 지금도 보면 인위적인 것이 명확하며, 중국인들에 의하면 1915~20년 경에 지워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일본이 훼손했다고 본다.

11. 우리 겨에의 일본 진출을 보면, 가장 먼저 가야가 건너갔고, 백제가 오오사카, 나라 지역으로, 신라는 토호쿠 지역(박물관에 가면 자료가 다 있음), 고구려는 혹카이도(현지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고구려인과 같은 복장을 한 벽화가 있다) 지역으로 건너가 이 4국이 일본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이들이 현지인들과 혼혈이 이루어짐으로써 가야인, 가야인+이이누 혼혈, +삼국인 혼혈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현 일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혈맥이 많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백제가 망할 때 2만의 왜병 지원군이 왔는데, 이들은 주로 후쿠오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증왕의 가야 공격 시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유민으로 봐야 한다. 백제가 이들을 도왔기 때문에 이때 백제를 지원한 것이다.

12. 일본은 독도문제와 관련해서 가야의 우산국읠 최후의 히든카드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가야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자료를 확부 중이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그 뒤의 자료인 이사부, 일본 군부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였다는 것을 일부러 내놓고 있다. 나중에 “그보다 먼저 독도는 우산국인데 우산국과 탐라국이 왜가야의 영토였으니 독도도 원래는 우리 것이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것이다.
우산국은 지증왕 때 병합이 되었다는 기록만 가지고 있으나 일본에는 조작되었을 수도 잇지만 “이때 우산국의 수로가 배를 타고 시네마현으로 도망을 왔으며, 현제도 우산국 수로의 비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야, 우산국이 처음에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우익은 독도뿐 아니라 왜가야와 연결된 임나가야까지를 자기영토라 주장(임나일본부설)하게 될 것이며, 이의 회복을 고토회복이라고 주장하려고 할 것이다.
일본의 우익단체는 ‘일본회의’로서 전국에 수천 개의 조직이 있는데, 그 중 정치인들인 시노요시다까, 이나마 도시오 등을 부추기는 우익 대표적 인물이 계속 독도를 방문하겠다고 신청하는 시모도 마사오다. 그는 다께시마로 성을 바꿀 정도로 독도, 위안부 문제에 집착하고 있으며, 사꾸라이 모코토와 같은 독도, 위안부 관련 젊은 우익선두주자들에게 가야사 등을 가려쳐 논리적으로 탄탄한 바탕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 때처럼 고토회복을 내세우고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다.

13. 가야를 일본에서는 가락이라고 한다. 그들은 일본에 있던 가야를 본토가락, 한반도에 있던 가야를 임나가락이라고 하는데 일본에는 12세기까지 본토가락이 존재했었다. ‘쇼토쿠 황태자가 백제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오 이와 연결되는 가건이다.
허황옥 신화도 일본에서는 남족에서 왔다고 만 했는데 가야지역에서 보면 남족은 일본이므로 일본에서 왔다고 하기 위해 만든 허구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남쪽을 인도라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허씨의 시조라고도 하지만 일본에는 허황옥에 대한 이른 기록이 없다. 따라서 한국의 자료에서 남족에서 온 허 황옥을 진실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은 최고의 노력을 했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14.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일본인을 옷도 제대로 없는 야만인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일본에도 아스카, 헤이안 왕조 등 왕이 있었으며 다라서 말타기와 글공부 등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데, 일본은 오히려 이를 조장해준다. 그래야 우리가 안심하고 있을 것이며, 그대 고토회복을 내세워 논리적으로도 제압하려는 것이다. 우리도 고대 일본에도 최소한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5. 여몽 연합군의 일본 경격도 재미있다.
몽골군은 기마와 사술에는 능한 강한 군대였으나 해전, 해성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부 상귝한 군대도 일본군에 패했다(우리나라에서는 이겼다고 기록). 그것은 그들의 전술이 고구려와 같은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술은 좌측과 같은 전투대형에서 보듯이, 고구려에서는 맨 앞에 국수를 두고 처음에 활을 쏘아 적을 혼란스럽게 한 후에 경기병이 들어가서 유린하여 혼란과 힘을 빼고 난 후에 본진이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섬멸하는 식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이때 궁수가 주로 결혼한 여자들이었는데, 여자는 힘이 떨어지지만 활은 쏠 수 있었으며 하체가 약한 처녀들은 장궁(땅에 닿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좀 약해도 가능, 높이 쏘는 단거리용), 아주머니들은 단궁과 맥궁(애기낳고 나면 다리에 힘이 좋아지므로, 사정거리가 먼 활)을 쏘았는데 가야도 이와 같았다.
왜는 단지 궁수를 여자가 아닌 노인들로 했다. 이는 왜가 가야, 고구려, 백제의 혈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본에게 지지 않으려면 패총 등 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여 제대로 찾아야 한다. 사실 가야는 대족장이 있었지만 300여개 부족의 연맹체로서 국가의 형태는 아니었으므로 ‘4국체제’라는 말은 맞지 않으며, 열국체제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질문>

1. 역사의 연결고리,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가야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해서도 좀 알게 되었고, 일본의 자만심의 뿌리, 우리 양궁 실력의 뿌리 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
2. 당시 인구로 20만의 대군을 형성할 수 있었겠는가?
삼국사기와 고구려실미항록 등에서 국내성의 인구가 90만명이었다니 가능하다고 본다.
3. 광개토대왕비에 가야의 출처가 있으나 연구가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인데, 다음에 다시 토론을 했으면 한다.

스크랩 원문 : 황조전(皇祖殿)

한배달강의 파일을 스크랩한 것인데 정리가 잘 된 것 같아 퍼왔습니다. 가끔 오타가 있거나 그림자료가 삭제된 점은 아쉽네요. 강사는 동경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젊은 학도였는데 역사에 대한 열정과 패기가 대단했습니다. 다만 대륙 조선사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왠지 왜가 가야,신라,백제 와 고구려인들이 섞인자들이라고 보거든요....여라가지 정황으로 볼때 그래요~

출처 다음카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