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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양형식|작성시간19.08.18|조회수121 목록 댓글 0

김주열

金朱烈

요약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11일,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마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의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출생 1943. 10. 7,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사망 1960. 3. 15, 경남 마산시
국적 한국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로 이루어진 평화적 시위대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마산데모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는 남성파출소·북마산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사상자(7명 사망)가 발생했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 되었는데, 4월 11일 그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연 3일에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의 시체를 검시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 도착하여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


출처 다음 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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