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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고향 남원

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양형식|작성시간19.11.18|조회수364 목록 댓글 0

1.대륙조선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는 모택동이 남원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전남일보에 모택동의 선조묘가 남원에 있다는 기록도 찾아내기도 했었다.
한국상고사학회를 이끌었던 율곤 이중재 선생님은 대륙조선의 기초가 되는 삼국시대의 강역이 대륙에 있었음을 반도 이주후 최초로 주장하고 고증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율곤 선생님이 오행(五行)에도 정통하다 하셨는데, 박인수 선생님의 댁에서 잠시 일을 도울적에, 율곤선생님의 강의내용을 모두 녹화해 두신 것이 있어서(당시 강상원박사님의 영상자르기하는 작업을 몇 개월 했었다) 오행부분의 영상을 보았으나, 나름 10년이상 오행과 사주공부를 한 입장에서 보면, 사주실력은 이론가일뿐 실전가로서는 영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사주로 본다면 함양에 계셨던 제산 박재현선생을 당할자가 당대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것이라는 생각이다. 머리가 아둔했던 소치로 10년이상을 공부해도 사주를 잘 모르겠더니만, 제산선생님의 제자가 집필한 물상론을 보고서 비로소 기본적인 문리(文理)라 터졌으니 말이다.

며칠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내용입니다. 모택동이 남원사람이었다는 기록의 근거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내용이기에 우리 카페에 올립니다.

2.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9.7.15
글 쓴 이 Yuji Miyamoto (hyungu89)
등 록 일 2008년 06월 01일 PM 03시 52분

제 목 (687) [잡담] 만약 이 소설의 내용이 '실화' 를 바탕으로 한 것이 맞다면... (정말 "후덜덜~" 이네요...)

박찬두인가 하는 분이 쓰신 소설 내용 중 일부라는데...???
저도 빨리 이 글의 '진위 여부' 를 확인하고 싶어 정말 미치겠군요...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율곤 선생님을 포함 모두가 실존 인물들입니다!)

모택동의 고향
(박찬두)

허허로운 하늘에는 목련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해 팔을 휘젖고 있다.
동안거(冬安居)라도 하듯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던 나무.
저 멀리 기러기 한 무리가 헤엄치듯 날아가는 것을 보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든다.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면 이제 봄이 멀지 않음을 직감한 것일까.
겨울이라지만 제법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자 목련나무 가지 끝에는 일월초순인데도 수줍은 듯 얼굴을 감추고 있는 꽃망울을 터뜨렸다. 예년보다 매우 춥겠다고 기상대는 예보했지만,
엘리뇨 현상 때문에 오히려 더 포근하리라는 것을 목련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식물의 직감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목련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 기공협회(氣功協會)에서 행하는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엘 갔다가 돌아오신
상고사학회(上古史學會) 회장 율곤(律坤) 선생을 뵙기 위해 충정로 자택을 찾았다.

율곤선생은 얼마 전에는 중국에 가서 연변대학 총장을 만나기도 하고,
연변대학 고적연구소 주관 ‘고대사학술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도 하셨다.
그리고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몽고의 인사를 만나 한민족사관(한民族史觀)의 정립을 위해 국내에 사무실을 개관하는 문제를 협의하시기도 하셨다.
특히 만난 몽고인은 몽고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경제인이자 조선족으로서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기공협회에서 강의하시는 것도 사실은 기(氣)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한민족사(韓民族史)에 관한 것도 강의하는 조건으로 강의를 허락할 정도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올바른 사관(史觀)을 정립하기 위해 칠십 평생을 애쓰시고 계신 분이시다.
나는 장편소설 "도인을 찾아서"를 탈고 한 뒤 선생님께 보여드릴 겸, 지방에 갔다가 온 일에 관해서도 들을 겸 해서 저녁 시간을 맞추어 선생님댁을 찾은 것이었다.
마침 선생님은 아직까지 번역이 끝나지 않은 "산해경(山海經)"을 번역하고 계셨다.
기공협회 강의에 대해서는, 기(氣)에 관한 교재를 써 달라는 얘기와 강의에 열광한 회원들이 잠을 못 자도록 질문을 해서 고생을 했다는 얘기 등을 간단히 말씀하시고는,
"산해경" 속에 새롭게 발견되는 비밀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신다는 등 "산해경" 얘기로 말씀을 돌리셨다.
"산해경" 속에는 중국 고대사의 비밀 즉 한민족이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 일대 등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다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며 매우 흥분하셨다.
“박선생, 그런데 말이야. 기가 막힌 소설 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선생님은 가끔 소설 거리가 될 만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때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설은 대단한 소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아직 소재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아 소설 창작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이번만은 구체적인 소재를 찾아 집필에 착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무슨 좋은 소재라도 있습니까?”
“있구 말구. 이번에 지방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생각이 났지 뭔가.”
“어떤 내용인데요?”
“그 얘기가 소설로 나오면 난리가 날거야, 난리가!”
선생님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나 대단한 소재인 듯 뜸을 들이셨다.
“그런 것이 있으면 진작 말씀을 해주셔야지요.”
“그런데 말야, 그 얘기를 한동안 잊고 있었지 뭔가. 꽤 오랜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말야.”
“그러셨어요. 무슨 얘기인지 무척 기대가 되는데요. 어서 말씀을 해 주시죠.”
“허허, 그 얘기는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나는 아무래도 시간도 저녁 시간이라 해서 술 한 잔이라도 사 드리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선생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정월의 하루해는 짧았다. 어느 새 도시의 빌딩에는 풀 죽은 석양의 붉은 빛마저도 시들어 사라지고,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식당을 찾아 나서는 잠깐 사이인데도 금새 사방은 더 어두어져 도시의 불빛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날씨는 어둠이 내리자 약간 쌀쌀해졌다. 외투깃을 바짝 올리고 장갑을 낀 사람들이 곁을 지나갔다.
선생님도 추우신지 잠바의 자크를 올리셨다.
우리는 늘상 가는 전주식당으로 갔다. 허술하기는 하지만 싸고 서비스도 좋아 선생님이 좋아하는 단골집이었다.
쥐눈처럼 작은 눈을 가졌지만, 눈치 하나는 빠른 육십대 초반의 주인남자는 구십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 웁쇼!”
강한 억양을 타고 들려오는 주인의 인사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소원 성취하십시오!”
나는 새해 처음 만나는 터라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으니 좋은지 만면의 웃음을 띄우고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새해 운수 대통하십쇼!”
“네, 감사합니다.”
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지난번처럼 삼겹살에 소주 한 병 주시지오.”
나는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삼겹살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술병의 마개를 따고는 선생님께 한 잔 권해 드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무슨 소재인지 어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내가 다짜고짜로 소설 소재부터 얘기를 꺼내자 선생님은
“허허 급하긴…….”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싫지 않은 표정이셨다.
“내가 말이야, 나의 일생을 소재로 쓰게 해달라고 소설가들이 엄청나게 졸라댔는데도 다 거절했거든. 왜냐 하면 그들은 도(道)와 역사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지.

그런데 박선생이 쓴 글을 읽으면서 천지신명이 나에게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어.
"도인을 찾아서" 처음에도 나오지만 나는 박선생이 18일간의 쑥뜸삼매를 경험하는 등
구도(求道)의 열정과 효심에 감동을 받았네.
그리고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내가 역시 사람은 잘 보았다는 생각을 했어.”
“아이참, 선생님. 과찬의 말씀을 다하시네요. 그렇게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 소설이 나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박선생이 쓴 소설을 읽으면서 어찌나 재미있고, 감회가 새롭고, 감격스러웠던지……. 글쎄 새벽 5시까지 꼬박 읽기도 했다는 것이 아닌가.
내 평생 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꼬박 새보기는 이번이 처음일세.”
“그러셨어요? 저는 선생님께서 어떻게 보아주실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있으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 이번 소재도 박 선생이 쓰면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네.”
“그렇게 저를 생각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겨울방학에는 소설을 한 편 더 쓰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정말 잘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 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으로 알고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선생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쓸 터이니 말씀해 주시죠.”
선생님은 술을 한 잔 드시기 전에 구운 삽겹살 두 개와 파, 마늘, 고추장, 양념된장, 김치 등을 상추에 싸시고는 말씀하셨다.
“자, 술이나 한 잔 더 들게.”
하시면서 술을 드시고는 손에 든 쌈을 입에 넣으셨다.
나도 선생님처럼 쌈을 싸서는 술을 한 잔 마셨다.
식당 안에는 마침 토요일이라 술꾼들이 몇몇 앉아서 술을 먹으면서 웃어댔다.
주인은 손님 접대를 하면서도 좋아하는 TV연속극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는 날품팔이꾼들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모여 고돌이를 하면서 희희덕거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제법 컸지만 모두가 웃음과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서민적인 분위기여서 싫지가 않았다.
“벌써 오랜 전의 일이지. 아마도 10여 년은 되었을 것이네. 하루는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네. 전화 내용은 나를 좀 만나자는 것이었네.”
“무슨 일이었는데요?”
“단군학회 한 회원이 나를 만나자는 것이었어.”
“단군학회 회원이요?”
“그렇다니까. 나도 처음에는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 했지.
그래서 어떻게 나를 알고 만나자는 것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글쎄, 남원에 있는 황의지(黃義智)라는 분이 나를 소개해 주었다는 거야.”
“황의지라는 분은 어떤 분이신데요?”
“황의지라는 분은 나와 매우 친밀한 분이신데, 남원에 살고 있는, 황진장군(黃進將軍) 후손이시지.
황진장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名將)으로 ‘바다에는 이순신(李舜信),
육지에는 황진’이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왜적과의 싸움에서 많은 승리하였는데,
특히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충정공(忠旌公)을 말한다네.”
“아, 그렇습니까?”
사실 나도 황진 장군의 진주성 싸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황의지라는 분도 대단한 분이시라네. 광복 후에 지리산 빨지산 대장까지 지낸 경력이 있는 분이신데,
그 경력으로 그 동안 사회의 냉대를 많이 받아 사회적 성공을 못하신 분이시라네.
그러나 의기가 충천하고 기개가 곧기로 유명한 분이시지.
나의 고향 통영과 진주와는 같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어 오래 전부터 친분을 맺어 오고 있지.”

나는 황진장군의 후손이자 지리산 빨지산 대장이라는 황의지라는 분에게 매우 관심이 갔다.
조상은 조국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했건만, 그분은 빨지산 대장이라니…….
매우 아니로니칼 한 삶을 사신 분이시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지리산 빨지산 활동에 대해서는 이병주의 "남부군",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많은 작품들이 나와 있어
어느 정도 그 활약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빨지산 활동이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념의 대립을 넘어 우리 민족이 겪은 다양한 정신적 유산의 하나로 포용하자는 데는 동감하고 있었기에 더욱 흥미를 자아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지금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남북분단이라는 이념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어,
빨지산 운동을 전면 포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 수준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소설 거리라는 것이 빨지산 운동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여 다소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이미 그것은 많은 대가들이 다룬 주제라서 특별한 체험이 아니고서는 나 같은 풋내기가 다루어 성공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이 말씀을 계속 들어보기로 하였다.
“황의지 선생의 선조의 고향은 진주이지만, 빨지산 운동을 한 인연으로 지금은 남원 지리산 자락인 뱀사골에 살고 있어.
그런데 하루는 남원에 살고 있는 조카뻘인 황병익이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거야.
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까, 조용히 만자나자고 하더래.
그래서 모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황의지 선생이었지만 그날은 나가기로 하였다네.
아마 남원역 근처에 있는 역전다방으로 나가셨다는 구먼.”
“그래서요?”
나는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소재로 전개되는 율곤 선생의 말씀에 갑자기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에 나가 들어보니,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감히 발설을 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어.”
“어떤 내용인데요?”
“그러니까,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 귀화인은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양심적이고 의기가 강하고 역사에 밝으신 분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는구먼.
그리고 자기가 죽은 뒤에 세상에 알려 달라는 말도 했다는 것이야. 그래서 황의지 선생이 나를 소개하였다는 거야.”
“그래서요?”
이거 보통 소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얘기를 듣게 되었다네.”
“선생님, 정말로 기대가 되는데요. 도대체 귀화한 중국인이 전해준 말은 무슨 내용인데요?”
“박 선생, 그 내용이 내가 말하는 소설의 소재라는 것이여!”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잘 들어야 하겠는데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말이야, 그 중국인은 원래 남원이 고향이었다네.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인 셈이지. 그 사람은 6.26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었다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중국인이 되었다가 그 사람이 귀화했다는 것인데요, 뭐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네요.”
“자네도 잘 알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김일성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으로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네.
낙동강 전투에서도 승리한 김일성은 부산만 탈환하면 그의 적화통일은 성공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지.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김일성은,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만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 북쪽으로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네.
밀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압록강까지 밀려 이제는 남측의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었지.
그 때 김일성은 중국의 모택동에게 지원을 요청했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미인계까지 쓴 김일성의 간곡한 부탁에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군대를 지원해주기로 하였다네.
그런데 그 때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긴밀히 부탁을 하나 했다는 거야.”
“무슨 부탁인데요?”
“남원 출신의 병사 한 명을 뽑아 보내라는 거야.”
“남원 출신 병사를 왜 모택동이 뽑아 보내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다네.”
“중국에서 귀화했다는 그 사람이 포로로 잡혀간 후, 모택동의 긴밀한 부탁으로 모택동에게 보내졌다는 것이야.
그 병사는 포로로 잡혀갔으니 죽을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모택동이 부른 이유를 모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다고 하네.”
“그랬겠네요.”
“그런데 영문을 모르던 병사는 차차 자신을 부른 사연을 알게 되었다네. 그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기였다네. 그래서 자기가 죽기 전에는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지.”
“정말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궁금해지네요. 무슨 비밀이 있길래 죽기 전에 공개하지 말라는 말까지 한 것일까요.”
“그 귀화인이 털어 놓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네.”
선생님도 흥미진진한 말씀인지 술을 한 잔 더 들이키시고는 잠시 말을 끊으셨다.
“정말 궁금하네요. 무슨 이야기인지요?”
“모택동은 자신을 뽑아 보내라고 한 것은, 자기 할아버지가 남원 출신이고 자기와 자기 아버지도 남원이 고향이라서 고향 사람인 자신을 뽑아서 보내라고 했다는 것이었어.”
“네에?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사실이야. 그러니까 이 사실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죽기 전에는 발설해서는 안 되는 특급 비밀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야.”
“선생님, 그렇다면 모택동이 조선인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정말 그럴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네. 모택동의 아버지의 묘는 중국에 있지만, 할아버지 묘부터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야. 그런데 모택동의 할아버지 묘가 지리산 천황봉 있다는 것이야.”
“아니, 하필이면 지리산 천황봉이라는 산꼭대기에 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자세한 것은 박선생이 탐문을 해서 밝혀 보도록 하게.”
“선생님, 만약 모택동이 조선인이라면 10억 인구를 통치한 실질적인 인물이 조선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실은 발표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네.

그래서 소설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박선생에게 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 망명을 온 장교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야. 그러니 이제는 발표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말하는 것일세.”
나는 정말 충격적인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모택동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엎을 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내용만을 가지고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좀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인물 세 명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는 모택동!!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것은 일대 사건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율곤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황의지 선생을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였다.
“술이나 한 잔 더 먹고 다시 서재로 가세.
내가 그렇지 않아도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는데, 황의지선생과 약속이 되면 박선생하고 남원에서 만나도록 해보겠네.”
나는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어서 서재로 가서 약속을 받고 싶었다.
마침 오늘 따라 선생님께서는 술을 한 병밖에 드시지 않고는 식사도 간단히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다시 서재로 가서 전화를 했다.
“황선생님이세요? 나 율곤입니다. 제가 일월 중순에 지방에 내려 갈 일이 있는데, 남원을 한 번 들릴까 해서요.
무슨 일이냐구요? 아, 황선생님을 소재로 한 소설도 쓸 만한 문학박사가 있어서 나와 내려갈 터이니 함께 만났으면 해서요.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잘 됐군요. 날짜는 19일이 어떻겠습니까?
광주 사는 최두식이라는 제자가 그때 시간이 난다니 그때가 제게는 좋겠는데요.
아무 때나 괜찮아요? 예, 그럼 약속한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선생님은 금방 약속을 하셨다. 최두식이라는 광주에 사는 친구가 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안내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모택동이라는 인물이 내 삶의 한 켠에서 크게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고등학교 동창 가운데 서울대학을 나와 늦은 나이에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에 유학을 가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이름은 김광태였다. 그 친구는 대학원에서도 모택동을 연구했다.
혹시 그 친구에게서도 모택동의 일가에 대한 내력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묘한 흥분에 잠겼다.
나는 19일이라는 날이 갑자기 멀게만 느껴졌다.
어서 율곤선생님과 함께 황의지라는 분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일생도 나에게는 하나의 소설 거리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한(小寒) 추위가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한지도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절기를 무시하지 않는 버릇이 있는지,

대한(大寒)이라고 아침에는 제법 쌀쌀했다.
내일이 황의지선생과 만나기로 한 1월 19일이라,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율곤선생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율곤선생의 전화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오후 늦게 율곤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선생이여?”
“네, 선생님.”
“그런데 말이여, 최두식이라는 제자한테서 전화가 와야 하는데 오질 않아.
하루 종일 핸드폰을 해도 응답이 없으니 말야. 어디 산속에 들어가 박혔나?”
“그러면, 어떡할까요? 그냥 내일 남원으로 내려갈까요?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까요?”
“기다려 봐야지. 연락 안 할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19일이 지나도 최두식한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남원을 내려가려던 계획은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알고 보니 최두식이라는 사람은 황의지선생한테 미리 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리산 뱀사골의 깊은 계곡이라 핸드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내려가지 않은 상태에서 최두식과 황의지선생은 율곤선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나는 율곤선생님께 최두식이 없더라도 남원역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황선생님께 가면 되지 않겠느냐며
어서 내려갈 것을 건의했으나, 선생님은 제자의 차가 없으면 불편할 것 같은지 내려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내려가지 못하고 말았다.
내 말대로 그냥 내려갔으면 황의지선생이나 최두식씨도 모두 만나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1월 26일 나는 선생님께서 몹시 독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댁을 방문했다.
선생님은 그 동안 "산해경(山海經)" 번역으로 강행군을 하시어 피곤이 겹치셨던 모양이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기도 하고, 약을 지어다 드시기도 하는 등 심하신 편이었다.
“최두식은 그 이후로 연락이 왔는지요?”
“대둔산에 가 있을 거여.”
“대둔산에요?”
“대둔산에 도사라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는데, 최두식이가 그 할머니한테 미쳐 있거든.”
도사 할머니라, 나는 갑자기 최두식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
“도사 할머니라면 어떤 분인지요?”
“대둔산 기슭에서 후천세계를 꿈꾸는 할머닌데, 한쪽 눈이 실명을 안 보이는 할머니지.
최두식이는 도사할머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못하더라구.”
“아, 그래요?”
“내가 갔더니, 사주를 대라는 거여. 그러더니 공부는 많이 했으나 지혜가 열리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신통한 할머니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런 할머니한테 최두식이라는 사람은 왜 빠져 있는 것이죠?”
“그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앞은 대나무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인데 앞으로 후천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야.

그런데 최두식이라는 사람은 할머니가 죽으면 그 터를 물려받아서 공부를 하고 싶은 속셈이 있는 것이지.”
“그렇군요.”
나는 최두식이라는 사람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보는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는 제자라고
알고 있는데, 오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그 제자가 도학을 공부한 착실한 제자라고 했다. 체격도 크고 남자다운 성격이라고 했다.
이번에 선생님께서 공부하시던 홍천에 가서 책을 가져올 적격자라고 말씀하셨다. 갈 때 나도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선생님, 그러면 지금 연락을 하셔서 홍천에 언제쯤 갈 수 있는지 알아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 볼까?”
연락을 했더니 약속이 많아서 2월초순까지는 올라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개학 전에 함께 갔으면 하는 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선생님, 남원의 황의지 선생님께서는 중국에서 망명온 장교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고 계신 건가요?”
나는 다른 것보다도 모택동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싶어 말씀을 드렸다.
“황의지 선생은 남원에 오래 사셨고, 그리고 남원의 유지니까 그 정도의 소식은 알고 있을 것이야.”
나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자주 황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직접 연락을 드려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황의지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흔쾌히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6.25전쟁 때 남원 출신의 북한군이었다가 모택동 휘하의 장교로 발탁되어 승승장구한 장교, 그러다가 한국으로 망명을 온 장교. 그의 가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장교는 이미 숨을 거두었지만, 가족을 찾으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선생님 댁을 나왔다. 그리고 어서 전화를 하여 황의지 선생님을 만나 자세한 것을 여쭤 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 끝 -
[출처] 190. 모택동의 고향|작성자 집쟁이.

'모택동 선조묘' 남원 보절 산자락에?


'대국 천자지지 모광대묘'로 마을에 구전 / 원로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어" / 조사·연구 뒤따라야…모씨 명창 묘 추정도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중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모택동은 외세를 몰아낸 중국의 영웅이자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택동과 관련한 전설이 전라북도 남원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모택동의 할아버지(선조) 묘가 남원시 보절면에 위치해 있다는 게 전설의 주된 내용이다.

과연 이 전설은 사실일까? 전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의구심을 갖고 전설이 떠도는 현장을 찾았다.

남원시에서 20㎞ 가량 떨어진 보절면 용평마을의 만행산 천황봉 자락. 전설의 현장을 잘 알고 있다는 이 마을의 원로인 형보욱(84) 씨와 이병채(77) 전 남원문화원장, ‘천황봉 아래 대국 천자지지 유래’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던 소가광(75) 전 남원문화원 감사가 현장에 동행했다.

일행은 만행산 입구인 용평제 바로 밑에서 발길을 멈췄다.

형보욱 씨는 “2003년 저수지 제방공사로 전설 속의 그 묘는 이미 사라졌다”면서 수풀로 변한 평탄한 지점을 분명하게 가리켰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모광대묘’가 모택동 할아버지(선조)의 묘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 동네 아이들은 이 곳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고 나무꾼들이 묘 인근에서 잠시 쉬어가곤 했어. 이 묘의 연고자는 없었어.” 형 씨는 ‘모광대묘’의 구전에 대해 이 같이 설명했다.

2003년 지관과 함께 모광대묘를 방문했다는 소가광 전 감사는 “당시 전국의 유명한 명당을 찾아다니며 수학하고 있다는 지관이 모광대묘를 찾고 있었다. 그 지관은 ‘모택동 선조가 천자 발복지를 찾아 한반도 이 곳까지 와서 자기 조상의 유택(무덤)을 마련하고 대국의 천자 모택동을 탄생케 했다’고 말했었다”면서 “지관은 ‘보절’이란 고장이 산세나 지형 상으로 궁궐터로 손색이 없는 길지의 터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소 전 감사는 “이환주 남원시장도 중국에서 근무할 때 모택동 주석의 선조 묘가 남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면서 ‘모택동의 선조는 누군가에게 묘가 훼손될까 두려워 광대묘라고 남기고 떠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실제 이환주 시장은 “중국 근무(전북도 파견) 때 한 한국인으로부터 이 내용을 전해 들었다”면서 이 전설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2003년 소 전 감사와 현장답사를 했던 이병채 전 원장은 “옛날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전설의 실체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조사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수소문끝에 찾아낸 한 연구가는 ‘모광대묘는 모택동 선조의 묘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전설을 오랫동안 추적했던 이 연구가는 익명을 전제로 “1700년대 전라도 출신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평양감사 부임공연을 펼쳤다는 기록이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있고, 그 후손이 몇년 전에 전화를 통해 보절 천황봉 아래 선조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면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모광대묘는 이런 내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흥갑이란 명창의 족보를 찾아내 조사한다면 모광대묘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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