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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의 시작(남원성전투 1597.8.12-8.16)

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양형식|작성시간20.02.22|조회수59 목록 댓글 0

정유재란의 시작(남원성전투 1597.8.12-8.16)



일본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동시 진격을 휘하 부대에 하달하였는데

고령 전투와 동시에 벌어진 이 남원성 전투는 조선-명 연합군의 패배로 일단략되고 말죠

일본군은 임진년의 패배를 되새겨 전라도의 곡창 지대의 함락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고
이에 정지룡이 상대한 왜군과는 상대가 되지 아니하는 대군을 전라도에 배당하였죠

그리고 이에 해당되는 장수도 정기룡이 상대한 장수와는 격이 다른
고니시, 우끼다, 가토 등.....

무려 5만대군이 부산 안골포등지에 상륙을 하여
고성 , 사천, 하동를 거쳐 구례로 향하여
전라도로 진입하였죠

이로서 일본군의 목표가 정해진 것인데
이미 조선 수군을 와해 시키고
그 것에 힘을 얻은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입하고 다시 충청도를 점령 한 후에
조선의 서울을 위협하면서 육상 병력과 수군 병력으로 조선- 명 연합군을 포위 공략하고
다시금 남는 일본 수군으로 명나라 해안을 괴롭히면서
협상을 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엿보입니다.

하여간 일본군은 8월 7일에 구례에 입성을 하였고
이 지역의 미비한 조선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도도히 북상을 하였던 바

남원성의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남원성에 명나라 화기가 올라 올 수 있게 남원성을 개조하기 시작하였고
유격장 진우충에게 구원을 요구하였는데

사실 남원성은 산성도 아니고 평지에 위치한 성으로
원래 성이 건설된 이유가 고려 말의 조창을 왜적에게서 보호하기 위한 성곽으로
남원이 농업 기지로의 자위용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규모 공격을 방비하기에는 모자름이 있었죠

이에 진우충이 구원하겠다는 대답만 하고 군사를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니
이는 남원성에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바로 중국식 답이었죠

양원이 다시 전라도 관찰사와 순찰사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달리 답이 없었고...

이제 당시의 전투 현황을 난중 잡록 정유년 8월 조에서 찾아 기록하고자 합니다.

남원성 전투는 1597년 8월 11일에 일본군의 정탐이 나타남으로 해서 시작이 되는데
그 전에 일본군의 고니시가 양원과 이복남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월을 바치니

' 소장이 듣기로 남원성에는 천군 3000이 있고
밖에는 구원군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선군이 구원을 한다 하여도 구례에서 우리에게 망한 구례의 장수가 약 몇천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고
전라 병사께서 다시 수천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고
또 우리의 병력은 임진년 이후 부터 싸워온 정예이니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전라도의 병력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남원성이 계사년 이래 계속 꾸준히 성을 높였다 하여도
과연 진주보다 성이 두껍고 높겠습니까?

남원은 진주보다 성도 낮고 작으니
어떻게 우리의 10만 대군을 상대할 것입니까?

귀하 각하께서는 총망 받는 분들로
물러나 귀국의 본진이 준비되고 도착함을 기다려
우리와 싸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에 양원은 편지에 답을 달기를

' 본관은 동서로 나달아 싸워 진 적이 한번도 없거니와
융을 입은 이후에 항복을 한 적도 진을 내 준 적도 없다

허나 고국에서 멀리 나와 고립된 성에 홀로 버티고 있으니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성을 내 줄 것이니

이는 부득이할 경우에 성을 내 줄것이라는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고니시는 양원의 뻔뻔함에 얼굴을 붉혔고

다시 이복남은 답서는 보내지 않고
전라 병 1000명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입성하니

고니시의 편지에 대한 대답이었죠

이에 양원은 조선군 1000명도 원병은 원병이니
일단은 싸우게 되었죠

그런데 왜 조선군 전라도 병마사의 군대가 1000명 밖에 안되었을까요?

원래 병마사의 군대는 3000이었었죠

원래는 3000이었는데
왜적의 군대가 구례에 입성하였음과 전라도가 전장으로 변하자

그 때에 순천에 있던 이복남이 서둘러 남원으로 향하니
군사들이 죄다 도망치고나 낙오하고

주변에는 싸움에 익숙한 군관과 장교 50명만 남게 되었죠
(나중에 두사충의 열전에서 밝히겠지만 당시의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만치 죽기로 싸움에 임하질 않았죠
이유는 경상도인은 이미 일본군 치하에서 일본의 만행을 다들 겪어 보았지만
전라도는 일본에게 점령을 안당했었으니깐요
그래서 아직 도망병이 생기는 여유가 있습니다.
아직 전라도 사람들은 왜적을 두려워 하기만 하지 미워하지 않고 있었죠)


현재 남아있는 남원성

이복남이 홀로 남원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남원으로 향하다가
옥과에 있는 조창을 불태우고 다시 서창을 불태우려 하는 길에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 별장 신호(申浩) 등을 만나
그들의 병력 1000과 함께 남원에 들어 오게 된 것이죠

이복남이 홀로 입성하려고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의 직위가 전라도 병마사인데
5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입성하기가 아마도 꽤나 챙피했을 것인데

서창에서 김경로를 만나니 그들도 남원으로 향하는 길이라 하니
매냥 반가워 눈물을 흘리며 이르길

' 귀하와 본관이 죽을 곳을 찾았소이다 ㅠㅠ!!'

김경로의 입장이 나였다면 이렇게 물었겠죠

' 그런데 장군의 병사들이 이게 다요? 에게~~ '

그러나 김경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 장군과 같이 죽을 곳이니 소생에게 영광이오!!'

그러고는 같이 남원으로 향하는데

이미 남원이 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니
적들이 남원의 성문 앞에 빽빽히 모여 어디든 조선군이 들어 갈 구멍이 없었드랬죠

그 때 이복남이 눈이 찢어 지게 부릅 뜨고 손에 침을 뱉아 비비며 이르길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을 위해 일할 날이 이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 ( ㅡ,.ㅡ???)

그러면서 남원성 주변을 전투를 위하여 정리하고 있던 일본군 사이를 유유히 통과하여
시끌 버쩍하게 (주악을 울리며??)남원성에 입성을 완료하였던바

그것을 보고 있던 일본군이 벙쪄서 조선인 포로에게 묻길

'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 같으냐??'(한마디로 저 미친 놈은 대체뭐냐;;라는거겟죠;;)

조선인 포로가 답하길

' 저자가 바로 우리 전라도의 병마 절도사 이복남 올시다!!'


남원성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바라보니
조선군 1000명과 남원의 군민 약 6000여명
그리고 명나라 군 몇천이 그 형세로 남원의 수비를 하기로 했는데

남원의 군민은 비 정규군으로 무장이 정예하지 않으니
비록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여 싸움에서는 명나라의 평군사보다 더 위협적이나
큰 칼을 쓰고 긴창을 구사하는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부족함이 많았죠

명나라 군은 남병과 북병의 혼합 병력이나
기마 중심의 북병은 약 1200명으로 5만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고

성곽 싸움에 익숙한 남병은 800명으로
이 남원성 싸움에 필요한 화포나 총, 그리고 활을 쏘아야 하는 실 병력이었죠

그리고 유군으로 1000인의 병력이 있었으나

이 유군의 병력도 유군의 역활 보다는 좌익이나 우익으로 편성을 하였고

조선군도 한 익으로 삼고
남원 군민으로 유군으로 삼아 화포와 돌을 나르는 것을 담당케 하여
일본군을 상대하게 하니

조선-명 연합군은 북문은 조선군에게 전담케 하여
그 지휘관으로 전라 병마사 이복남이 하게 하고
그 휘하에 전라 조방장 김경로, 방어사 오응정, 구례 현감 이원춘으로 하여금 지휘케 하고

동서남문은 명나라 군으로 하여 지키게 한 바
동문은 중군 이신방이 남문은 천총 장표, 서문은 천총 모승표가 담당하였죠

그리고 총 지휘는 부총병 양원이 담당하였는데

이미 구례에서 출발한 겉으로는 10만 대군으로 일컫는 일본군은
실지로는 5만대군으로 구례에서 구례의 현감 이희춘의 몇백명의 군사를 가볍게 밟아 버리고
남원을 향하여 두방향으로 진출을 하였는데

1대는 서쪽에서 또 다른 1대는 서북 방향으로 접근 하였던바

일찍이 양원에게 고니시가 편지를 보내어
남원을 비워 달라고 한 것은
겉으로는 명나라 군을 탈출케 해 주려는 것이었지만

원래는 탈출하는 명나라 군을 성 밖에서 쉽게 사로 잡으려 한 수작이었죠

하여간 이복남과 김경로의 천여명의 조선군이 입성함으로 해서 양원은 성을 지키게 되었고
만약에 고니시의 주장대로 양원이 남원을 비웠을 경우 명나라 2천 수백의 군대가 어떻게 되었을까는 상상하기 나름이겠죠

하여간 일본군의 선발대가 도착한 연후에 남원성 근처의 가옥들을 청소하였고
공격하기에 알맞게 하니

그것은 대군이 공격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 사이에 조선군이 입성하였고

조선군이 입성을 한 후에 공격을 하니

일본군의 공격 순서는 소수의 선발대로서 공격을 하여
먼저 입수한 적황이 사실인지 파악을 하고

만약에 적이 소수일 경우에는 이 선발대의 공격력만으로 항복을 받아 내어
본대의 병력에 피해를 적게 하는 것인데

조선에서의 전투는 이 선발대의 공격만으로 항복을 받아 낸 적도 없고
싸움에 입각하면 조선군을 모조리 죽여 없애야 전투가 끝이 나니
선발대의 공격은 자살 공격일 뿐이지만

일본인들은 자기네들의 전통과 습관으로 인하여 정유년의 싸움에서도 이러한 전투 방법을 중시하고 있었죠

13일 선봉 고니시와 그의 사위 종의지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 안이 휜히 보이는 방암봉(訪岩峯)에 진을 세우고
공격 명령을 하달하니

그의 병세가 넷으로 나누어져

한대는 방천(防川)에서 선원(禪院)을 거쳐 향교 앞까지 뻗쳐 장성교(長城橋)를 지나 서문 밖에 이르러 진영을 짜고

또 다른 한대는 칠장(漆場)으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덕암(德岩) 밑의 구지소(舊紙所) 앞을 지나
다시 내를 건너 율장(栗場)으로 뻗어 대무천(大毋泉)을 지나 서문 밖의 적과 서로 이어 진영을 짜니

그 모습은 마치 달 무지개가 달을 반으로 쪼갠 모습과 같았다고 합니다.

고니시는 바로 공격에 들어 가질 아니하고
남원성 주위로 뛰어 다니게 하여 성안의 군민의 사기를 저하케 하려 했고

양원은 주변에 명을 내려 함부러 포를 쏘지 못하게 하고
총을 낭비하는 것을 금하니

그것은 고니시가 그것을 노리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죠
( 과거 여진족과의 싸움에 익숙한 양원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죠
여진족들은 서부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처럼 명나라군의 진영을 주변을 뺑뺑 돌아
명나라군의 탄약을 소비케 하였었죠)

그러다가 점심 먹을 시간이 되자
고니시는 명나라 군을 도발하기 위하여

다섯명의 병사를 보내어 남원 동문 앞 돌다리 앞에 늘어서서 성안의 우리 병사들을 모욕하니

양원이 불끈하여 이르길

' 조선군은 활을 잘 쏜다고 하니
저들을 아작 씹어 버릴 병사들을 뽑아 저 들을 살아 못 돌아 가게 하시요!!'

이에 이복남이 답하길

' 왜놈이 자기 네들만 총이 있는 줄 알고 우리에게는 총이 없는 줄 아니
왜 놈들 죽이는 무기로는 활보다 총이 제격 올시다' 하여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陣) 정금(鄭金)을 선발하여

다리에 서 서 우리 병사들을 모욕하고 있는 왜구들을 쏘게 하니

세놈이 바로 죽고 나머지 두놈이 그 세명의 왜구들의 시체를 들고 달아 났죠

이에 우리 병사들이 소리쳐서 환호하고

다시금 2시경에 일본군이 조선의 포수의 사격 솜씨가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의 포수 전부를 데리고 나와서 우리에게 총을 쏘아 대니

양원이 또 다시 발끈하여 이르길

' 저들을 아작을 내 버립시다!!'

이 때에 우리 포수가 나와서 이르길

' 왜 놈이 불을 쏠 때에는 언제나 운집하여 쏘아 대니
이 때에는 조선의 완구로 진천뢰를 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여 진천뢰를 쏘아 터뜨려 적의 밀집대형을 흩으어 놓으니
다시금 남원성의 우리 병사들의 환호성이 터졌죠

양원이 그것을 보고 다시 적들의 수효가 계속 늘어 가는 것을 보고 이르길

' 적이 자기네들 본대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공격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준비를 하여야 겠습니다.'

그러면서 남원 사문의 다리에 못판을 깔고
주변 성곽 주변에 마름쇠를 골고루 뿌려 났는데

새벽녁에 소리가 들려 가만히 쳐다 보니
적 세명이 조용히 접근하여 다리에 매설된 못판을 제거하고
마름쇠를 하나 하나 줍는게 보이는 지라

명나라 군 중에 놋쇠로 된 가지 있는 창을 잘 쓰는 자 수명을 내 보내어
그들을 조용히 제거하고....

이 사건 이후에 즉각 사방의 네개의 다리를 철거하였죠

이에 왜적들은 본진이 도착하기 까지 사방에서 끊임 없이 총을 쏘아 대고
고함을 지르며 불을 지르고

사방에 원군이 들어 올 수 있는 지형과
사찰을 습격하여 살상하니
남원 주변은 말 그대로 왜적 외에 모두 살육 당하였죠

남원성에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려 한 8월 13일
전라도 관찰사는 전투에 미적 거리던 박홍로(朴弘老)가 파직되고
황신(黃愼)이 신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 황신은 변산 반도로 몰려 피난 중이었고....

남원을 구원하려는 시도도 역시 있었으나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이 변산으로 가서 신임 관찰사가 된 황신을 모시고
남원으로 총부의 징원차관(徵援差官)까지 데리고 가다가
적성진(赤城津)에 이르러 왜적들이 길을 차단하니
다시 북으로 달아나 버렸죠

물론 김순명이 많은 병력을 가지고 간 것은 아니었고

그 역시 이미 가진 병력은 얼마 안되었고
그것마저 왜적과 한번의 조우로 풍지박살이 나 버려 거의 홀홀 단신으로
감사와 징원차관을 데리고 남원에 죽으러 갔다가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된 것이죠

하여간 8월 14일의 날이 밝자

우끼다의 본대가 속속 도착하여
본격적인 전투 개시에 들어 갔고

우끼다와 고니시가 머리를 맞대어 이르길

' 우리는 대군이고 저들은 한줌 밖에 안되니
우리의 물자와 우리의 수효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니
예전에 호죠를 박살내듯 남원 밖에 하나의 기지를 세워 남원이 성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해버려

저들이 처음부터 싸울 수 없게 합시다!!'

그러면서 군세로 성을 에워 싸고
남원 성 밖의 민가와 절을 부수어 그 재목으로 장제를 만들고

민가의 초가를 이었던 짚으로 남원성 밖의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 있는 참호를 메어서
그 장제가 나아갈 길을 만들고

다시 나무를 많이 베어와 성을 포위하듯 담을 쌓고
그 담에다 총안을 만들어 아군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수 없게 하고

남원 동남쪽에 높은 장대를 만들어 그위에 왜적이 올라가
남원성을 내려다 보며 총을 쏘니

남원성 동남을 지키던 명나라군이 몸을 숨길 곳도 없이 많이 죽어 버려
동남쪽 성루를 지키던 병력이 와해 되었죠

다시 점심 먹을 시간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고....

서문에서는 왜적이 서문 밖 2리 밖에 있는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가지고 와서
서문의 병사에게 보이니
명나라 군이 놀라고 군기가 크게 흔들리니

양원이 이르길

'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그러자 중군이 이르길

'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양원은 뜻을 굽히질 아니하고

북병 즉 기마병 천여명을 모아 성 밖으로 쏟아져 나아가니
왜적은 흠칫 놀라는 척하며 도망가고

돌다리 앞까지 나아가자 매복한 군세가 나와 퇴로를 막자
양원이 그 때 서야 속은 것을 알고
호각을 부르고 초요기를 흔들어 퇴각령을 내리니

이미 많은 수가 상한 뒤였죠

15일 아침 양원이 큰 결심을 하여
나발을 불었더니

성중이 고요하고
다시 성위에서 나발을 부니

고니시가 그것을 듣고 손뼉을 치며 이르길

' 저것은 양 부총병의 항복하려는 나발이로구나!!'

그래서 중국말 할 줄 아는 부하가 있는 지 찾아 보라 이르니
없는 고로 조선말 할 수 있는 병사를 찾아 성 아래로 가게 하니

조선말 할 수 있는 왜적이 성 아래에 이르니

양원이 통역관에게 중국말로 이르고
그 통역관이 조선말로 왜적에게 이르길

' 너희 고니시에게 이르라 서로 사신을 교환하자고!!'

그러고는 양원의 명나라 사신을 고니시에게 보내니

고니시와 그 사신 일행이 한참 말을 나누다가

다시 고니시의 뜻을 가진 왜의 사신이 남원성에 들어와 양원과 이야기를 나누니

왜사가 이르길

' 우리 장군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성을 빨리 비우라구요!!'

양원이 통역관에게 이르니
통역관이 이르길

'양부총병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15세 부터 군직에 몸을 담고 천하를 횡행하며 지금껏 진 적이 없소
지금 나는 천군 10만 정병으로 성을 지키는데 성을 쉽게 내어 줄 수 없소이다!!라구요'

왜사가 듣고 다시 이르길

'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 모든 역사서는 사실 속에 거짓을 가지고 있고
어떤 역사서는 거짓 속에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계시죠........

제가 남원성 전투의 기록으로 난중 잡록을 선택한 이유는
그 지은이가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의 기록이고
무엇 보다 남원성 전투에 직접 참전한 인물의 기록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의 기록은 전투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을 하였지만
양원에 대한 기술은 그가 살던 시대의 사정으로 인하여 자세하게 기술을 못하고
붓을 굽었으니

양원은 전쟁후 조선의 은인이 된 인물이고
조경남이 살던 시대에 명나라군에 대한 욕을 한다든지
양원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기는 일은 바로 은의롭지 못한 일로
평가되어 명나라 장수에 대한 기록은 임금의 기록을 남기는 것과 같이
매우 아름답고 정의로운 인물로 서사되어야 했던 시대상의 반영이죠

왜사와 사신을 교환하게 된 것은 양원이 바란 것이었고
양원이 거듭 나발을 불어 고니시가 못내 사신을 교환하였던 것으로

그것은 양원이 성을 내주는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겠죠

난중 잡록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면
그것은 양원이 사신을 청한 것이 아니라
고니시가 사신을 청하여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

그것이 아니고 양원이 굳이 사신을 청하여
이런 이야기를 함은 구원군이 올 시간을 벌려 했다고 보기보다는
기록의 왜곡을 의심해 볼만하고

다른 기록에 양원이 명나라 군의 무사한 탈출을 목적으로
조선군과 조선 인민, 그리고 남원성 양도를 내걸었다는 설이 있고

반면에 고니시는 양원 혼자만 탈출을 용인하고
명나라군의 목도 일본군에게 양도하려는 목적을 보임으로 인하여

양원과의 회담이 결렬되었음을 보이고 있죠

그러나 이러한 회담 다음날

양원 혼자만 살아 남고

전부 옥쇄 하였음과 남원성에 있던 이 조경남도 15일 저녁을 틈타 탈출 하였음은
무언가 의심스럽게 합니다.

처음에 죽기 위하여 남원에 갔던 조경남이 왜 성벽을 넘어 탈출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양눠은 서쪽 벽에 성곽 싸움의 경험이 전무한 북병을 배치하여
서쪽이 함락되게 하였을까요?

그리고 양원은 말을 몰아 홀로 적의 목재 장벽을 어떻게 뛰어 넘어 도주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도 대낮에 말이죠???

저는 조경남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남원성 전투의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어염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남원성의 함락은 명나라 군이 잘 못싸워서도 아니고
당시 남원성 수비군의 수효가 작아서도 아닌

고니시와 양원 양자의 협의로 인한

즉 수뇌부 바로 부총병 양원의 배신의 결과로 인한 것이란 것이죠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명예를 금보다 중히 여긴

당시의 선비였던 조경남이 비겁하게 성을 빠져 나오게 된 원인이
바로 개죽음 하기는 싫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양원이 일본측의 사신과 은밀히 편지를 주고 받고
무슨 일인지 자기 명나라 장수에게도 알리지 않으니

소문이 돌았는데

첫째는 명나라군이 무사히 철수하는 조건으로 남원성과 조선군민 7000여명을 일본측에 양도한다는 조건이라는 것이었죠

둘째는 그것도 아니고 성이 함락한 이후에 양원 부총병의 목숨을 구제해 달라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고

성을 지키는 양원과 무슨 일이 있어도 성을 함락하여야 하는 고니시 양자간에 합의란 처음 부터 있을 수가 없는 것인데도

이렇듯 사신간의 편지가 오고 갔는데

조선측 사령관 전라 병마 절도사 이복남이 중군 이신방에게 이르길

' 듣자 하니 부총병 각하께옵서 성을 왜구에게 내어 준다는 유언이 있사온데
이 일로 말미암아 남원 부중이 시끄러우니
중군은 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말 좀 해 주시구려!!'

이신방이 이르길

' 본장이 조선까지 온 것은 황상의 명을 받들어 왜적을 소탕하여 조선을 지키기 위함이라
아직 우리 부총병과 우리 군사가 조선을 위하여 공을 세운 것이 없는데
남원성을 내 준다고 하는 그런 소문이 도는 지 알 수가 없구려

병사는 이러한 헛소문이 도는 것을 힘써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이복남이 물러나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한사람이 뛰어와 이르길

' 통사가 저에게 이르길
양원이 성을 판다고 합니다

무슨 조건으로 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행장(고니시)이 우리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얻기를 원한다고 하니
추측하건데 양원이 우리 조선 사람의 목을 팔아 명나라 군의 생명을 얻으려고 하나이다!!'

이복남이 그 소리를 듣고 양원에게 달려가 이르길

' 부총병 나으리 들리는 말이 사실이오리까?
장군께서 우리 조선인의 목을 팔아 대국의 병사를 살리려고 하신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야 우리가 극력으로 싸울 수 있지 않겠소이까!!'

양원이 듣고 이르길

' 헛소문이요
이러한 헛소문에 병사 영감이 흔들리는데 조선군들이 어찌 힘껏 싸울 수 있겠소
영감은 이런 소문따위에 솔귓하지 말고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는데 힘써야 할 것이요!!'

이복남이 다시 물러 나와
명나라 장수들에게 찾아 다니며 정보를 얻으려 한 바

명나라 장수들이 모조리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지라

다시 북문으로 돌아 가고

북문에 기대어 적세를 보고 있자니

남문에 적들이 가득한데 남문을 지키는 명나라군은 북군으로 성곽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여
성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고 하여

이복남이 북문의 군병을 이끌고 남문에 이르니

어찌된 일인지 남문의 병사들이 북문을 향하여 뛰고 있고
이복남이 한사람을 붙들고 이르길

' 왜 남문의 병사가 북문으로 가는가?'

그 사람이 이르길

' 남문이 열렸습니다!!
왜적이 남문에 가득하니 북문은 비었을 것이라 하여 북문으로 가는 중입니다.'

이복남이 그 말을 듣고 놀라며 이르길

' 왜적이 성중에 들었으면 힘껏 싸워 몰아 내야지
왜 도망을 치는가!!'

그러면서 남문으로 향했는데

이미 남문을 통하여 왜적이 들어와 성루를 다 차지하고 있음으로
이복남이 다시 북문으로 가는데

북문은 이미 그 곳을 지키고 있던 1000명의 조선 병력외에 명나라 병력과 조선 사람으로 피난하려는 사람으로 북새통이었고

명나라 기마병에 의하여 사람이 깔리고
사람 위에 서 있는 기마가 엎어져 다시 깔리면서 북새통이 되었고

북문 밖에도 왜적이 가득 있는고로
탈출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싸울 수도 없는 패닉 상태가 되어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였죠

어떤 사람이 이르길

' 이미 양원 부총병은 서문을 통하여 나갔다고 하니
병마사께서도 어서 나가시지요!!'

이에 이복남이 이르길

' 나는 죽으려 남원에 온 자이지
살기 위하여 도망치려 남원에 들어 왔겠는가!!'

그러는 동안에 왜적이 남원성에 가득 차게 되었고

북문에서 패닉 상태에 있는 명나라 군과 조선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베어 죽이게 되었고
이복남과 조방장 김경로가 그 북새통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서로 이르길

' 이렇게 남원에 쌓여 있는 무기와 화약을 적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태워 버립시다!!'

그러면서 남은 조선 병사들을 거느리고 다시 부중으로 왜적들을 처치하며
진격하여 부중의 화약 창고에 들어가서 불을 질러 터 뜨려 버리니

남원의 반을 날려 버리고

전사하니 왜적은 남원이 임진년 이후 정유년 까지 생산하여 쌓아 놓은 물산을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죠

그 전에 이복남과 김경로가 조선군의 남은 무기들을 땅에다가 묻고
표식을 하였는데

나중에 황신이 남원이 회복 된 다음에 다시 파내어 조선군이 사용케 하였던바

그의 공이 여기에 있죠

부총병 양원이 도망하여 전주에 이르니
전주는 텅 빈 공성이었고

다시 공주로 도망쳐 공주에 이르러 장계를 올리니

양원이 도망치려 할 때에 50여기로 적중을 돌파하여 달아 나다가
접반사 정기원도 데리고 도망을 쳤는데

정기원은 말을 잘 타지 못하니
자꾸 말에 떨어지는 것을 자기가 다시 태우곤 하였는데

왜적이 주변을 포위하여 다급한 와중에 정기원이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구원하지 못하였다 하였죠

그러나 남원성 주변을 왜적이 처음 포위하는 날 나무 장벽으로 철저히 막았는데
50여기의 기병으로 그 장벽을 왜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부수고 달아났는지의 설명이 없음으로

접반사 정기원이 실상은 왜적에게 살해 당한 것이 아니라
양원에게 살해 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명나라군 3000명과 전라 병마군 1000명, 그리고 남원의 군민 7000명이 모조리 살해 당하였고

장수급으로 전사한 자만 해도 총병(總兵)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 이상 명나라군 장성,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이상 조선군 장성

남원성 함락직전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그림

칠천량 해전 이후

8월 15일을 전후해서 주요한 전투가 동시에 벌어 졌었는데

하나는 경상도에서 정기룡의 고령 전투, 함안의 황석 산성 전투, 또 하나는 남원성 전투였죠

정기룡의 고령 전투는 일방적인 조선군의 승리였으나
그것은 정기룡이 아직 경상 우병사가 되기 이전에 조경 휘하에서 싸울 때 부터의 전투에 경험이 풍부한 부하 장병이 건재하였고

다시 전직 경상 우병사 박진이 군사를 준비하고 무기를 제련하여 놓은 것으로 인하여
승리하게 된 것으로 경상도만의 특징으로 다른 도에서는 이러한 것을 기대하기가 힘든 형편이었죠

그러한 것으로 경상 좌도 함안에서의 황석 산성 전투는 가토라는 이름에 겁을 먹은 함안의 장수들의 탈출로 인하여 와해가 된 전투이고

남원성 전투는 칠천량에서의 조선 수군의 와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조선군의 실상을 그대로 표출한 사건이죠

전라도 병마사 이복남은 바닷길로 기어 올라올 수도 있는 왜적이 순천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에 대한 방비로 골몰하다가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하고 군사가 다 도망가 버렸고

이대로 전라도의 병마가 와해가 되어 왜적이 남원에 들어 와
임진년 이후 쌓아 놓은 조선의 군량과 군비가 다 왜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이복남이 태워버려 그 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고

권율은 왜적이 바닷길로 전라도, 충청도를 우회하여 바로 도성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것에 겁을 먹고 전전 긍긍 하고 있던 사이.......

조정은 이순신에게 표를 주어 이미 명나라가 통제사로서의 복귀를 명한 것을 용인하였고

다시금 선조 이연은 몽진 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 경리 양호가 의주를 지나며 조선 조정에 표를 올리니

자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죠

남원과 전주를 장악한 왜적은
전주를 불 태우고 전주 성을 허물고
산으로 도피한 백성을 잡아 내어 죽이고 귀를 자르고 코를 베었죠

그리고 전주에서 좌우군이 합세하여 북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곳곳에 위치한 조선군의 산별적인 저항을 대군의 병력으로 가볍게 누르고

9월 3일에는 공주로 무혈 입성을 하였죠

요즘에 일본의 기록과 기념물에는 공주와 나주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조선군의 코와 귀를 베어다 일본으로 날랐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사실은 조선군의 코와 귀가 아니라
병약하고 늙어 피난을 떠나지 못한 여자와 노인, 아이들의 코와 귀였죠

공주와 나주에서는 아주 작은 전투도 없었으니
그것은 우리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더러

당시의 조선군의 형편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은 재란이 발발하기 전해에 극심한 전염병과 한재로 인하여
인구가 극감하였고 군대 조직도 이 문제로 와해가 되어
정유년에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가 힘들었고

그런 문제로 명나라 조정이 곡식과 약재를 지원해 줄 정도였죠

그래서 정유년의 전투 과정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임진년과는 다르게
왜구들의 진격이 어떠한 방해도 없이 진행되고 있죠

하여간 충청도로 진입한 왜적들은
다시 좌우로 병력을 나누어 서울을 바라보고 진격을 하였는데

주 병력은 연기-청주-천안 방면으로
일부는 진산- 금산-옥천-회덕-문의-청주로 진입하였죠

이와 같은 진격으로 중순에 온 충청도가 왜적의 휘하에 들어 가니

그 소식을 들은 두사충이 이르길

' 이제 삼한 백제의 땅 중 백제의 온 지경이 왜구의 발 아래 놓이게 되었구나!!'

다시 서울에서 허균이 이 소식을 접하고서 시를 짓되

聞道龍城陷
들은 즉 용성이 함락되었다네
將軍夜突圍
장수는 저녁을 틈타 도망 쳤다더군
噬呑窮百濟
백제의 땅을 다 집어 삼키더니
鋒銳逼王畿
적의 날카로운 기세가 서울까정 위협하네~~
骨肉知焉往
답답도 하여라 지친은 다 어디로 간겐가
君臣定式微
식미(시경의 편명)를 노래하는 임금과 신하여
鄕園豺虎窟
옛동산이 늑대와 호랑이의 소굴로 변했으니
何處可言歸
어데로 돌아 갈것인가?

허균의 이 시는 임금과 신하들의 본거지인 전라도가 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어데로 도망 갈 것인지 시경의 식미편을 들어 비 웃고 있는 시죠

하여간 왜적들은 9월 7일경에 그 첨병이 경기도 남쪽으로 들어 왔고
그 소식은 서울의 조정을 억누르고 있었죠


출처 :http://blog.naver.com/hind1204?Redirect=Log&logNo=21932490

김경진씨에 "임진왜란"에서 의 추가 설명에 따르면
전라병마절도사 이명복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알고 어린아들 이경보를 탈출시킵니다.
하지만 모리가 이끄는 우군에 잡히게 되고 이후 일본으로 보내져 모리가의 가신이 됩니다.
이후 이경보는 이름을 리노이에 세이겐(李家成玄)으로 바꾸고 당대에 유명한 유학자가 됩니다.
그후손인 사학자 리노이에 마사후미씨가 83년 남원성을 방문하여 만인총을 참배하고 간 일이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비록 전쟁중이었으나 전라도만은 안전했으나(칠천량해전 직전까지는)
대신 전투의지가 그만큼 약했다고 하더군요 왜군의 만행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임란초기의 조선군들처럼 두려워하기만해서 싸움이 힘들었다고합니다.
그에비해 경상도,충청도..(충청도병사들도 전쟁초부터 우직하게 잘싸웠다고 하더군요)
특히 정유년당시 경상도병사들은 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자가 대부분이라 악에 받쳐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령현전투에서는 생포된 왜군의 배를갈라 간을 꺼내 나누어 씹어먹어
그것을 본 왜군을 겁에 질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정도로 증오했던것 같습니다..
또한 실전경험이 많아서 야전에서도 왜군과 대등 때로는 우위에 서서 전투를 했다고 하는군요

뭐 하지만 명나라군은 그런 전라도군사보다 더해서 남원성전투에서 끝까지 왜군과 사투를 벌인건 조선군이고
명군은 칸네전투의 표현을 빌자면 "추수하듯 왜군에게 도륙당했다"는 군요;;;

스크랩 원문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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