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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박(梁大撲)의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작성자신나 (충장공파 종손)양형식|작성시간20.05.27|조회수70 목록 댓글 0

양대박(梁大撲)의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휘뚜루
▒ 양대박(梁大撲)의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1. 절제된 유람의 기록
조선 중기에 지어진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의 작자 양대박(梁大樸, 1544~1592)은 자가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 청계도인(靑溪道人),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부친은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낸 양의(梁艤)이며,
아들은 양경우(梁慶遇)이다.
시명(詩名)을 떨쳤으며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학관으로서 아들과 어린 종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을 만나 맹주(盟主)로 삼고, 전주에서 의병 2,000여 명을 모집했다.
계속 의병 모집에 힘을 기울이다가 과로로 병들어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순국하셨다.
비록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공이 컸다. 의병을 모아 고경명이 의병활동을 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뒤늦게나마 1786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됐고, 이후 1796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개증(改贈)되었다.
저술로는 <청계집(靑溪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전란을 맞아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본래 문사로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국조인물고>에서는‘시(詩)
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당대의 재사(才士)로 존경받았으며, 담론하는 언사가 유창하고 위대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추앙했다.
향리(鄕里) 사람들과 교제함에 항상 재력이 있는 사람들과는 멀리하며 사람들의 외롭고 급한 일을 도와준 것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고상한 기절과 한번 한 말은 사람들이 다 믿고 복종했다’고 했다.
문학적 재질이 뛰어났던 그는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지리산을 유람하고 역대의 지리산 유람록 가운데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을 남겼다.

그는 또한 이름난 산을 이곳저곳 많이 유람했는데, 그 가운데 <금강산기행록>이란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양대박의 금강산 유람록"은 비교적 장편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유람록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전편에 걸쳐 그 기록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람의 일정과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묘사는 자세하지만, 자신의
주관적 감정은 가능한 억누른 까닭이다.
양대박은 처음 금강산 유람을 떠나고 싶어했고, 유람을 떠나기 전부터 당대의 이름난 시인 이달(李達)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 양의가 원주목사가 되어 유람을 떠나게 된 때에는 이달이 호남 쪽으로 내려가 있어 시 짓는 벗과 함께 갈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이처럼 시로 당대에 이름이 났으며, 금강산에 시를 짓는 동반자를 원할 정도로 시에 관심이 많았으니, 응당 금강산에서 지은 시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람록에도 그의 시가 제법 들어가 있을 법도 하지만, 자신의 시는 한 편도 수록하지 않았다. 그의 문집인
<청계집>에는 단발령에서 지은 시를 비롯해 금강산에서 지은 많은 시가 있고, 심지어 정양사에서 지은‘정양사(正陽寺)’, 장안사 에서 지은 ‘입장안사(入長安寺)’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람록에는 천일대에서 지은
권근(權近)의 응제시(應製詩),
장안사에서 지은 김시습(金時習)의 시, 정양사에서 지은 성임(成任)의 시 세 수만 수록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장안사에서 지은 김시습의 시를 보자.
소나무와 전나무 우거진 오래된 사찰에,
松檜陰中古道場,
내가 와서 똑똑 선방을 두드리네.
我來剝啄扣禪房.
노승이 선정(禪定)에 드니 흰 구름 자욱하고,
老僧入定白雲鎖,
들녘의 학이 둥지에 깃드니 맑은 운치 빼어나네.
野鶴移棲淸韻長.
새벽녘 해가 떠오를 적엔 금빛 전각이 빛나고,
曉日昇時金殿曜,
차 달이는 연기 날리는 곳에 용이 날아오르는 듯.
茶煙颺處蟄龍翔.
맑고 한적한 곳을 유람한 뒤로는,
自從遊歷淸閑境,
영욕을 마침내 모두 잊어버렸네.
榮辱到頭渾兩忘.

이상과 같이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적 재능에 대해 과시하거나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의 시를 수록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마다, 그리고 불교와 관련된 설화의
불합리성을 만났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비교적 간략하게 그리고 중립적인 측면에서 기술했다.
그만큼 이 유람록은 양대박이 자신의 감정을 가능하면 추스르고 억눌러 지은 것이라 하겠다.
양대박의 <금강산기행록>은 한국문집총간 제53책에 실려 있는 <청계집> 권4를 저본으로 했다.


↑ 금강산 구룡폭포에 있는 상팔담.

2. 유람의 동기와 일정
‘중국 사람들조차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했다’는 말을 양대박도 반복하여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이 부처에게 시주하고 축원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고려국(高麗國)에 태어나 한 번이라도 금강산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하니, 이 산의 명성이 천하에서 중히 여겨졌음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 그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지만, 양대박도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평생의 커다란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

양대박은 지리산의 서편 아래쪽 남원 출신의 인물이다.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일찍이 지리산에 올랐고, 그 밖의 여러 산에 오른
바 있는 그로서는 천하의 명산으로 알려진 금강산에 가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룰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부친이 원주
목사로 나가게 되자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됐다. 그는 이러한 사정을 유람록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침 신미년(1571) 봄에 아버지께서 강원도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가게 되셨다. 원주는 곧 관동지방에 딸린 고을이다. 혼정
신성(昏定晨省)하는 여가에 잠시 우산과 짚신을 챙겨, 한 번 선경(仙境)에 이르면 오래된 소원을 보상받을 수 있으므로 스스로
기쁘고 다행스럽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녹봉에 매어서 출입이 한계가 있고, 세 번이나 본가에 다녀오느라 헛되이 1년을
보냈다. 세상일이 사람을 속박하니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번 손곡(蓀谷) 이익지(李益之: 李達)와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음속에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임신년(1572) 봄 4월에 나는 한양에 있으면서 초주당(草奏堂: 漢吏學館)에서 교감하고 있었는데, 티끌이 눈에 들어가 오래도록
불면증에 걸렸다. 그때 문득 아버지께서 영동 고을로 파견되어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휴가를 청해 성화같이
급히 달려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 있었으니, 이는 천운이다. 이때 이익지는 호남지방을 떠돌고 있어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신세가 되었으니, 예전의 정녕한 약속은 결국 공교롭게도 어긋나게 되었다. 나는 시를 주고받는 벗을 잃었으니,
이번 산행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는 지리산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많은 산을 유람했지만, 그 가운데 금강산을 으뜸으로 쳤다. 그러다가 그가 금강산 유람을
계획한 것은 1571년 아버지 양의가 원주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년이 지난 1572년에
아버지가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준비해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4월 4일 꿈에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거문고 연주자 이성과 함께 출발했다.
4월 4일(기미). 맑음. 거문고 연주자 이성(李誠)이 한양으로부터 와서 배알하여, 함께 행장을 서둘러 꾸려 출발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금은화가 핀 언덕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맑은 시내는 나무를 감싸고 흐르며 여기저기 어지러이 솟은 산은 들판을 에워
싸고 있었다. 시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앉을 만했으며 경관이 맑고 깨끗했다. 마을 사람 서너 명이 먼저 전별연을
준비하여 술자리를 열어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저물녘에 횡성현(橫城縣)으로 가서 묵었다.
그는 유람을 다녀와 이 유람록을 작성하고 맨 뒤에서 ‘이 해(1572) 단양월(端陽月: 음력 5월) 2일에 송암주인(松嵒主人)이 기록
하다’고 했다. 유람록의 내용을 보면 그가 유람을 떠난 일시는 1572년 4월 4~20일 대략 17일간의 기록이다. 유람록은 유람을
마친 뒤 열흘 남짓 기간이 지난 뒤에 지은 것이다. 4월 4일 횡성현에서 시작된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4월 5일 창봉역-삼마현-홍천현
4월 6일 원창역-춘천
4월 7일 청평산-소양강-우두사-환희현-완폭대-운수교-청평사-고량협-남진강-낭천현
4월 8일 산양역-주파현-서운역-김화현-창도역의 역사
4월9일 풍천진-통구현-단발령-풍원-배재-영풍교-장안사
4월 10일 명담-표훈사-안양암-삼일봉-삼일암-대송라암-연화대-소송라암-정진봉-석응봉-선암-안문재-혈망봉-통천혈-귀암
-송라암-분옥계-표훈사
4월 11일 만폭동-세건암-금강담-윤필암-선유담-보덕굴-관음대-성적암-첨선굴-표훈사-천친암-무등재-정양사-진헐대
-천일대-정양사
4월 12일 방광봉-보현재-개심암-개심대-천덕암-원통사
4월 13일 백운재-사자암-화룡담-마하연사-거빈봉-주영암-묘길상암
4월 14일 안문령-진솔암-월계-현종령-성불암-불정암
4월 15일 성불암-유점사-산영루-개복대-단풍교-장항-구재-사자천-발연사-구룡동-소인곶-경고
4월 16일 구곡계-삼준령-명파역-무송대-명사-열산현-간성군
4월 17일 영월루-진부원-이수정-진부령-사담암-남교역
4월 18일 한계산-원통역-인제현-마노역-천감의 역사
4월 19일 사미정-삼마현-창봉역-횡성현
4월 20일 원주-월송정

(주: 이 일정은 경상대 금강산유람록 번역팀의 번역에 의함)
원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간 유람이었기에 원주 근처 횡성에서 출발해 원주 월성정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은 비교적 빡빡했다. 아버지는 일정이 조금 느긋했고, 젊은 그의 일정 가운데 4월 10일은 명담을 거쳐 표훈사에서부터 안양암-삼일봉-삼일암-대송라암-
연화대-소송라암-정진봉-석응봉-선암-안문재-혈망봉-통천혈-귀암-송라암-분옥계를 지나 다시 표훈사에 이르는 17곳을 구경했다.
이튿날에도 만폭동에서부터 시작해 세건암-금강담-윤필암-선유담-보덕굴-관음대-성적암-첨선굴-표훈사-천친암-무등재-정양사-
진헐대-천일대를 거쳐 정양사에 이르기까지 15곳 정도를 구경했다.
이처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많은 곳을 유람한 까닭은 금강산에 워낙 볼거리가 많아 정해진 일정에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한 것이었다. 금강산 유람에 이처럼 매달렸던 것은 금강산을 평생 한 번 가기도 어렵거니와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에 매료되어서일 것이다.

↑ 금강산 외금강 수정봉 정상에서 본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

3. 뛰어난 경치의 묘사
명산으로 많은 산봉우리와 산골짜기를 품고 있는 산이라 해도 구경거리는 한계가 있다. 지리산이 덩치가 커도 가볼 곳은 몇 개의
골짜기이며, 설악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금강산은 그 유람 코스도 다양하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산과 골짜기와 바위와
절을 만나게 된다. 다음 양대박이 기록한 그의 유람록 첫머리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금강(金剛)’이라는 이름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불경에 ‘3만 리 떨어져 있는 발해(渤海)에 금강산이 있는데
부처가 모이는 곳이다’고 했고, 또 ‘금강이란 사람이 금을 먹어 끝내 소멸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하다면 산의 뼈대는 또한
굳센 기운이 모인 것이니, 천지가 없어진 뒤에도 여전히 썩지 않을 것이다’고 했으니 두 설이 모두 근거한 바가 있다.
금강산의 이름은 여섯 개가 있으니, 금강산(金剛山)·개골산(皆骨山)·풍악산(楓嶽山)·기달산(山)·열반산(涅槃山)·중향산
(衆香山)이다. 겹겹의 산등성이와 첩첩의 고개는 산의 겉과 안을 가로막고, 큰 물결이 앞뒤에서 성대하게 흐른다. 이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바위와 계곡을 뚫고 새나 넘을 수 있는 험난한 길을 부여잡고 오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 열흘 동안 힘들게 간 뒤에야 비로소 신선이 사는 땅으로 통한다.
스스로 초연히 세상을 버리고 멀리 가서 돌아보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비록 산을 좋아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끝내 산을 오를 수 없다. 금강산 안에는 총림(叢林) 네 개와 정사(精舍) 108개가 있다. 그 나머지 산사(山寺)의 세찬 폭포, 아름다운 골짜기의 기이한 바위는 다 기록할 수 없다.

불경에 있듯이 속세에서 3만 리 떨어진 곳에 금강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남원에서만 가자고 해도 꽤 먼 거리여서 쉽사리 가기가 어렵고, 또 1만 2,000봉이라 일컬어지는 금강산의 수많은 산과 골짜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두고 구경한다고 해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산과 골짜기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사찰 등 인공적인 것도 많다. 그는 금강산 안에 총림이
네 곳, 정사는 108곳이 있다고 했으니, 금강산에 안겨 있는 사찰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양대박이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에 대한 반응은 금강산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단발령에서부터 이어진다.
그는 단발령(斷髮嶺)에 올라 그 유래에 대해 “이 고개에 오르는 세상 사람들이 금강산을 바라보면 모두 머리를 깎고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고, 그곳에 오른 감회를 “지금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니, 만일 몸에 깃털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어찌 진경(眞境)에 이를 수 있겠는가? 지팡이에 의지해 몰두하여 바라보니 즐거워서 갈 길을 잊었다”고 했다.

초입에서 이미 그곳의 뛰어난 경치에 매료되어 “별천지는 깊고 바위는 기이하고 장대하며, 떨어진 꽃잎이 물을 따라 인간 세상을 향해 흘러가니,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멀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단발령과 근처 장안사 골짜기 입구의 경치를 보고 무릉도원이 멀지 않다고 했다. 이렇게 망고봉을 거쳐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毗盧峯)에 올랐을 때의 그의 감회는 매우 깊었다.
가장 높은 정상에 이르고 나니 사방이 훤히 트여 둥근 세계 속에 만물이 있어서 한눈에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가물가물하고 우주는 아득하여 분명하지 못했다. 법령이 이 산의 정보를 자못 알고 있어서 나를 돌아보며 가리켜 보여 주어,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다.
바로 북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공손히 하늘을 받들고 있으며 우뚝하게 표지를 세워 태을(太乙)과 이웃하고 있는 것이 비로봉이다. 비로봉 허리 아래에 층층의 산이 두르고 벌여서, 북쪽을 향해 에워싸며 호위하고 있는 것이 또한 수천 봉우리인데, 이것을
통틀어 중향성(衆香城)이라고 한다. 이 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 혹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작은 티끌도 일지 않고 햇빛이
흩어져 비추니, 완연히 얼음산이 높이 솟아 쌓여 있던 눈이 처음으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다시 곤륜산(崑崙山)이 어지럽게 무너지는 듯이 백옥(白玉)이 빼어남을 다투니, 참으로 천지 사이에 기이한 모습이다.

중향성봉 동쪽에 국망봉(國望峯)·원적봉(圓寂峯)·수미봉(須彌峯)·법왕봉(法王峯)·가섭봉(伽葉峯)·선암봉(船巖峯)·만경봉(萬景峯)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대단히 웅장하고 빼어났다. 선암에서 조금 내려오니 또 영랑재(永郞岾)와 웅호재(熊呼岾)
두 고개가 있었다. 여기에서 올라가면 비로봉 정상에 이를 수 있고, 내려가면 사선동(四仙洞)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정동쪽에는 월출봉(月出峯)·일출봉(日出峯) 두 봉우리가 있다. 참으로 이른바 해와 달이 도는 높은 표지로서 하늘과 다섯 자 떨어진 곳이라 하는 곳이다.

안문재(雁門岾)를 지나 우뚝하게 솟은 것이 혈망봉(穴望峯)이다. 봉우리의 높고 뛰어나기가 망고봉(望高峯)과 나란하다. 혈망봉 허리에 구멍이 있는데 등까지 뚫려 있으며 이름은 통천혈(通天穴)이다. 바라보니 마치 대롱으로 엿보는 듯하다. 두보(杜甫)가
이른바 “화살 오늬만 한 하늘로 통하는 문 하나가 있네.[箭栝通天有一門]”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인 듯하다.
금강성(金剛城) 남쪽 가에 봉우리 열네 개가 있으니, 부도봉(浮圖峯)·층상봉(層床峯)·송라봉(松蘿峯)
·원통봉(圓通峯)·백마봉(白馬峯)·미륵봉(彌勤峯)·
시왕봉(十王峯)·사자봉(使者峯)·백탑봉(白塔峯)·
반야봉(船若峯)·석가봉(釋伽峯)·천불봉(千佛峯)·
나한봉(羅漢峯)·천등봉(天燈峯)이다.
망고봉 남쪽으로는 천등봉이 가장 높다.
오로봉(五老峯) 아래에는 층층의 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옥같이 아름다운 나무가 가리고 이지러져 있어서 한 굽이 신선세계의 근원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한데, 이곳이
바로 시왕동의 물줄기이다.

금강대(金剛臺) 서쪽에 보현봉(普賢峯)·윤필봉(潤筆峯)·향로봉(香爐峯)·사자봉(獅子峯)·담무갈봉(曇無竭峯)·오현봉(五賢峯)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봉우리 형세가 차츰차츰 낮아져 허리 아래로는 어슴푸레 보였다. 그 밖에 바위인 듯, 봉우리인 듯한 하나
하나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은 아무리 교력(巧歷: 산수(算數)와 역법(曆法)에 통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몸을 돌아보니 이미 층층의 허공 밖으로 나와서 오히려 동쪽으로는 양곡(暘谷: 해가 뜨는 곳)을 바라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우연(虞淵: 해가 지는 곳)을 가리킬 수 있지만, 가물가물한 기운이 하늘까지 이어져 눈의 힘이 쉽게 다해, 다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유람을 떠나기 전 금강산에 대해 수많은 산과 골짜기, 그곳 산사의 세차게 흐르는 폭포, 아름다운 골짜기의 기이한 바위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했던 생각을 낱낱이 확인하며, 여기에 언뜻언뜻 자신의 느낌을 덧붙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비로봉에 올라 한눈에 금강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금강산 전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곳곳 마다의 경치에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그 감회를 간략히 말했다. 만폭동에 대해서는 “은빛의 성과 같은 바위와 하얀 절벽이 좌우에 층층이 서 있고, 백 길의 폭포가 하늘 밖까지 천둥소리를 냈다. 깊은 것은 못이 되고 얕은 것은 여울을 이루었으며,
흘러서 소용돌이가 되고 떨어져서 폭포가 되었다. 마음이 놀라고 눈이 어지러워 주의하여 볼 수가 없으니, 조화의 교묘함은 여기에서 극치를 다했다”고 했다.
보덕굴에 이르는 경치에 대해서도 “층층의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고, 석벽에는 길이 없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구리 기둥을
세우고 허공에 건너질러 집을 걸쳐놓았다. 아로새기고 아름답게 꾸며진 집이 구름 끝으로 나는 듯했다. 바라보니 마치 산신령이
살아 있는 그림을 바친 듯하고, 바다에 뜬 신기루가 고운 빛을 내는 듯하여 사람을 놀라고 감탄하게 하니, 나도 모르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했다.
개심대(開心臺)에 이르러서는 “서쪽에 개심대가 있는데 지극히 높고 시원했다. 멀고 가까운 봉우리와 높고 낮은 시내를 모두 볼 수 있었다. 느긋하게 걸어 올라가 구경을 하니 가슴속의 응어리를 충분히 씻어낼 만했다. ‘개심’이라는 이름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 <청계집>권4에 수록된 금강산기행록.

4. 유람을 마친 뒤의 감회
금강산 최고봉 비로봉에 올라 조화의 교묘함이 여기에서 극치를 다했다고 감탄해 마지않았고, 보덕굴, 개심대 등 절경을 만날 때마다 그 뛰어난 경치에 넋을 빼앗겼던 그는 4월 20일 17일간의 유람을 마치고 원주로 되돌아 왔다.
원주로 돌아와 보니 가뭄이 심하여 밭두둑이 갈라지고, 백성들은 끼니를 굶는 등 관내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고, 원주목사인 그의 아버지는 유람한 것을 후회한다고 전했지만, 양대박 자신은 이에 대한 후회보다는 유람의 감흥이 너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기 전에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에 대해 선유들의 기록을 보고 금강산 유람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다. 그는 “내가 일찍이 이곡(李穀)의 <유산기(遊山記)>를 본 적이 있다. 망고봉(望高峯)은 시왕동의 북쪽에 있는데 높이 반공중에 솟아
있어서, 발아래 수천수만 개의 봉우리를 하나하나 가리킬 수 있으며, 절벽은 가파르고 길은 끊겨서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이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때문에 험난함을 잊고 그 봉우리에 오르고자 한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했다.

나는 삼생(三生)의 천한 선비라서 세상사는 데 걸리는 일이 많다. 인생에서 바람과 파도가 만 리나 이어져 스스로를 물이 말라
헐떡이는 물고기처럼 곤궁하다고 여겼다. 단지 하찮은 재주에 옷자락을 끌고 깨진 벼루로 구차히 밥을 벌어먹으면서, 동방의
속세에 파묻혀 항상 우물 안 개구리의 허물을 끌어안고 산 지가 오래 됐다. 바다 위의 신비로운 산이 하늘 밖으로 아득하고,자라 등 위에서의 바람과 안개는 인간 세상과 큰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니, 큰 바람을 타고 붉은 안개를 넘어 상청(上淸)을 오가는 것이 어찌 다생(多生: 중생)의 오랜 소원이 아니겠는가?
망고대에 올라서는 태극(太極)을 엿보고 홍몽의 세계를 굽어보니, 하늘과 땅의 끝이 마음속에 있었다. 불정대에 올라서는 부상(扶桑)에 공손히 손을 맞잡아 예를 표하고 귀허(歸墟: 바닷속에 있는 큰 골짜기)에 인사하니, 석목(析木: 우리나라 동북쪽 지역
을 가리킴)과 청서(靑徐: 우리나라 동쪽 지역을 가리킴)가 모두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자재(子才)가 강남을 삼켰다는 말과 공자(孔子)가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가르침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그는 금강산 유람이 십수 일 간의 짧은 유람이었지만 가슴속이 시원하여 찌꺼기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를
‘페르시아 상인이 파는 귀한 보배와 같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여러 산 가운데 금강산이 최고였다고 강조하여 말했다.
나는 일찍이 산수에 노닐 맹약을 하고 더욱이 방외의 유람을 탐내어 우리나라 이름난 곳을 모두 찾아가보았다. 두류산(頭流山)을 감상했고,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했으며, 천마산(天磨山)을 대략 돌아보았고, 복정산(覆鼎山)을 찾아다녔으며, 재악산(載岳山)을
밟아보았고, 운문산에서도 팔을 내저었으며, 뭇 신선이 모이는 곳과 고승(高僧)이 사는 곳을 끝까지 찾아보고 내키는 대로 돌아 다녔다. 그러나 금강산에 비하면 바람이 아래에 부는 것과 같이 낮은 곳에 있어서 같은 등급으로 말할 수 없다.

그는 두류산, 가양산, 천마산, 복정산이라 불리는 삼각산, 재악산, 운문산을 두루 밟아보았지만 금강산에 비하여 한참 아래 수준 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유람록을 남기는 것은 “영동 지역은 한양과 수백 리나 떨어져 있지만, 사막이나 약수(弱水)의 제약이 없어서 속세의 이끌림을 많이 받는다. 화택(火宅: 이승)에서 늙어 죽는다면 애석하리라. 내가 이 때문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
하여 내보이니, 뜻을 지녔으면서도 아직 가보지 못한 자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이다” 하며,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볼 것을 권유 했다.
금강산에 가보지 못하고 죽으면 너무 애석하다고 하며, 가보지 못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이 글을 짓는다고 했는데,
아마도 혼자 보기는 너무 아까웠던 것이리라~!

☞ 글: 사진 윤호진 교수(경상대학교 한문학과)의 월간 山 "명산유람록" 중에서..

출처 블로그 휘뚜루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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