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cafe.daum.net/gentlemoon/JEdG/304979?svc=cafeapp1. 대부의 광전사, 권응수
- 영천성 전투 당시의 기록 -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安東)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朴晋)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해(申海)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鄭天賚)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級)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나머지는 차등있게 상직(賞職)이 주어졌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10번째 기사
- 안덕원 전투 당시의 기록 -
왜노들이 전주(全州)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安德院)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맞혀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강한집』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포저집』
- 이치 전투 당시의 기록 -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위대기(魏大奇),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고개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조위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 라고 썼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연려실기술』
- 수원 전투 당시의 기록 -
척후(斥候)로 전방에 나가 있던 중에 적을 만나 역전(力戰)을 벌이고 나서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충청도 조방장(忠淸道助防將)이 되었고, 계사년(癸巳年) 봄에는 본도(本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 황진이 활솜씨 뿐만이 아니라 근접전과 기창술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 단기로 돌진하여 조경을 구하다 -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난중잡록』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鄭起龍)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趙儆)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判官)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才略)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牧民)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尙州)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判官)을 목사(牧使)로 올리면 다시 판관은 낼 필요가 없다.’ 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5일 을묘 1번째 기사
▶▶ (행장 제외)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기룡의 무용, 확실히 능력이 뛰어난 장수인 건 맞는 듯
- 앞장서 적들의 목을 베어 공훈을 올린 정기룡 -
(1) 도원수 권율이 한명련과 정기룡의 공을 치계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한명련(韓明璉)과 정기룡(鄭起龍)이 합세하여 우도(右道)의 왜적을 나포해서 벤 19급(級)을 전부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게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13일 무진 6번째 기사
(2) 마귀 제독이 언급한 정기룡의 공로
상(임금, 선조)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나 서운합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들었고 또 재략(才略)도 없으니 여기 있어야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중원에는 호걸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이 나오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변보(邊報)를 듣건대, 지난 3월 24일 정기룡(鄭起龍)이 적 24명의 목을 베었다 하고, 또 나의 가정(家丁)들도 고군(孤軍)으로 적의 수급 23개를 베었다고 하며, 또 진주(晉州)의 적과 싸울 때도 70여 수급을 베었을 뿐 아니라 마필(馬匹)도 그에 상응하게 노획했으며 조선인을 쇄출(刷出)한 것도 1백여 인에 달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일 도산(島山) 싸움에서도 적들은 내성(內城)만 지키고 있으면서 외성(外城)이 깨졌는데도 구어(救禦)에 뜻이 없었으며, 행장(行長) 역시 제 진만 굳게 지켰을 뿐 원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로 미루어 볼 때 적을 평정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3일 정사 4번째 기사
- 명나라에게 인정받다 -
(1) 마귀 제독이 믿을 수 있는 용장으로 정기룡을 논하다.
마 제독(마귀)이 말하기를,
"만약 저들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마땅히 대병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鄭起龍), 김응서(金應瑞), 한명련(韓明璉)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그리고 김응서를 불러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1일 을미 3번째 기사
(2) 마귀 제독이 조선 제일의 명장으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정기룡을 논하다.
"근일 남쪽 소식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임금, 선조)이 말하기를,
"수로(水路)의 보고를 들으니, 진 도독(陳都督) 대인이 상당히 참획하였는데 소방(小邦)의 수군도 황제의 위엄을 힘입어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자, (마귀)제독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 정기룡(鄭起龍), 한명련(韓明璉), 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예단을 올렸으나 받지 않았다. 상이 작별하고 나왔다.
『선조실록』 103권, 선조 31년 8월 15일 무진 1번째 기사
(3) 유격 모국기가 정기룡과 이운룡을 언급하다.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대인께서 해상에서 오셨으니 적의 정세에 대해 들은 것이 없소이까?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라외다."
하자, (모국기)유격이 말하기를,
"지금 수길(秀吉)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군사를 훈련한다고 하니 수년 사이에 병화가 그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귀국에서 적당한 인재를 장수로 임명하여 전수(戰守)하는 계책을 강구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가 올라올 때 고령(高靈) 등처를 살펴보니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서 기근이 대단히 심하고 매우 허술하였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지난번 울산의 적은 제가 후진(後陣)에서 막았기 때문에 예봉(銳鋒)이 경성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심으로 감사하외다."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상께서 해상에 대해 진념하시어 병선을 많이 만드신다면 적이 염탐하고서 반드시 방비(防備)가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의 수로 총병(水路總兵) 이운룡(李雲龍)과 육로 총병(陸路總兵) 정기룡(鄭起龍)은 두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것은 이 두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부하여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하외다."
하였다.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2일 무진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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