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아침이다.
봄의 꽃향기가 그윽하게 담겨 있는 바람내음이 상쾌하다.
금오(량금오,梁金烏)는 통시(뒷간)에 앉아서 시원하게 볼 일을 보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털이 까만 돼지가 바닥에 떨어진 누런 대변을 맛있게 먹다가 혀로 시원하게 항문 주위를 핥아준다. 돗통시에서 바라보는 탐라(耽羅)의 파란 하늘과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삼월 초하루다.
오늘은 매년 한 번씩 열리는 아지발도 선발일이다. 탐라에서는 15세가 되면 모든 남정네는 군역의 의무가 생긴다. 이웃나라 신라와 마찬가지로 15세에서 60세까지는 군대를 가거나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다.
아지발도는 어리다는 아지(강아지,송아지 등)와 용감하다, 영웅 등을 일컫는 탐라말인 발도를 합친 말로 소년영웅을 뜻한다.
아지발도 선발 대회는 군역에 임하게 되는 15세 소년들을 대상으로 4개 종목의 경기를 개최하여 그 1위에게 각각 아지발도라는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무예와 힘을 숭상하는 전통을 만드는 것으로써 수백 년 전부터 매년 개최된 역사 깊은 대회이다.
바다에서 개최되는 1개 종목과 육지에서 개최되는 3개 종목에서 각기 아지발도가 선발되는데, 바다종목의 우승자는 수달(水達)아지발도, 일반 활쏘기 종목의 우승자는 보사(步射)아지발도, 말위에서 쏘는 활쏘기의 우승자는 기사(騎射)아지발도, 그리고 씨름에서의 우승자는 삼손(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삼손과 같은 맥락으로 힘의 장사를 뜻하는 탐라말이다)아지발도라 부른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최선을 다하면 되느니라.”
량주형(梁柱兄)은 아지발도 대회에 출전하는 막내아들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나이가 오십대 중반인 량주형은 탐라의 성주(星主)이다.
량주형에게는 첫째 부인인 고씨 부인에게서 다섯,둘째 부인인 량씨 부인에게서 다섯, 모두 열 명의 장성한 아들들이 이미 있었으므로 어미 없이 자란 막내 아들은 그저 애틋할 뿐이었다. 금오의 어머니는 황해용왕의 따님인 구랭이꽃(龍花)이었으나 금오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
“예, 담담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금오(金烏)는 부친에게 예를 올리고 오전에 수달아지발도 경기가 진행되는 바닷가로 향했다.
“주군. 잡것들과 승부를 겨루는 것이 다소 민망하오나 탐라의 전통이라 하니 일단 최선을 다해 임하여 주십시오.”
양사부(楊師父)와 궁사범(弓師範)이 옷을 모두 벗고 바닷가 경기장에 들어가는 금오를 향해서 읍(揖)하면서 군례(軍禮)를 올렸다.
양사부와 궁사범은 금오의 어미인 구랭이꽃(龍花)이 금오가 네 살 때 병으로 죽자, 황해용왕이 금오를 보살피고 교육시키고자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금오는 이들과 같이 최근 몇 년간은 당나라, 왜국, 신라 등으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돌아다녔으므로 탐라에서는 금오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楊)사부는 발해(渤海)제국 사람으로 사십대 중반의 나이이다. 십대 약관의 나이에 당나라의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제도)에서 판수(板首,장원급제)하고 당에서 20여 년간 벼슬을 한 수재이다.
궁(弓)사범은 이십대 후반 나이의 신라 사람이다. 토산(兔山)의 용맹한 궁(弓)씨라는 이름으로, 무예로는 세간에서 알아주는 궁씨 가문의 무술 일인자이다.
두 사람은 황해용왕이 신뢰하는 황해용왕 수하의 문무(文武)의 일인자 들이며, 수십 년간의 거란과의 싸움으로 나라와 아들들을 모두 잃은 황해용왕이 마지막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보낸 사람들로 지난 십여 년간 금오를 문(文),무(武) 양면에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교육하였다.
“아지발도 선발전을 시작한다.”
성주(星主) 량주형이 단 위에 올라 대회 시작을 선포하였다.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 제창.”
성주(星主) 량주형이 선창(先唱)을 하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량씨 천손(梁氏 天孫)”
“영세불망 은(永世不忘 恩)”
“량씨 탐라 주인(梁氏 耽羅 主人)”
“만세 만세 만만세(萬歲 萬歲 萬萬歲)”
모든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는 구호와 만세삼창이 커다란 함성이 되어 넓은 탐라해변에 울려 퍼졌다.
영세불망맹세는 탐라의 모든 행사에서 제창되는 구호이다.
고쿠리(고구려,高句麗)가 삼백여년 전에 망했을 때, 안시성주(安市城主) 량만춘(梁萬春)은 휘하의 백성들과, 의형제인 부여말갈(扶餘靺鞨,낮추어 불러 불열말갈拂涅靺鞨이라고도 한다.)의 왕인 걸걸대형(夫大兄)의 백성들과, 연개소문의 학살을 피하여 안시성으로 도망 나온 영류태왕의 태자 고환권(高桓勸)의 일족들을 모두 고쿠리(高句麗) 수군을 동원하여 탐라로 이주시켰다.
이 때 량만춘 성주가 이들을 탐라로 이주시키지 않았으면 이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죽거나 노예가 되는 비참한 형편에 처하였을 것이다.
탐라에 천년 이상을 살고 있던 천손 량씨(天孫 梁氏)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같이 살도록 해주었다. 이 은혜를 길이 기리기 위하여 이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를 만들었고 행사 때면 언제나 제창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원래 량씨(梁氏)만 살던 탐라 섬에 이때부터 걸걸(夫)씨와 다까(高)씨가 같이 살게 되었다. 걸걸(夫)씨는 부여말갈(扶餘靺鞨) 사람들로 용맹한 기마부족이다. 안시성 바깥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탐라에서는 부여말갈 왕(王)의 성(姓)을 따서 모두 걸걸(夫)씨 성을 쓰게 되었다. 안시성의 백성들과 고쿠리 수군들은 모두 고(高)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탐라말로 높을 고(高)를 다까라고 부르므로 다까씨(氏)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만 영류태왕의 태자 고환권(高桓勸)의 일족들인 고쿠리 왕족들은 자신들을 고(高)씨라고 불러 일반 백성 다까씨들과 차별화 하였다. 량만춘 장군은 자신의 칭호인 성주(城主)를 성주(星主)로 바꾸어 탐라의 수장(首長) 호칭으로 정하였고, 고쿠리 왕족들의 대표를 왕자(王子)라고 불러 예우해주었다.
량만춘장군은 성주(星主)는 탐라 주민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선포하고 실제로 2대 성주로 부여말갈(扶餘靺鞨)의 왕(王) 걸걸대형의 아들 걸걸사우를 성주(星主)로 지명했다. 그러나 걸걸사우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며 곧 사임하고 성주(星主)는 천손 량씨(天孫 梁氏)의 자리임을 선포하였다. 이후로 량씨(梁氏) 대표들이 모여 량씨(梁氏)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자를 성주(星主)로 세우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삼백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선출된 자는 문제가 없으면 육십 세까지 성주 직을 수행하고 다음 성주를 선출하게 된다. 지금 성주 량주형도 이십대 초반에 성주로 선출되어 삼십여 년 동안 성주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수달아지발도를 뽑기 위한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 방법은 수영으로 바다를 헤엄쳐 300장(약 900미터)거리의 다섯 길(약 15미터) 깊이 물속에 있는 돌거북이를 가지고 육지로 먼저 돌아오는 자가 승리자가 되는 방식이다.
돌거북이는 다섯 개가 물속에 있는데 각기 크기와 무게에 차등을 두어 먼저 도착한 자가 가벼운 돌거북이를 가져 오면 되므로 먼저 목표점에 도달한 자가 절대 유리한 방식이다.
수영 실력과 지구력, 힘 등을 동시에 평가할 수 있는 방식이다.
수달아지발도대회의 결선에 오른 열다섯 살 먹은 소년들 이십 명이 해변의 출발선 앞에 벌거벗고 횡대로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물(陽物)만 봐도 성씨(姓氏)를 알겠다.”
해변을 둘러싼 백성들 사이에서 수군수군 탄성이 들렸다.
결선에 오른 20명 중에 다까(高)씨가 13명 걸걸(夫)씨가 3명 량(梁)씨가 4명이다. 다까씨는 조상들 중에 고쿠리 수군 출신들이 많아 아무래도 바다에 익숙하고 현재도 전복, 소라 등 해산물 채취에 종사하는 인원이 많아 당연히 많은 인원이 결선에 올랐다.
현재 탐라의 인구 비율로 봐도 다까씨가 육할, 량씨가 삼할, 걸걸씨가 1할 정도였다. 그외에 고쿠리(高句麗)의 왕족 출신인 소수의 고(高)씨가 귀족을 자처하며 왕자(王子)직을 세습하며 있었는데, 고(高)씨는 대체로 기골이 장대한 편이라 다른 성씨보다는 머리 하나는 더 큰 특징이 있었다.
결선에 오른 만큼 20명 모두 체격이 우람한데, 양물(陽物)은 다까(高)씨가 가장 작고 걸걸(夫)씨가 그 다음,그리고 량(梁)씨가 가장 크다.
그중에서도 량금오(梁金烏)의 양물(陽物)은 다른 소년들의 두 배 정도로 커서 단연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
탐라의 성(性) 풍속은 담백하고 솔직해서 별로 금기사항이 없었다. 이번 행사는 탐라백성 거의 전부가 나와 보는 큰 행사인데, 특히 아낙들이 총각들의 양물들을 보며 침을 꼴깍 꼴각 삼키고 있었다.
“쾅!”
출발을 알리는 쇠북소리와 함께 20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바당(바다의 탐라말)으로 뛰어 들었다.
모두 개구리헤엄으로 열심히 목표 깃발을 향해 헤엄쳐 가는데, 유독 빠른 선수가 있었다.
탐라에서는 헤엄이라면 개구리헤엄 밖에 모르는데, 이 선수는 특이한 방식으로 빠른 속도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요즘 영법으로는 자유형인데, 량금오였다.
섬나라 왜국에서 이 영법을 배운 것이다. 수영 속도가 두 배 정도 차이가 나며, 량금오는 다른 선수들이 절반 정도 갔을 때 이미 목표점의 깃발에 도착하였다.
량금오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바당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5길(약 15미터) 물속에는 다섯 개의 돌거북이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크기 차이가 제법 컸다.
금오는 그중에서 가장 작은 돌거북이를 가볍게 안고 바당 속 바닥을 발로 박차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수면에 오르니 열심히 헤엄쳐오는 선수들이 보였다. 개구리헤엄 치고는 놀라운 속도들이었다.
금오는 양손으로 돌거북이를 들고, 개구리헤엄으로 천천히 육지의 출발점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승부는 가려진 것이었다.
금오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출발점에 도착하여 돌거북이를 들고 아버지인 성주(星主) 량주형 앞으로 가서 예를 표하였다.
“수고했다. 저쪽에서 옷을 입고, 나머지 선수들이 들어올 때까지 쉬고 있어라.”
량주형이 애써 기쁜 표정을 감추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성주님. 하례드리옵니다. 성주님 아들이 아니옵니까.”
량주형 옆에 있던 왕자(王子) 고자견(高自堅)이 과장된 표정으로 성주에게 하례를 했다. 고자견(高自堅)은 속으로는 복잡한 심경이었으나 역시 고쿠리 왕족 출신답게 예절과 처신에 능했다.
“량씨가 수달아지발도가 된 것이 몇 년 만인가?”
물에 능숙한 다까씨가 대부분 차지하던 수달아지발도를 량씨가 그것도 성주의 아들이 당당히 차지했다.량씨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다른 성씨의 백성들도 당당한 승부 앞에 진실로 축하를 보냈다. 탐라인은 강한 자를 숭상하는 솔직하고 좋은 풍습이 있어 시기(猜忌)보다는 진정한 축하를 보내는 것이 진실로 느껴졌다.
오시(午時,오전11시-오후1시)에 보사(步射)아지발도 대회가 시작되었다.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탐라에서도 점심을 먹지 않으므로 이제부터 육지아지발도 선발전 3대회가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
보사(步射)아지발도 대회는 40장(120미터) 밖의 과녁에 10발의 화살을 쏘아 그 점수를 가리는 방식이다. 과녁은 가로, 세로 각기 1장(3미터) 크기인데 점수를 가리는 원이 둥글게 그려져 있다. 원은 모두 10개인데 가운데 10점원은 지름 2치(약 5cm), 9점원은 지름 4치(약 10cm)정도로 매우 작았다.
40장(120미터)거리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크기인데도 탐라인들은 눈이 아주 좋아 표적을 읽어낸다. 특히 량(梁)씨들이 선천적으로 눈이 더 좋은 편이다. 그래서 활쏘기대회 중 보사(步射)아지발도 대회에서는 량씨들이 우승을 대부분 차지했다.
예선을 통과한 10명의 사수가 10개의 과녁 앞에 각기 섰다. 심판관이 큰 소리로 하나에서 다섯을 세는데, 그 사이에 활을 쏘아야한다.
실제 전투에서는 속사(速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각기 풀을 뜯어 뿌리며 바람의 방향을 가늠했다. 탐라의 바람은 사납고 방향을 종잡을 수 없으므로, 활쏘기에서 바람을 예측하여 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쾅!”
쇠북소리가 울리며 심판관이 큰 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넷이요.”
“다섯이요.”
사대(射臺)의 선수들이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보통 심판관이 ‘셋이요.’를 외칠 때 화살을 날렸으나, ‘하나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과녁 정 중간에 깊이 박히는 화살이 있었다.
량금오(梁金烏)의 화살이었다.
선수들은 대부분 커다란 목궁(木弓)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금오의 활은 각궁(角弓)이었다.
탐라는 덥고 습한 기후라 각궁의 아교풀이 녹아서 실제 전투시 어려운 처지에 처할 수 있어서 대체로 목궁을 사용하고 있는데 탐라의 왕벚꽃나무나 물푸레나무로 만든 목궁도 그 성능은 상당했다.
고쿠리(高句麗)의 각궁(角弓)은 강하고 정확하기로 유명한 무기였으므로 탐라에 온 이후에도 활의 장인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이윽고 남쪽지방에서만 나는 황칠을 10번 이상 칠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습기와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제작과정이 어렵고 재료들이 고가라 널리 쓰이는 활은 아니었다.
금오의 활은 일반 각궁의 2배의 굵기와 탄성을 가지고 있어 일반인들은 절반도 당기지 못하는 강궁(强弓)이었다. 활에 일가견이 있는 궁(弓)사범이 최고의 장인에게 부탁하여 제작한 황금 10량(375g)짜리 비싼 활이다.
금오는 궁사범과 같이 10년 가까이 작은 활에서 시작하여 이 강궁(强弓)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거듭해왔으므로 능숙하게 이 강궁(强弓)을 다루었다. 특히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경우 각궁(角弓)이 목궁보다 훨씬 작으므로 기사(騎射)에 유리했다.
화살은 육량시(六兩矢)를 사용했다. 보통 사용하는 화살은 3량(100그램 정도)무게의 화살인데 그보다 두 배가 무거운 화살이다.
강한 활에 무거운 화살을 사용하면 빠르게 바람에 날리지 않고 목표물을 강타할 수 있다. 다만 강한 팔 힘과 오랜 수련이 필요하다. 야생마를 길들일 때 야생마가 제 주인임을 인정하고 굴복하는 과정과 같이 강궁이 제 주인임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10개의 금오의 화살이 모두 과녁의 한복판에 깊숙이 꽂혔다.
“만점이요.”
표적을 확인한 심판관이 신이 나서 외쳤다.
열 개의 화살이 모두 과녁 중간 10점원을 맞추는 만점은 심판관도 처음 보는 것이다.
보사(步射)아지발도도 량금오(梁金烏)의 차지였다.
미시(未時,오후1시-3시)에 기사(騎射)아지발도대회가 시작되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다섯 개의 과녁에 활을 쏘는 방식이다. 이 대회에서는 섬인구의 1할 정도인 걸걸(夫)씨들이 대부분 우승했었다.
기마전의 명수인 부여말갈인의 후예인 것이다. 한자로 표기할 때 말갈(靺鞨)은 가죽신 靺,가죽버선 鞨을 쓰고 있으나 이는 중국인들이 비하해서 쓰는 문자이며, 실제로는 자신들을 몽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몽골이란 용감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금오를 당할 수는 없었다.
“만점이요.”
금오의 과녁을 확인한 심판관이 신이 나서 외쳤다.
보사(步射)아지발도와 기사(騎射)아지발도를 량금오(梁金烏)가 모두 차지했다. 그것도 모두 만점으로.
“보사(步射)아지발도와 기사(騎射)아지발도를 모두 우승하면 궁복(弓福)아지발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60여 년 전 사해(四海)를 평정했던 영웅 장보고(張保皐)장군이 궁복(弓福)아지발도가 되시어 량궁복(梁弓福)이라고 불린 이후 궁복(弓福)아지발도 탄생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심판관 수장을 맡고 있는 다까만치(高慢治)가 탐라의 지도자(성주,왕자,촌장 등)들이 모여 있는 연단 앞에서 기록을 보며 설명했다.
“ 보사(步射)아지발도와 기사(騎射)아지발도 그리고 삼손아지발도를 모두 우승하면 호랭이(虎)아지발도라고 부르게 됩니다.100여년 전에 량호(梁虎)라는 분이 있었다고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수달(水達)아지발도까지 4개 종목을 모두 한 사람이 우승하면 용호(龍虎)아지발도라고 부르며, 150여년 전 신라 남원경(南原京)의 수장(首長)인 남원부백(南原府伯)이 되신 대영웅(大英雄) 량우량(梁友諒)공(公)이 용호(龍虎)아지발도가 되신 것이 지금까지 유일한 사례입니다.”
이미 3개 종목을 우승한 량금오(梁金烏)가 삼손아지발도까지 차지하면 150년 만에 용호(龍虎)아지발도가 나오게 된다. 탐라 섬의 각 성씨들은 각자 특기로 하는 종목이 있으므로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2개 종목을 한 사람이 우승하는 일도 극히 드믄 일이었다. 4개 종목을 모두 한 사람이 우승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신시(申時,오후3시-5시)에 씨름판에서 삼손아지발도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미 며칠간의 예선을 거쳐 4명의 선수가 결선에 올라 있었다. 제비를 뽑아 상대가 정해졌다.
량금오(梁金烏)는 다까온다르와 준결승을 치루게 되었다. 6척5촌(6尺5寸,약195cm)의 기골이 장대한 거인이다. 고쿠리의 바보온달 이야기에 나오는 온달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온달은 온다르족을 말하는데 온다르족은 북방 부리야트 지방에 사는 족속이었는데 장대한 체구로 유명하다고 한다. 원래 사람은 북쪽으로 갈수록 체구가 커지고 힘이 센 특징이 있다. 호랭이(虎)도 북쪽 호랭이가 남쪽 호랭이보다 훨씬 컸다.
량금오(梁金烏)의 키는 5척3촌(5尺3寸,약160cm정도)정도로 탐라의 표준 키 정도이다.
탐라의 씨름은 고쿠리(高句麗)씨름으로, 짧은 바지를 입고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상대의 샅바를 잡는 왼씨름이다.
씨름판 중앙에서 다까온다르와 량금오가 샅바를 잡고 서서히 일어섰다.
심판의 ‘하기요.’ 소리와 함께 씨름이 시작됐다.
서로 샅바를 잡자 당연히 키가 큰 다까온다르의 몸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몸 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는 상태에서 다까온다르가 들배지기를 하려고 오른쪽 다리가 뒤로 빠지는 것을 보고 금오는 지체 없이 옆무릎치기 기술을 사용하여 순간적으로 다까온다르를 잡아 돌렸다.
다까온다르가 옆으로 벌렁 쓰러졌다. 작은 체구지만 지난 십여 년간의 힘든 무예 수련을 성실하게 해온 량금오(梁金烏)의 힘은 엄청났다.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거인 다까온다르가 옆으로 벌렁 쓰러지는 것이 관중들이 보기에는 마치 다까온다르가 실수로 미끄러진 것 같이 보였다.
탐라씨름은 단판제였으므로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났다.
'상대의 실수로 이긴 것 같이 보이지만 대단한 힘과 씨름기술을 가지고 있는 무서운 놈이다.'
고말로(高末老)는 평소 씨름연습을 하던 다까온다르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고말로(高末老)는 왕자(王子) 고자견(高自堅)의 아들이다. 6척(6尺,약180cm)장신의 우람한 체격과 날렵함을 겸비한 타고난 씨름꾼이다.
다까온다르와는 평소 연습 때 3대7 정도로 고말로(高末老)가 우세했다. 고말로(高末老)는 힘이 월등한 다까온다르 같은 역사(力士)를 씨름기술로 제압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최근 4~5년간은 금오가 탐라에 없었으므로 갑자기 나타난 성주의 아들이 3개 아지발도를 석권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하자 가장 긴장한 사람도 고말로(高末老)였다.
“침착하게 하면 이긴다. 씨름에 있어서 탐라에서 너를 이길 자가 누가 있더냐.”
왕자(王子) 고자견(高自堅)의 당부를 뒤로 하고 고말로(高末老)는 씨름판에 올랐다.
'상대의 키가 작으니까, 시합이 시작되자말자 틈을 주지말고 들배지기로 들어올려서 내동댕이 치자.'
고말로(高末老)는 심판의 ‘하기요.’ 소리가 들리자마자 금오(金烏)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런데 상대가 다리 사이에 자기 다리를 집어넣고 버티는데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무릎을 차내어 내동댕이 쳐보려고 하지만 전혀 여의치 않았다.
다른 기술로 승부를 보려고 고말로(高末老)가 금오를 땅에 내려놓는 순간 금오는 상대의 하체로 파고들어 뒤집기 기술로 고말로를 등에 지고 일어나며 거꾸로 내동댕이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인(巨人) 고말로(高末老)가 공중에 거꾸로 뜨더니 씨름판의 검은 모래 바닥에 얼굴부터 꼬라박혔다.
“150년 만에 용호(龍虎)아지발도가 탐라에 탄생했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바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탐라명당(耽羅明堂,星主와 王子가 정무를 보는 탐라관청의 명칭)의 넓은 마당에 차려진 씨름판 주위에서 탐라백성들 모두 어울려 춤을 추며 백오십 년만의 이 경사를 축하했다.
이어서 각 촌(村)별로 준비한 돼지고기와 술을 상에 올리고 화톳불을 피우며 잔치가 시작되었다.
“황소 네 마리를 잔치에 내놓겠습니다.”
오늘의 영웅인 량금오(梁金烏)가 탐라명당의 대청에 모여 있는 탐라의 지도층(성주,왕자,각 촌장 등)에게 큰 소리로 고했다.
“영웅께서 배포도 과연 크십니다.”
눈치빠른 왕자(王子) 고자견(高自堅)이 찬사를 보냈다. 성주 양주형이 무표정하게 지시했다.
“그리 하도록 하라. 군사들은 바로 소들을 잡아 잔치에 내도록 하라.”
각 아지발도 우승자에게는 황소 한 마리가 부상으로 주어진다. 척박한 섬에서 황소는 큰 재산이었다. 잘 사는 집 자손이 아지발도가 되는 경우에도 황소를 잔치에 선뜻 내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귀한 소를 잔치음식으로 쓰는 것도 아주 특별한 경우로 탐라 백성 대부분은 소고기 맛도 잘 모를 정도로 귀한 음식인 것이다.
“탐라 영웅 만만세. 용호아지발도 만만세.”
신이 난 군사들이 황소 네 마리를 잡아서 고기를 각 촌(村)별로 나누어주고, 술과 고기가 넘치는 잔치의 열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록에 보면 용호아지발도는 친모를 제외한 탐라 모든 아낙을 숫자에 상관없이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용호아지발도가 150여 년 만에 탐라에서 나왔습니다. 이 경사를 맞이하여 성주께서는 기록에 있는 용호아지발도의 권리를 오늘의 영웅 용호아지발도가 행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탐라의 문서와 역사를 관리하는 역사관(歷史官)이 성주에게 진언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가? 그럼 그리 하도록 하라.”
량주형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호아지발도가 비록 내 자식이라 하나 용호아지발도 본인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 하겠는가?”
성주 량주형은 지난 오 년간 막내아들이 탐라에 없었으므로 자식이 운우지정을 제대로나 아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금오는 시원하게 답했다. 음양의 이치는 각 나라를 오년간 주유하며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미만의 처녀들로 오늘은 다섯 명하고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대상을 정하면 좋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역사관(歷史官)이 성주 량주형에게 보고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은 당연한 것이다. 탐라명당의 큰 방에 다섯 개의 자리를 깔고 제비를 뽑아 선발된 처녀들을 들이도록 하라.”
탐라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성 풍속에서는 이 행사는 탐라 백성들에게 경사 중의 경사로 여겨졌다. 음양의 조화야말로 천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 것이다. 탐라에서는 곡식을 파종할 때에도 백성들은 밭에서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기원하는 전통이 있을 정도로 음양의 조화를 중요시했다.
“제비에 뽑힌 년들은 복이 터졌구나.”
처녀들이 큰 방 자리 위에 벌거벗고 누웠고, 이윽고 금오가 큰 방으로 들었다.
아낙네들이 문에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엿보기는 남정네는 안 되고 아낙네들만 가능했다.
큰 방에서 금오가 처녀들과 차례차례 관계를 하기 시작했다. 금오의 정력은 놀라웠다. 양물도 거대했지만 불알이 세 개라 량금오(梁金烏)의 정력(精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예전에 당나라에서 음양의 이치를 알려주러 기루(妓樓)에 같이 갔던 궁사범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처녀들은 십여 번을 극락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혼절하고, 문밖에서 들여다보던 아낙들도 연이어 혼절해서 실려 갔다.
바깥의 잔치판에서는 소고기를 흡족하게 뜯으며 만세 만세 소리와 춤판, 싸움판이 밤새 여기저기 벌어져서 볼 만 했다.
자시(子時,오후11시에서오전1시까지)가 지나고 축시(丑時,오전1시부터오전3시까지) 말미에 금오는 큰 방을 나왔다. 큰 방에는 처녀 다섯이 모두 혼절해서 늘어져 있었다.
금오는 우물가에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작은 방에 들어가서 바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금오는 잔치 뒷정리를 하고 있는 마당을 지나 탐라명당의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에는 탐라의 지도층인 성주, 왕자, 촌장들이 모여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다 혼절한 아낙이 육십여 명입니다. 정력으로도 과연 영웅이십니다.”
“경사로다. 탐라에 큰 복이 내려오셨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한 번도 사정(射精)을 안 하셨다는 점입니다.”
역사관(歷史官)이 성주 량주형에게 보고했다.
“접이불루(接而不漏)!”
대청에서 탄성이 터졌다. 관계는 하되 사정은 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접이불루(接而不漏)는 모두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방중술(房中術)에 능하여 사정(射精)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것은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양생법(養生法)을 평생 수련하는 도가(道家)의 도사(導師)들도 실제로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대청에서의 인사를 끝으로 탐라의 아지발도를 뽑는 행사의 마무리는 모두 끝났다.
“수고했다. 대견하구나.”
“옥룡자(玉龍子)께서 남원(南元) 법화사(法華寺)에 오셨다하니 오늘 오시(午時,오전11시)에 말을 타고 양사부, 궁사범과 같이 우리 네 사람만 남원(南元)에 다녀오도록 하자.”
량주형이 금오에게 넌지시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