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시원하게 뱃전을 두드리더니, 동쪽 야산 위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구름다리처럼 드리웠다.
왕건(王建)은 뱃머리에 서서 송악 선단을 둘러보았다.
송악 선단은 대장선을 가운데 두고 앞에 두 척 뒤에 두 척이 간격을 유지하며 잔잔한 황해 바다를 연안을 끼고 항해(航海) 하고 있었다.
왕건은 양 팔뚝 안에 장착된 단검(短劍) 두 자루를 슬쩍 꺼내 보았다. 팔뚝에 설치된 단추를 양 옆구리에 대고 누르니 자동으로 단검이 칼집에서 나와 손 안에 쥐어졌다. 크기는 칼날이 4치(약10cm), 칼자루가 3치(약7.5cm)정도 되는 작은 단검들이다.
“이 단검(短劍)들은 천축국에서 구해온 귀한 물건들이다. 녹도 전혀 슬지 않고, 두꺼운 장검과 부딪쳐도 장검이 두 동강이가 날 정도로 극강(極强)하다.
이것들은 천축우츠강이라는 강하고 특이한 신철(神鐵)로 만든 귀한 단검들이다. 천축국에서도 우츠광산은 수백 년 전에 자원이 고갈되어 더 이상 우츠강은 나지 않는다.”
“궁장군의 말이, 금오(金烏) 너는 단검술이 특히 뛰어나다고 하니 이 단검들을 주마. 양팔 소매 안에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단추를 누르면 저절로 손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어젯 밤 늦게 황해용왕은 왕건을 은밀하게 불러 여러 가지 당부와 함께 이 단검들을 주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했지만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인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알려주고, 주의사항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다 보니 어느새 새벽닭이 울었다.
선단은 송악상단 중 최고의 뱃사람들과 노련한 행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해용왕은 치밀하게 최고의 베테랑 전문가들로 선단을 구성했다. 큰 거래이기도 했지만 절대로 실패하면 안되는 항차(航次)인 것이다.
“대행수님. 안으로 드셔서 좀 쉬시지요.”
대장선의 선장이 다가와서 좀 쉴 것을 권유했다. 탐라에서 올 때부터 어젯밤까지 강행군한 것을 아는 것이다.
“예,그리 하지요.”
“존칭을 쓰시면 저희가 부담스럽습니다. 하대하셔도 됩니다.”
오십이 넘은 대장선의 선장이 존칭을 듣더니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예, 아랫것들이 볼 때에는 그리 하겠습니다. 둘이 있을 때는 존칭을 쓰겠습니다. 아버지뻘 되시는데요.”
왕건(王建)은 심성이 천손(天孫) 량(梁)씨답게 원래 겸손한데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천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선장은 오늘 아침에 예성강포구를 출발하기 전, 선단의 행수들과 선장들을 모아서 왕건이 중요사항들을 지시하는 모습과 선단을 지휘하는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치밀하고도 대범하게 지휘를 하는데 노련한 선장들이나 행수들이 보기에도 한 치도 틀리거나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또한 여러 수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리하는 것도 전혀 오만함이 없고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저 곳이 혜성군(槥城郡,당진) 당진(唐津)포구입니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면천산성입니다. 지금은 호족(豪族) 박득의(朴得宜)가 지배하고 있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당나라로 가는 뱃길이 있어서 당진(唐津)이라고 부릅니다. 무역항으로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상단의 선임행수가 왕건의 옆에서 육지의 포구를 보며 설명했다. 예성강포구를 떠난 지 한 나절이 지났다.
선단은 계속 해안선을 따라 육지를 끼고 남쪽을 향해 내려왔다. 원양항해술이 부족하여 가능하면 계속 육지를 보면서 배의 항로를 잡는 것이다.
배의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라 배의 속도는 탐라선의 절반쯤 되어 보였다.
수심이 얕은 신라의 서남해 연안을 항해하려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라야 했다.
송악상단의 배는 폭이 5척(약15미터), 길이가 15척(45미터)정도 되는 큰 배로 갑판 가운데 조타실 겸 지휘소가 있고, 갑판 아래로 이층으로 창고마루(船艙)를 놓은 큰 배이다.
각 배에 타고 있는 인원은 선원이 30여명, 상단(商團)인원이 30여명. 호위군사가 20여명으로 총 80명 정도 되었다.
그러니까 상단의 총 인원은 대장선에 타고 있는 참모들까지 포함하면 420명이었다. 참모들 이십여 명은 상단과는 별도로 황해용왕이 왕건에게 붙여준 사람들로 송악의 군사, 첩보, 재정, 외교, 제철, 병기 및 각종 물품 제조 등의 실무자들이다. 이번 항차에서 왕건을 보필하며 서로 얼굴을 익히고, 앞으로 송악 경영에 필요한 정보를 왕건에게 주도록 하겠다는 것이 황해용왕의 의도였다.
특이한 것은 조타실 사방으로 가로 세로 한 자(약30cm)쯤 되는 두꺼운 유리창(琉璃廠)이 붙어 있어 뿌옇게나마 바깥을 살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날씨가 추울 때에나 일기가 나쁠 때에는 아주 유용할 것 같았다.
“회회국(回回國) 회회아비(이슬람 상인)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저희 송악공방(工房)에서 만든 유리(琉璃)입니다. 저희 배에도 저희가 직접 만든 각종 유리제품이 실려 있습니다.”
선단에서 보이는 바닷가마다 창고 같은 집들이 연이어 있고, 집집마다 장작불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소금을 굽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국가가 정해준 염상(鹽商)만이 소금을 만들고 거래할 수 있었으나, 신라가 힘을 잃은 후에는 바닷가에 있는 호족 모두가 자염(煮鹽)을 구워 내륙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예로부터 가장 귀하게 여겨진 자원이다. 없으면 사람이 죽는 필수품인 관계로 어쩌면 금보다 더 귀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들은 이 소금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하고, 비싼 세금을 붙여 국가 재정의 큰 부분을 충당했다. 그러나 전란, 지배층의 사치 등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때에는 그 세금이 소금 원가의 100배가 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럴 경우 당연하게 민란이 도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불과 이십여 년 전에도 당나라에서 소금 밀매(密賣)를 하던 황소(黃巢)가 민란을 일으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황제(皇帝)로 등극하여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칭하고 5년간 통치하였으나 당의 선무절도사 주전충, 하동절도사 이극용 등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던 것이다.
황소(黃巢)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당나라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현재 당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선단은 저녁 무렵에 위도(蝟島)에 도착했다.
“오늘 밤은 위도에서 자고 내일 목포를 지나 남해로 진입합니다. 내일 항해 구간은 해적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 단단히 대비하고 출항해야 합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야습에 대비하여, 선원들이 선박을 방어(防禦) 진형에 맞게 닻을 내려 안전하게 정박시켰다.
“위도(蝟島)는 천혜의 항구입니다. 섬 지형은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고 항구는 육지에 감싸여 풍랑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등에 날카로운 가시가 무성해 맹수도 피해간다는 고슴도치(蝟) 같은 요새지(要塞地)입니다.”
대장선의 선장 만길(萬吉)이 위도(蝟島)포구의 주변을 둘러보며 왕건에게 말했다.
“그러나 워낙 요충지다 보니까 특정 세력이 독점할 수 없어서 무주공산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해적들도 탐을 내고 있습니다만 일단 점령해도 그 다음이 두려운 거지요.”
“저는 삼십년 이상을 이 길을 다니고 있습니다만, 늘 이 위도를 우리 송악상단이 장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염원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선단은 두 시진(약 4시간)정도를 항해하여 목포 고이도 인근에 이르렀다.
“지나온 길의 군소(群小) 해적들은 상단의 규모가 커서 공격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 압해도(押海島) 해적들에게 통행세를 내야합니다.
시오리(十五里) 앞에 진도(珍島)와 육지 사이의 울돌목(鳴梁)이라는 물살이 아주 거센 해협(海峽)이 있습니다. 반시진(약1시간) 후에 그 곳이 정조(停潮)이니 그때 해협을 건너 남해로 진입해야 합니다.”
“제가 선단의 대행수인 척 하고 해적들에게 통행세를 낼 터이니, 대행수께서는 상단 수하인 척 하시고 지켜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선임행수가 조심스럽게 왕건에게 건의했다.
“그렇게 하지요.”
선원들이 대장선 뱃전에 하얀 깃발을 올리자, 저 멀리 섬 그늘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배길이가 5척(약15m)정도 되는 작은 배였으나 갑판 아래 노 젖는 칸이 있어 양쪽에서 노를 저어서 빠르게 다가왔다.
상선에서 줄사다리를 내려주자 해적 두령과 수하 두 명이 배 위로 올라왔다. 해적이지만 모두가 번듯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고무래 정(丁)자를 새겨서 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번번이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리야 돈을 받는 일이지만 장사하느라 고생이 많으시오.”
해적 두령이 아는 체를 했다. 송악상단의 선임행수와는 자주 보는 구면(舊面)인 것이다.
“그나저나 통행세가 올랐소. 예전 큰 배 한 척당 금 두량이던 것이 금 세량으로 올랐소.
견훤이라는 사람이 무주(武州,또는 무진주)를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가 견훤에게 조금 세금을 내야 하오.
바다에서야 우리가 왕이지만 우리도 육지생활을 해야하니 어쩔 수가 없었소. 그 견훤(甄萱)이라는 자가 워낙 싸움을 잘해서 육지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모양이오.”
“그러시겠지요. 배가 다섯 척이니 금 열닷량이 되겠군요. 두령님 몫으로 금 닷량을 더하여 총 스무량을 준비했습니다. 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고맙소. 내 잘 기억해두겠소.”
“잠시 후에 울돌목이 정조(停潮)로 들어가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시오. 장사 잘 하시오.”
해적 두령이 자기 몫 금 닷량에 입이 찢어져서 기분 좋게 배에서 하선했다.
선단은 정조(停潮)로 잔잔한 울돌목을 지나 남해(南海) 바다로 진입했다.
“아까 배에 올랐던 자는 압해도 해적의 소두령(小頭領) 중 한 놈입니다. 수단이 좋아서 요직인 통행세를 거두는 자리를 꿰차고 있지요.
압해도 해적은 신라 서남해 해적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집단입니다. 두령급은 중국 해적들이고 아랫것들은 신라인과 중국인이 반반쯤 섞여 있습니다.
스스로를 정가군(丁家軍)이라고 부르며 신라 서남해안을 주로 약탈하고 중국과 왜국까지도 약탈의 손길을 뻗고 있지요. 또한 물목의 요지인 목포 앞바다를 장악하여 상선들의 통행세를 받아 큰 부(富)를 얻고 있습니다.
저 자들을 비롯한 해적들의 노예사냥으로 신라 서남해안은 폐허로 변하고 사람 살 곳이 못되고 있습니다.
특히 압해도 해적 놈들은 사람고기를 즐겨 먹는 흉악한 놈들입니다. 노예사냥으로 잡은 양민들 중 여인네와 아이들 중 상품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자기들이 매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죽일 놈들.”
송악상단의 선임행수가 이를 갈면서 분을 토했다.
선단은 옛 청해진이 있던 완도(莞島) 청해포구에서 하룻밤을 유(留)하고 섬진강 하구(河口)의 하동포구(河東浦口)로 출발했다.
신라에서 말하는 소위 장보고의 난 이후 완도는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김제 벽골제 등으로 강제 소개(疏開)되었다.
그러나 완도 청해포구는 신라의 기운이 쇠약해진 이십여 년 전부터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법 번성하고 있었다.
이튿날 선단은 점점이 섬들이 떠 있는 다도해(多島海) 사이를 누비며 하동포구(河東浦口)를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여수(麗水) 앞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곳 바다와 땅은 승주(昇州,순천)호족 박언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박언지는 진골이며 신라의 왕자 출신인데, 승주도독으로 부임 후 탁월한 수완으로 승주지방을 장악하고 승주지방의 호족세력이 되었습니다. 그의 맏아들 박영규 또한 이제 20대 중반인데 능력이 아주 출중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춘길(春吉)이 왕건에게 지나는 곳마다 그 곳의 자세한 내력을 상세히 보고했다. 나이가 40대 중반인 춘길(春吉)은 송악의 교정보소(敎精報所)의 수장(首將)인 도감(都監)이었다. 요즘 말로는 비밀정보부의 대장이니 모든 중요 정보들을 취급하는 요직(要職)이다.
춘길은 송악과 상단에 관련된 모든 정보에 정통하였으므로 황해용왕이 상단의 행수로 위장시켜 이번 항차에 동행시킨 것이다.
상단은 이윽고 두치강(섬진강은 고려 말부터 사용된 지명임) 하구에 도착하여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횡천강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하동포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하동포구에서 작은 배를 타고 도선사(導船士)가 상단배로 올라와서 안전하게 선단을 하동포구에 정박시켰다.
“멀고 험한 바닷길에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남원경(南原京)의 하동군장(河東郡長) 량선태(梁宣泰)입니다. 남원부백(南原府伯)께서 친히 하동포구에 와 계십니다. 제가 남원부백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원부백(南原府伯) 량성무(梁誠武)는 하동군(河東郡) 동헌(東軒) 내실(內室)에서 왕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원부백(南原府伯) 량성무(梁誠武)입니다. 일단 화물(貨物)의 선적이 중요하니 같이 창고로 가서 화물을 확인하고 선적하도록 하지요.”
량성무(梁誠武)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오십이 다 되었다. 동안(童顏)인 것이다. 타고난 것도 있겠으나 본인이 평소 양생(養生)에 노력하는 것도 젊어 보이는 큰 이유이다.
화물(貨物)은 창고 선반에 검수(檢受)에 용이하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진열해 놓았다. 송악상단 행수들과 무기에 일가견이 있는 상단 호위군사의 대장(隊長)과 참모들이 꼼꼼하게 검수를 하고 숫자를 세고 선적까지 확인했다. 먼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가야하므로 언월도 2,000자루는 하나하나 기름을 먹인 볏짚에 싸서 5자루씩 나무상자에 잘 포장하여 선적했다. 한 자루에 스무근(약12kg) 정도 나가는 언월도 이천자루가 선적되니 뱃전이 물속으로 석자(약1미터) 정도 내려앉았다.
언월도는 안전을 위해서 배 한 척에 집중해서 선적했다. 중요한 물건이 이배 저배 나뉘어서 선적되어 있으면 관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원경에서 만든 도, 검, 창 등 기타 무기들과 차(茶) 같은 특산품들이 다른 배 한 척에 실렸다.
나머지 배 두 척에는 송악에서 선적한 각종 교역품이 가득 실려 있었고 대장선은 만일을 대비하여 선창(船艙)을 비워 두었다.
“저희 남원 운봉고원(雲峯高原)에서 만든 목궁 일천 자루와 목궁용 화살 10만발이 있는데 추가로 선적하셔서 왜국(倭國)에 팔아보시지요. 대금은 판매하시고 나서 나중에 천천히 주시면 됩니다.”
량성무(梁誠武)가 갑자기 왕건(王建)에게 예정에 없던 목궁(木弓) 얘기를 꺼냈다.
뜬금없었으나 량성무(梁誠武)가 실없는 소리를 할 위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왕건은 즉시 화답했다.
“그리 하시지요.대장선의 선창이 비었으니 그 곳에 싣도록 하지요.”
목궁(木弓)과 화살까지 모든 선적(船積)이 끝나고 목궁(木弓)과 화살을 제외한 대금(代金)의 지불까지 모두 끝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단의 자체 경비는 상단의 호위군사들이 번을 서기로 하고, 그 주위에는 물 위까지 저희 남원 병력(兵力)들이 이중으로 경비를 서도록 하겠습니다. 송악상단의 일행들은 저희가 준비한 객관에서 편히 쉬시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대행수께서는 저와 저녁이나 같이 하시지요.”
량성무(梁誠武)가 왕건을 하동군 동헌의 내실로 인도했다. 독대(獨對)하면서 할 얘기가 있는 듯 했다.
“탐라에서 150여 년 만에 탄생한 용호아지발도를 뵙는 영광을 누립니다.”
량성무(梁誠武)가 독대(獨對)하며 차(茶)를 대접하면서 느닷없이 왕건에게 치사(致辭)를 했다.
“저희 남원에서도 사방에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도 있는 난세(亂世)니까요.
그러나 이 정보는 옥룡(玉龍) 량궁복 장군의 아드님이신 옥룡자(玉龍子) 도선대사께서 주신 것입니다. 옥룡자께서는 신라에 계실 때는 주로 백계산(白鷄山,광양에 위치함) 옥룡사(玉龍寺)에 계십니다만, 저희 남원 실상사(實相寺)의 실질적인 주지 스님이시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종정(宗政) 스님이시기도 합니다.
도선대사께서 저희에게 밀서를 보내셔서 왕공(王公)은 이 난세를 통일하여 평화를 가져오실 분이니 모든 협조를 다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저희 남원량씨(南原梁氏)들은 선대(先代) 휘(諱) 友字 凉字(梁友凉)어른께서 후손(後孫)들은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에서 은인자중(隱忍自重,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참고 견디며 몸가짐을 신중히 함)하며, 깊은 물 속의 이무기(교룡 蛟龍)처럼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칫 등룡(登龍)을 꿈꾸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도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여 승천(昇天)하려는 꿈을 꾸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남원량씨(南原梁氏)들이 남원 밖에 나가 큰 일을 해보려고 할 때에는 량씨(梁氏) 성(姓)을 감추고 다른 성(姓)과 이름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
상주의 호족 아자개도 원래 량씨(梁氏)로 남원의 호랭이아지발도 출신이었으나 그래서 아자개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그의 아들 견훤(甄萱)이 백제 의자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며 완산주에서 백제국을 몇 년 전에 건국하였지요.”
“저희 남원량씨(南原梁氏)들도 탐라의 량씨(梁氏)들 같이 천성(天性)이 착하고 남을 잘 믿는 성질(性質)이 있습니다. 이런 난세에는 절대 버려야할 것들이지만 천성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견훤(甄萱)이라는 자는 성정이 독하고 결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옥룡자께서는 견훤(甄萱)은 서독(西毒)이라고 하셨습니다.서쪽의 독을 품은 악독한 자이니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도 본인이 지랭이(蛟龍)의 자손임을 알고 있으니 남원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견훤(甄萱)이 본디 량씨(梁氏)라고 믿지 않습니다. 천손(天孫) 량씨(梁氏)에서는 저렇게 악독한 성정을 지닌 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믿을만한 곳으로부터 견훤(甄萱)이 자금 확보를 위하여 서남해안의 해적들과 같이 대마도(對馬島)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는 왜국에서 유일한 은광(銀鑛)이 있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대마도(對馬島)의 현재 무력으로는 이들을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만일 기습이라도 당하게 되면 수천만량의 은이 약탈당할 것입니다.”
“이들은 단병접전(短兵接戰)에 아주 능한 자들로, 직접 접전을 벌려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이들을 잡는 방법은 원거리에서 많은 궁수들이 동시에 다량의 화살을 퍼부어 살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기 대마도의 지형도가 있습니다.
대마도의 남섬 중간 지점, 이 곳에 은광산(銀鑛山)이 있습니다.”
“해적들이 침입하려면 이시야네(石屋根) 포구에 상륙하여 유일한 도로가 있는 십리 정도의 계곡길을 통하여 은광산으로 침입하려 할 것입니다.
이때 이곳에 많은 수의 궁병을 배치하여 화살을 퍼부어대면 이들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량성무(梁誠武)는 얼마 전에 옥룡자 도선대사에게서 왕건(王建)이야말로 천하를 통일할 재목이니 힘 닿는 데까지 왕건을 도와주라는 간곡한 밀서를 받았다.
현재 와병중(臥病中)이라 직접 가지 못하니 꼭 좀 부탁한다는 전언이었다.
량성무(梁誠武)도 도선대사에게서 이렇게 간곡한 서신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왕건의 그릇을 떠보려고 뜬금없이 목궁 판매 이야기를 던져봤는데, 겉으로는 아직 15~6세의 소년 같았으나 단번에 큰 결단을 내리는 것이 역시 왕건은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왜국에서는 활은 모두 목궁을 사용하는데, 활의 길이가 1장(3미터)이 넘습니다. 따라서 화살도 크고 무거워서 사거리는 가장 멀리 쏠 수 있는 사각(45도)으로 쏘아도 40장(120미터)을 넘지 못합니다. 해적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지형에서는 궁병의 매복은 없다고 안심하고 침입할 것입니다.”
“저희 남원의 목궁은 최대사거리(45도로 공중으로 쏘았을 때 미칠 수 있는 최대 거리)가 200장(600미터)이 넘습니다.활의 길이는 왜(倭) 목궁의 절반(1.5미터)정도이지만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합니다.
남원의 목궁은 지리산의 박달나무를 땅속에 2년 동안 묻어서 나무의 진을 빼고 이후 3년간 그늘에서 잘 말린 목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땅에 묻을 때도 토질이나 땅의 깊이에 따라 목궁의 성능에 차이가 생깁니다. 오랜 경험으로 남원 장인들이 최고 성능의 목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수십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왕건님께서는 결국 견훤과 천하를 쟁패하게 되실 것입니다. 대마도에서 그 첫 승부를 겨룬다고 생각하시고 전투에 임하십시오. 다만 대마도에 침입한 모든 인원을 죽이셔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비록 해적선의 노 젖는 불쌍한 노예들일지라도 한 놈이라도 살려두어서는 후환이 생길 것입니다. 왕건님의 능력은 뛰어나 보이시나 성정이 천손(天孫) 량씨(梁氏)답게 어질고 온유해 보이셔서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꼭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가지로 배려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왜국에 목궁을 소개하고 판매하려면 남원 목궁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목궁의 장인들과 최고의 궁병들을 십여 명 빌려드릴테니 왜국에서 써보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그렇게 해주시지요.”
“이들의 대장(隊長)으로 한 사람을 오늘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칠년 전 남원의 호랭이아지발도가 된 인물로 활로는 따를 자가 없는 명사수입니다. 다른 무예도 물론 뛰어나고, 심성도 사려가 깊은 자입니다.
다만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본인이 인정해야 진심으로 충성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왕건님의 몫입니다.
지금은 남원을 떠나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데, 오늘 이 자리에 불러 놓았습니다. 원래 이름은 량숭겸(梁崇謙)인데 지금은 능산(能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배려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입니다.”
“능산(能山)을 들라 해라.”
량성무(梁誠武)가 밖을 향해서 하명하니, 키가 훤칠한 건장한 사내가 내실 안으로 들어 와서 두 사람을 향해서 읍했다.
“능산이라고 합니다.”
“반갑소.이번 왜국 항차에 큰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소.”
“성심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능산은 공손하게 답하며, 왕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순간 능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아니,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