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철원 궁예에게 와서 친위대 근무를 시작한지도 어언 3년이 지났다. 그동안 왕건은 성실하게 궁예를 수행하고 여러 가지 공을 세워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어 있었다.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왕건은 키도 훌쩍 자라서 6자(180cm)가 넘고 160근(약 100kg)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장사(壯士)가 되어 있었다.
여섯 달 전 궁예는 나라 건국을 널리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고리제국(高麗帝國)이라고 하였다.
궁예는 황제폐하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허름한 승복 차림에 검소한 생활을 하고 하급병졸들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궁궐 내 생활도 아주 검소하여 비용을 최소화했다. 세금도 최소한 거뒀으며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자주 살피는 등 이상적인 군주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왕건을 총애하여 수시로 불러 격의 없이 어울렸는데, 일 년 전에는 왕건과 의형제를 맺고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시는 의례를 시행하여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궁예는 늘 말했다. 나의 오른팔은 사형(내원경)이시고, 나의 왼팔은 내 아우(왕건)이다.
“아우야. 내원경(內院卿)이 우리 고리제국(高麗帝國)의 황도(皇都)를 철원(鐵原)에서 송악(松岳)으로 옮기자고 주청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궁예가 마군장군(馬軍將軍) 왕건을 불러 저녁을 같이 하던 중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내원경(內院卿)은 궁 안의 내부 살림을 총괄하는 기관인 내원(內院)의 수장(首長)이다. 종간(宗干)이 기관 설립 때부터 쭉 맡아왔는데, 사람들은 종간을 부를 때 내원 어른이라고 부른다.
“폐하께서 결정하시옵소서. 미륵의 지혜를 어느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송악은 아우의 터전이 아니냐.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우리 고리제국이 옛 고쿠리(高句麗)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국토의 요충인 한수(漢江)유역인 한주(漢州)를 확실히 장악하는 게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송악이 더 낫다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물산이 풍부한 송악으로 황도(皇都)를 이전한다면 그동안 청빈하게 제국 건설에 매진해온 관료들이 자칫 해이해지지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왕건은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황도(皇都)를 옮기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주청했다.
“그럴 수 있겠지. 그거야 내가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면 해소될 터이고, 그럼 고리제국의 황도(皇都)를 송악으로 천도(遷都)하도록 하자.”
그해 사월에 궁예는 황도(皇都)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천도(遷都)하기 전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猌鈇)가 송악은 물론이고 패서지역 전체에 대하여 그동안 심어 놓았던 첩자들을 총동원하여 샅샅이 검증하고 궁예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다.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猌鈇)는 머리가 좋고 의심이 많은 인물로 원래 신라 진골 귀족의 종으로 있다가 량길(梁吉)의 수하로 들어가 첩자두목으로 있다가 궁예에게 붙은 자이다.
비록 신라 진골 귀족의 종이었으나 머리를 인정받아 재정과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으므로 한자(漢字)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문서 작성에 능하였다.
궁예 밑에서도 첩자두목으로 있다가 궁궐 수비와 비밀경찰 역할을 하는 내군(內軍)이 창설되자 종간의 추천으로 내군장군(內軍將軍)이 되었다. 종간의 심복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猌鈇)가 그동안 각 지방에 심어놓은 첩자망(諜者網)에 대하여 상세히 알게 되었다.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猌鈇)의 첩자망(諜者網)은 상당히 정교하고 큰 조직이었다.
이는 궁예가 첩자망(諜者網) 조직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궁예는 대범한 척했지만 의외로 꼼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궁예가 극히 검소하게 황궁을 세우라고 지시하였으나 왕건은 송악산 남쪽 넓은 지역에 웅장한 황궁을 신속하게 건립하였다.
“황궁이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보기는 좋구나. 몇 달 만에 이런 황궁을 짓다니 과연 내 아우일세. 수고했네. 옴 마니 반메 훔.”
궁예는 나름 웅대한 송악의 황궁을 보고 기뻐했다.
몇 년 동안 궁예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면서 왕건은 겉과 속이 다른 궁예의 성정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에게 귀부하기 전부터 송악을 궁예에게 수도로 내어주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므로 송악의 지휘부에서는 몇 년 동안 치밀하게 그에 따른 대책을 실행해왔다.
곡도(鵠島,백령도)와 포을도(包乙島,대청도)를 새로 개척하여 송악의 무역 근거지이자 군사기지로 만든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보안을 엄수하는 가운데 방파제를 새로 쌓고 항구를 조성하는 큰 공사였다.
또한 패수(대동강) 앞바다에 위치한 큰 섬 대우도에도 평양과 룡강의 군사시설과 연계하여 수군기지를 새로 설치했다.
궁예의 승인 하에 패서지방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무리들을 왕건의 지휘 하에 패서지방 호족들이 연합수군을 조직하여 완전히 소탕한 것도 큰 성과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수군의 지휘법도 익히고 자연스럽게 패서지방 호족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송악의 병력과 군사조직도 대부분 룡강지방으로 이전 시켜놓았고 송악은 군사력보다는 예성강포구를 이용한 국제무역으로 부유한 상업도시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는데 주력했다.
송악이 고리제국(高麗帝國)의 황도(皇都)가 되면서 궁예의 중앙군(中央軍)인 미륵군(彌勒軍) 일만 명도 철원에서 송악 외곽지역인 장단의 넓은 평야지대로 이전하여 진을 펼치고 주둔하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궁궐살림뿐만 아니라 이들 미륵군에게도 풍부한 재정 지원을 하여 쓰다 남을 정도로 각종 보급물자를 충분히 공급했다.
생전 처음 풍족한 생활을 하다 보니 미륵군 내부에서는 전쟁을 기피하는 기운이 생겨나고 있었다. 왕건의 생각 대로였다.
물론 여기에 쓰인 재화들은 패서지방 호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조성한 것들로 날로 부담이 커지고 있는 패서지방 호족들은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건의 송악은 황도를 유치하는 대신 궁예로부터 10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 받아 오히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사실 궁예의 권력은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미륵군의 과장된 위용에 대부분 기반하고 있었으나 왕건은 지난 삼년간 미륵군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미륵군은 전원 보병으로 미륵교를 신봉하는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병력은 일만 오천 명 정도이고 핵심병력은 용화향도 천명이었다.
용화향도는 미륵교의 승려들로 승병들이었는데 창술, 검술이 뛰어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도들이었다. 전투에 임할 때 이들은 동귀어진(同歸於盡,상대와 같이 죽겠다)을 외치며 용감히 돌격하여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백전백승 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사기(士氣)에 지방 호족들의 군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들 외에 궁예군의 핵심전력으로는 마군(馬軍) 이천명이 있었다. 기병대(騎兵隊)인 이들은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환선길을 사령관으로 하여 4명의 마군장군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예의 미륵군은 견훤의 백제군에게는 약했다.
그동안 몇 차례 백제군과의 전투가 있었으나 모두 패전하여 상당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후 궁예는 미륵군과 백제와의 전투를 일절 중단시키고 대책을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궁예도 패전의 원인을 알고 있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훈련된 견훤의 백제군에게는 사기만 앞세우고 무작정 돌격하는 미륵군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패전을 경험한 미륵군의 사기도 뚝 떨어져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었다.
견훤의 백제군과 맞서려면 전략, 전술적으로 잘 훈련된 대규모의 정규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많이 사는 견훤의 백제국에 비하여 인구도 1/3에 불과하고 물산도 빈약한 궁예의 고려제국으로서는 호족들의 군대가 아닌 대규모의 정규군 양성은 지금 형편으로는 무리인 것이다.
명주의 금순식, 금예 형제에게 삼만의 병력이 있었으나 이들은 궁예의 적이 아니었을 뿐 궁예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아니었다. 명주는 이복형들이지만 형님들의 땅이라 서자에 불과한 궁예의 입장에서는 세금이나 군사를 요구할 수도 없고 잘 달래서 다소의 협조나 얻어내면 다행인 지경이라 궁예의 고민은 컸다.
대규모의 정규군 추가 양성을 위하여 지금보다 과도한 세금을 더 요구하는 순간 대부분의 호족들이 등을 돌리고 딴 마음을 먹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왕건 장군. 황도를 송악으로 옮긴지 이년이 지났습니다. 황도를 송악으로 옮긴 것은 참으로 시기적절한 일이었다고 황제폐하께서 저 내원에게 어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사실은 왕륭태수께서 저에게 간하여주신 것을 제가 황제폐하께 주청을 드렸을 뿐인데... 제가 분에 넘치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제국의 내정은 안정되어 가는 것 같고 견훤의 백제와 본격적으로 일전을 벌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군도 아시다시피 백제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동안 미륵군 이외의 정규군 양성에 주력하였으나 여전히 미흡한 상태이고 호족들은 가중되는 세금과 인력 차출에 불만이 쌓여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견훤은 최근 신라의 대야성(합천) 공략에 실패하여 많은 병력을 잃고 국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입니다.
삼국이 쟁패하던 옛적에도 ‘백제의 부(富)의 절반은 금성(錦城,나주)에 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백제 금성을 패서 호족들의 힘을 모아 수군으로 공략하여 점령하면 백제의 힘의 절반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는 폐하께서 내신 묘안입니다. 왕건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원경(內院卿) 종간이 왕건을 내원으로 불러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황제 궁예의 묘안이라는데 반대할 신하는 없었다. 진짜 궁예가 이런 묘안을 내었는지는 모르지만 종간은 언제나 궁예의 권위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곤 했다.
“황제폐하의 뜻이시라는데 해야지요. 다만 금성(錦城)은 머나먼 백제의 남쪽 끝입니다. 공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고 공격하다가 밀린다면 모두 물고기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세가 불리해도 절대 적에게 투항하지 않을 충직한 군대가 필요하고, 충분한 군선 및 수송선이 확보되어야만 합니다.
군선 및 수송선은 제가 패서 호족들과 협의하여 조달해보겠습니다. 내원어른께서는 상륙군으로 용화향도 천명을 포함한 미륵군 삼천을 동원하도록 폐하께 주청드려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기마병은 사용할 수 없는 작전이니 보병뿐인 미륵군에게 딱 맞는 전투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며칠 후 황제 궁예의 회의실에 내원경 종간, 내군장군 은부, 마군장군 왕건, 미륵군 대장군 혜명(慧明)스님이 황제 궁예와 같이 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럼 결정되었다. 여기 있는 다섯 사람 말고는 이 작전은 절대 비밀이 엄수되어야 한다. 왕건 장군을 수군대장군(水軍大將軍)에 임명하니 육 개월 후에 금성(錦城)을 공격하도록 하라.
내군장군 은부는 첩자들을 풀어 금성(錦城)공략에 필요한 첩보들을 수집하도록 하라.
군선 및 수송선을 만들 패서 호족들에게는 우리의 형제국인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위태로우니 육 개월 후에 거란을 수군으로 공격한다고 하라.
패서의 호족들은 대부분 고쿠리(高句麗)의 후손이니 고쿠리(高句麗)의 원수인 거란 공격에 토를 달지는 않을 것이다.”
궁예가 단호하게 칙명을 내렸다.
“아우에게 또 큰 짐을 맡기는구나.”
궁예가 왕건을 따로 불러 인자한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말했다.
“금성 공략은 시의 적절한 작전이라고 봅니다만 그 성공확률은 반의 반도 안된다고 봅니다.
내군장군 은부가 금성 공략에 필요한 첩보를 수집한다고는 하나 금성은 백제 남쪽 끝 땅이라 이 또한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패서 호족들에게 군선 및 수송선 제작을 지시한 후 두 달쯤 후에 제가 직접 백제 땅에 잠입하여 두 달 가량 백제 금성의 실정(實情)을 살피고 올까 합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리 하도록 하라. 또 필요한 것은 없느냐.”
“이번 작전의 성공에는 나주 앞바다인 목포와 압해도, 고이도 등의 해적들과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현재 견훤이 이들에게도 세금을 거두고 있어서 해적들의 불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들에게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고 앞으로의 자유로운 활동도 보장해주겠다고 약조해 주어야만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금성태수이며 대대로 금성의 대호족인 종례에게도 향후 10년간 세금을 전액 면제해준다고 약조해야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 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 그리 하도록 하라. 나중에 틀림이 없도록 내원경 종간사형에게 문서로 작성하여 칙명을 내리라고 할 터이니 부디 몸 건강히 돌아오도록 하라. 아우야.”
“존명(尊命)”
“이번 금성(錦城) 공략 작전은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어려운 작전입니다. 내원경 종간이 갑자기 이 작전을 들고 나온 것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한다면 패서 호족들의 힘을 빼고 나 왕건을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만들어서 궁지로 몰려는 속셈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큰 안목으로 본다면 참으로 시의 적절한 작전이라고 봅니다. 결국 금성 공략은 우리가 백제를 이길 수 있는 주춧돌을 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묘안(妙案)입니다.
이제 군선 및 수송선 제작은 예정대로 진행되도록 해놓았으니 나는 능산(能山)만 데리고 두 달 동안 백제 정찰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룡강의 별동대장 궁(弓)장군에게는 육지로부터 금성 공략을 할 별동대 오백을 인솔하여 송악상선을 이용하여 지리산 아래 남원에 가 있도록 명을 내려놓았습니다. 지리산 아래 남원에는 이미 협조를 요청해 놓았습니다.
송악 지휘부 여러분께서는 내가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우더라도 내가 지시한대로 치밀하게 작전을 준비해주기 바랍니다.”
왕건은 송악 지휘부에게 세밀하게 금성공략작전 준비를 지시해놓고 의형제 능산 아우만 데리고 예성강 포구에서 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