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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등룡기08 박술희(朴述熙)와 복사괴(卜砂瑰)

작성자양승철문양공후|작성시간21.08.24|조회수44 목록 댓글 0

왕건은 능산과 함께 평민 복장을 하고 예성강 포구에서 배를 타서 당진 포구에서 내렸다.

“제가 형님께 소개해 올릴 사람이 당진(唐津)에 삽니다. 형님이 철원에 가 계실 때 심심해서 이곳저곳 다니다가 만난 사람인데 물건입니다.

당진 호족 박득의(朴得宜)의 아들로 박술희(朴述熙)라고 하는 자인데 문무를 겸비한 인물입니다. 한 번 만나보시죠.”

능산이 웃는 것같이도 보이고 찡그린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술희를 생각하니 전에 만났던 때가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았다.

 

“박술희라고 합니다. 말씀은 능산 형님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6자(180cm)가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의 박술희가 객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머리는 박박 밀고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한 거한(巨漢)인데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왕건이라고 합니다.”

“우리 팔씨름 한 번 합시다.”

갑자기 다짜고짜 박술희가 말했다.

“좋지요.”

갑자기 객관 탁자 위에서 왕건과 박술희의 팔씨름이 벌어졌다.

능산이 히죽 웃으며 심판을 봤다.

“자.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박술희가 왕건의 손목을 꺽으며 팔목을 세게 눌렀다. 팔씨름을 많이 해 본 솜씨인데 먼저 기선을 제압하면 팔씨름은 십중팔구 이긴다는 것을 아는 솜씨였다.

 

박술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힘을 써도 왕건은 표정의 변화도 없고 팔도 꺽이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왕건이 서서히 박술희의 팔목을 꺽더니 탁자바닥에 살며시 눕혀 놓았다.

체격은 양 거한(巨漢)이 비슷한데,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제가 졌습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박술희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말했다.

“성격 한 번 시원시원하구나. 좋다. 우리 의형제를 맺어 삼형제가 되어 보자꾸나.”

왕건이 호탕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지난번 박술희를 만났을 때에도 지금과 똑 같았습니다. 술희야. 너는 힘도 약한데 왜 자꾸 팔씨름은 하자고 하는거냐?”

능산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내 평생 팔씨름에 두 번 졌소.자, 저희 집에 가셔서 의형제를 맺는 술판을 한 번 벌려보시지요.”

 

이튿날 의형제를 맺은 세 사람은 혜성군장((槥城郡長) 박득의(朴得宜)에게 인사를 갔다.

혜성군장((槥城郡長) 박득의(朴得宜)는 왕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깍듯이 상석을 내주며 예우했다.

“대인(大人)과 제 자식 놈이 의형제를 맺었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남원을 육로로 가시려면 웅천주(熊川州,공주)를 지나 황산군(黃山郡,논산)을 거쳐 완산주(完山州)로 해서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완산주(完山州)는 견훤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안전하게 지나가려면 길 안내가 필요한 곳인데 저의 수하의 육상무역 두령인 복사괴(卜砂瑰)라는 자가 길을 잘 알고 있으니 길안내자로 같이 데리고 가시지요.

이 자는 제 자식 술희의 글선생이자 무술 스승인 자로 나름 문무를 겸비한 실력자인데 품성이 침착하고 명석하여 사리 판단에 아주 밝은 자입니다.

이번 일정에 동행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왕건 장군께서 데리고 쓰시도록 하시지요.

복사괴(卜砂瑰)에게도 그렇게 일러 놓았습니다.

놓치기는 아까운 인물인데 혜성군((槥城郡)보다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할 인물인 것 같아서 장군께 맡깁니다. 또 제 아들 술희 놈이 경솔한 데가 있어서 제 스승을 동행시키는 것이 제 아들놈에게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큰 은혜를 입습니다. 이 은공은 마음에 깊이 새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복사괴(卜砂瑰)의 노련한 길 안내로 왕건 일행은 나흘 만에 지리산 아래 남원경에 무사히 도착했다.

왕건일행의 도착 소식을 듣고 량성무(梁誠武)가 마중을 나왔다.

“왕건 장군 어서 오십시오. 도선대사께서 서찰을 보내 오셨습니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시어 직접 오지는 못한다고 하시며 앞으로 궁예의 운은 20년, 견훤의 운은 40년을 더 갈 터이니 천하통일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희가 촐본(日月의 자손 金星,여기서는 錦城이라고 불리는 나주의 원 뜻을 나타내며 고쿠리의 추모태왕의 촐본도 같은 뜻임)이라고 부르는 백제의 금성(錦城)에 대해서는 상세한 조사를 해 놓았습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작전실을 만들어 놓았으니 잠시 쉬시다가 궁장군이 도착하면 함께 보시도록 하시지요.

송악상단은 어제 하동포구에 도착하여 궁(弓)장군 일행 오백여 명이 은밀하게 남원으로 이동 중에 있는데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왕건일행이 쉬는 사이 궁(弓)장군의 별동대(別動隊) 병력 오백 명도 남원경에 도착하여 왕건일행과 같이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이동하였다.

남원 교룡산성은 남원의 서쪽 교룡산(蛟龍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으로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교하게 축성하여 요새지를 만들어 놓았다.

남원(南原)의 서쪽 교룡산(蛟龍山)은 동쪽의 지리산과 함께 양쪽에서 남원경을 든든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지랭이산성(蛟龍山城)은 남원량씨(南原梁氏)의 시조이신 휘(諱) 우자(友字) 량자(諒字) 어르신께서 축조하신 산성입니다.

방어에는 아주 유리한 곳으로 이 안에 지랭이(蛟龍)처럼 웅크리고 있으면 어떤 강적도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곳이 작전실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량성무(梁誠武)가 직접 왕건 일행을 작전실로 안내했다.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건물 안의 작전실에는 금성(錦城,나주)의 지형 모형이 찰흙과 나무를 이용하여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었다. 왕건이 보기에도 도선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만들어진 정교한 지형도였다.

내색은 전혀 안하지만 량성무(梁誠武)도 도선대사에게서 도선비기를 착실히 공부한 듯 했다.

 

“금성(錦城,나주) 공략의 핵심은 금성산성(錦城山城)의 점령입니다. 금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금성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지형이 방어에 절대 유리하고 산성 내에 풍부한 물이 있습니다. 또한 성내의 양곡창고에는 군사들이 삼년 먹을 양곡이 안전하게 쌓여 있습니다.

지형도를 보시면 높은 산이 없는 금성평야 가운데에 유독 높고 험한 큰 산이 금성의 서쪽에 바짝 붙어 있어서 실로 절묘한 위치의 요새지입니다.

견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금성산성에는 견훤의 정예군 천명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지형도를 보면서 량성무(梁誠武)가 금성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사실 견훤의 백제 남쪽 끝에 있는 금성을 공격하여 취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작전을 종간이라는 자가 생각해냈다니 필시 왕건 장군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가 어느 정도 숨겨져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금성공략이 성공할 경우 그 성과는 엄청날 것입니다. 견훤이 대야성 공략에 실패하여 백제의 전력이 약화된 이때 금성을 공략한다는 것도 시기적으로 적절합니다.

금성공략의 육군병력으로 용화향도 천명을 포함한 미륵군 삼천이 투입된다니 금성공략이 성공한다면 궁예 전력의 핵심인 이들을 장기간 궁예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있어 그 또한 아주 좋은 방책입니다.

지형도의 영산강 하구 뱃길을 보시면 많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압해도 해적들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선박도 영산강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 사이의 바다는 얕은 갯벌이라 배가 드나들 수 없습니다. 해상진입로는 갈초도(葛草島,자은도)와 증도(曾島) 사이의 깊은 바닷길과 진도에서 압해도로 들어가는 바닷길, 이 두 군데의 바닷길 밖에 없습니다.

일단 이 두 바닷길로 목포 앞쪽 압해도와 고이도에 들어오면 압해도와 고이도 앞바다는 깊어서 좋은 항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외달도와 율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과해야 비로소 영산강 하구가 있는 목포 포구에 이르게 됩니다. 영산강 하구인 목포에서 금성 앞에 있는 영산포구까지는 100리(약40km)물길인데 큰 배도 무난하게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가운데 물길이 깊습니다. 그러나 전쟁시에는 덕진포 상류는 강폭이 좁아 위험하므로 강폭이 넓은 덕진포에서 상륙군을 내려놓고 선단은 즉시 후퇴하여 큰 바다로 빠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량성무(梁誠武)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왕건 일행은 지형도를 보며 량성무(梁誠武)의 설명을 듣자 금성(錦城)의 전장(戰場)이 손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왕건일행은 하동포구에서 송악상단의 배 한 척을 타고 압해도로 들어갔다. 일행은 능창, 박술희, 복사귀와 궁장군 그리고 궁장군 휘하의 지휘관 10여명이었다.

미리 압해도 해적들에게 고리제국의 수군대장군 왕건이 비밀리에 방문한다고 연락을 해놓았으므로 왕건 일행은 압해도 송공산성의 해적두령 산채로 안내되었다.

“압해도 정가군(丁家軍) 대장군 능창(能昌)이라고 하오. 인근에서는 수달장군(水獺將軍)이라고 하오. 물에서는 나를 당할 자가 없소이다.”

압해도 해적 대두령 능창이 거만하게 수인사를 했다.

“금성을 공격해서 견훤의 백제군을 몰아내시겠다. 좋소이다. 하지만 견훤은 육상전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하늘이 낸 맹장(猛將)이오. 전에 한 번 붙어보았지만 견훤은 힘과 지략을 겸비하여 나도 육상전에서는 견훤의 상대가 안되오.

그러나 요즘 견훤이 여기저기 전쟁을 벌이면서 이 곳 금성에서 세금으로 많은 돈을 뜯어가고 있소. 나도 견훤에게 조금 세금을 내고 있지만 금성태수(錦城太守) 종례(宗禮)는 날로 높아지는 세금 요구에 죽을 맛이오.

고리국(高麗國)이 금성을 얻게 되면 세금은 일절 걷지 않겠다니 왕건 장군이 약조문을 쓴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겠소. 궁예의 칙서인가가 이미 와있지만 다시 한 번 왕건 장군이 약조문을 쓰도록 하시오.

금성태수 종례에게도 내가 소개장을 써줄 터이니 잘 해보도록 하시오. 이왕 오셨으니 저녁을 드시고 압해도에서 하루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금성으로 출발하도록 하시오.”

왕건일행은 압해도에서 저녁을 대접 받았다. 해적들의 잔치답게 시끌벅적하면서도 푸짐하게 술과 함께 고기와 생선들이 나왔다. 왕건 일행에게는 개를 잡아 그 고기를 내왔고 해적들은 사람고기를 사람의 피와 함께 먹었다. 해적들은 사람의 팔 다리 뼈에 붙은 고기를 맛있게 뜯어먹었다.

 

금성태수(錦城太守) 종례(宗禮)와의 협의는 잘 끝났다. 조상 대대로 금성지방의 호족을 지내고 현재 금성태수(錦城太守)의 관직까지 가지고 있는 종례(宗禮)는 금성평야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견훤에게 귀부한 후 계속되는 과도한 세금 압박으로 뭔가 돌파구를 찾고 있던 형편이었다.

궁예의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이 금성을 점령한다면 향후 10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한다는 궁예의 칙서를 받은 종례(宗禮)는 궁예군에게 협조하기로 약조하였다.

왕건일행은 금성산성을 비롯하여 금성의 요충지들을 샅샅이 정찰하고 지리산 아래 남원으로 도보로 돌아왔다.

 

남원으로 돌아온 후 왕건 일행은 교룡산성의 작전실에서 상세한 작전을 수립했다.

궁장군의 별동대는 조를 나눠 금성산성과 견훤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는 금성의 요충지들을 은밀히 접수할 작전을 수립하고 남원 교룡산성 안의 비슷한 지형을 대상으로 예행연습을 몇 번씩이나 시행했다. 궁장군의 별동대는 이런 침투작전을 위해서 특별히 훈련된 정예군이라 능숙하게 작전연습을 시행했다.

 

“궁장군의 별동대는 우수한 군사들입니다. 금번 금성공략 작전은 무난할 것 같습니다. 궁장군의 별동대는 교룡산성에서 머물다 작전일정에 맞춰 출동하면 될 듯합니다.

작전개시 일에 압해도의 해적들이 바닷길 안내를 해준다고 하나 그들만 믿고 있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포 앞 바닷길과 영산강 하구부터 금성까지 길목을 안내할 수 있는 길 안내꾼 10여명을 제가 훈련시켜 놓았습니다.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이며 길 안내꾼의 대장은 저희 남원의 호랭이아지발도 출신의 량능길(梁能吉)이라는 청년입니다. 이제 열여덟 살입니다만 힘과 무예가 출중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한 번 주군을 정하면 목숨 바쳐 충성할 인물입니다. 왕건 장군께서 써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왕건이 남원에 온지도 사십여 일이 지났다.

량성무(梁誠武)가 왕건과 독대하며 차(茶)를 대접하며 무심한 듯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 했다.

왕건은 속으로 찬탄했다.

“이 량성무(梁誠武)라는 인물은 천하의 흐름과 앞날을 훤히 내다보고 있다. 실로 대단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 난세에는 교룡(蛟龍)처럼 은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인물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면서 나는 천하통일을 꿈꾸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량성무(梁誠武)가 마치 왕건의 생각을 읽은 듯이 잔잔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하는 것입니다. 왕건 장군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으셨으니 천하통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궁예는 20년 운세가 다하면 스스로 악을 행하여 저절로 몰락할 것입니다. 왕건 장군께서는 인내하시면서 하늘의 뜻이 오는 날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되겠습니다.

그러나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견훤이라는 자를 넘어서야 합니다.

견훤은 전쟁(戰爭)의 신(神)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비범한 자입니다. 제가 판단해 봐도 전쟁에 있어서는 왕건 장군보다 한 수 위입니다. 또한 성품이 냉혹하면서도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고 충성하게 하는 포용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왕건장군께서는 정(精)에 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천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냉혹한 전쟁터에서는 타고난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선대사께서는 왕건 장군의 그 약점이 결국 천하통일의 힘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견훤의 40년 운세가 끝나면 하늘이 왕건 장군께 천하를 내어줄 것입니다.

저희 남원의 량씨(梁氏)들은 교룡(蛟龍)처럼 조용히 왕건 장군을 돕겠습니다.

제반 사항을 미루어 판단할 때 이번 금성공략은 성공적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견훤이 금성을 호락호락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백제국내의 사정이 나아지면 반드시 금성공략을 시도할 터인데 그때에는 미륵군 삼천이 견훤을 막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견훤은 백제내의 여러 포구에서 수군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견훤의 수군에도 각별히 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금성공략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왕건 장군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종간일파의 견제를 받으실 것입니다. 몇 년 후 금성에서 다시 전쟁이 터지면 강력한 수군이 필요할 터이니 그때에 금성 수복을 빌미로 강력한 고리제국(高麗帝國) 수군을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왕건 장군께 금성은 종간일파의 견제를 피할 수 있고 힘을 기를 수 있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입니다.”

왕건은 도선비기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것 같은 선량하고 착한 기운이 사악하고 독한 것들을 결국 이길 것이다.’

 

왕건은 남원에 온지 오십 일 만에 능산, 박술희, 복사괴와 남원의 길 안내꾼 열 명을 데리고 송악상선 편으로 송악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칠십여 척의 고리제국(高麗帝國)의 함대가 압해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함대의 규모는 컸으나 제대로 된 군선은 거의 없었고 커다란 상선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압해도 해적들의 안내선이 나타나서 함대를 덕진포 포구로 인도했다.

배위에 싣고 온 작은 배들로 상륙군들이 덕진포 포구에 상륙하자 함대는 방향을 돌려 먼 바다로 나간 후 송악 예성강 포구로 바로 뱃길을 돌렸다.

왕건은 상륙군과 같이 덕진포 포구에 내려 작전을 지휘했다. 능산, 박술희, 복사괴가 왕건을 호위했다. 량능길(梁能吉)을 대장으로 하는 남원의 길 안내꾼 10여명은 미륵군의 각 부대의 길안내를 맡아 금성까지 길을 안내했다.

 

견훤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궁장군의 별동대가 이미 금성의 모든 요충지를 점령했고 견훤의 정규군 천여 명을 모두 포로로 잡아놓았기 때문에 미륵군 삼천여명은 금성산성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할 수 있었다.

 

왕건은 금성태수(錦城太守) 종례(宗禮)의 협조 아래 궁예군 육군의 모든 병력의 배치를 마치고 전선(戰線)을 안정시킨 후 한 달 후에 능산, 박술희, 복사괴와 같이 송악으로 돌아왔다.

 

궁예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었다.

궁예는 승전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치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자들에게는 후하게 상과 벼슬을 내렸다. 치밀하고 공정한 논공행상은 궁예의 장점이었다.

그 중 으뜸은 당연히 왕건이었으므로 왕건은 병부장(兵部將,국방부장관)으로 제수되었다.

그 다음은 궁(弓)장군이었는데 궁예와 성이 같아지므로 궁(弓)장군과 협의하여 왕건이 공적서에 유금필(庾黔弼)로 이름을 바꾸어 올렸으며 유금필(庾黔弼)은 마군장군(馬軍將軍)에 임명되었다.

 

궁예는 그사이 신천(信川,황해도 신천)의 호족 강연창(康衍昌)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승려의 몸으로 장가를 갈 수 있느냐고 사양하였으나 내원경 종간의 주청이 계속 되자 마지못한 듯 황후를 맞아들인 것이다.

패서(浿西,황해도,경기도)지방 호족들의 진정한 충성을 얻어내려면 혈연을 맺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종간의 주청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궁예는 황후를 맞아들인 후 송악의 화려한 황궁에서 여색(女色)을 탐하기 시작했다.

원래 종간의 계획은 패서(浿西,황해도,경기도)지방의 중요한 호족들인 황주(黃州,황해도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박지윤(朴智胤), 정주(貞州,경기도 파주 교하와 개풍군)의 유천궁(柳天弓), 광주(廣州,경기도 광주)의 함규(咸規) 등과 골고루 혈연을 맺는 것이었으나 궁예는 예쁜 처녀를 구해 올리게 하여 정을 통하는 재미에 빠져 정작 호족들과의 혼인에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나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마침내 종간이 목숨을 걸고 궁예에게 직간을 했다.

초심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종간의 직간에 궁예는 정신이 번쩍 난 듯 했다.

그리고 쇠테우리(鐵原)의 철옹성(鐵瓮城)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자책하고, 고리제국(高麗帝國)의 수도(首都)를 다시 쇠테우리(鐵原)로 옮겼다. 마침 그 해가 도참설(圖讖說)에서 신성시하는 갑자년이었으므로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정한 다음 신라의 제도를 모방해서 각종 관제와 직제, 군제 등을 다시 제정했다.

그리고 쇠테우리(鐵原)의 철옹성(鐵瓮城)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철원평야(鐵原平野)에 거대한 성곽을 쌓고 대대적인 궁성 축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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