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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등룡기09 중원(中原) 류긍달(劉兢達)

작성자양승철문양공후|작성시간21.08.24|조회수39 목록 댓글 0

궁예는 철원(鐵原)으로 마진제국의 수도를 옮기고 왕륭을 철원태수에 임명했다.

철원에 사방 십리(약4km)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石城)을 건설하고 그 안에 당나라 장안을 모방하여 시가지를 조성하는 대역사(大役事)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마진국의 모든 호족과 직계 가족은 일 년의 절반은 철원에 와서 살도록 칙명을 내렸다.

왕건은 마진제국 병부(兵部)의 총수여서 당연히 철원으로 가야 했으나 수군사령관으로써 마진제국 수군을 건설하는 임무가 급했으므로 궁예는 왕건을 송악태수 겸 수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서 다행히 송악에 그대로 있게 되었다.

철원에는 궁예가 순군부(巡軍府)를 새로 만들어 군권을 총괄하게 했다. 병부(兵部)는 순군부(巡軍府)의 명을 받는 하부 조직이 되어 기동력과 순발력이 중요한 군부조직이 옥상옥(屋上屋)의 이상한 조직이 되었다.

궁예의 의심병(疑心病)이 서서히 발병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건은 병부의 직을 내놓고 수군의 일에 전념하겠다고 궁예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행정능력과 사리판단이 뛰어난 복사괴는 왕건이 이름을 복지겸(卜智謙)으로 바꾸어 병부(兵部)의 참모로 임명했는데 복지겸의 능력을 눈여겨본 내군대장군 은부가 내군장군으로 발탁해 갔다.

왕건과 복지겸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된 것이다. 왕건을 늘 경계하던 내군(內軍) 안에 확실한 우군(友軍)이 생겼다.

 

왕건은 마진제국 수군을 재정비하고 예성강 포구를 방어할 수 있는 발어참성을 새로 축조했다.

한수(漢水)가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혈구(穴口,강화도)를 송악의 직할지로 확보하고 수군기지를 새로 조성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여전히 있었다. 마진제국의 수군은 패서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사병(私兵)을 모아 놓은 것일 뿐 이었다. 의심 많은 궁예는 병권을 한 사람에게 절대 집중시키지 않았다. 평상시에 왕건이 부릴 수 있는 수군은 송악 직속의 수군 뿐 이었다.

왕건은 궁예의 정책에 호응하여 평상시 호족들의 군대 보유 권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어쨌든 호족들이 모든 비용을 지출하여 양성한 사병(私兵)들인 것이다.

그 대신 왕건은 패서지방의 호족들의 군대 대신 마음을 얻는데 주력했다. 패서지방의 호족들도 그동안 실력으로 증명된 왕건의 능력을 인정하고 왕건에게 마음을 점차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탐라에서 탐라 법화사 주지스님이 송악으로 와서 도선대사가 입적(入寂,수도승이 죽음)하셨음을 알렸다.

도선대사는 탐라 법화사의 모든 것을 왕건에게 준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탐라 법화사는 법화사 선단과 함께 패서지방으로 이전하라고 당부하였다.

왕건은 크게 슬퍼하며 스승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탐라 법화사에는 수도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승려 이십여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곡도(백령도)에 법화사를 새로 크게 짓고 탐라 법화사 무역선단과 함께 이주시켰다.

몇 달 후 철원태수로 임명되어 격무에 시달리며 마음 고생을 하던 왕륭이 별세했다.

왕건은 스승들의 연이은 죽음에 망연자실하였다.

인생의 고비마다 가르침을 주고 조언을 해주던 스승님들은 이제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님들의 모든 가르침은 또렷이 왕건의 가슴 속에 남았다.

 

“결국에는 온유함이 강함을 이기고 포용력과 겸양의 덕을 갖춘 사람이 마지막에는 승리하여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

도선비기의 마지막 구절이 왕건의 머릿속에 강력히 떠올랐다.

 

궁예가 왕건을 철원으로 불러 중원(中原) 공략을 명하였다. 견훤의 백제제국과의 접경지대 전투는 미륵교의 위세가 아직 살아 있는 웅주(충청도), 서원경(청주)쪽에서는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미륵군에 더하여 궁예가 철원에서 조련한 웅주 출신의 정규군이 새로 가세하니 세(勢)에서 백제군에게 밀리지 않았다. 웅주 출신의 용맹한 지휘관인 환선길, 임춘길 등이 있어 군을 잘 이끌었다.

국토의 중심인 중부지방에서는 중원(中原京과 中原府를 합쳐서 中原이라 부른다)의 류긍달(劉兢達)이 신라의 군사조직인 10정 중에서 남천정과 골내근정을 모두 접수하여 한주(漢州) 남쪽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예전 삭주(朔州), 북원경의 량길(梁吉)에 비견될 정도로 강했다.

류긍달(劉兢達)은 힘을 바탕으로 중원의 중립을 선언하고 누구에게도 간섭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풍부한 인구(人口)와 물산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원(中原)은 땅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특히 중요한 철(鐵)이 많이 나서 누구나 탐낼만한 땅이었다.

교통도 남한강(南漢江)을 따라 수운(水運)이 발달했으며, 하늘재를 통하여 교통로가 상주와 연결되는 문자 그대로 국토의 중심, 중원(中原)이었다.

 

한반도 전체를 재패하려고 하는 야심가라면 중원(中原)은 꼭 필요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드디어 중원(中原)을 탐내고 있던 견훤이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늘재를 넘어 직접 중원(中原)을 공격했다.

류긍달(劉兢達)은 이 공격을 잘 방어하여 하늘재 너머 상주지방으로 백제군을 후퇴시켰고 양군(兩軍)은 현재 하늘재를 전선으로 하여 양쪽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궁예는 류긍달(劉兢達)이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는 이때를 이용하여 류긍달(劉兢達) 군(軍)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중원(中原)을 마진국의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궁예의 정규군(中央軍)은 웅주, 서원경 쪽에 대부분 가있어 가용할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그래서 왕건을 통하여 패서지방 호족들의 군대로 중원(中原)을 공격하려 했다.

 

“이는 장군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는 종간과 은부의 계략입니다.”

철원에서 은밀히 왕건을 만난 복지겸이 말했다.

“류긍달(劉兢達)의 중원군(中原軍)의 세력은 마진제국 군대 전체를 합친 것보다 강합니다. 비록 양쪽에서 공격받는다고 해도 지구전으로 원정군의 약점을 파고들며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중원(中原)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하지 말고 구원군(救援軍)을 보내 미륵의 자비로 중원(中原)을 끌어안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십시오.

명분에 약한 궁예는 장군 말대로 할 것입니다.”

복지겸은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류긍달(劉兢達)의 중원군(中原軍)의 세력이 마진제국 군대 전체를 합친 것보다 강하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 자료를 은부대장군을 통하여 궁예 앞에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정보 수집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은부는 이 증거를 궁예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때 장군께서 구원군(救援軍) 파견을 주장하신다면 종간도 더는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복지겸은 과연 명석하고 사리 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왕건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어서 마음 속으로는 이미 왕건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다.

 

역시 복지겸이었다. 궁예는 복지겸이 생각한대로 그대로 결정했다. 종간은 옆에서 아무 말도 못했으며 정보를 상신한 은부는 궁예의 칭찬을 듣고 희색이 만연했다.

“그리 하도록 하라.

내가 직접 가는 것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라. 아우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중원(中原)으로 갈 것이다.

구원군은 패서지방의 호족의 군대와 물자를 징발하여 왕건 대장군이 재량껏 구성하도록 하라.

언제쯤 출발할 수 있겠는가?”

“구원군은 한 달 후에 철원을 출발하여 중원(中原)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라.”

“존명(尊命). 삼가 폐하의 칙명을 받듭니다.”

“구원군이라... 만백성을 돕고 제도하는 것이 미륵이지. 구원군을 보내니 마음이 흐믓하구나. 역시 내 아우야. 그러나 전쟁터마다 아우를 보내야하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마진제국에 군을 제대로 지휘할 인물이 이리도 없다니 통탄할 일이로다.”

궁예가 왕건을 보며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령을 보내 중원(中原) 류긍달(劉兢達)에게 마진제국의 구원병을 보낸다는 폐하의 칙명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원경 종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건에게 수(手)에 있어서 밀렸다고 생각하고 기가 많이 죽은 말투였다.

 

왕건은 패서지방 호족들의 연합군을 인솔하고 철원에서 중원으로 출병했다.

궁예와 마진제국의 중신들이 철원 십리 밖까지 배웅하며 구원군을 환송했다.

 

“철원은 참으로 불편한 곳입니다. 북원경(원주)만 해도 교통이 이리 사통팔달인데 궁예는 왜 철원을 고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능산이 왕건의 옆에서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철원에서 북원경까지 나오는 길은 몹시 험난했다. 왕건은 도선비기의 풍수 비결에 따라 신라 전 국토의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군수물자를 실은 치중대(輜重隊,군수 지원을 제공하는 제반 전투 근무 지원 부대의 집단을 말함)는 철원으로 오지 말고 북원경에 집결하도록 사전에 명을 내려놓았다.

능산의 말대로 철원은 일국의 수도가 될 만한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땅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실력은 없고 허울뿐인 황제 궁예가 자신의 철옹성 안에 숨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궁예의 행동은 도피안사의 주지스님이 전해준 얘기그대로였다.

왕건이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이라도 별 기반이 없는 궁예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궁예의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자신의 세력은 아직 패서지방에 국한되어 있고 그나마도 송악보다 군사력이 강력한 패서 유력호족들은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한 현실을 왕건은 잘 꿰뚫어보고 있었다.

 

“북원경(원주)은 과연 북쪽의 요충지라 할 만 하다. 그런데 량길(梁吉)은 용력과 무술이 대단한 무장(武將)이라고 들었는데 요충지를 장악한 그가 어찌 그리 궁예에게 허무하게 당했을까?”

왕건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같이 행군하던 류금필(庾黔弼)에게 물었다.

“량길(梁吉)은 사실 궁길(弓吉)입니다. 저희 집안인 토산(兔山)의 용맹한 궁씨(弓氏)집안 사람입니다. 북원경(원주)과 그 주위 수십 개의 성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칠 때 토산궁씨(兔山弓氏)는 원래 량씨(梁氏)였다는 조상님들의 말이 생각나서 이름을 량길(梁吉)로 바꾼 것입니다. 량길(梁吉)이 대단한 무장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창기의 미륵군을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없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도들의 집단이었으니까요.

량길(梁吉)은 운이 나빴다고 봅니다.”

류금필(庾黔弼)이 마상(馬上)에서 왕건에게 냉철하게 말했다.

 

류긍달(劉兢達)은 중원의 중신(重臣)들을 거느리고 제주(堤州,제천)까지 마중을 나왔다.

백제군과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호위군사를 천여 명이나 끌고 왔다. 말이 좋아서 구원병이지 언제 적군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를 구원해주시려고 이 수고를 하시다니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류긍달(劉兢達)이 몸을 깊이 숙이면서 왕건에게 치사를 했다. 류긍달(劉兢達)은 마흔 살 정도의 장년(壯年)으로 몸집이 튼실하고 눈매가 매서웠다.

 

류긍달(劉兢達)의 안내로 왕건의 마진제국군(摩震帝國軍) 일만 명은 중원경의 남한강변에 진을 쳤다.

넓은 강변을 따라 한수(漢水,한강)를 따라 올라온 배들이 즐비했고 도처에 곡창(穀倉)과 염창(鹽倉)이 산재해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부유(富裕)한 고장이었다.

 

“견훤의 백제군은 하늘재 뒤로 물러나 상주지방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상주성(尙州城)의 호족 아자개는 견훤왕의 아비임에도 불구하고 백제군에게 일체의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 아비에게 대들 수는 없어서 천하의 견훤왕도 상주성(尙州城)에는 손도 못대고 전주에서 각종 군수물자를 조달해 쓰고 있어서 이만 명 군사의 물자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합니다.

현재 견훤왕은 제 아비 때문에 열이 받쳐서 전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중원군(中原軍)은 저희만 아는 지름길로 상주에 있는 백제군을 기습하여 쫓아버리려고 작전계획을 다 수립해 놓았습니다. 마진제국군(摩震帝國軍)은 중원경 본진에서 위엄만 보이시면 충분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류긍달(劉兢達)이 작전회의에서 말했다.

이어서 중원군(中原軍)의 장군 형술(兄述)이 작전지도를 펴놓고 상세한 기동작전방법을 설명했다.

 

마진제국군의 군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탄금대 정자에서 류긍달(劉兢達)과 왕건이 독대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견훤군의 공격에 맞서고 있는 저희 중원군(中原軍)의 뒤를 치자고 하는 내원경 종간에 맞서서 왕건 장군께서 중원에 차라리 구원군을 보내자고 주장하신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류긍달(劉兢達)이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류긍달(劉兢達)의 정보력이 놀라웠다.

“저희 중원은 위치가 국토의 중앙에 있다 보니까 늘 침탈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비용을 들여 첩자단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왕건 장군님께 유용한 정보를 얻으면 바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의 은인이시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배려 부탁드리며 좋은 관계를 이어 가도록 상호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온 군사들은 모두 패서 호족들의 사병(私兵)들입니다. 대부분 수군(水軍)들로 육상 전투에는 미숙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니 중원에서 한 달 정도 군진훈련을 하고 가겠습니다. 일만 명이나 되는 패서병력이 한군데 모인 것은 처음이니까요.

대규모 작전에 대한 훈련을 제대로 시켜 나중을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해주신다면 우리 치중대를 동원하여 하늘재 아래에 미륵대원(彌勒大院)을 조성하려 합니다.

그 곳은 도선대사께서 절을 지으라고 명기해 놓은 곳이기도 합니다.

철원의 궁예황제가 이번 중원 출정군을 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원에 구원병을 보내기를 주청할 때, 저의 명분이 미륵의 자비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궁예황제가 있는 철원 쪽을 향해 거대한 미륵상을 조성하고 사찰을 건립한다면 자신이 미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황제가 흡족해할 것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황제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지요. 사찰의 도면을 주시면 저희 중원에서 웅장한 사찰로 공사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전장에서도 사찰을 건립할 생각을 하시다니...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실 겁니다.”

류긍달(劉兢達)은 왕건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무장(武將)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심성이 온후하고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양지덕(謙讓之德)까지 갖추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한 마진제국 안에서 일은 일대로 혼자 맡아서 하면서 질시와 견제를 받고 있는 왕건의 형편도 이번 기회에 잘 알게 되었다.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류긍달(劉兢達)의 중원군은 백제군을 지름길을 이용한 급습으로 상주에서 쫒아냈고, 왕건은 일만 명 패서연합군의 조련을 마쳤다. 이제 일만 명의 군세가 일사분란(一絲不亂)하게 기동할 수 있게 되었다.

“왕건 장군을 뵙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 쭉 이어갔으면 합니다.

이런 난세에 유력한 호족들과 뼛속까지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서로 피를 섞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중원과 상주지역의 장악은 천하통일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될 일은 결코 아니지요.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뵙게 될듯합니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시지요.”

왕건을 배웅하면서 류긍달(劉兢達)이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얘기를 흘리듯이 했다.

왕건은 금세 알아들었다. 맞는 얘기였던 것이다.

혼인(婚姻)보다 양쪽 집안을 끈끈하게 맺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은 없었기 때문이다.

“충고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 늘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네. 역시 아우야. 전쟁터만 나가면 대승이니 아우는 우리 마진제국의 보물이며 수호신이야.”

궁예는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왕건의 개선을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철원에서 개선식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마진군대는 철원 100리(약 40km) 안에 절대 들어오지 말라는 황제의 칙명이 내려져, 패서연합군은 북원경(원주)에서 패서로 돌아갔다.

철원에는 내군을 대폭 강화하여 보병 이천, 기병 오백에 달하는 내군이 수도 경비를 맡았다.

내군은 군사 능력에 상관없이 궁예를 살아 있는 미륵으로 믿는 열성적인 미륵교 신자들로 채웠다.

철원은 점점 궁예와 종간, 은부만의 철옹성이 되어 가고 있었다.

 

궁예는 왕건을 마진제국의 2인자인 승상에 임명했다.

왕건은 착실하게 마진제국의 내정을 총괄하며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마진제국은 패서지방과 웅주지방을 제외하고는 궁벽한 산촌이 대부분이라 세수(稅收)가 절대 부족했다.

웅주지방은 미륵교 신자가 대부분이라 그동안 세금을 최소한만 징수했었는데 왕건은 패서지방과 똑같은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웅주지방에서 승상 왕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때 웅주지방에 아지태(阿志泰)라는 자가 나타났다.

아지태는 웅주사람으로 웅주 군소호족의 자식인데,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배우고 도교(道敎)의 도사(道士)가 되어서 다시 웅주로 왔다. 그는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 급제할 정도로 학식도 갖추고 있었다.

아지태(阿志泰)는 궁예가 웅주지방을 순행할 때 미륵교의 독실한 신자인 서원경 태수가 학식과 식견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소개하여 궁예를 만나게 되었다.

아지태(阿志泰)는 궁예에게 서원경은 미륵의 향기가 가득한 맑은 고장이니 이름을 청주(淸州)라고 바꾸자고 건의하여 궁예의 환심을 샀다.

궁예는 자신을 참미륵이라고 신격화하는 아지태의 감언이설에 혹해서 아지태를 철원에 데리고 와서 마진제국의 내정과 학문을 담당하는 광평성(廣評省)의 수장(首長)인 광치내(匡治奈)로 임명했다.

궁예의 깊은 신임을 받게 된 아지태는 이후 몇 년 사이에 광평성의 조직을 점차 확대하여 광평성 아래에 병부(兵部)·대룡부(大龍部)·수춘부(壽春部)·봉빈부(奉賓部)·의형대(義刑臺)·납화부(納貨府)·조위부(調位部)·내봉성(內奉省)·금서성(禁書省)·남상단(南廂壇)·수단(水壇)·원봉성(元鳳省)·비봉성(飛鳳省)·물장성(物藏省) 등을 둔 거대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아지태는 궁예가 참미륵이라 철원의 철옹성을 당나라의 장안성과 같이 위엄이 있는 수도로 웅장하게 건설하면 대동방국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요설(妖說)로 궁예를 홀렸다.

궁예는 아지태의 말을 따라 철원에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대역사를 하도록 하명했고,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다시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태봉(泰封)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의미한다. 태봉(泰封)의 말뜻은 좋았으나 아지태는 궁예의 현신미륵(現身彌勒,지상에 내려온 미륵) 구체화를 추진하여 궁예는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탔으며,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따르게 했고, 또한 궁예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애꾸눈의 안대도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바꿨다. 우쭐해진 궁예는 이제 직접 경전까지 여러 권 지어 대중을 상대로 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종간과 은부는 처음에는 아지태를 궁예 신격화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보고 우호적으로 대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궁예의 총애를 받는 아지태를 제거하기 위하여 별별 방법을 동원했으나 아지태 또한 만만치 않아 궁예는 번번이 아지태의 손을 들어주고 종간과 은부는 초조해졌다.

종간과 은부는 그동안 견제했던 왕건에게 같이 아지태를 제거하자고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며 제안했다.

왕건이 봐도 아지태는 겉만 화려한 독버섯 같은 자였으나, 만일 아지태가 제거된다면 종간과 은부는 그다음 순서로 왕건 제거를 노릴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왕건은 허허벌판에 온갖 계략과 음모가 난무하는 철원이 싫어졌다.

 

이때 금성(錦城)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견훤의 대군이 금성을 침공하여 금성은 함락되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인 금성산성도 함락되고 용화향도 천명을 포함한 미륵군 삼천 명도 전멸했다는 비보(悲報)였다.

견훤은 지난 몇 년 동안 금성공략을 치밀하게 추진해 왔다. 백제 내의 여러 포구에서 수군도 대규모로 양성했으며 금성태수와 해적들에게도 이제는 금성에서 세금을 무리하게 걷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백제의 남쪽 끝에서 백제의 숨통을 틀어쥐던 태봉제국의 영토 금성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궁예는 크게 분노하여 왕건을 정금성대장군(征錦城大將軍) 겸 수군대장군(水軍大將軍)에 임명하여 금성(錦城) 수복(收復)을 총 지휘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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