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 포구에서 내린 왕건은 지게에 홍어 한 짐을 지고 금성(錦城) 시내로 향했다.
장삿배로 위장한 송악상단의 첩보선은 왕건이 돌아올 때까지 영산포 포구에서 대기하고 있기로 하였다.
늘 부산하던 영산포 포구는 몇 척의 장삿배만 떠 있고 한산했다.
늦가을이라 길가의 감나무들은 잎은 모두 떨어지고 홍시가 먹음직스럽게 달려 있었다. 감나무 아래에는 농익어 떨어진 감들이 납작하게 터져서 썩고 있었다.
난리가 한바탕 지나가서 아무도 감을 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에는 드문드문 행인들이 있었으나 모두 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얼른 일을 보고 들어가려고 서두르는 것이다.
“이보시어요.”
왕건도 잰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어디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게가 무거워 보이는데 시원한 물이나 한 바가지 드시고 가시죠.”
길 아래 빨래샘 우물에서 젊은 처자가 물바가지를 손에 쥐고 왕건을 불렀다.
“고맙소.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인데.”
처녀는 물바가지에 물을 한 가득 뜨더니 옆에 있는 버드나무에서 버들잎을 한 웅큼 훑어서 물에 띄워 왕건에게 건냈다.
왕건은 물위의 버들잎을 후후 불면서 물을 맛있게 마셨다.
“고맙소. 그런데 왜 먹는 물에 버들잎을 띄웠소?”
“바쁘게 길을 가시기에 급하게 물을 드시다 체하실까봐 그리 한 것입니다.”
처녀는 당돌하게 왕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처녀의 용모는 뛰어났으나 전혀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것이 성격이 당차 보였다.
그리고 처녀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장사꾼 아니시죠? 지금 금성 시내에는 기찰이 쫙 깔려서 낮선 자는 모두 잡아들이고 있답니다. 잡아 들인 자는 수상해 보이면 바로 참수한다고 합니다.”
“고맙소. 그러면 어찌 한다. 등짐이 홍어라 빨리 팔아야하는데.”
“서너 살 먹은 아이가 봐도 영낙 없는 군인이신데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저의 집이 저 산 아래 마을이니 우선 소녀의 집으로 가시죠. 기찰이라도 지나가면 바로 잡히실 판입니다.”
왕건은 도리 없이 지게를 지고 소녀를 따라갔다.
금성으로 보낸 첩자들마다 아무 소식이 없어 왕건이 변복을 하고 직접 금성의 실정을 살피려 잠입하였는데 처음 보는 시골 처녀가 대뜸 밀정이 아니냐고 물어보니 담대한 왕건도 기가 찼다.
“이 곳은 안전합니다. 지게는 저쪽에 놓으시고 방으로 드시지요.”
방안은 거적이 깔려 있었으나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간단한 가재도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곳은 소금 밀매상들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 안에는 밀고자도 없고 기찰도 들어오지 않아서 안전합니다. 소녀의 아비도 소금 밀매상의 졸개인데 내일 들어올 예정이니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시고 내일 소녀의 아비를 만나 금성의 실정을 들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소문에 지금 금성에는 수상한 자마다 목을 쳐서 죽여 죽은 사람의 목이 수북하게 굴러다닌다고 합니다.”
“고맙소. 내가 생명의 은인(恩人)을 만난 것 같소.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
담대한 왕건도 내가 경솔했구나 싶어 등골이 오싹했다. 조금만 수상해도 일단 죽이고 본다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잠입한 첩자들 모두가 소식이 없는 것이 이해가 됐다. 모두 죽은 것이다.
처녀가 정지(부엌)에 군불을 든든히 지펴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있다 저녁을 지을 때 홍어를 좀 쓰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홍어 장사는 내 팔자에 없는 것 같소. 가짜 장사꾼 모습이 그렇게 어색했다니.”
“변장은 그럴 듯 했습니다. 다만 길손께서 너무 준수하셔서 장사꾼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처녀는 미소를 띄고 말을 이었다.
“저녁 전에 잠시 누워서 쉬시지요.”
“그런데 집에 방이 하나 뿐인 것 같은데 오늘 밤에는 처녀와 어찌 자야 하겠소?”
“아비와도 늘 한 방에서 자 버릇해서 남정네와 자는 것은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왕건이 거적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처녀가 옷을 모두 벗고 왕건 옆에 누워 있었다.
“어찌 이러오.”
“소녀의 몸을 받아 주시옵소서. 길손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제 낭군이시옵니다. 저는 길손과 백년가약을 맺고 싶습니다.”
“허. 나도 그쪽이 마음에 들지만 너무 급하지 않소.”
“저는 이미 마음을 드렸습니다. 몸도 받아 주소서.”
알몸의 처녀가 왕건의 옷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벗겼다.
왕건과 처녀는 한 몸이 되어 뒹굴기 시작했다.
이미 왕건의 나이 이십칠세, 운우의 정은 겪을 대로 겪었다.
그러나 왕건은 아차 싶었다.
뭔가 많이 달랐던 것이다. 처녀의 몸에 삽입을 하고 한 식경(약 15분)도 안 되었는데 왕건의 몸이 이상했다.
처녀의 몸속에서 천 마리의 문어가 왕건의 몸을 끌어당기고 애무하며 절정으로 이끌었다.
처녀가 자지러지는 순간 왕건도 사정의 느낌을 느끼고 급히 남근(男根)을 처녀의 몸에서 꺼내어 거적 위에 사정했다.
당나라에서 도교의 방중술을 공부한 생전의 양사부(楊師父)에게서 방중술을 전수 받아 사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왕건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 아까운 것을 왜 거적에 쏟으셨습니까?”
처녀가 옥문(玉門)에서 피를 흘리면서 거적 위의 정액을 손으로 닦아 자신의 옥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 임신이 되면 처녀가 난감할까봐 배려한 것인데 미안하오. 그런데 숫처녀로구나. 남정네를 처음 겪는 처자가 어찌 이리 담대하오.”
“저는 길손을 처음 본 순간에 제 일생을 맡길 분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부디 소녀를 마다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소. 그대와 혼인하리다. 다만 나는 그대 한 사람만 거둘 수는 없을 것이오. 양해해 줄 수 있겠소.”
“영웅호색(英雄好色)은 당연한 것입니다. 괘념치 마소서.”
뜻밖에 처녀가 문자(文字)를 썼다.
“제 아비에게서 문자를 배워, 읽고 쓰는 것은 제법 합니다. 제 할아버지가 장보고 상단의 행수 출신으로 문자에 능했다고 합니다.”
홍어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나서 왕건과 처녀는 군불이 지펴져 따뜻한 방 안에서 밤새도록 운우지정을 즐겼다. 멀리 새벽닭이 울었다.
왕건이 잠시 자다 눈을 떠보니 처녀가 단정한 옷매무세로 아침상을 개다리소반에 차려서 들여왔다.
“그런데 아직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구나. 나는 왕건이라 하오.”
“소녀는 순이(順伊)라고 합니다. 성은 없고 아비 이름은 다련(多蓮)이라 합니다.”
왕건이 아침상을 물리고 반나절(약 3시간)이 지났을 때 처녀 순이의 아비 다련(多蓮)이 들어왔다.
“왕건이라 합니다. 주인 없는 댁에서 하루 유숙하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왕건이라 하시면 혹시 태봉군의 왕건 장군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구! 귀하신 분이 이 누추한 곳에 묵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따님 덕에 백제군에게 잡히지 않고 몸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님과는 아버님의 허락도 없이 어제 백년가약을 맺기로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아이구! 귀하디 귀하신 분이 저희 같은 것들과 혼인이라니요. 나중에 소실로라도 써주시면 황감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정실 부인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다만 정실부인이 몇 명이 될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 같은 것들을...대인(大人) 처분대로 하십시오.”
다련의 아비, 즉 순이의 할아버지 장인호(張仁浩)는 장보고 상단의 무역 행정을 담당하는 행수로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 사후 청해진 백성들이 김제 벽골제 지역 농장의 노예로 끌려갈 때 몸을 피하여 작은 배를 타고 청해진을 탈출했다. 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서남해안 외딴 섬 우이도로 가족을 데리고 몸을 피한 장인호는 작은 배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했다.
장인호는 노환으로 이십여 년 전에 작고했으나 가족들은 계속 우이도 섬에서 살았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어느 날 해적들이 우이도 어촌마을을 습격하여 고기잡이를 나간 가장들을 제외한 전 가족을 잡아 갔다.
눈치 빠르게 숲으로 도망간 어린 순이를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해적에게 잡혀 갔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다련에게 순이는 해적의 우두머리가 가슴에 정(丁)자 표시가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노라고 전했다.
다련은 수소문 끝에 마을을 습격한 해적들이 압해도 해적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평소 안면이 있던 밀염간(密鹽干,소금밀매꾼들이 소금을 굽는 곳)의 거간꾼을 통하여 잡혀간 사람들의 안위를 수소문 하였다. 그러나 남자들은 중국 오월지방에 노예로 팔려갔고 여인들과 아이들은 압해도 해적들이 이미 잡아먹었다는 비보(悲報)만 들을 수 있었다.
이후 다련은 섬에서 나와 소금 밀매꾼의 조직에 들어가 일을 해 왔다. 다련은 아비인 장인호(張仁浩)에게 글을 배웠고 눈치가 빨라 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금성(錦城)에 있는 소금 밀매꾼 본부에서 행정을 보는 행수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금성에는 낯선 자는 모두 죽이라는 견훤의 명령이 내려와서 아주 위험합니다.
제가 금성의 실정을 상세히 아뢰겠습니다.”
다련은 금성과 목포 앞바다까지 이르는 영산강 뱃길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정보를 왕건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왕건은 다련의 설명에 감탄했다.
다련의 정보는 여느 첩자들의 보고보다 훨씬 유용했던 것이다.
다련은 영리하고 눈썰미가 대단했다.
“나와 같이 송악으로 갑시다. 영산포 포구에 배가 대기하고 있소.”
“그러지요.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하니 지금 바로 출발하시지요.”
다련은 작은 칼 하나만 품 안에 품고, 순이를 데리고 바로 왕건을 따라 나섰다.
왕건이 송악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흘렀다.
다련은 송악에 와서 태봉제국 수군의 수뇌부들에게 금성 공략에 필요한 생생한 정보들을 자세히 알려주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능력을 인정받아 금성 공략 작전 첩자 대장의 직책을 받고 다시 금성 일대로 잠입했다.
자청하여 아비를 따라간 순이도 소금 밀매꾼 마을의 아낙들을 규합하여 여성 첩자 부대를 만들고 행상으로 위장을 하여 금성과 영산포 주변을 돌며 정보를 수집하였다.
아낙들은 기찰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으므로 의외로 소중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견훤은 그동안 수군 건설에 주력하여 상당한 규모의 수군 전력을 구축하였습니다.
목포지역 바다 사정을 잘 아는 압해도, 고이도, 갈초도 해적들까지 휘하에 거두어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금성 공략 작전 첩보부대에서 보내온 정보들에 의하면 영산강 하구 목포에서 시오리 들어가는 영암 덕진포구에 배들을 일렬로 묶어 금성으로 가는 항로를 아예 봉쇄하는 작전을 매일 연습하고 있다 합니다. 뱃길이 막혀 압해도 앞바다에 태봉제국 수군이 발이 묶이면 날쌘 해적들의 배들로 공격하여 결정타를 먹일 계획인 거지요.
해적들의 배는 화공(火攻)도 매일 연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적들은 배의 물자를 노략질해야하기 때문에 통상 화공은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군선들이라 노략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예 배를 불태워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해적들은 압해도 해적두목인 소위 수달장군(水獺將軍) 능창(能昌)이 총 지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패서지역 태봉 정보부의 수장이 된 정보총감(情報總監) 춘길의 보고를 듣던 태봉제국 수군 수뇌부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지형과 바닷길에 익숙한 해적들과 해적 앞바다나 다름없는 곳에서 해전을 벌린다면 승산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해적들은 화공까지 준비하고 있고, 견훤의 대함대는 금성으로 가는 바닷길을 배들을 묶어 아예 봉쇄한다고 하니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겨울철의 목포 앞바다는 통상 북동풍이 불기 때문에 화공은 북동쪽 방향에 진을 치고 있는 견훤군이 절대 유리한 조건이었다.
남서쪽 바다에서 진입해야 하는 태봉수군은 화공 작전을 편다면 불길이 아군을 덮치게 되어 화공작전은 아예 생각할 수 없는 악조건(惡條件)이었다.
왕건은 홀로 말을 타고 정주(貞州)호족 류천궁(柳天弓)을 만나러 갔다. 정주(貞州)는 송악에서 이십리(약 8km)도 안되는 가까운 곳이라 금세 갈 수 있었다.
정주(貞州)에는 한수(漢水,한강)와 칠중하(七重河,임진강)의 접경지대인 넓은 수면에 태봉제국 최대의 선소(船所,조선소)가 있다.
“금성 공략 작전 때문에 매우 바쁘실텐데 왕건 장군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류장자(柳長者)어른 그동안 격조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금성 공략 작전에 전념하느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사실 정주(貞州) 선소(船所)에서 진행 중인 군선(軍船) 조선(造船)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미처 챙겨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군선(軍船) 조선(造船)이 다 끝났다는 류장자(柳長者)어른의 연락을 어제 받고서야 비로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군선(軍船) 오십 척의 조선은 잘 되었습니다. 왕건 장군께서 평소에는 상선으로 쓰다가 유사시에는 노를 설치하여 군선으로 쓸 수 있게 묘안(妙案)을 주셔서 제가 봐도 절묘한 배가 완성되었습니다.
같이 한 번 보실까요.”
“예, 그러지요.”
교하(交河)포구에 새로 만든 군선 오십여 척이 정연히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군선은 노를 저어 바람의 방향에 상관없이 적을 공격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노를 하갑판에 설치해야 하는데, 왕건은 평상시에는 상선의 창고로 쓰고 전쟁 시에는 노를 설치하여 격군(格軍)이 노를 저을 수 있게 군선을 설계하였다. 왕건의 설계대로 상선 겸용 군선들을 정주(貞州) 선소(船所)에서는 훌륭하게 조선(造船)하였다.
“군선(軍船) 오십 척을 만드는데 철원에서는 아무런 지원이 없어서 류장자(柳長者) 어른께서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시게 하여 실로 송구합니다.”
“뭐, 철원에서 지원이 없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 상관없습니다. 저는 왕건 장군만 보고 제 전 재산의 절반을 투자한 것입니다.
전에 제가 군선이 완공되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이제 군선 오십 척이 훌륭하게 완공됐으니 소원을 말씀해 보시지요.”
“제 소원은 왕건 장군을 사위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리 하겠습니다.그러나 이 난세에 전국의 유력 호족들과 결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혼인이니 제가 몇 번을 혼인해야 할지는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필요하면 백번이라도 혼인하셔야지요. 그러나 왕건 장군께서는 아직 총각이시니까 제 딸이 첫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금성 공략 작전이 눈앞에 있습니다. 왕건 장군께서 모처럼 찾아주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이런 날이 올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제 딸과 오늘 신방을 차려주시지요.”
“그리 하겠습니다.저 같은 인간을 이리 생각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천부당 만부당(千不當 萬不當)한 말씀입니다. 왕건 장군이야말로 천하의 진정한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철원의 미친 놈,가짜 미륵 궁예의 장인이 된 신천의 강장자(康長者,康衍昌)가 너무나 불쌍합니다.”
류천궁(柳天弓)은 원래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류천궁(柳天弓)은 왕건이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류천궁(柳天弓)의 딸은 평범한 용모였으나 훌륭한 교육을 받아 겸손한 행동거지와 예의범절이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정한수(井寒水)를 떠놓고 간단한 혼인식을 한 후에 둘은 신방에 들었다.
합환주(合歡酒)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류천궁(柳天弓)의 딸은 무척 지혜롭고 사려 깊었다.
왕건은 신부(新婦)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류천궁(柳天弓)의 대저택의 안쪽에 호젓이 위치한 곳이라 사방이 조용했다.
알몸이 된 신부가 왕건의 옷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벗겼다.
남자의 몸을 처음 접하여 온몸을 굳히고 있는 신부를 왕건은 서서히 애무하며 긴장을 풀고 운우지정에 몰입하게 유도했다.
신부가 절정에서 자지러지며 흐느껴 울었다.
“온 몸이 꽉 차서 터질듯한 기분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십여 차례 절정을 느끼며 초야(初夜)의 신부가 왕건의 품 속을 파고 들었다.
왕건은 군선 오십 척, 운송선 백여 척으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궁예가 철원에서 예성강 포구로 와서 태봉제국 수군의 출정을 환송했다. 성대한 출정식을 열어주고 왕건에게 부월을 하사했다. 궁예가 미륵의 복장을 하고 장대한 불교의식도 거행했다.
“금성 공략 작전이 마무리될 때까지 짐이 송악에 머무르며 작전 경과를 지켜보겠다.
왕건 대장군은 짐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요청하라. 천하 제일의 미륵군을 이끌고 짐이 금성으로 갈 것이니라.”
왕건은 대함대를 이끌고 선발대가 이미 점령한 진도(珍島)로 향했다.
진도(珍島)란 보석 같은 섬이라는 뜻이다.
진도는 ‘1년 농사로 3년을 먹고 산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농경지가 넓고 각종 농수산물이 풍부한 섬이다.
또한 주위에 250여 개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어 수군을 운용하기에도 좋았다.
왕건은 이곳에서 상황을 보아가며 금성 공략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견훤의 대수군(大水軍)과 해적들이 포진하고 있는 목포 앞바다와 영산강 하구를 바로 공격하고 금성으로 진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첩자들을 이끌고 첩보활동을 하던 다련도 딸 순이와 함께 금성에서 진도로 왔다.
“칠 년 만에 주군을 뵙습니다.”
량능길(梁能吉)이 진도의 왕건의 지휘소 안쪽 깊숙한 밀실에서 왕건을 만났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능길(能吉)아.”
량능길(梁能吉)은 칠년 전에 남원에서 지원해준 길 안내꾼들의 대장(隊長)으로 금성 공략 작전에 참여했었다.
남원의 호랭이아지발도 출신답게 무예에 능하고 힘이 장사인 량능길(梁能吉)은 왕건의 의형제가 되어 능산, 박술희와 함께 4형제가 되었다.
왕건은 칠년 전에 비밀리에 량능길(梁能吉)을 갈초도(현재 자은도)의 해적집단으로 침투시켰다.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한 것이다.
갈초도 해적집단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량능길(梁能吉)은 칠년 동안에 능길(能吉)이라는 이름으로 갈초도 해적의 부두령(副頭領)이 되어 있었다.
갈초도는 목포 앞바다에서 가장 끝에 있는 큰 섬이다.
오십여 년 전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鹽長)은 당나라에서 소금밀매상의 호위무사를 하던 당나라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모르고 소금밀매상 출신이라 염장(鹽長)이라 자칭(自稱)했다.
염장(鹽長)은 운주절도사 ‘이사도의 난’ 때 장보고가 소속되어 있던 무령군의 소장(小將)으로 장보고와 한솥밥을 먹었었다.
이사도의 난이 끝나고 무령군이 해체되어 다시 소금밀매단에 들어간 염장은 장보고 상단에 소금을 공급하며 장보고와 가까워졌다. 염장의 뛰어난 무술 실력을 아낀 장보고는 염장을 좋아했다. 장보고는 무술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무조건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 습성이 결국 장보고를 허무하게 죽게 했다.
염장은 장보고 암살에 성공한 후 신라의 소금 공급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특권을 얻어 엄청난 부를 쌓았다.
신라 조정에 세금을 내야하는 정식 거래도 이문이 좋았지만, 소금 밀거래는 이문을 독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염장은 당나라와 신라에서 소금을 밀거래하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었다.
갈초도는 소금밀매조직에서 당나라와의 소금 밀거래를 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갈초도 인근 섬들에는 밀염간(密鹽干,소금밀매꾼들이 소금을 굽는 곳)을 설치하여 신라 서남해안에서 잡아온 주민들을 노예로 부려 소금을 구워냈다.
지금은 염장의 손자 염표(鹽豹)가 소금밀매조직을 이끌고 있는데 신라가 몰락하여 신라조정이 준 소금거래 특권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서남해안의 호족들마다 소금을 구워서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소금밀매조직의 형편은 그닥 좋지는 못했다.
당나라에서도 소금밀매상이던 황소(黃巢)가 당나라를 몰아내고 황제노릇까지 하다가 패전하여 죽은 이후에 소금밀매조직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역시 형편이 좋지 않았다.
염표(鹽豹)는 신라 서남해안을 주름잡고 있는 압해도 해적들과 서로 협조하며 노예무역의 거간꾼 노릇도 하며 소금밀매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염표(鹽豹)는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자였는데, 왕건은 소금밀매단의 행수였던 다련에게서 염표(鹽豹)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어서 염표와 소금밀매단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련을 포함한 누구도 갈초도 해적의 부두령(副頭領) 능길(能吉)이 왕건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금성 공략은 견훤의 군대를 치기 전에 먼저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입니다.
특히 압해도 해적의 대두령인 능창은 워낙 수전(水戰)에 능해서 수달장군(水獺將軍)이라고 불리우는 인물로 이 자를 꼭 제거해야 합니다.
제가 진도의 왕건 대장군이 염표(鹽豹)를 회유하러 갈초도로 직접 온다고 하니 이때를 이용하여 적장(敵將)을 잡아 큰 공로를 세우라고 권유하면 물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능창이 왕건 대장군을 잡으러 갈초도로 올 것입니다.
이때 정예부대를 매복시켜 능창을 잡도록 하시지요.”
“좋은 방안이다. 그리 하도록 하마. 이번 금성 공략 작전이 성공한다면 네 공(功)이 제일 크다.”
“그러하시면 염표(鹽豹)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밀지(密旨)를 전달하시지요. 염표(鹽豹)는 의심이 많은 자라 미끼를 쉽게 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염표(鹽豹)가 물지 않고는 못 배길 미끼를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마. 치밀하게 준비하여 밀사를 보낼 것이다.”
“그러면 저는 다시 갈초도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갈초도 해적들 중 제 수하 100여명은 모두 신라인들로 제 명령에 죽고 사는 제 사람들입니다.
저는 유사시 갈초도에서 내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겠습니다.”
“칠년 동안의 너의 노고가 도로아미타불(徒勞阿彌陀彿)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할 터이니 아우도 몸조심 하거라.”
“존명(尊命).”
왕건의 부름을 받은 순이가 내실에서 왕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장인과 함께 고생이 많았다. 목숨을 걸고 획득한 정보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구나.”
“부부(夫婦)사이에 감사할 게 뭐 있습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지휘소 옆 큰 집을 장인과 같이 우선 쓰도록 해라. 순이 네가 내 부인(婦人)임을 천명할 터이니 이제 사람들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해줄 것이다.
금성 공략이 성공하면 장인어른은 목포 앞바다를 무대로 무역상단을 운영하는 금성의 호족이 될 것이다.”
“대대로 금성을 지배해온 호족 종례의 위세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종례는 금성 내륙을 다스리고 장인어른은 금성의 바다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아비의 능력을 보아가며 결정하시오소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니 자칫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될 수 있습니다.”
순이는 정성스럽게 왕건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알몸이 되어 왕건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천 마리의 문어가 꿈틀거리는 듯, 심연의 동굴이 빨아들이는 듯 순이의 옥문(玉門) 안은 황홀했다.
순이의 옥문은 몇 만명 중의 하나 있을까 말까한 명기(名器)였다. 속칭 긴짜꼬(緊子口,巾着)로 안으로 당기는 음기(淫氣)가 충만해 있었다.